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후
[clearfix]
1. 개요
고려의 문벌이자 외척. 고려 인종의 왕후 공예태후의 부친으로, 의종, 명종, 신종 등은 모두 임원후의 외손자가 된다. 『고려사』의 임원후열전에서는 도량이 넓고 깊었으며 풍채에 위엄과 무게가 있고 경사에 통달했다고 평가한다.
2. 출신
본관은 정안, 오늘날의 장흥 임씨로 상당한 문벌귀족이었다. 장흥 임씨는 임원후의 부친 정경공 임의가 수태위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상주국까지 오르며 두각을 나타냈다. 임의는 임원후가 윤관, 이식, 이위의 딸과 결혼함으로 수주 이씨, 경원 이씨, 파평 윤씨 문벌과 연결됐다. 임원후는 딸을 김인규의 아들에게 시집보내 수주 이씨와 혼인 관계였던 경주 김씨 문벌과도 관계를 맺으려고 했으나, 인종의 왕비로 간택돼 이는 무산됐다. 장흥 임씨는 외척이 된 이후 원간섭기까지도 권문세족으로 명맥을 이어간다.
3. 생애
선종 6년(1089) 정경공 임의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명은 원애(元敱). 장흥 임씨의 시조 임호(任顥)의 손자다. 예종 시기 과거에 급제하고, 예종 4년(1109)에 처 수주 이씨와 사이에서 득녀한다. 인종 시기 전중내급사가 되고 합주 수령으로 공적을 세운다. 고려사 후비전에 따르면 임원후의 딸이 국모가 될 것이라는 소문을 들은 이자겸의 질투로 개성부사로 좌천된다. 예종 12년(1117) 부친상을 당해 황보한(皇甫翰)에게 편지를 보내 아버지의 묘지명을 부탁한다. 척준경이 인종의 꿈을 해몽하며 임씨 후비를 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인종 4년(1126) 이자겸이 축출된 뒤 임원후의 딸이 궁에 들어가고 인종 7년(1129) 왕비가 되면서 임원후는 고려의 새로운 외척이 된다.
묘청 등이 서경으로 천도하려는 움직임을 견제해 인종에게 글을 올리기도 했으나 인종도 평양 천도에 관심을 가졌기에 묵살된다. 임원후열전에 따르면 재상들이 모두 묘청의 말을 듣고 따랐지만 홀로 이를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즈음에 판공부사를 거쳐 중서시랑평장사로 승진한다. 결국 묘청이 반란을 일으키자 천도를 반대했던 김부식과 함께 중군수에 임명되고, 김부식은 평양으로 출병하는 한편 임원후는 도성을 지킨다. 난을 진압한 공로로 동덕좌리공신호를 받고 개부의동삼사 검교태부에 오른다. 그 뒤에는 판병부사, 문하시랑평장사[1] , 판이부사를 지내고 수태보 판서경유수사가 된다. 판이부사로 있으면서 인사를 공정하게 했기에 산도보다 낫다는 평을 듣는다.
임원후는 외손자 의종이 즉위한 시점에도 살아있었다. 의종 시기 문하시중에 임명되고 정안후(定安侯)에 봉해진다. 임원후는 조회에서 전각 아래가 아니라 위에 올라와서 의종에게 절했기에 간관의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의종 시기 '선충안사좌리동덕공신 삼중대광 개부의동삼사 수태위 상주국 정안공 식읍2천호 식실봉6백호'에 오르며, 임원후를 위해 관료와 아전들까지 배치된 수령부(壽寧府)라는 독자적 부처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의종 10년(1156)에 68세의 나이로 죽는다.
4. 가족관계
- 조부: 임호
- 부: 정경공 임의
- 모: 낙랑군부인 이씨
고려의 외척으로 유명한 이자겸도 왕으로 즉위한 외손자는 인종 하나뿐인데, 무신정권 덕분에(?) 외손자가 셋이나 왕위에 오른다. 이자연이 딸 인예태후를 문종과 결혼시켜 외손자 셋이 왕이 된 전례가 있다. 그러나 임원후 사후 인종은 외척들을 견제해[6] 임원후의 아들들은 권세를 부리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자연 사후에도 배경이 튼튼했던 인천 이씨 외척들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외손자들의 즉위 배경은 무신정권기의 권력 이동에 따른 선왕의 폐위이기 때문에 외척의 권력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