인릉(서울 서초)

 


仁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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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3. 형식


1. 개요


조선 23대 왕 순조와 왕비 순원왕후를 모신 합장릉이다. 바로 옆에 위치한 조선 3대 왕 태종원경왕후를 모신 쌍릉인 헌릉과 함께 헌인릉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에 위치하고 있다.
인릉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본래 세종소헌왕후가 묻힌 영릉(英陵)의 초장지(初葬地)로 생각되는 곳이다. 관련 기사 영릉은 본래 헌릉의 서쪽 언덕에 위치해 있다가, 조선왕조실록 1446년 음력 6월 6일 기사의 영릉 지문, "영릉(英陵)을 헌릉(獻陵) 서강(西崗)에 다스리어" 1469년(예종 1년)에 지금의 경기도 여주시로 천장을 하였는데, 헌릉 서쪽 언덕이 지금 인릉이 위치한 곳으로 추정되고 있는 것이다. 즉, 좋지 않은 자리라고 하여 영릉(英陵)을 옮겼는데, 그 좋지 않은 자리에 인릉이 들어온 셈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구(舊) 영릉의 정확한 위치는 알기가 어려운 상황이고, 인릉이 위치한 곳이 명당이라는 의견도 있으니 관련 뉴스 참고만 하자.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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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고적도보에 실린 1920년대 인릉(仁陵)의 모습. 인릉의 후면에서 정면을 바라본 모습이다.

순종 연덕 현도 경인 순희 체성 응명 흠광 석경 계천 배극 융원 돈휴 문안 무정 헌경 성효 대왕(純宗淵德顯道景仁純禧體聖凝命欽光錫慶繼天配極隆元敦休文安武靖憲敬成孝大王)은 숭정(崇禎) 기원후(紀元後) 1백 63년 경술년 6월 18일 탄생하였다. 경신년 2월 왕세자(王世子)에 책봉되고 이해 7월에 즉위하였다. 갑오년 11월 13일에 승하(昇遐)하였고 을미년 4월 19일에 교하(交河)의 구치(舊治) 뒷산 을좌(乙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는데, 재위(在位)는 34년이고 수(壽)는 45세이다. 헌종(憲宗) 14년 무신년에 존호(尊號)를 체성 응명 흠광 석경(體聖凝命欽光錫慶)이라고 추상(追上)하였고, 금상(今上) 4년 계축년에 존호를 계천 배극 융원 돈휴(繼天配極隆元敦休)라고 추상(追上)하였다. 병진년 10월 11일 광주(廣州)의 헌릉(獻陵) 오른쪽 등성이 자좌(子坐)의 언덕에 천봉(遷奉)하였다." 【영중추부사 정원용(鄭元容)이 지었다.】

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 부록에 있는 순조대왕 천릉 비문에는 순조가 승하한 후 어느 곳에 장사를 지냈는지, 그리고 언제 이 곳으로 천릉(遷陵, 능을 옮김)하였는지에 대해서 자세히 밝히고 있는데, 그 내용은 위와 같으며, 조선왕조실록 기사 조금 더 상세하게 인릉의 조성 역사를 일자별로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 1834년(헌종 즉위년) 음력 11월 13일, 순조 승하
  • 1834년(헌종 즉위년) 음력 12월 21일, 능을 파주의 옛 장릉(長陵)[1] 의 왼쪽 언덕에 정함 조선왕조실록 기사
  • 1835년(헌종 1년) 음력 2월 29일, 능을 조성하면서 흙빛이 흡족하지 못하고 뇌석(腦石)이 깨져 상할 염려가 있다 하여, 조성을 중지함 조선왕조실록 기사
  • 1835년(헌종 1년) 음력 3월 7일, 능을 파주 교하의 장릉(長陵)의 국내(局內)로 옮기라고 명함 조선왕조실록 기사
  • 1835년(헌종 1년) 음력 4월 19일, 파주 교하에 장사를 지냄
  • 1855년(철종 6년) 음력 1월 18일, 인릉의 천장 등에 대해서 논의함 조선왕조실로 기사
  • 1856년(철종 7년) 음력 10월 11일, 헌릉 서쪽 언덕으로 옮김
그 후, 순조의 왕비인 순원왕후가 1857년(철종 8년) 음력 8월 4일에 승하하자, 능호를 문릉(文陵)으로 하였으나, 조선왕조실록 기사, 이후 인릉에 합치는 것으로 결정하였으며, 조선왕조실록 기사 음력 12월 17일에 인릉에 합장하였다. 조선왕조실록 기사

3.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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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릉은 조선왕릉 중 전형적인 합장릉의 형식을 띄고 있다. 한 가지 특이할만한 점은 조선왕릉의 형식으로 만들어진 왕릉 중에서는 마지막 합장릉이라는 점인데, 이는 24대 왕 헌종과 왕비들을 모신 경릉은 삼연릉이라는 독특한 형식이고, 25대 왕 철종철인왕후를 모신 예릉은 쌍릉의 형식이며, 26대 왕 고종명성황후를 모신 홍릉과 27대 왕 순종, 순명효황후, 순정효황후를 모신 능은 황제릉의 형식으로 지어져 있기 때문이다.
봉분은 병풍석이 없이 난간석만 둘러쳐져 있으며, 혼유석 1기[2], 장명등 1기와 망주석 1쌍, 문인석 1쌍, 무인석 1쌍, 석마 2쌍, 석호 2쌍, 석양 2쌍 등이 표준에 맞춰져서 설치되어 있다. 다만, 봉분과 봉분을 둘러싼 곡장(담) 사이의 공간이 꽤나 넓어서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점이 특징이다.
인릉의 정자각 우측에는 비각이 세워져 있는데, 그 안에는 2개의 표석이 세워져 있다. 하나는 숭정 기원후 230년(1857년, 철종 8년)에 세워졌으며, "조선국 순조대왕 인릉 순원왕후 부좌(朝鮮國 純祖大王 仁陵 純元王后 附左)"라고 새겨져 있다. 또다른 하나는 광무 4년(1900년)에 세워졌으며, "대한 순조숙황제 인릉 순원숙황후 부좌(大韓 純祖肅皇帝 仁陵 純元肅皇后 附左)"라고 새겨져 있다.

[1] 옛 장릉은 인조인열왕후가 안장된 장릉(파주)의 초장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며, 오늘날 파주 운천리를 의미함. 장릉(長陵)은 원래 파주 운천리에 위치하였다가, 나중에 현재의 위치인 파주 갈현리로 천장하였음[2] 혼유석은 조선왕조 초창기에는 봉분이 하나더라도 합장릉인 경우에는 2기가 설치되어 있으나, 중기를 넘어서게 되면 합장릉인 경우에도 1기만 설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