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

 




1. 개요
2. 배경
3. 성립
4. 전개
5. 이념과 노선, 논쟁
5.1. 내용 형식 논쟁
5.2. 목적의식 논쟁
5.3. 아나키즘 논쟁
5.4. 예술대중화 논쟁
6. 해체
7. 해체 이후
8. 작품
9. 한계 및 의의
10. 참고


1. 개요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
통칭 카프(KAPF[1])는 1925년 8월에 결성, 1935년 5월 20일에 해체된 사회주의 문학단체다. 계급의식에 입각한 조직적인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계급혁명 운동을 목적으로 삼았다.

2. 배경


  • 첫 번째 배경: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볼셰비키 혁명에 의해 소비에트 연방, 즉 소련이 건국되고 1923년 적백내전이 종료된 후 전 세계에 불기 시작한 사회주의 운동에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당시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여러 단체들이 탄생하였다.[2][3]
  • 두 번째 배경: 1919년 3월 1일에 시작되어 몇 달간 지속된 3.1 운동이 실패로 끝나면서 시작된 낭만주의 사조, 그것도 세기말적인 퇴폐적 낭만주의와 민족 비관주의가 만연하는 현실에 대한 반성이 시작되었다. 이 반성은 주로 퇴폐주의 계열 동인지였던 <백조>에서 일어났다(그러나 '백조'는 이후 공중분해되는 시련을 겪었다).
  • 세 번째 배경: 신경향파 등의 자생적인 발생. 신경향파의 자생적인 발생은 작가들이 현실과 조우하여 그 현실을 똑바로 보기 시작하며 그 현실, 식민지 현실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그 해결점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던 것이 배경 중의 하나였다. 신경향파와 같은 방법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염상섭이나 현진건처럼 현실을 고발하는 정도의 내용을 묘사한 일도 많았다.
'''그리하여 이러한 배경을 기반으로 지금까지도, 남한에서건[4] 북한에서건[5]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는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문학운동이 시작되었다.'''
실제로 문학사를 공부하다보면 대학교에서 전공수업을 듣기 전까지는 카프(KAPF)라는 좌익계열 문예운동이 있었다는 정도로 얼렁뚱땅 넘어간다. 대개는 한국에서 허용되지 않았던 사상을 기반으로 하였다고 해서 가르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오죽하면 월북 시인 오장환병든 서울을 읽었다고 간첩단으로 몰았을까.[6] 하지만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고 과거 참여-순수 논쟁이 일어났던 때와는 달리 탈 이데올로기 시대에 접어들었으니 카프라는 단체에 대해서 가르치더라도 태클 걸 사람들은 있을 것이다. 조심하자. '''하지만 카프를 잘 모르고 지나가게 된다면 그냥 20~30년대 문학사가 비어 버린다.''' 지금까지도 학교에서 사회주의 사상이 중심이 된 문학과 그 기법이 다소 거칠다고 하여 가르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 문학사에 대해 본격적으로 가르치는 중3 국어 과정에서도[7] 카프라는 이름만 짚고 넘어갈 뿐 관련 작품이나 작가 예시를 들지 않는다.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의 20세기 초반 문학사를 배우더라도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흔히 프롤레타리아 문학이라 불리는 좌익계 경향문학이다.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가지는 시대적 의미를 파악하지 않고서는 문학사의 전개('''특히 현대 리얼리즘의 탄생''')와 문학이 근현대 사회에서 차지한 입지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3. 성립


1922년 성립된 염군사(焰群社)[8]와 1923년 성립된 파스큘라(PASKYULA)[9]가 1925년 8월에 그 조직을 합쳤다. 그리고 그들은 조직의 이름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줄여서 조선프로예맹, 에스페란토로 Korea Artista Proleta Federacio. 약자로 KAPF라고 정했다.
발기인은 박영희·김기진·이호·김영팔·박용대(朴容大)·이적효·이상화·김온·김복진·안석영·송영·최승일·심훈[10]·조명희·이기영·박팔양·한설야(韓雪野)·김양(金陽) 등이었다. 카프의 결성과 함께 파스큘라가 중심이 되어 종래의 신경향파 문학과는 달리 뚜렷한 목적의식에 기초를 둔 계급문학으로 방향전환을 하게 되었다. 염군사 계열의 이념성과 파스큘라를 중심으로 하는 기성 문단의 경향성과 결합되어 계급 문단을 집단화하고 조직화했다고 할 수 있었다.

4. 전개


1925년 8월에 두 단체를 합하였다고 하더라도 문예운동을 진행함에 있어 필요한 것은 글을 발표할 지면이었다. 본래 천도교에서 발행하던 종합잡지 <개벽>[11]이라는 훌륭한 지면이 있었지만, 얼마 못가 강제폐간당했다.
결국 이들은 1926년 2월, 준기관지적 성격[12]을 지닌 잡지 <문예운동>을 창간하였다. 그리고 이 잡지를 통하여 계급문학운동의 조직적 실천을 가시화하기 시작했으며, 기존 문단의 대표적인 인사였던 이광수, 염상섭, 김억 등을 공격했다.
그리고 1926년 12월 26일. 카프는 <중외일보>를 통해 조선프로예맹이 임시총회를 통해 강령과 규약을 결정하였고 위원 선거를 하였음을 발표하며 비로소 조직의 실체를 드러냈다.[13]

"신흥하는 무산 계급이 가질 온갖 예술을 창조하는 조선의 예술가들로 작년 여름에 창립된 조선프로레타리아예술동맹에서는 금번 일층 그 목표하는바 예술 운동을 하기 위해 지난 24일 저녁 시내 청진동 95번지에서 임시 총회를 개최하고 강령과 규약 등을 개정하는 동시에 위원 선거를 하였다."

* 동맹원: 이기영, 김영팔, 이량, 조명희, 홍기문, 김경태, 임정재, 양명, 이호, 김온, 박용대, 권구현, 이적효, 김기진, 이상화, 김복진, 최학송, 최승일, 박팔양, 박영희, 김동환, 안석주

* 위원: 김복진, 김기진, 이량, 박영희, 최승일, 안석주, 김경태

* 강령: 우리는 단결로서 여명기에 있는 무산 계급 문화의 수립을 기함.

* 규약

1. 본회의의 명칭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이라 칭함

2. 본회의의 위치는 경성부에 치함

3. 본회의의 회원은 본 동맹의 강령 규약을 승인하는 자로 함(단, 위원 1인 이상의 추천에 대하여서는 위원회에서 결정함)

4. 본 동맹은 본 동맹의 강령을 달성키 위하여 좌기의 4부를 치하고 사업을 실행함.

서무부, 교양부, 출판부, 조사부

5. 좌기 4부의 책임 위원은 각 위원의 협조로서 직무를 분담함.

6. 본 동맹은 7인의 위원을 선정하여 사업의 실천에 당함(단, 위원이 사직할 시에는 위원회에서 보선함)

7. 위원의 임기는 만 1년으로 함.

8. 본 동맹은 1년 1회의 총회를 개하고 수시 필요에 의하여 위원 2/3 이상의 요구에 의하여 또는 위원회에서 소집함을 규정함

9. 본 동맹원은 경상비 1개월 20전을 납입함(단 매월 5일 이내)

10. 본 동맹은 동맹의 강령 및 규약에 배반하는 자는 위원회의 결정으로 제명함을 정함.

<중외일보> 1926년 12월 26일

이 시기 카프는 끊임없이 외형을 불려 나갔다. 그렇기에 김화산과 같은 아나키스트도 있었고, 아나키즘사회주의가 혼재되어 있었으며, 천도교 측과도 공조를 맺고 있었다.[14] 그리고 꾸준한 활동을 통해 세를 불리던 카프는 1927년 9월. 조직을 확대 개편했다.

'''중앙 위원회 위원'''

(경성) 김복진, 박영희, 조명희, 한설야, 최학송, 윤기정

(동경) 이북만, 홍양명, 조중곤, 한식, 홍효민

(대구) 이상화

(원산) 박용대

'''중앙상무위원회'''

서무부 : 윤기정

교양부 : 박영희

출판부 : 최학송

조사부 : 김복진

조직부 : 홍효민

'''강령'''

우리는 무산 계급 운동에 있어서 맑스주의의 역사적 필연을 정확히 인식한다. 그럼으로 우리는 무산 계급 운동의 일부분인 무산 계급 예술 운동으로서,

1. 봉건적 및 자본주의적 관념의 철저적 배격

2. 전제적 세력과의 항쟁

3. 의식적 조성 운동의 수행을 기한다.

<조선일보> 1927년 9월 4일

조선프로예맹은 조직을 확대 개편하면서, 1927년 11월 최초의 기관지인 <예술운동>을 일본에서 발간했다.[15]
또한 '''제1차 방향전환'''이라 일컬어지는 이념 노선의 전환을 꾀했다. 1926년 말부터 계급 문단의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던 방향전환론은 사회운동 자체가 요구하는 이념적 노선과 실천 방향을 어떻게 수용하느냐 하는 문제가 주된 관심사였다. 이에 따라 조직 내에서는 내용 형식 논쟁과 아나키즘 논쟁을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이념노선으로 내세우게 되었고 동경을 거점으로 하고 있던 급진적 사회주의자 조직인 "'''제3전선파'''"가 국내 계급 문단에 진출하게 됨으로써 조직은 마르크스주의 이념 노선을 확고하게 정하는데 성공함과 동시에 급진적인 신세대 사회주의자라는 새로운 피를 수혈받게 된 셈이었다.[16] 그리고 이 새로운 '''피'''들은 계급 문학 운동의 정치적 진출과 관련된 이론 투쟁을 증대시키고 대중적인 조직을 꾀하게 하였으며 정치적 투쟁 국면을 새로이 노출시키기도 하였다. 기존의 계급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사회정치적 조직과 조선프로예맹이 조직적으로 연계되기도 하였고 이를 통해 봉건적 자본주의에 따른 관념을 배격하고 전제적인 세력과 항쟁을 벌이고 의식적 조성운동의 수행 등과 같은 투쟁적인 실천운동을 강조하게 되었다. 현장에서 살기 위해 투쟁하던 노동자들이나 농민들에게는 얼마나 전달되었는지는 미지수이지만.
이들이 추구하던 계급문예운동의 이념노선과 실천방법을 잘 드러내는 것이 다음의 '''<무산계급예술운동에 대한 논강>'''이다.

조선의 무산계급운동은 1927년을 일기로서 운동의 질적 방향전환을 감행하였으며, 따라서 무산계급 예술운동에도 질적 방향전환을 요구하여 이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은 이 전환의 실행을 기함.

무산계급 예술운동의 방향전환을 실행함에 있어서 우리는 먼저 우리 운동이 전환되지 않으면 안 될 객관적 조건의 현계단을 구명하며 그리함으로써 현계단을 파악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이것 없이 우리는 무산계급 예술운동의 방향전환의 실천의 전개를 기하지 못한다. 그것을 구명 파악함에는 과감한 이론투쟁을 실행할 것이다.

그 이유는 맑시스트는 세계 변혁과정에서 그 역사적 필연으로 박도한 객관적 정세의 현계단을 구명하며 파악하며 전취하여 그럼으로 운동의 역사적 임무를 다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럼으로 전 세계 무산계급운동은 지금 이 변증법적 역사과정을 과정하고 있다.

무산계급운동의 방향전환은 이리해서 부분적 투쟁으로부터 대중적 전체적 투쟁을 의미하는 것이니 즉 조합주의 투쟁에서 정치 투쟁을 의미하는 것이다. 진실한 의미에서 맑시스트는 '세계를 여러 가지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변혁함에 있다.' 이것을 실행함에는 정치투쟁으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목전에 실례로는 XX의 무산계급은 지금 XX정치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치 획득을 현단계로서 전취하려 하며, 지금 그것을 과정하고 있다. 이에 일본의 제국주의의 지배 밑에 있는 전 조선 민중은 필연적으로 이 정치 과정을 과정해야 하며, 그리해서 지금 그것을 과정하고 있다. '조선의 민족단일당'을 절규하며 조선 각지에서 총역량을 이리로 집중시키게 되었다. 이럼으로 조선의 민족적 정치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그럼으로 조선프로레타리아예술동맹은 무산계급운동의 방향전환과 한 가지 이 민족적 정치 투쟁 시야를 전취함으로 이 과정을 과정하여야 한다.

따라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은 무산계급예술의 임무를 작품 행동에 국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전운동의 총기관이 지도하는 투쟁을 실행하기 위하여 우리는 예술은 무기로서 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이리하여 작품지상인 행동의 계급적 자기 소외로부터 무산계급예술의 구출을 기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예술운동은 정치투쟁을 위한 투쟁예술의 무기로서 실행된다.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은 대중에게 이 투쟁의식을 고양하며, 이것의 교화운동을 위하야 조직하며, 그리하여 우리는 무산계급예술운동의 역사적 임무를 다할 것이다.

이 논강에서 다루고 있는 조선프로예맹의 계급문학운동의 이념적 노선과 그 실천 방법은 마르크스주의자의 입장에서 조합주의적 투쟁을 벗어나 정치투쟁으로 진출해야 한다는 것과 조선의 민족 단일당(신간회)에 대한 총역량의 집결과 민족적 정치운동으로서의 계급운동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술이 무기가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들은 예술을 무기로 민족을 일깨우고 당면해서는 일본의 제국주의에, 더 크게는 자본주의 체제하의 모든 제도와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 강령은 사회주의자들이 신간회 조직에서 이탈하기 시작한 12월 테제(1928)의 등장 이전까지 계속되었다.
조선프로예맹은 이런 강령 아래 조직의 확장을 꾀했다. 동경지부 이외에도 함흥, 해주, 평양, 개성, 수원, 원산, 목포 등에 지부를 설치하였으며, 일본의 계급문예운동조직인 NAPF와의 연계를 꾀하기도 하였다.

5. 이념과 노선, 논쟁


식민지 현실에 눈을 뜨고 일제의 지배 체제 아래에서 이루어진 자본주의의 모순에 정면으로 대응한 것이 조선프로예맹의 기본적인 입장이고 이념이었으나 조직을 이끌어나가는 사람이 변화함에 따라 노선이 바뀌는 일도 있었다. 물론 이는 주변의 정황이 바뀌어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한 면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문예활동이라는 입장은 바뀌지 않는다.

5.1. 내용 형식 논쟁


김기진이 박영희의 <철야>와 <지옥순례>를 비평한 글, <문예월평>을 두고 박영희가 반박하면서 시작. 1926년 12월 <조선지광>으로부터 1927년 2월 <조선문단>까지의 짧은 기간에 이루어진 논쟁이었으나 이후 조선프로예맹의 방향을 설정했다는 점과 처음으로 비평이 문학사에서 중심적인 위치로 올라섰다는 점에서 중요한 논쟁으로 평가된다.
논쟁의 발단은 팔봉이 회월의 단편소설 「철야」와 「지옥순례」를 놓고서 비판한 데서 시작되었다. 회월의 단편 <철야>에 대해서 팔봉은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나섰다.

그 결과 이 일편은 소설이 아니오, 계급의식, 계급투쟁의 개념에 대한 추상적 설명에 시종하고 일언일구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만 사용되었던 것이다. 소설이란 한 개의 건축이다. 기둥도 없이 석가래(서까래)도 없이 붉은 지붕만 입혀 놓은 건축도 있는가?

이 인용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김기진은 박영희의 단편소설인 <철야>가 계급의식의 선전, 즉 내용전달에 급급한 나머지 제대로 문학적인 형상성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주제를 드러내는 방식이 ‘소설’이 아니라 ‘추상적 설명’에 불과하다는 것, 즉 소설이 소설로서 갖추어야 할 요소들을 무시한 채 ‘너무도 쉽사리 간단하게 처리하였던 것’을 비판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작가적 태도나 작품의 주제가 아니라 그것을 체현하고 있는 작품의 형식적 면모를 강조하던 김기진의 ‘경향’론의 연장선상에서 박영희에 대한 비판이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그에 의하면, 프로 문학작품도 그것이 예술의 한 범주인 문학이라고 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미적인 구조를 지녀야만 한다는 것이다. 목적이 아무리 정당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성취하고자하는 수단이 그에 상응하지 못한다면 그 의의를 상실한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비판은 이제 막 조직을 정비하고 목적의식에 입각한 본격적이고 총력적인 문화운동에 들어서려고 하던 카프 내부에 충격을 주었다.[17]
이에 대해 박영희는 <투쟁기에 있는 문예비평가의 태도>(<조선지광> 1927.1)라는 반박문을 들고 나왔다. 박영희는 김기진의 입장에서 드러나는 모호함[18]에 대한 추궁을 논의의 핵심으로 펼쳤다. 여기서 박영희는

프롤레타리아의 전 문화가 한 건축물이라면 프로의 예술은 그 구성물 중 하나임

을 논한 다음 소설로서 완전한 건축물을 만들 시기는 아직 시기상조임을 밝힌다.
또 박영희는 이 글에서

부르주아 문예비평가는 작품의 구조에 중요한 착점을 두지만 프로 문예비평가는 작품에 나타나는 의식과 xxx대조하여서 프로작품의 가치를 말해야

한다면서, 김기진을 부르주아적 비평가로 규정하고 '''태도의 불선명함'''을 지적하면서 비판했다. 궁극적으로 프로 문예 비평가의 '''태도'''를 문제시하는 것이었다. 그런 후 회월은 일본의 비평가 청야계길의 외재적 비평을 이렇게 옮겨놓고 있다.

오늘날 우리 앞에 있는 문예비평은 두 가지 당연한 길이 있다. 하나는 내재적 비평이라고 말한 것이고 하나는 이것에 대응해서 외재적 비평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내재적 비평이라는 것은 역시 비평가가 나타난 작품의 내부를 뚫고 들어가서 그 구성요소를 분해하며 그 결합을 조사하며 당연히 그 곳에 있어야 할 조화가 없는 것을 지적하며, 내용과 기교의 관계, 그 파탄을 보기도 하는 비평이나, 그것을 설명적 비평 또는 문학적 비평이라고 해도 무관한 것이다.

또 한 가지 외재적 비평이라는 것은 나타난 예술작품을 일개의 사회현상으로서, 나타난 예술가를 일개의 사회적 존재로서, 그 현상 그 존재의 사회적 의의를 결정하는 비평이니 이것을 전것과 대립해서 문화사적 비평이라고 해서 무관할 것이다.

이러한 박영희의 반박에 의해 논쟁이 시작되고 박영희가 들고 나온 외재적 비평에 반응하여 여러 비평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김기진이 재비판(<무산문예작품과 무산문예비평>)을 한 것을 포함하여 권구현의 <계급문학과 그 비판적 요소>, 주요한의 <취재의 경향과 제삼층 문예운동>등이 그것이다. 이들의 가세로 프로 문예 작품이 작품으로서의 자질을 갖춰야 하는가 여부를 초점으로 하여 문단의 이목이 모아졌다.
하지만 이 논쟁은 김기진이 재비판용으로 들고 나온 <무산문예작품과 무산문예비평>을 소설관에 관련된 이론적 입장에서는 아무런 오류도 인정하지 않으면서, 비평가적 태도 면에서 불선명한 점이 있다고 동지들이 지적한다면 사죄를 하겠다고 마무리 지으면서 급작스럽게 끝났다. 김기진은 1927년부터 임화 등 소장극좌파 문인들이 동경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기 시작하면서 한결같이 박영희의 편에 서서 지지하자, 논쟁을 더 이상 이어가지 못하고 자진 철회한 것이었다. 거기에 더해 사회주의 운동 세력이 단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명분하에 김복진, 이성태 등이 압력을 넣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 논쟁은 표면상의 해결을 보았다. 그러나 소설 미학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어서 상당 기간에 걸쳐 지속되었다. 김기진 역시 ‘추상적인 개념 설명만으로는 소설이 될 수 없다’는 자신의 입론을 강력하게 견지하여 곧이어 <내용과 표현>을 발표하였고, 같은 문제로 박영희도 <문예비평의 형식파와 마르크스주의>를 통해서 자신의 입론을 마련해나갔다. 김기진의 포기로 인한 박영희의 부전승이었다.[19]
이 논쟁으로 조선프로예맹은 그 지침을 정하고 방향을 설정할 수 있게 되었음은 물론이고 박영희가 이론적인 지도자로 급부상했다. 이에 따라 박영희가 주창한 목적문학론, 혹은 방향전환론에 의해 제2차 방향전환 이전까지 이북만을 위시한 현장 출신의 문인들과 박영희를 위시한 이론가들의 논쟁이 계속되었다.

5.2. 목적의식 논쟁


박영희는 김기진과의 내용 형식 논쟁에서 자기의 주장이 일단 카프에 수용되자 신경향파의 문예관이 문학의 사회적 기능을 상실한 채 ‘소일거리’가 되고 있음을 지적하여 <문예운동의 방향전환>에서 자연발생적인 신경향파 문학을 경제투쟁에서 정치적 의미의 목적의식적 문학으로서의 방향전환을 요구하며, 문학은 특히 부르주아를 비롯한 모든 반동적 의식형태을 폭로함으로서 정치투쟁의 부차적 임무를 맡아야 함을 강조했다. 또 이 '방향전환론' 아래에서 <문예운동의 목적의식론>을 통해서 목적의식을 취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론투쟁의 선행을 주장하면서 즉 신경향파문학에게 적극적인 계급적인 투쟁을 바랐다. 박영희의 이 주장은 조중곤, 이북만, 한식 등의 소장파의 극렬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이북만은 <예술운동의 방향전환은 과연 진정한 방향전환론인가>을 통해

작품행동에만 국한된 운동만으로도 무산계급해방 운동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공상주의자.

라고 말하였다. 이는 박영희의 주장을 '''조직을 무시하고 대중을 도외시한 방향전환론'''이라고 정면으로 배격한 것이었다.
또 조중곤은

현 단계에서는 공산주의 달성에 대한 공리적 선전적 전투술을 쓰면 그만이며, 좌익적 정견발표문도 예술이며 포스터도 예술.

이라고 단언했다. 이 논쟁에서 박영희와 소장파들은 각자의 주장에 대한 작품창작에 대한 구체적 방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문학의 역할과 문학을 정치투쟁의 도구로만 생각하였다고 볼 수 있다.

5.3. 아나키즘 논쟁


프로 문학운동에 있어서 아나키즘 문학론은 프로 문학이 득세하는 와중에 그것을 비판하고 나섰다는 점, 그래서 문학에 대한 본질적 문학가의 태도에 관해 성찰하는 기회를 갖도록 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둘 수 있다. 김화산의<계급예술론의 신전개>는 아나키스트로서의 김화산이 마르크시즘 문학을 공격하는 평론이다. 김화산은 박영희의 소설을 근거로 '''박씨의 說은 예술로 볼 수 없으며 예술로서의 성립조건을 무시하는 것은 선전 포스터나 정견발표문'''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제재에 맞는 새로운 것을 논리적으로 체계화하는데는 실패했고 단지 계급의식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자신의 단견을 제시했을 뿐이다.<뇌동성문예론의 극복>을 통하여 아나키스트는 외부의 강권이 아니라 개성과 자유를 고조한다고 프로 문학을 비판하자 이에 박영희, 윤기정, 한설야, 임화, 조중곤에 의해 반론이 제기되어 논쟁으로 발전되었지만 박영희는 직접적으로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고 '무정부주의적 예언'을 경계하는 어조를 피력할 뿐이었다. 임화는 김화산의 개인성과 자유성에 논리적으로 대응하지 못했으며. 한설야 등의 반격은 김화산의 계급관이 공상이고 허구라고 말하면서 아나키즘에 대한 이론 제시가 없었다는 것을 공박하고 프로 문예운동을 향한 교란책이라는 데에 의견을 같이 했다. 김화산의 아나키스트적 발언은 〈카프〉맹원들에게 의식강화를 촉진시켰고 목적의식을 가지고 방향전환을 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 논쟁으로 아나키스트 계열 문인들은 카프에서 제명된다.'''

5.4. 예술대중화 논쟁


문학대중화 논쟁이라고 칭하기도 하며 대중화 논쟁이라 칭하기도 한다. 김기진, 박영희의 내용 형식 논쟁에서 파생된 감이 없지 않다. 실제로 이 논쟁은 아나키즘 논쟁의 빌미가 되었고 그 여파가 카프의 방향전환 논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 방향전환론은 대중화 논쟁은 단초가 되었다.[20]
그 시작은 1928년 1월 <조선지광>에서 김기진이 <사회의식과정에 순응한 예술>을, 한설야가 <1928년의 대중간의 문예관계는 어떻게 진전될까?>라는 글을 투고하면서였다고 본다. 이 중에서 한설야는 문예운동에서 방향전환론을 전개, 발전시키려면 예술의 대중화가 선결해야 할 문제라는 것을 처음 지적했다.

민중이 어떤 문예를 요구할까? 어떤 문예가 요구되고 동시에 어떤 문예가 나올까하는 대중간의 교호관계를 봐야 한다. 실상 대중은 문예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 다음은 김동환이었다. 김동환은 한설야의 글에 호응하여 <조선지광>1928년 2월호에 투고한 <조춘잡감>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

새끼를 꼬며 읽어도 전후맥락이 다 알리도록(전후맥락을 다 알 수 있도록) 그렇게 쉬운 말로 쓰기로 하자. 프롤레타리아 자신이나 각각이 알아들을 그런 말로. 그런 태도로 써야 할 것이 아닌가.

여기에서 주장하는 것은 쉽게 쓰자는 것만이 아니라 문인만이 아닌 ‘쉽게 써서 대중에게 글을 읽게 할 것인가’ 하는 주제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김동환의 주장에 대해 1928년 5월. 장준석이 <조선지광>에 <왜 우리는 쉽게 쓰지 않으면 안되는가?>라는 제목의 글을 투고했다. 여기에서 장준석은 왜 쉽게 써야 하는지 제대로 논리 전개를 해내지 못했다고 비판하였지만 사실상 ‘왜 예술을 대중화해야 하는가’하는 물음을 던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여기에 이북만이 <사이비 변증론의 배격 - 특히 자칭 변증론자 한설야씨에게>라는 글을 투고함으로써 20년대 후반부터 30년대 초반까지 이어지는 기나긴 대중화 논쟁에 불이 붙었다. 그리고 내용 형식 논쟁에서 어설프게 물러나야 했기에 할 말이 많았던 김기진이 본격적으로 나섰다.
김기진은 <통속소설소고>에서 "통속소설"은 보통 사람이 사회와 인생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견문의 한계를 초월해서는 안되고, 마르크스주의적 이데올로기가 보통 사람의 견문과 지식의 범위 내에서 이루어져야 독서대중에 들어가게 되므로 작품의 보급배부와 선전의 힘이 필요하고 작품 그 자체가 끄는 힘이 있어야 함을 주장했다. 또 <대중소설론>에서 독자의 교양 정도에 따라 대중소설과 프로 소설로 나누어지는데 두 소설은 목적과 정신은 동일하나 내용은 프로 소설은 제재와 문장이 고등하고 논리적이어도 무관하여 노동자, 실업자, 농민의 극소수, 급진적인 청년 학생이 주요대상이고, "대중소설"은 제재와 문장이 평범하고 통속적인 것으로 무지한 농민과 노동자. 부녀자 등을 대상으로 소설을 창작하여야 한다는 것으로써 대중화론을 본격화 시켰다. 또 김기진은 ‘프로시가’ 문제에도 <프로시가의 대중화>를 통해 어떻게 하면 현재의 '프로시가'를 전 대중 속으로 들어가게 할 수 있을까하는 데서 그 원인을 교양의 정도와 관련시켜 무지에 초점을 두어 그들을 위한 시가를 제작하여야 함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김기진의 '대중화론'은 카프의 소장파로부터 비판을 받고 논쟁으로 이어졌다. 특히 임화는<탁류에 향하여>, <김기진 군에게 답함> 등을 통해 형식 등을 문제삼고 "혁명적 원칙의 대담한 왜곡"이라고 비판하면서 또 김기진을 '입으로만 프로를 연호하고 있는 예술지상주의' 라고 비난했다. 결국 볼세비키화 입장에서 선 임화의 비판에 김기진은 <예술의 대중화에 대하여>를 통해 일부는 수긍하고 반성하는 태도를 내비치면서 논란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자신의 이론을 ‘방향수정 없이 전개’하며 자신의 의견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음을 내비쳤다.
김기진과 임화의 논쟁이 일단락된 후, 안막은 <조선프로예술가의 당면의 긴급한 임무>를 통해 볼셰비키 대중화론을 제창했다. 그리고 권환은 <조선예술운동의 당면한 구체적 과정>이라는 글을 통해 안막의 의견을 보충했다. 이 대중화론은 김기진이 주장한 대중화론과는 분명히 다르다. 대중의 흥미나 취미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고난에 찬 삶을 극복하고자 하는 욕구를 자극하는 문학'을 지향하는 것이다.
이들이 노리는 것은 카프를 본격적으로 사회운동단체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었고 이는 어느 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이 논쟁은 당대 식민지 조선의 대중의 대다수가 농민이었으므로 농민문학론을 야기시켰고 30년대의 본격적인 창작방법론과 사실주의 논쟁의 출구를 여는 역할을 하였다.

6. 해체


카프의 제2차 방향전환은 더욱 과격한 사회운동에의 투신을 카프와 기타 사회주의 단체에 요구했다. 한편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파시즘의 광기 속으로 내달려 가던 시기였다. 이에 따라 일본 국내에서도 사회주의 문학단체가 속속 해산당했고, 이는 식민지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따라 카프는 두 차례 체포사건에 휘말리고, 사실상 조직의 이름은 남아있지만 활동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일본은 카프 해산을 종용하였고, 카프 내부에서도 카프를 해산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와중에 1934년 박영희 등이 카프를 탈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21]
결국 카프 해소파와 비해소파간에 논쟁이 벌어졌고, 1935년 임화[22]는 자신의 손으로 카프 해산 신고서를 총독부 관할 경찰서에 제출하였다. 이것으로 10년간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한국 경향문학 운동은 막을 내렸다.

7. 해체 이후


카프 해체 이후 대부분 전향하였지만, 이후에도 리얼리즘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었다. 이에 따라 고발문학론, 풍자문학론, 휴머니즘론 등 다양한 사조와 이론이 소개되고 전개되었다. 하지만 1940년대를 지나면서 전향한 작가들의 대부분은 자의에서든 타의에서든 친일문학의 길을 걸었다. 해방 이후에는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일명 '문건')라는 사회주의계열 예술단체를 결성했다. 그리고 미군정의 탄압이 심화되자 대부분 월북했다.
그렇기 때문에 80년대에만 해도 카프에 대한 연구는, 자칫 잘못하다간 남산이나 갈월동에서 시원하게 국밥 하나 마실수 있는 행위였다.[23] 1980년대말 해금이 되기 전까지의 카프 연구는 주로 '카프에서 전향한 문인들', 즉 카프에 한 때 몸담았다가 전향하면서 사회주의를 부정한(그래서 반공체제의 입맛에 들어맞는) 이들만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카프와 관련된 인물은 적절하게 자체검열했다. 가령, 김남천은 '김X천'이라든지, 임화는 본명인 임인식으로 표기하거나 임X식으로 표기했다.
그리고 80년대 말 해금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오늘날 연구 성과는 대부분 이 시기에 이루어진 연구들이다.[24]

8. 작품


  • 강경애 : <인간문제>
  • 김기진 : <붉은 쥐>, <젊은 이상주의자의 사(死)>
  • 박영희 : <사냥개>, <철야>, <지옥순례>
  • 송영 : <일체면회를 거절하라>
  • 이기영 : <서화(鼠火)>, <고향>
  • 이북명 : <질소비료공장>
  • 임화 : <네거리의 순이>, <우산 받은 요코하마의 부두>, <우리 오빠와 화로>
  • 조명희 : <낙동강>
  • 한설야 : <과도기>, <황혼>

9. 한계 및 의의


일단 까놓고 말해서 재미가 없다. 문학(예술)을 '선전선동의 도구'로 사용한 것과 다를 바가 없으며, 상당히 이데올로기적이다. '기-승-전-혁명전사화' 구조가 많다. 문제는 혁명전사가 되게 하는 사건이 도대체 타당한 이유로 보여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25] 물론 이 시기 그리 주목받지 못했던 당대 노동자나 농민 현실과 문제를 그려내는 데에는 성공적이긴 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이데올로기적이기에 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다소 비현실적이다. 거의 대부분 작품에서 노동자나 농민은 하나로 뭉쳐 단결하며, 결말은 희망차고, 붉다. (...)
이렇게 재미도 없는데,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검열삭제도 매우 많이 당했다. 이는 김기진과 임화가 충돌했을 때, 김기진이 제기한 문제이기도 하다. 선전을 위해 과격하고 직접적 표현을 사용하면 검열삭제 당해서 오히려 제대로 의미전달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 당시에 문제였고, 임화는 이것이 부르주아 문학으로 가는 길이라고 철저히 배격했다.
여기에서 임화가 승리하고 볼세비키 대중화론이 제창되고 보다 더 농민과 노동자의 현실을 그려내는 방향으로 나아갔지만, 현실은...만주사변 등으로 일본의 검열과 탄압이 심화되어 갔다. 그 전에는 그나마 자체 검열로 '사회주의'를 'XX주의'로 처리하면 통과시켜주었지만 30년대부터는 XX조차 못쓰게 했다. 또한 검열 단어가 있으면 해당 문장이나 문단을 전체 삭제시켰다. 그래서 전개-발단은 있는데, 그 이후가 없는 채 끝맺는 경우가 나타났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연극과 영화 분야에 관심을 돌려, 보다 대중에게 다가가고자 했다. 1929년부터 카프는 문학만이 아니라 예술전반으로 그 활동범위를 넓혔고, 이에 따라 극단을 조직하고 영화사를 만드는 등의 활동을 했다. 하지만 검열로 인하여 제대로 활동도 못했고, 오히려 이로 인하여 1, 2차 검거사건이 발생했고 카프 해산이 벌어졌다.
어쨋든 '남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다.'라는 박영희의 말처럼, 카프의 한계를 잘 드러내는 말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들의 존재와 이들이 불러 일으킨 논쟁들은 30~40년대 다양한 사조의 범람을 가져왔고 한국문학의 성장과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본격적이고 전문적인 문학 평론가가 출연했다.

10. 참고


  • 권영민 <한국현대문학사>(민음사)
  • 권영민 <한국계급문학운동사>

[1] Korea Artista Proleta Federacio. 에스페란토 명칭이니 '코아뽀포'로 읽어도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마치 '케이에이피에프'라고 읽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아무도 그렇게 안 읽지만 말이다.[2] 민족해방운동과 관련해서 많은 관심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무슨 '처세 상식,' '시사 상식' 수준으로 하나의 유행처럼 번졌다.[3] 놀랍게도 이 시기 동아일보블라디미르 레닌 사망 이후 추모 기사를 실었으며, 조선일보는 1930년대까지 사회주의적인 논조를 유지했다.[4] 당장 1980년대말까지 이들의 작품은 금서였다. 그리고 북한에서 고위층 인사가 된 이기영이나 홍명희 같은 이들은 아직 해금되지 않았다. (하지만 작품은 출간되고 있다.)[5] 1950~60년대까지 북한문학사에서 카프에 대한 연구는 활발히 이루어졌다. 위가 크신 분의 지도가 없었기에 문제점과 한계가 명확하다고 언급하지만, 지금도 상당히 높은 가치로 인정을 받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위가 크신 분의 지도를 받은 빨치산 문학에 대한 평가가 더 높다. (...) 또한 카프를 이끌었던 주요인물 가운데 임화, 김남천 등 북한에서 숙청당한 인사들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이루어지더라도 그냥 까기 위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또한 박영희, 김기진, 백철 등 전향하여 남한에서 활동한 인물들에 대한 평가가 왜곡되어 이루어져 있거나, 축소평가되고 있다.[6] 오송회 사건. 출옥한 선생님들에게 '오송'이 무엇인가를 물었더니 아무도 오송이 뭔지 몰랐다고 한다.[7] 7차 교육과정 기준.[8] 염군사는 1922년 9월 이적효(李赤曉)·이호(李浩)·김홍파(金紅波)·김두수(金斗洙)·최승일(崔承一)·심훈·김영팔(金永八)·송영(宋影) 등으로 조직된 최초의 프로문화 단체였다. 이 단체의 강령은 “본사는 해방 문화의 연구 및 운동을 목적으로 함”이라 하여 문학에 국한하지 않은 광범한 문화운동을 내세웠는데, 이 단체는 사회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좌익 문학청년 집단이었다.[9] 박영희·안석영·김형원·이익상·김기진·김복진(金復鎭)·이상화·연학년(延鶴年) 등을 중심으로 조직된 무산계급 문학운동의 한 단체였다. ‘PASKYULA’란 명칭은 그들의 두문자(頭文字 : 앞머리글자)를 따서 명명한 것으로, “예술을 위한 예술을 배격하고, 인생을 위한 예술을 건설한다.”는 것이 그들의 공통된 강령이었다. 파스큘라는 <백조> 동인의 일부와 동경 유학생 극단 토월회의 일부 회원이 중심이 된 문학 단체였다.[10] 카프의 창설에 참석하였으나 이듬해 자진탈퇴했다. 이는 중외일보를 통해 조직의 실체를 드러낼 당시에 명단에 없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11] 이 시기 편집자가 박영희였고, 이를 통하여 많은 카프 문인이 등단했다.[12] 기관지가 아니다. 아직 카프의 이름을 명시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려 허가를 받았다. 하지만 3호만에 폐간되었다.[13] 이 이전에는 카프를 언급하는 기사가 없었다. 사실상 이 때 조직이름을 공개한 셈이다.[14] '종교는 아편이다.'라는 공산주의자와 종교의 만남이라 이상하게 보이지만, 1920년대 중반까지 조선에서 사회주의는 아나키즘 등과 뒤엉켜 들어와서 꽤나 포괄적인 사상이었다. 그래서 천도교에서 사회주의자들을 이끌겠다는 시도도 있었다. (...)[15] 조선에서 아예 발간이 금지되었다. 그래서 이를 피하고자 일본에서 발간하여 조선에 들여왔다.[16] 대신 동경을 거점으로 하고 있던 제3전선파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NAPF에게서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17] 그리고 김윤식은 이 논쟁을 두고 프로 문학 내부 지도자끼리의 첫 대립, 김기진의 비판이 프로 문학 전반의 급소에 해당된다는 점, 프로 문예의 방향전환을 준비하는 내적 모순이 표면화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18] 박영희의 글에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 소설다운 소설을 써 내라는 것인지, 계급문학 운동을 제대로 행하기 위해서 소설의 요건을 갖추자는 것인지 모호했다.[19] 하지만 몇 년 후, 박영희는 자신이 김기진을 논박했던 논리 그대로 임화에게 당했다. 그리고 김기진은 1928년에 떠오른 문학대중화 문제에서 자신의 논리를 피력했다.[20] 간단하게 말해서 대중화에 대한 논쟁은 내용 형식논쟁의 주요 쟁점이 예술의 정치투쟁의 무기화였다는 점에서 파생될 수 있었던 것이다. 문예를 어떻게 대중에게 가지고 가서 선전 선동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이다. 즉 무지한 대중을 위해 가장 쉽게 대중이 알아들을 수 있는 초보적 표현방식으로 투쟁의식을 전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21] 박영희 등이 카프 탈퇴서를 먼저 제출했지만, 카프에서 이들을 먼저 제명한 것처럼 처리되었다. (...)[22] 김남천이라는 이야기도 있다.[23] 권영길 선생은 1983년, 자신이 경향문학에 대해 연구한 책자가 검열에 걸려 전량 회수되었던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24] 특히 80년대 학생운동의 분위기와 맞물려서 엄청 활발하게 이루어졌다.[25] 그렇다고 타당하게 써버리면 검열의 문제에 부딪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