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다

 

1. 일반적인 의미
2. 성경 속의 인물
2.1. 개요
2.2. 행적
2.4. 에브라임 부족과의 내전
2.5. 기타


1. 일반적인 의미


1. 옷을 몸에 꿰거나 두르다.
2. 받거나 당하다.

2. 성경 속의 인물



2.1. 개요



히브리어: יפתח (Yiftah, '가 열 것이다.')
구약성경 판관기(공동번역 · 가톨릭)/사사기(개신교)의 등장인물로, 고대 이스라엘의 민족 지도자인 판관이다. 공동번역성서의 표기는 '입다'와 '옙타',[1] 가톨릭 성경에는 '입타', 영어 표기는 '제프사(Jephthah, /ˈdʒɛfθə/)'이다.
본격적인 등장은 11장부터며 후술될 사건으로 인해 기독교인들에게 상당한 임팩트를 주는 인물이다.

2.2. 행적


므낫세 자손 길르앗의 아들[2]로, 당대의 힘세고 강한 전사였다.
하지만 창녀의 소생인 사생아였기 때문에 입다를 싫어한 본처 소생 형제들이 집에서 쫓아냈다. 입다는 돕 땅으로 가서 살았는데, 근방의 싸움 좀 한다는 사내들이 자연스럽게 모여 입다를 따랐다.
입다는 그렇게 건달패 혹은 도적 때의 두령으로 살던 중 길르앗 원로들의 갑작스런 요청을 받았다. 암몬 족속이 쳐들어오니 도와달라는 것. 처음에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아니 나를 미워해서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낼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도와달라는 것이냐?"'''고 따졌지만, "암몬족을 쳐주면 당신을 지도자로 받들어 모시리라고 야훼께 맹세하겠다"는 원로들의 제안을 수락하고 이스라엘 군대[3]의 대장이 되었다.
그리하여 입다는 암몬족 임금에게 사절을 보내 어째서 영토를 침범했는지 따졌으나, 말이 안 통하자 '''"일전에 너희들이 우리더러 자기들 땅에 못 들어오게[4] 해 놓고, 이제 와서 우리가 기껏 이 지역 싹 청소해놓으니까, 지네 땅 침범한 거라며 돌려달라고 우기는 건 무슨 심보냐? 그것도 우리가 그동안 눌러살던 3백년 동안 아무 말 없더니 이제 와서?"''' 하며 선전포고에 가까운 반론을 펼쳤다. 암몬 족 임금은 이 말 또한 귓등으로도 안 들었고, 야훼의 영을 받은 입다는 암몬군의 배후를 쳤다. 그 전에 입다는 길르앗 미스바 지방에서 야훼에게 서원하는데, 내용이 심상치 않다.

만일 하느님께서 저 암몬 군을 제 손에 부쳐주신다면, 암몬 군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 '''제 집 문에서 저를 맞으러 처음 나오는 사람을 야훼께 번제로 바쳐 올리겠습니다.'''[5]

(판관기 11장 30~31절, 공동번역성서)

And Jephthah made a vow to the Lord, and said, “If you will give the Ammonites into my hand, then '''whoever comes out of the doors of my house to meet me,''' when I return victorious from the Ammonites, '''shall be the Lord’s, to be offered up by me as a burnt offering.”'''

(New Revised Standard Version)

votum vovit Domino dicens : Si tradideris filios Ammon in manus meas '''quicumque primus fuerit egressus de foribus domus meae''' mihique occurrerit revertenti cum pace a fillis Ammon '''eum holocaustum offeram Domino.'''

(불가타 성경)

[image]
성경에 따르면 입다는 아로엘에서 민닛 어귀에 이르기까지 스무 성읍을 함락하고 아벨 그라밈까지 진격하여 초토화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입다는 그렇게 승승장구하며 미스바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는데, 손뼉 치고 춤을 추며 나와 입다를 반기는 인물은 바로 '''자신의 외동딸'''이었다. 반전이라면 반전.
고작 집에서 나오는 것이라 해봐야 하인 따위라 생각했지만 결국 자신의 딸을 울면서 야훼에게 바치는 새드 엔딩을 체험하게 된다. 하지만 판관기 저자는 입다가 딸을 번제로 바쳤다는 사실만 기록할 뿐, 입다의 행위 자체에 윤리적 판단은 내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판관기 저자가 입다의 인신제사를 특별히 옹호한다고 볼 수는 없다.

2.3. 인신공양 논란


나름대로 선한 인물로 등장한 입다의 갑작스러운 인신제사 장면은 고금의 많은 종교인들과 신학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정말로 인신공양을 바쳤는지에 대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image]
1. '''입다가 정말로 인신제사를 바쳤음이 분명하다.'''
입다 본인은 짐승이 아닌 인간을 바친다는 것을 충분히 의도했을 가능성이 있다. 31절에서 입다는 '제 집 문에서 저를 맞으러 처음 나오는 사람'를 바친다고 했으므로, 집에서 기르는 짐승을 생각했다면 이렇게 표현했을 가능성은 적다. 게다가 정말로 짐승을 생각한 것이라면 자신의 딸이 나왔을 때 대성통곡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끔찍한 서원을 한 배경에 대해 학자들은 입다가 인신제사를 드리는 문화권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판관기의 배경이 되는 판관 시대의 이스라엘 민족은 인신제사를 지내는 이방 민족들과 교류하면서, 성경에서 우상숭배로 간주하는 그들의 종교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하느님과 이방 신들을 함께 섬기는 경향을 보였는데, 판관기에서는 당시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이방 민족들의 침공에 시달린 이유를 이러한 우상숭배에 대한 하느님의 징계를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입다 본인부터가 그다지 도덕적으로 선한 인물도 아니었다.
다만 이 인신제사설을 받아들일 경우 입다가 굳이 인신제사를 강행한 것에 대해서는 다소 의문이 남는다.
첫째, 흔히 '한 번 서원한 것은 어떤 방법으로도 취소할 수 없다'는 통념이 있는데, '''아무리 맹세에 맹세를 거듭한 서원이라도 율법에서는 취소가 가능했다.''' 즉, 고의적이지 않거나 율법에 대해 무식해서 율법에서 금지하거나 실제로는 마음에도 없는 엉터리 맹세를 한 경우 레위기 5장 4~6절에 근거하여 속죄제로써 어린 양이나 염소를 바치게 되어 있었다. 이스라엘 율법에 명시된 제사 중 하나로 비고의적인 죄에 대한 제사를 의미한다. 제물의 모든 기름을 불사르고, 가죽 등 부산물은 도시 밖으로 나가서 따로 불사른다.
레위기에 있는 다른 율법으로도 딸을 구제할 수 있었는데, 입다는 '''얼마든지 자신의 딸을 대신해서 일정량의 금액을 지불하고 끝낼 수 있었다.''' 입다의 딸이 처녀라는 점을 들어 대략 10대 소녀라고 가정한다면 레위기 27장 2~8절의 구절을 근거로 대속비로 10세겔을 내고, 만일 그 이상의 연령대라면 은 30세겔을 내고 인신제사를 대신할 수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제사법에는 사람을 번제로 드리는 제사가 없었고 구약의 타락한 이방인들을 묘사할 때 우상숭배로 자녀를 번제로 드리는 경우를 언급한다. 한나 역시 자신의 아들인 사무엘을 여호와께 드린다고 서원했으니 이 경우의 '드린다'는 말이 '번제'가 아닌 성전봉사자로 보내는 경우일 수도 있다.
이렇게만 하면 엉터리 맹세를 지키지 않은 것이 용서가 되었다. 즉, 당시 율법과 관행은 그렇게까지 꽉 막힌 체계가 아니었고 나름대로 융통성이 있었다는 얘기다. 이런 좋은 방법이 있는데 왜 입다가 굳이 딸을 희생해서 제사를 드렸을까?
다만 입다의 일화에서 율법을 논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는 있다. 인신제사가 유대교의 율법에 맞지 않는다면 애초에 입다의 서원 자체가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철회되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비율법적인 서원이 버젓이 통과되었다는 것 자체가 당시의 상황이 인신제사도 거리낌없이 허용할 정도로 초율법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6] 참고문서: 가톨릭 백과사전(영문)
실제로 이 당시의 이스라엘에서는 타 문화권과의 교류가 많이 일어났다. 40년 이상 광야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그들이 가나안에 정착하게 되면서 그 지역의 문화와 풍습을 받아들이게 된 것. 이 과정에서 일시적으로나마 인신공양 풍습이 이스라엘에 전래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당시의 시대 자체가 모세와 여호수아 이후 제대로 된 정치적/종교적 지도가의 부재로 인해 종교관과 도덕관 등이 상당히 막장스러워져서 유대교의 율법이 제대로 실행되지 않은 혼란한 시기였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예언자들이 종교개혁을 외치게 된 배경도 이런저런 이유로 유대인들에게 타 문화의 유입이 상당한 수준으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또 사사기 11장 35절에 보면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라도 말한 것으로 봐서는 단지 서원한 것을 무르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여긴 것일 수 있다.
또한 이 당시 아무리 일반인들이 율법을 몰랐다 하더라도 주변 레위인들이나 율법에 빠삭한 분에게 찾아가 자문을 구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입다는 자신의 큰 승리에 대한 서원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이것은 사사기에서 나타나는 사사들의 여호와에 대한 의지로 이민족에게 큰 승리를 거둔 후 실수하고 잘못을 범하는 그런 구조와 일치한다. 물론 입다는 부패하고 타락했다기보다는 비극이라고 봐야 할 듯.
사실 입다가 생각하는 신에 대한 관념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시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인 여호와를 일종의 다른 이방민족들이 자기들만의 신을 섬겼던 것처럼 그런 전쟁신 또는 수호신 쯤으로 여겼을 수도 있다. 분명히 인신공양은 율법에서 죄라고 말하고 있고 레위인들이나 주변인들이 말렸을 것에도 불구하고 강행했다는 사실은,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율법 위에 둔 어찌보면 교만이나 죄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7]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신이 사사들에게 천사나 영을 통해 이것저것 알려주기도 하는데 왜 입다가 인신공양을 할 때에는 신이 그 어떤 계시나 주변인들을 통해서 입다를 막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따진다면 기드온이 죄를 저지를 때 왜 막지 않으셨으며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할 때마다 나타나서 가이드하지 않는가? 따라서 입다의 경우는 명백한 죄이나 비극이며 사사기 시대의 어두운 단면을 시사한다는 것이 가장 타당한 해석이라고 본다.
2. '''인신제사의 제물로 바친 것이 아니라, 딸을 성전에서 평생 처녀로 살며 봉사하게 한 것이다.'''
상술된 주장에 반대하는 이들은 입다가 사람을 정말로 바친다는 것을 의미한 게 아니라, 입다의 딸을 야훼에게 드려서 성전에서 평생 헌신하며 봉사하는 삶을 살게 했으리라고 주장한다. 여성의 서원의 경우 아버지가 임의로 취소시킬 수도 있을 만큼 여성 인권이 존중되지 못했던 당시 시점에서 생각하면, 한 여자의 인생길을 아버지가 정해주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또한, 위에 제시되었지만 사람을 바치기로 한 서원에 대해서는 사람 대신 돈으로 값을 정해서 바치기만 하면 되었다.
너무 당혹스럽고 충격적인 사건이라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적절하다는 주장도 많다. 물론 입다의 딸이 평생 처녀로 살아야 했으며 성전 밖으로 나와 친구들을 만나고 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 삶을 살게 된다는 점에서 이 시나리오 역시 아주 해피 엔딩은 아니다. 그래도 인신제사 시나리오보다는 훨씬 다행스러운 시나리오다.
하지만 이 주장은 내용이 무난해지는 대신 여기저기서 성경의 내용과 충돌하는 문제가 생긴다. 즉, 지나친 확대해석으로 인해 성경의 본뜻을 왜곡할 가능성이 높다.
첫째, 입다는 애초 서원할 때 명백하게 '''"제 집 문에서 저를 맞으러 처음 나오는 사람을 야훼께 번제로 바쳐 올리겠습니다."'''하고 말했다는 점이다. 이스라엘 율법에 명시된 제사 중 하나로 특별한 절기 때 행하며, 제물을 백 퍼센트 완벽하게 불로 태운다. 헌신, 감사 등을 표할 때에도 드리며, 입다의 경우 감사에 대한 번제라고 볼 수 있다. 번제 제물이 타는 연기는 성경에서 곧잘 '향기로운 냄새'라고 표현되는데, 판관기의 이 장면에서는 그런 표현은 커녕 일체의 제사 묘사도 없이 얼렁뚱땅 넘어갔다는 점이 특이하다.
아브라함 역시 아들 이사악을 바로 이 '번제'로 드리려 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아무튼 입다는 명백히 사람을 불에 완전하게 태워 제사를 드리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그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구약성경에서는 인신제사를 금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둘째, 딸과 친구들은 성전 봉사와 같은 무난한 상황이라기보다는 인신제사와 같은 충격적인 상황에 더 어울리게 반응했다. 심지어, 그때 이후부터는 이스라엘에 전통이 생겨서 '''매년 나흘씩 온 이스라엘 처녀들이 입다의 딸을 위해 애곡을 했다.''' 성전 봉사를 위해 딸을 바치는 것은 흔한 일이라는 점에서, 한 민족 전체가 이렇게까지 트라우마에 가깝게 애도하는 상황을 보면, 오히려 정말로 인신제사를 드렸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대체로 성서학자들은 실제 인신공양을 드렸다는 설을 지지하고 있으며 '성전 봉사설'은 주로 개신교 계열의 몇몇 학자들을 통해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사실이 어찌되었든, 입다의 딸에 대해서는 다른 해석도 있다, 성전 봉사설에서 발전된 주장으로, 입다의 딸과 그 친구들은 여성 공동체를 이끌게 되었다는 전승이 있으며, 입다의 딸은 최소한 남성중심의 세계에서 이에 구애되지 않고 살아간, 최초의 유태인 페미니스트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입다의 딸은 어느 남자에 시집가서 남의 집 아낙으로 인생을 마치기보다,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선택한 여성이라는 해석인 것이다. 페미니즘이 성할 때에 그녀는 유태계 페미니스트들의 시조로 받들어졌다. 실제로 비슷한 시기를 다룬 룻기에 보아도 과부인 나오미와 룻은 비슷한 처지의 여성들끼리 함께 거주하던 집단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룻기 4:14, 4:17)

2.4. 에브라임 부족과의 내전


이스라엘 12부족 중 가장 강성한 부족은 요셉의 둘째아들 에브라임의 후손을 자처하는 에브라임 부족으로, 이들은 조상 요셉야곱에게서 장자권을 받은 것을 근거로 다른 부족들을 억압하는 패권적인 모습을 자주 보였다.
선대의 판관 기드온 때에도 에브라임 부족이 자신들의 허가없이 기드온이 미디안족과의 전쟁을 한 것을 문제삼아 기드온을 치러 왔다가 기드온이 "전쟁은 제가 시작했지만 미디안의 두 추장을 사로잡은 것은 에브라임 부족 아니십니까? 그러니 어르신들의 공이 제 공보다 큽니다." 하고 숙여서 내전 없이 물러간 적이 있었는데, 이때 에브라임 부족은 입다에게도 자신들의 허가 없이 암몬과 싸운 것에 대해 협박하며 입다를 무릎꿇리려 들었다.
하지만 소심하게 농사를 짓고 살던 기드온과 달리 위에 나온 것처럼 원래 도적 두목이었고, 게다가 자기 입방정 때문에 귀한 딸을 산제물로 바쳐 속이 뒤집힐 대로 뒤집혀 있었던 입다에게는 협박이 통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내전이 벌어졌다.

입다는 길르앗 전군을 이끌고 에브라임과 싸워 에브라임을 격파하였다. 길르앗 사람들은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는 처지였다. 에브라임에서 도망친 길르앗 놈들, 에브라임과 므나쎄 사람들 속을 떠도는 놈들이라는 말을 들어왔던 것이다.[8]

(판관기 12장 4절, 공동번역성서)

자신들의 세력만 믿고 입만 살아있던 에브라임 부족은 방금 전까지 실전을 치르고 온 길르앗 부족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고, 대패한 에브라임 부족들은 요르단 강을 건너 후퇴하기 위해 나루터로 모였으나 나루터는 이미 길르앗 부족 병력이 점령하고 있었다. 여기서 길르앗 병사들은 에브라임 부족을 가려내기 위해 시험을 한다. 에브라임 부족이 ʃ 발음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고 s로 발음하는 것을 이용한 것. 십볼렛 참조.

길르앗 군은 에브라임 지역의 요르단 강 나루를 차지하고 에브라임 사람이 도망치다가 건네달라고 하면, 에브라임 사람이냐고 묻고 아니라고 하면 '''쉽볼렛'''이라고 말해 보라고 하고 그대로 발음하지 못하고 '''십볼렛'''이라고 하면 잡아서 그 요르단 강 나루턱에서 죽였다. 이렇게 하여 그 때 죽은 에브라임 사람의 수는 사만 이천이나 되었다.

(판관기 12장 5~6절, 공동번역성서)


2.5. 기타


두에-랭스 성경에는 입다의 딸이 등장하는 장면(판관 11,35)에서 다른 판본에는 없는 "Alas!"라는 표현이 있다. 이것은 슬픔과 유감을 나타내는 문예체 단어다.
세인트☆영멘에서는 65화의 나들이 때 이 입다 이야기를 패러디했다. 아이코네 가족들과 주인공들이 바베큐를 하는데, 비둘기 모습으로 내려온 그분이 '번제의 서원은 결코 돌이킬 수 없다. 내 배는 바베큐만을 위함이니 이제 와서 바베큐가 아닌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했다.

[1] 히브리서 11장 32절에서 쓰인 표기다. 그리스어 표기인 Ιεφθάε에서 유래한다.[2] 길르앗이 아버지의 이름일 수도 있지만 판관기 내내 길르앗은 여호수아를 따라 요르단 강을 건너지 않고 요르단 강 동편에 눌러앉은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지파의 일부 등의 집단을 통칭하는 이름으로 등장하므로 길르앗의 아들이란 뜻은 길르앗 부족의 남성이란 의미일 것이다.[3] 통일된 이스라엘이라기보다는 본인을 따르던 도적떼와 므낫세 지파의 군대이다.[4] 출애굽기 시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 지나가게 해달라고 청했으나, 허락도 안해주고 그것도 모자라 군대까지 보낸 일.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역으로 토벌한 것은 물론이요 오히려 그 땅을 차지했다.[5] 사실 야훼의 이름에 대고 맹세하면 안되는데 이놈은 그걸 어겼다. 결국 그 결과는... 하단 참조.[6] 또는 당대에 레위인들조차 다 썩어빠졌고 율법을 아는 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어서 그냥저냥 이방신들의 풍습을 그대로 따랐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러한 해석을 견지할 경우 사사기 당대의 이스라엘이 얼마만큼 막장이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7] 어쩌면 타인의 생명을 경시한 입다가 치뤄야할 잔인함의 대가로도 볼 수 있다.[8] 위 각주에 나온 것처럼 길르앗 사람들은 여호수아를 따라 요르단 강을 건너지 않은 사람들의 후손이어서 요르단 강을 건너 가나안을 차지한 다른 부족에게 천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