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朝鮮王陵
조선왕릉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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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1392~1897)과 대한제국(1897~1910)의 역대 왕(황제)과 왕비(황후), 그리고 추존왕(추존황제)과 왕비(추존황후)가 묻힌 능(陵)을 통틀어 일컫는 말. 왕과 왕비가 묻힌 곳이라는 점 때문에 조선왕릉을 "'신들의 정원"' 이란 은유적 표현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총 42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태조의 추존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그 왕비들의 능까지 포함하면 총 50기. 그러나 일반적으론 42기의 능만을 조선왕릉으로 표현하고 있다.
2009년 6월 27일 스페인 세비야에서 개최된 제33차 세계유산위원회를 통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여기에는 40기만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는데, 나머지 2기인 제릉과 후릉이 현재 북한에 위치해 있기 때문. 그리고 폐위되어 '''임금의 능'''이 아닌 '''왕자의 묘'''가 된 연산군묘와 광해군묘도 여기서 제외됐다.
일반적으로 방문 관람시 성인 기준 입장료 1,000원[4] 이며, 해당 왕릉이 위치한 지역민의 경우 50% 할인이 적용된다. (단 신분증 필참) 간혹 특정일(예를 들면 광복절과 같은 특정 공휴일이나 명절 등)이나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의 '''문화가 있는 날'''에는 무료 개방행사가 진행되므로 이 점을 참고해두면 좋다.
조선왕릉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는 했지만, 몇몇 능역의 경우는 여타 사유로 인해 '''비공개'''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서삼릉의 효릉.[5] 따라서 비공개 능역을 관람하고 싶으면 한시적으로 공개되는 시기를 고르던가, 또는 문화재청에 별도로 문의해야 관람이 가능하므로 답사할 생각이 있다면 잘 알아보고 답사하도록 하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란 거창한 수식어 때문에 뭔가 대단한 것으로 느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사실 막상 가보면 별로 볼 게 없다. 만약 당신이 역사에 흥미 있는 사람이거나 이 부분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다르겠지만...
왕릉임에도 의외로 옆 나라의 왕릉과 같은 웅대함이나 화려함 같은 건 별로 없다.[6] 그나마 능의 중심인 능침과 봉분의 경우 바로 앞에서 보면 제법 웅장하다 느낄 만하기는 한데... 몇몇 능을 제외한 대부분은 보존상의 이유로 능침 앞부터 출입을 금하고 있어 이 또한 멀리서 관람하는 것만이 가능하다.
그래도 왕릉들은 왕실의 능역인 만큼 숲(일반적으로 소나무) 보존이 잘 되어 있고 경관도 매우 좋기 때문에 왕릉을 관람하는 사람들은 왕이나 왕비를 참배한다는 목적보다는 대개 산림욕이나 가벼운 산책, 관광 목적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으며 아예 능역 코스를 산책로나 수목원으로 구성해 놓은 곳도 있다.대표적으로 세조와 정희왕후의 광릉 옆에 위치한 광릉수목원이 있다. 사릉의 경우는 권역 내에 전통수목양묘장과 자연생태전시관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덕분에 낮은 확률로 딱따구리 같은 보기 어려운 조류나 쉽게 보기 힘든 식물을 찾을 수도 있어서 이런 희귀한 동식물에 관심 있는 사람이 방문해도 좋은 곳이다. 강남 한복판에 자리 잡은 선릉(+정릉)은 도심의 허파 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으며, 지하철로 찾아갈 수 있어 접근성도 좋다.
그 외 사진 촬영이 취미인 사람들도 많이 찾으며, 능이 있는 인근 지역의 학생들이 사생대회나 백일장, 소풍 같은 학교 행사 때문에 방문하는 경우도 많다.
조선왕릉의 경우, 다른 왕조의 능과는 달리 아직까지 무덤 내부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진 적이 없다. 이는 왕릉 제례를 맡은 전주 이씨 종약원에서 발굴에 동의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건전한 학술 연구라고 해도 무덤을 완전히 파헤쳐야 하니 예법상 매우 꺼릴 수밖에 없다. 사실 조선왕릉 이외에도 천마총 같은 삼국시대 왕릉급 고분들을 발굴했던 것도 예전 일제강점기&권위주의 시대였기 때문에 가능했지 현재 발굴은 경주 김씨 등 문중의 반대가 강해 어렵다. 이 때문에 조선 왕릉의 내부 구조는 조선왕조실록 등 왕릉 축조에 대한 기록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그나마 조선시대 왕릉의 기본적인 조성 규정을 담은 국조오례의를 포함해 능의 주요 사항을 담은 능지, 국장 과정과 택지 정보 및 능침 조영 등의 자료를 담은 국장도감의궤(國葬都監儀軌)와 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 등 관련 자료들이 풍부하게 남아있는 편이라서, 굳이 발굴하지 않아도 내부를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일 수도. 그래도 혹시라도 남아있을지 모를 유해를 부검해서 연구하지 못하는 점은 여전히 아쉬운 편. 건강 상태 및 체형 등을 통해 당시 인물들의 개인사를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유해를 연구해서 대부분 소실된 역대 국왕의 어진을 복원하는 것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조선왕릉은 조선 시대에는 조정의 엄격한 관리를 받아왔고, 일제강점기 기간 및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당연히 중요하게 다뤄서 관리하였으며 무엇보다 시신을 안치한 석실에 석회를 두텁게 바른 회곽묘라서 포크레인같은 중장비나 폭약 없이 소수 인력이 단시간에 몰래 파들어갔다 빠지는 식의 도굴이 불가능한데다 검약을 강조한 유교 윤리에 따라 온갖 진귀한 부장품을 가져다 묻은 이전 왕조와 달리 '비교적' 도굴할 가치가 없는 물건들 뿐이라 도굴꾼들이 자기 목숨을 걸고 공격할 동기 자체가 부족했으므로 왕릉 강역 주변이 훼손되었을지언정 왕릉 자체는 보존되었다. 구한말 오페르트 도굴사건이 벌어졌으나 석회에 막혔고, 2007년 서오릉 순창원(順昌園, 명종의 원자인 순회세자와 공회빈 윤씨의 합장묘)도 자행된 도굴 시도 역시 두터운 석회벽에 막혀 미수에 그쳤다. 조선 왕릉 도굴성공 사례는 다수의 인력을 눈치볼것 없이 동원할 수 있었던 선정릉 도굴사건이 유일하다. 이 사건은 임진왜란 후 조선과 일본이 외교 관계를 회복할 때 조선측에서 관련자들의 처벌을 강하게 요구할 정도로 심각하게 다루어졌다. 자세한 이야기는 기유약조 문서에 나와 있다.
조선왕릉들은 주변의 지명에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잦다. 특히 아예 지명화되어버린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성북구 정릉동), 문정왕후 윤씨의 태릉(태릉 선수촌), 세조의 광릉(광릉수목원) 등이 그러하다. 그 외에도 조선왕릉에서 역명을 따온 철도역인 선릉역, 선정릉역, 태릉입구역, 정릉역, 온릉역, 사릉역, 세종대왕릉역 등이나 서오릉 앞을 흐르는 창릉천과 그 일대의 행정동명인 창릉동, 그리고 해당 지역에 조성될 예정인 창릉신도시, 태종의 능침 앞을 지나는 도로인 헌릉로, 용인서울고속도로의 헌릉IC 등의 지명이 그 예이다. 다만 세종대왕릉은 '영녕릉'이라는 이름을 무시한 사례.
2. 조선왕릉의 입지
조선왕릉은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수도인 한양 인근인 경기도에 주로 밀집해 있다. 이는 조선의 국법인 경국대전에서 '능역은 도성에서 10리(약 4km) 이상, 100리(40km) 이하의 구역에 만들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기 때문이다. 이 규칙에서 예외는 다음과 같다.
- 동북면(함길도, 지금의 함경도)에 있는 태조의 조상들을 추존한 왕릉(목조~환조) 8기
- 개성에 있는 태조의 첫 번째 부인이자 추존된 한씨(신의왕후)의 제릉, 같은 개성에 있는 조선의 2대 임금인 정종(조선)과 정안왕후의 후릉
- 귀양지에서 죽은 뒤 이후 추숭하면서 무덤을 그대로 격상한 단종의 장릉(강원도 영월군)
- 원래 장지에 문제가 생겨서 불가피하게 이장해야 했던 영녕릉(세종, 효종). 세종의 왕릉은 본래 부왕인 태종의 왕릉인 헌릉 인근에 있었다. 그런데 이미 세종 재위 기간에 최양선이라는 풍수가가 '이곳은 후손이 끊어지고 장남을 잃는 무서운 자리입니다'라고 살벌한 주장을 했다. 이 예언이 맞았는지 계유정난 등 왕실에 피바람이 불면서 무덤 터가 불길하다는 인식이 박혔다. 이 때문에 예종 때 현 위치로 이장했다. 효종의 무덤은 본래 동구릉 구역에 있었으나 자꾸 석물이 파손되는 사고가 일어나자 현종 때 현재의 위치로 이장했다.
- 국왕 본인의 특별한 지침을 따른 정조의 융건릉.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무덤을 양주 배봉산(현대의 동대문구)에서 경기도 화성으로 이장하고 이후 정조 본인의 유언대로 아버지의 무덤 근처에 왕릉을 만들었다.
3. 형식
조선왕릉은 풍수와 지형, 그리고 안장되는 순서 등에 따라서 6가지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 단릉(單陵) - 한 언덕 위 하나의 능에 한 사람이 안장되어 있는 왕릉. 대표적으로 태조가 묻힌 건원릉
- 쌍릉(雙陵) - 한 언덕 위에 단릉이 나란히 두 개 있는 것. 대표적으로 태종과 원경왕후가 같이 묻힌 헌릉
- 합장릉(合葬陵) - 한 언덕 위 하나의 능에 두 사람이 함께 안장되어 있는 것. 대표적으로 세종 과 소헌왕후가 같이 묻힌 영릉
-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두 개의 언덕에 각각 단릉이 있는 것. 대표적으로 세조 와 정희왕후가 같이 묻힌 광릉
- 삼연릉(三連陵) - 한 언덕 위에 세 개의 단릉이 있는 것. 헌종과 효현왕후, 효정왕후가 같이 묻힌 경릉이 유일하다.
-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 - 하나의 언덕 위에 단릉이 위아래로 배치된 것. 대표적으로 경종과 선의왕후가 같이 묻힌 의릉
조선왕릉 상설도 (단릉 표준)
기본적으로 불탑을 모방한 난간석, 12지신을 부조한 병풍석, 정자각, 무덤 주변의 문무석인 등 석물 배치와 같이 통일신라, 고려 왕릉의 양식을 거의 이어받았다. 초기에는 전왕조와 비슷한 양식을 유지하다 중후기로 가면서 독자적으로 변화한다. 조선왕릉은 크게 위와 같이 구성되어 있지만, 조성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이유 뿐만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위의 구조를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는 왕릉은 현재로서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므로, 조선왕릉 구조의 표준 정도로만 이해를 해 두자.
- 그림에서는 봉분에서 난간석만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는데, 어떤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이 모두 쳐져 있는 곳도 있고 어떤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 모두 없는 곳도 있다.
- 수라간(그림의 4번)과 수복방(그림의 3번)을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는 왕릉 자체가 거의 없다. (있더라도 현대 시대에 들어서 복원한 경우가 대부분)
- 소전대(그림의 6번) 역시 현재는 건원릉과 헌릉 외에는 찾아 볼 수 없다.
- 무석인(그림의 8번)이 아예 배제되고, 석마(그림의 10번) 2쌍이 아니라 1쌍만 배치된 능도 있다. 예를 들어 단종의 왕비인 정순왕후가 묻혀있는 사릉.
- 상계, 중계, 하계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은 왕릉도 있다.
- 장명등(그림의 11번)이 중계가 아니라 하계에 위치한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철종과 철인왕후가 묻힌 서삼릉의 예릉.
4. 능(陵)
조선왕릉은 그 격에 따라서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 능(陵) : 왕, 왕비, 그리고 추존왕과 추존왕비, 황제와 황후의 무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왕릉은 총 50기(이성계가 추존한, 이성계의 선조를 모신 8기의
능 포함)이며, 그 중에 40기의 능이 남한에 위치하고 있다. 나머지 10기의 능(제릉, 후릉 및 함길도(함경도) 8릉)은 북한 개성에 위치한다.
- 원(園) : 왕세자, 왕세자빈 또는 임금의 사친(私親)[7] 의 묘소에 붙이는 이름이다. 총 12기.
- 묘(墓) : 나머지 왕족(대군, 군, 공주, 옹주, 후궁)과 폐위된 왕과 왕비의 무덤.
4.1. 왕과 왕비의 능
4.2. 추존된 왕과 왕후의 능
4.3. 폐왕과 폐비의 묘(墓)
구분상 왕릉이 아니기 때문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서 제외되었다.
독특하게도 가족 묘 형태로 조성되어 있는데 가장 상단에 연산군 부부가, 중단에는 의정궁주 조씨, 그리고 하단에는 연산군의 사위인 구문경과 딸 휘신공주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18]
독특하게 모 교회 공원묘지 안에 위치해 있어 접근이 용이하지가 않다.
5. 원(園)
원(園)은 왕세자, 왕세자빈과 임금의 사친(私親, 생부모)의 무덤으로, 엄밀한 의미에서 능과는 엄연히 구분되며 따라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도 등재되지 않았다.
6. 한국사 다른 왕조의 왕릉
7. 여담
2019년 말까지 스탬프투어가 운영된다.#
8. 같이보기
[1]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2]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3]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4] 여주시의 영녕릉(세종, 효종의 능)은 500원이며 드물게 외부인도 똑같이 받는다.[5] 12대 인종과 인성왕후 박씨의 능으로, 이곳은 서삼릉 경내이면서 동시에 농협 젖소개량사업소 영역이기 때문에 일반에는 비공개가 된 능이다.[6] 대한제국 선포 후에 조성되어 제후국이 아닌 황제국 양식으로 만든 홍유릉이 비교적 외관이 화려한 편이다. 다만 중국의 황제릉들은 무덤이라기보다는 '''산'''이라 불러도 될 정도로 거대하며, 조선이 존속하던 시기와 겹쳤던 중국왕조인 명, 청의 황릉은 말이 무덤이지 거의 작은 궁전 수준이다.[7] 임금을 낳은 선왕의 후궁.[A] A B C D E F G H 대한제국 때 추존 황제가 되었다.[B] A B C D E F G H I J K 대한제국 때 추존 황후가 되었다.[8] 북한 보존급문화재 556호[9] 북한에 위치해 있어 조선왕릉 중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서 제외되었다.[10] 북한 보존급문화재 551호[11] 제릉과 함께 북한에 위치한 왕릉이기 때문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서 제외되었다.[12] 조선왕조실록 세종 2년(1420) 1월 3일자 기사의 지문(誌文), 애책문(哀冊文)을 통해 능 조성 당시 신도비가 설립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13] 유일하게 강원도에 위치한 왕릉. 단종은 폐서인이 된 상태로 사망했기 때문에 노산군묘였으나, 숙종 때 복위되면서 장릉으로 승격되었다. 특이한 점은 장릉은 영월 엄씨 선산에 조성됐기 때문에 인근에는 엄씨 가문의 묘가 많이 위치해 있다.[14] 정순왕후가 사망하던 당시의 임금인 중종의 배려로 처음에는 부부인의 예로 묘가 만들어졌으나, 숙종 때 단종과 함께 복위되면서 사릉으로 승격되었다. 특이한 점은 장릉처럼 이곳 또한 정순왕후의 시매부(단종의 누이 경혜공주의 남편 정종) 집안인 해주 정씨 선산이기 때문에 인근에는 해주 정씨의 묘가 많이 위치해 있다.[15] 희빈 장씨가 묻힌 대빈묘가 명릉 근처에 있다.[16] 단릉이지만 독특하게 우측(봉분에서 바라보는 위치)에 봉분 자리가 마련되어 있어 실제로는 쌍릉의 규모다.[17] 하나의 곡장 안에 두 개의 봉분을 배치한 쌍릉의 형식이지만, 특이하게도 양옆으로 배치한 것이 아니라 앞뒤로 배치한 구조이다. 동원상하릉의 형식과 매우 유사한데, 하나의 곡장 안에 두 개의 봉분을 배치했다는 점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조선왕릉의 쌍릉 형식 중에서 앞뒤로 배치한 구조는 이 정릉과 화릉이 유일하다.[18] 원래 여기는 세종대왕의 4남 임영대군의 봉토였는데 세종의 명으로 의정궁주 조씨(태종의 후궁)의 봉사손이 되면서 의정궁주의 묘가 처음으로 자리하게 됐다. 이후 임영대군의 외손녀인 거창군부인 신씨의 요청을 중종이 들어주면서 연산군 가족의 묘가 함께 자리하게 되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19] 연산군 재위기에 제헌왕후로 복위되어 '회릉(懷陵)'으로 승격되었으나, 중종반정 이후 다시 묘로 격하되었다. 다만 무덤의 양식 자체는 왕릉의 형태 그대로이다.[20] 現 경희의료원 부지 내, 더 정확히는 경희여자중학교 건물[21] 폐주의 생모라는 공통점 때문에 격상과 격하의 과정이 위의 폐비 윤씨와 정말 유사하다. 광해군 재위기에 공성왕후로 추존되어 '성릉(成陵)'으로 승격되었으나, 인조반정 이후 다시 묘로 격하되었다. 회묘와 마찬가지로 석물은 왕릉의 제도를 갖추고 있다.[22] 광해군이 임종 때 자신을 생모 무덤 발치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겨서 성묘와 광해군묘는 직선 거리로 약 650m 남짓 떨어져 있다.[23] 성묘 바로 앞에 풍양 조씨 시조인 조맹의 묘소가 위치해 있다.[24] 엄밀히 말하자면 장희빈은 폐위의 개념이 아니라 인현왕후 복위로 인한 후궁 재강등이지만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죄로 사사당했기 때문에 왕의 생모 후궁의 묘소에 붙는 '원(園)'의 대우를 받지 못했다.[25] 22대 정조의 후궁으로, 홍국영이 몰락한 뒤 인명원은 원빈묘로 강등되었다.[26] 처음에는 서울시 성북구(지금의 고려대학교 자연계 캠퍼스)에 있었으나 1950년 서삼릉 후궁 묘역으로 이장되었다.[27] 이곳에는 문효태자의 생모인 의빈 성씨의 무덤도 함께 위치해 있다.[28] 흥선대원군의 묘는 처음에는 고양군 공덕리(현재의 공덕동)에 위치했으나 일제에 의해 1906년 파주군 대덕리로 이장, 1966년에는 미군 부지 확보를 위해 다시 남양주군 창현리로 이장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29] 26대 고종의 후궁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황귀비 칭호를 받은 인물이다.[30] 영친왕(의민황태자)의 장남으로 생후 8개월에 요절했다.[31] 영친왕(의민황태자)의 차남으로, 1947년 신적강하 전까지 이왕세자 신분이었다. 1910년 조선왕조(대한제국 포함)가 멸망한 이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공식적인 ‘원(園)’은 아니며 일반적으로는 ‘이구 묘’로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