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릉(조선 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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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이미지 하단에는 "헌릉과 인릉"이라고 표시되어 있지만, 이미지는 헌릉만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 초창기의 왕릉, 특히 쌍릉의 형식을 모범적으로 보여주는 왕릉이다. 위 사진은 1920년대에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헌릉의 모습이다. (출처 : 조선고적도보)
獻陵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 헌릉로에 있는 조선 3대 왕 태종 이방원과 그의 정실 원경왕후가 안장되어 있는 왕릉으로 쌍릉의 형식을 띄고 있다. 이후 23대 순조와 순원왕후의 합장릉인 인릉(仁陵)을 지금의 헌릉과 한 울타리에 안장하게 되어서, 이 두 능을 합쳐서 '''헌인릉'''이라 불리기도 한다.
1420년 태종의 비(妃)이자 4대 왕 세종 그리고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의 생모였던 원경왕후가 먼저 승하하게 되면서 지금의 자리에 왕릉이 지어져서 안장되었고 이후 상왕(上王)이 되어서 3남 충녕대군(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물러난 태종도 승하하여 같은 자리에 안장되면서 헌릉이 지어지게 되었다. 태종의 가혹한 외척 숙청으로 인해 말년 심신이 고생하다가 세상을 떠난 원경왕후의 릉에 태종까지 안장한 이유는 세종대왕이 두 부부가 저승에서라도 화해하여 잘 지내기를 바란 의도.[1]
내곡동 지역은 서초구 지역이기는 하지만 서초구 남부에 위치해 있고 이 곳의 특성상 농촌적인 분위기와 서민적인 분위기가 있고 주변에 제52보병사단 예비군훈련장 등이 있기도 하여서 호화롭고 상류층이 많은 서초구 강변 북부와는 다른 모습이며 근래에는 대통령 이명박의 사저 논란으로 구설수에 올랐던 곳이기도 하였다. 또한 근처에 회사도 있다.
같은 강남이지만 강남 도심 한복판에 있는 선릉이나 정릉과는 달리 서초구 남부 내곡동에 있기 때문에 도심 한복판이 아닌 이 지역의 특성상 미개발 지역에 있어서 야산에 위치해 있고 그 때문에 자연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곳이기도 하다. 때문에 주변에는 인공건물 대신 소나무 숲과 야산 숲 등으로 채워진 광경.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공인 문화재이다. 조선왕릉은 대부분 능침 보존을 위해 능역 앞까지는 올라가지 못하게 막아 놓았고 정자각 쪽에서만 관람이 가능하지만, 태종의 헌릉은 능침 앞까지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따로 마련이 되어 있어서 능을 가까이서 감상할 수 있는 능이다. 이는 세종의 영릉도 마찬가지.
헌릉은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 문정왕후 윤씨의 태릉, 세조의 광릉, 성종의 선릉처럼 대표적으로 인근 지역의 지명으로 통용되는 왕릉 중 하나이다. 실제로 이 능침의 인근을 지나는 주간선도로의 이름이 헌릉로이며 용인서울고속도로의 헌릉IC 역시 이 헌릉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1] 원경왕후의 상을 치를 때 태종은 역월단상제(삼년상 항목 참조)를 적용해서 굳이 3년상을 다 치를 필요 없고 12일만 입으라고 했지만 세종은 "3년복을 다 입지는 못해도 어머님 산소에 모실 때까지는 입겠다"고 반대했고, 세종은 또한 태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원경왕후의 무덤 옆에 작은 절을 짓기도 했는데, 태종이 "내가 불교를 싫어하는데 왜 내가 나중에 들어갈 무덤 옆에 절을 짓냐"고 버럭하자 "어머니 계시는 곳이 너무 적적해서 절에서 염불하는 소리라도 들으시면 좋지 않을까 해서 그럽니다."라고 대답했다. 물론 절을 짓는 것은 없던 일로 끝났지만, 세종이 태종의 말에 정면으로 반발한 몇 안 되는 사례로 남아 있다. 박시백은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외척 단속과 왕권 강화라는 명분이 있기는 했지만 어머니와 외가에, 나아가 자신의 처가에까지 너무 가혹했던 아버지에 대한 반발'''이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