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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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화(林和, 1908년 10월 13일 ~ 1953년 8월 6일)는 대한민국의 시인, 배우, 문학 평론가이다. 본명은 임인식(林仁植)이며 김철우, 아호는(雅號) 쌍수대인(雙樹臺人), 성아(星兒), 청로(靑爐), 양남수[1] 등 여러 필명을 사용했다. 임화라는 필명은 1927년부터 사용했다.
다다이즘 시인으로 시작해 마르크스주의 문학 운동을 표방한 단체인 카프(KAPF :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의 서기장까지 지냈고, 일제 말기엔 친일 행보를 걸었으며 광복 후 월북했다가 남로당 숙청 때 결국 처형당한 드라마틱한 인생을 산 인물.
서울 동숭동의 서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유년기 그의 가정은 파산 상태에 있었고, 거기에다가 1926년, 그가 19세 되던 해 어머니가 사망함으로써 그 충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거리를 전전하기도 했다. 그 해 연극에 대한 평론을 집필하며 연극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12월 카프에 가입했다.
그런데 그는 무엇보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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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시절 흰 피부에 수려한 외모로 엄청난 미남이었다. 그래서 <유랑> , <혼가> 와 같은 영화에 주연으로 발탁되기도 했다.[2][3]
1920년대 후반부터 시 창작과 비평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1927년경부터 계급문학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해, 1929년에 시 〈우리 오빠와 화로〉, 〈네거리의 순이〉 등을 발표하여 대표적인 경향파 시인으로 자리잡으며 카프를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다. 1935년 5월에 카프가 해산한 후에는 잠시 순수 문학으로 회귀하는 듯했지만, 박헌영과 가까워지면서 남로당 노선을 걷게 된다.
2번 결혼한 이력이 있다. 이귀례와 결혼했다가 이혼하였고, 카프가 해산한 1935년에 마산으로 내려가 요양하던 중에 만난 소설가 지하련[4] 과 이듬해 재혼하였다.[5]
그러나 해방 후 1947년 11월 박헌영과 지하련을 따라 월북한 그는 1953년 박헌영을 필두로 한 남로당 계열이 숙청될 때 북한 정권 전복 음모와 간첩 행위 등의 혐의로 기소당했고, 미제의 스파이[6] , 일제에 아첨하거나 결탁한 행위, 반소, 반공 행위 등의 죄목과 함께 평양에서 총살당했다.[7]
일본의 사회파 추리 소설가 마츠모토 세이초의 작품 <북의 시인>에서도 임화를 스파이로 보았으나, 이에 반박하는 우리나라 작가의 작품도 출간되었다.[8] 시체는 묻어 주는 사람 하나 없이 방치되었다고 알려졌다. 당시 만주에 피난을 가 있었던 지하련도 다급히 평양으로 내려와서 울고불며 그의 시신을 찾으려고 했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고 한다.[9] 그 뒤로는 남에서나 북에서나 임화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었다.
그도 죽음 앞에서는 나약한 한 명의 인간인지라, 막판에 김일성을 찬양하는 시를 몇 편 씀으로써 자신을 죄어 오는 죽음의 마수로부터 벗어나고자 했지만 결국 사형되었다.[10]
1950년에 6.25 전쟁이 발발하고 다시 서울을 찾은 그는 딸 혜란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고, 후퇴하는 북한군을 따라 자강도까지 쫓겨 가 <너 어느 곳에 있느냐>(1951)라는 시로 자신의 비애를 달래었다. 그 서정성이 빼어나다 평가되는 시이지만, 비슷한 시기에 발표한 그의 다른 시 <바람이여 전하라>, <흰 눈을 붉게 물들인 나의 피 위에> 들과 더불어 북한군 참전 전사들을 모욕하고 염전사상[11] 을 고취시켰다는 이유로 숙청의 도화선이 되었다.
문학사적인 면에서 개화기를 기준으로 한국 문학의 명맥은 완전히 끊겨 껍데기만 남고, 서양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한국으로 문학이 이식되었다고 하는 이른바 <이식문학론>을 1939~1941년 사이에 제기하였다. 그런데 임화가 월북 문인, 즉 북한 측 인사인 것도 있지만 이 이론은 '''현대 한국 문학을 근본부터 부정하기 때문에''' 학계에선 거의 금기시되는 문학론이다.[12] 그래서 임화에게 반박하고자 하는 여러 논문과 저술이 많이 나와 있다. 이식문학론에 대한 비판
읽어보자
현대사아리랑(상)
현대사아리랑(하)
참고로 대표적인 이식문학론 킬러가 바로 한국의 전통 문학과 현대 문학이 이어져 있다는 이론에 있어 정말 중요한 위치에 있던 천재 시인 정지용이다.
1. 개요
임화(林和, 1908년 10월 13일 ~ 1953년 8월 6일)는 대한민국의 시인, 배우, 문학 평론가이다. 본명은 임인식(林仁植)이며 김철우, 아호는(雅號) 쌍수대인(雙樹臺人), 성아(星兒), 청로(靑爐), 양남수[1] 등 여러 필명을 사용했다. 임화라는 필명은 1927년부터 사용했다.
다다이즘 시인으로 시작해 마르크스주의 문학 운동을 표방한 단체인 카프(KAPF :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의 서기장까지 지냈고, 일제 말기엔 친일 행보를 걸었으며 광복 후 월북했다가 남로당 숙청 때 결국 처형당한 드라마틱한 인생을 산 인물.
2. 생애
서울 동숭동의 서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유년기 그의 가정은 파산 상태에 있었고, 거기에다가 1926년, 그가 19세 되던 해 어머니가 사망함으로써 그 충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거리를 전전하기도 했다. 그 해 연극에 대한 평론을 집필하며 연극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12월 카프에 가입했다.
그런데 그는 무엇보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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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시절 흰 피부에 수려한 외모로 엄청난 미남이었다. 그래서 <유랑> , <혼가> 와 같은 영화에 주연으로 발탁되기도 했다.[2][3]
1920년대 후반부터 시 창작과 비평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1927년경부터 계급문학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해, 1929년에 시 〈우리 오빠와 화로〉, 〈네거리의 순이〉 등을 발표하여 대표적인 경향파 시인으로 자리잡으며 카프를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다. 1935년 5월에 카프가 해산한 후에는 잠시 순수 문학으로 회귀하는 듯했지만, 박헌영과 가까워지면서 남로당 노선을 걷게 된다.
2번 결혼한 이력이 있다. 이귀례와 결혼했다가 이혼하였고, 카프가 해산한 1935년에 마산으로 내려가 요양하던 중에 만난 소설가 지하련[4] 과 이듬해 재혼하였다.[5]
그러나 해방 후 1947년 11월 박헌영과 지하련을 따라 월북한 그는 1953년 박헌영을 필두로 한 남로당 계열이 숙청될 때 북한 정권 전복 음모와 간첩 행위 등의 혐의로 기소당했고, 미제의 스파이[6] , 일제에 아첨하거나 결탁한 행위, 반소, 반공 행위 등의 죄목과 함께 평양에서 총살당했다.[7]
일본의 사회파 추리 소설가 마츠모토 세이초의 작품 <북의 시인>에서도 임화를 스파이로 보았으나, 이에 반박하는 우리나라 작가의 작품도 출간되었다.[8] 시체는 묻어 주는 사람 하나 없이 방치되었다고 알려졌다. 당시 만주에 피난을 가 있었던 지하련도 다급히 평양으로 내려와서 울고불며 그의 시신을 찾으려고 했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고 한다.[9] 그 뒤로는 남에서나 북에서나 임화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었다.
그도 죽음 앞에서는 나약한 한 명의 인간인지라, 막판에 김일성을 찬양하는 시를 몇 편 씀으로써 자신을 죄어 오는 죽음의 마수로부터 벗어나고자 했지만 결국 사형되었다.[10]
1950년에 6.25 전쟁이 발발하고 다시 서울을 찾은 그는 딸 혜란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고, 후퇴하는 북한군을 따라 자강도까지 쫓겨 가 <너 어느 곳에 있느냐>(1951)라는 시로 자신의 비애를 달래었다. 그 서정성이 빼어나다 평가되는 시이지만, 비슷한 시기에 발표한 그의 다른 시 <바람이여 전하라>, <흰 눈을 붉게 물들인 나의 피 위에> 들과 더불어 북한군 참전 전사들을 모욕하고 염전사상[11] 을 고취시켰다는 이유로 숙청의 도화선이 되었다.
문학사적인 면에서 개화기를 기준으로 한국 문학의 명맥은 완전히 끊겨 껍데기만 남고, 서양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한국으로 문학이 이식되었다고 하는 이른바 <이식문학론>을 1939~1941년 사이에 제기하였다. 그런데 임화가 월북 문인, 즉 북한 측 인사인 것도 있지만 이 이론은 '''현대 한국 문학을 근본부터 부정하기 때문에''' 학계에선 거의 금기시되는 문학론이다.[12] 그래서 임화에게 반박하고자 하는 여러 논문과 저술이 많이 나와 있다. 이식문학론에 대한 비판
읽어보자
현대사아리랑(상)
현대사아리랑(하)
참고로 대표적인 이식문학론 킬러가 바로 한국의 전통 문학과 현대 문학이 이어져 있다는 이론에 있어 정말 중요한 위치에 있던 천재 시인 정지용이다.
3. 같이 보기
[1] 1947년 월북 후 남로당 유격대 선동용 문건에 실린 상당수의 글에 서명한 이름. 이 외에도 임다다(林DADA), 다임다(DA林DA)가 있다.[2] 참고로 두 영화는 모두 흥행에 실패했다.[3] 특히 <혼가>에서는 마부 역할을 맡았는데, 워낙 피부가 흰 데다가 메이크업마저 창백해 보이는 메이크업을 해 하루 종일 햇볕 아래서 일하는 마부와는 거리가 아주 먼 피부색으로 이질감이 두드러졌다. 윤기정은 <혼가>의 임화의 연기력에 대해 "미남자로만 보이려고 화장을 너무 많이 한 것과 동작의 선이 가늘고 표정도 심각한 곳이 없다"고 평가했다.[4] 본명은 이현욱이다.[5]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산호동 마산용마고등학교 뒷쪽의 산호공원 쪽에 지하련이 살던 집이 있다. 2015년 NC-KIA와의 창원 경기 도중 갑자기 연기 때문에 경기가 중단된 사건이 바로 이 집에서 났던 화재 때문이었다. 임화도 이 곳에 잠시 기거하면서 요양했다.[6] 실제로 CIC(미 육군 속 방첩부대)와 관련이 있다는 기밀 문서가 공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지적하는 기사도 있다.[7] 이 무렵 같은 계파에 있었던 소설가 안회남도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져서, 1954년 이후 안회남의 행적은 알 수 없다.[8] 한창 재판이 진행되던 중 그는 더 이상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견디지 못해 쓰고 있던 안경을 깨서 그 파편으로 자신의 동맥을 끊어 자살을 기도하지만 실패한다. 드라마 <제1공화국>에도 그런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9] 그 때문에 지하련은 수용소로 끌려갔고, 거기서 병사했다고 전해진다.[10] 일설에 의하면 김일성이 그의 잘생긴 외모를 질투했다고 한다.[11] 전후 월북/재북 문인들에게서 나타나는 전쟁에 환멸을 느끼는 사상.[12] 만약 남로당 숙청에서 살아남았다 해도 민족주의를 내세우기 시작하는 1960년대 후반에 그 문학론 때문에 숙청을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