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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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경 구약 성경의 2번째 권이다. 창세기의 다음 부분이며, 이후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로 이어진다. 이상의 다섯 기록은 전통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 모세가 저술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므로 "모세오경"으로 부른다. 동시에 모세가 첫 등장하는 책이다.모세가 팔을 바다로 뻗치자, 야훼께서는 밤새도록 거센 바람을 일으켜 바닷물을 뒤로 밀어붙여 바다를 말리셨다. 바다가 갈라지자
이스라엘 백성은 바다 가운데로 마른 땅을 밟고 걸어갔다. 물은 그들 좌우에서 벽이 되어주었다.
14장 21~22절(공동번역성서)
원제가 '탈출'을 의미하기 때문에 한국 천주교에서는 '''탈출기'''라는 명칭을 쓴다. 2005년 이전에는 '''출애급기'''[3] 라고 썼으나, 2005년에 개정된 한국천주교주교회의판 성경에는 영어 성경상 명칭인 Exodus를 그대로 번역한 탈출기를 사용하고 있다.
이 책은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탈출하는 과정, 곧 창세기 마지막에 이집트에 정착한 유대인들이 노예가 되었다가 탈출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어서 출(出)애굽이 되었다. 즉, '''이집트 탈출기'''다. 때문에 이 내용은 쿠란에서도 나온다.[4]
2. 제목 번역 문제
한국 천주교에서는 구약성경 제2권(Liber Exodi)을 중국식 명칭인 ‘出埃及記’를 따라 ‘출애'''급'''기’라고 불러왔다. 그래서 한국 천주교 최초(1959년)의 구약성경인 선종완[5] 라우렌시오 신부의 번역본에도 ‘출애급기’로 되어 있었다. 반면에 한국의 개신교에서는 초창기부터 ‘출애'''굽'''기’라고 일컬어 왔다. 그 유래를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성경 속의 지명 ‘이집트’를 ‘애굽’이라고 부른 데서 시작된 듯하다. 1977년 공동번역 구약이 출판되면서 어찌된 셈인지 이 구약 제2권의 이름이 개신교 측 용어인 ‘출애굽기’로 붙여졌고 1977년부터 무려 40년간 그렇게 불러왔다. 그러다가 1992년부터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구약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해서 2005년 신구약 새 번역 성경이 출판되었는데, [6] 이 한국 천주교 성경에는 ‘출애굽기’를 ‘탈출기’로 이름을 바꿔 놓았다.
3. 줄거리
내용은 창세기 끝부분에서 이어진다. 야곱의 아들들은 이집트 왕국에서 권력을 잡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형제 요셉의 보호 아래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일 강 동쪽 삼각주 지방의 여러 도시에서 번영하며 만족스러운 생활을 했고 가나안의 자기네 고향 땅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이후 43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열두 형제의 자손들과 그들의 직계가족은 야훼가 약속한 대로 커다란 민족으로 성장했다. 이집트 사람들은 그들을 '''히브리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어 파라오[7] 가 여러 명 바뀌었고 마침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파라오가 등극하게 되었다[8] . 히브리인들이 이집트를 배반하고 이집트의 적과 내통하지 않을까 우려한 새 파라오는 히브리인들을 노예로 삼아 비돔과 라암셋의 왕도를 건설하는 데에 강제로 집단동원했다. 이 위험한 이민노동자 집단의 폭발적인 인구 증가를 두려워했던 파라오는 '''히브리인 신생아 남자아기를 모두 나일 강에 빠뜨려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9]
그런 위험한 순간에 한 레위 부부가 아들을 낳았다. 이름은 남편이 아므람, 아내가 요게벳이었다. 이미 딸 미리암과 아들 아론을 둔 이 부부는 갓 태어난 차남이 너무 귀여워서 처음 3개월은 숨어서 길렀다. 하지만 집요한 추적을 견딜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아기를 역청을 바른 갈대바구니에 담아 나일 강가로 떠내려가게 했다. 첫째 미리암은 어린 남동생이 걱정되어 어머니 몰래 갈대밭에 숨어 갈대 바구니를 따라 나섰다. 그렇게 갈대 바구니에 담겨 강물 위를 떠가던 남자아기는 파라오의 여러 왕녀들 중 시녀들과 목욕하러 나일강에 온 한 왕녀가 발견하였다. 왕녀는 갈대바구니에서 우는 남자아기를 가엾게 여겨 그를 양아들로 들이기로 했고 갈대 숲에 숨어있던 미리암은 아기를 돌봐줄 유모로 자신의 어머니를 추천했다. 이렇게 아기는 히브리인 친어머니를 유모로 알고 이집트 왕녀를 자신의 어머니로 두게 되었고 아기가 젖을 뗄 무렵 히브리 여인과 미리암은 아기를 왕녀에게 데리고 갔다. 왕녀는 이 남자아이에게 모세[10] 란 이름을 지어주고 모세를 친아들처럼 돌봐주었다.
모세는 성장하면서 무술과 지혜가 뛰어난 젊은이로 자랐다. 다시 여러 해가 지나 40세의 어른이 된 모세는 공사장의 한 이집트인 감독이 히브리인 노예를 매질하는 것을 보고 분개하며 그를 죽인 다음 그 시체를 모래 속에 감추었다. 그러나 나중에 두 히브리 사람이 싸우는 것을 막으려 하자 그중 하나가 "너가 무엇을 어찌하려고? 우리도 죽이려 하는가?"라는 말을 하자 탄로났음을 알고 자기 행동의 결과를 두려워한 모세는 미디안 땅의 광야로 도망갔다.
이리저리 떠돌다가 이드로란 유목민 족장과 만나게 된 모세는 이드로에게서 히브리인의 역사를 듣게 되고 그의 딸 십보라와 결혼하여 아들까지 두며 다시 40년을 보냈다. 80세가 되던 해, 모세는 호렙 산 근처에서 히브리인들을 구출하라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11] 형 아론과 함께 이집트로 돌아가서 파라오에게 민족의 자유를 요구한다.[12] 파라오는 당연히 거부하고 히브리인 노예들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키는 조치로 대응했다.[13] 이로 인해 일이 풀리기는 커녕 오히려 고통이 더욱 가중되자 히브리인들은 모세 형제를 까면서 화를 내고 원망했고 그들의 원망을 들은 모세는 한동안 상심하지만 야훼의 위로로 마음의 짐을 던다.
이렇게 파라오의 고집이 꺾일 기미가 안보이자 야훼는 그 유명한 ''''10가지 재앙''''을 발동시킨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큰 틀에서 보자면 야훼가 모세와 히브리 사람들을 위해 이집트에 내렸다는 탈출기 속의 재앙은 이집트인들이 자기들의 신들로 인한 괴로움을 당하라는 것으로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이집트의 신들은 무쓸모다''''라는 것을 야훼가 일깨워주려 한 것인데[14] 파라오는 야훼의 경고에 굽히지 않았으며[15] '''그 대가도 고스란히 자신과 자신의 백성들이 치르게 만들었다'''는 것이 탈출기의 기본 줄거리.
최후의 재앙인 '초태생의 몰살'에 대해서 더 언급하자면 히브리인들의 초태생을 보호하기 위해서 야훼는 모세와 아론에게 지시하여 히브리인이 양을 잡아 자신들의 집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발라 이집트인들의 초태생을 모두 죽이는 밤에 재앙이 히브리인들의 집은 넘어가도록 했고, 이것이 유월절의 유래가 되었다. [16] 야훼는 또한 히브리인들이 서둘러 이집트를 떠나도록 하기 위해서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잡은 양의 고기와 함께 식량으로 준비해 두라고 지시했다. 이것은 유태인들의 축제인 파스카(무교절, 無酵節)의 기원이 된다.
파라오는 자기 아들까지 죽자 체념하고 히브리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모두 내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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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 인들은 이집트 동부 삼각주의 여러 도시를 출발하여 시나이 광야지대로 향했다. 그러나 나중에 자신의 결정을 후회한 파라오가 정예 전차부대를 동원[17] 하여 도망치는 히브리인들을 뒤쫓아왔을 때 홍해[18] 가 갈라져[19]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다 밑바닥의 마른 땅을 통과하여 시나이에 도착했다. 거대한 절벽의 계곡처럼 갈라져 있던 바닷물은 히브리인들이 모두 건넌 직후 합쳐지면서 추격하던 이집트 사람들을 집어삼켰다고 한다.[20]
여기까지가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탈출기의 내용이다. 뒤에는 세가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을 받는 장면[21] 과 히브리 백성들의 금송아지 숭배사건, 성막을 만드는 것(정확히는 성막 만드는 법)으로 끝이 난다.
4. 해석
전반부에서는 노예로 얻어 맞고 살지만 화려하고 풍요로운 이집트 지역을 떠나서, 팔레스타인 근처 광야 지역을 배경으로 힘겹게 사는 내용이 주로 나오며, 이에 따른 갈등이 번번히 등장한다. 잘 먹고 잘 사는 노예가 될 것이냐 가난한 자유민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랄까.
이집트 지역에 10가지 재앙이 내리는 장면[22] , 바다를 쩍하고 가르는 장면이나[23] 고기를 달라 하니 엄청난 메추라기(원문은 자고새) 떼와 만나[24] 가 나타나 포식하게 되는 장면, 물이 부족하자 바위를 때려 부수고 샘이 나온다든가[25][26] , 십계명을 받기 위해 뇌우가 쏟아지는 산으로 모세가 올라가는 장면이 나오는 등 묘사적으로 볼거리가 풍부하다.
하지만 20장 후로는 성전 건설이나 제사장 옷에 대한 규격이나 히브리인의 법에 관한 내용만 나와서, 일종의 법전이 되며 때문에 기독교도들도 읽기 매우 힘들어하는 부분이 된다. 이는 레위기까지 이어지고, 민수기와 신명기에도 율법에 대한 내용이 재등장한다. 성경 통독을 한 번쯤 결심한 사람에게 '''첫 번째이자 최대 고비'''. 흔히들 이 부분에서 그만두거나, 바로 요한 묵시록을 읽는다.[27] 그러나 탈출기 이후에 나오는 율법에 관한 내용들은 이후의 구약들과 신약성경을 읽는데 분명 도움이 된다. 판관기에서 기드온의 에봇과 드라빔[28] 문제라던지, 복음서에서 회막이 갈라진 것의 함의,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처벌 문제에 대한 예수의 태도, 슬로보핫 여인들의 상속 과정에 터잡은 예수의 족보에 대한 해석론 등 중요한 떡밥마다 구약 시대의 관념이 신약의 기록 당시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압제자 파라오로부터 자유를 찾아 떠나는 내용이라는 점, 민주주의 사회에 건전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현대인들에게 거부감이 없는 데다가 내용 자체가 상당히 드라마틱하며 몰입감을 주어 서구권에선 탈출기를 주제로 한 수많은 영화 (십계 등)와 애니메이션이 제작되었다.
5. 역사적·신학적 연구
5.1. 연구의 이유
근대 역사학과 고고학의 발달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와 성경의 내용에 대한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어디까지나 종교적 경전이며 초현실적인 과장과 기적들로 가득한 탈출기를 가지고 뭔 역사 연구를 다 하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시기 근동 문서는 죄다 이렇다.''' 이집트, 히타이트,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등 어느 나라를 보든 역사서술법은 구약의 서술법과 비슷하다. 딱히 탈출기만의 문제가 아니다.
예를 들어 이집트 기록 중에 유명한 투트모스 3세의 카르나크 비문을 보면 '''"아문 신이 파라오의 군대의 앞에 서서 팔을 뻗어 그들을 돕는다"와 같은 식의 표현이 수두룩하게 나온다.''' 당시 이 지역 사료들 자체가 반쯤은 초현실적으로 쓰여져 있기에, 구약성경과 그 안에 있는 출애굽기 역시 학계에서 엄연한 고대 사료로 인정받는다. 한국의 경우에는 단군 신화를 들 수 있다.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었다고 하지만 역사학계에서나 문학적으로 해석해보면 곰을 자신들의 조상신으로 섬겼던 부족과 호랑이를 자신들의 조상신으로 섬겼던 부족으로 해석한다. 고구려 주몽 설화나 신라 박혁거세 설화 등 자신들의 위엄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과장하는 것은 당시에는 동서양을 가리지 않았다.
고대 세계에서 역사를 기록했던 저자들에게는 우리에게 익숙한 '객관적인 사실을 기록해 후대에 전한다'는 관념 자체가 없었다. 고대 근동에서 역사서술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왕이나 신의 위업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역사 기록 자체가 종교적 텍스트를 겸했다는 뜻이다. 이러한 목적에서 벗어나서 우리가 생각하는 역사서의 개념이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훨씬 후대인 헤로도토스, 투키디데스부터다. 하지만 이조차도 현대적 관점의 역사서는 아니다.
이 대목에서 그럼 박씨전도 사료냐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으나, 박씨전은 저자가 역사적 사실은 사실대로 인정하는 상태에서 엄연히 소설로 쓴 것이고, 탈출기 같은 문서는 후대 히브리인에게 선조들의 역사로 알리기 위한 의도로 쓰여졌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정말 진지하게 역사적 목적으로 썼다는 말. 게다가 그 '소설' 박씨전 또한 병자호란이라는 엄연히 역사적으로 실제했던 사건을 당대 조선인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증언하고 있는, 사상사(思想史) · 문화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사료다. 하물며 탈출기는 소설을 쓰겠다는 목적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상, 문화사를 넘어서는 부분에까지 자료로 쓸 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오늘날의 우리가 탈출기를 당대인처럼 받아들여야 한단 논리로 이어지지 않는다. 더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며 치밀한 연구가 필요한 것은 옳다.'''
그리고 이집트의 역사조차도 '모두' 유물이나 유적으로 교차 검증된 것은 아니다. 팔레스타인 일대의 유물은 이집트 일대의 유물과는 보존 상황 자체가 다르다. 그리고 애초에 '고대사'는 자료가 택도 없이 부족한 영역이다. 고대에서 현대까지 세월의 간극은 많은 사료들을 소실시킨 것 못지 않게, 살아남은 사료들도 변형시켰다. 당연히 우리가 보는 원사료들은 다 사본들이고, 사본들은 필사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오류가 발생하게 된다. 특히 숫자와 관련된 것들은 가장 취약한 정보들이라 필사 과정에서 무수하게 변형되었다. 우리가 교양 수준에서 아는 부분만 교차검증이 돼서 대중들에게 알려진 거지, 그보다 훨씬 많은 영역들은 아직도 논란거리다. 그 논란거리 중에 하나가 바로 탈출기이고.
고대 로마나 중국처럼 잘나가고 대제국을 이뤘던 국가들에 대한 자료는 '그나마' 많이 남아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역시 부족한 부분이 많다. 이집트 역시 한때 잘나갔던 국가이니만큼 그 시대 그 지역치고는 자료가 좀 남아있는 편이지만 많은 제한된 사료와 여러 가지 가능한 증거들을 총동원하여 '추측'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추측의 영역은 학계에서 갑론을박이 오가고 학자마다 의견이 다르다. 탈출기 또한 그런 영역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단락에서 말하는 건 신화적인 묘사를 이유로 그 나머지 부분에 대한 신뢰도를 모두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수천 년 전에 문명이 시작된 이집트 기록에 비하면, 탈출기는 그 기록의 분량과 검증에서 어마어마하게 뒤쳐질 수밖에 없다.
5.2.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 문제
탈출기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스라엘 민족'(히브리인)이 이집트를 탈출해서 가나안 지역으로 이동했다는 이야기다. 즉, '''탈출기는 히브리 즉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 민족'은 과연 언제 형성된 것일까? 성경 외의 자료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최초로 언급되는 문헌은 기원전 13세기가 끝나기 직전 람세스 2세의 아들인 파라오 메르넵타가 가나안을 원정한 사실을 기록한 비석이다. 이 비석의 내용에 따르면 이집트 원정군이 가나안에 침공하여 이스라엘이라고 불린 민족을 대량 학살했고 파라오는 "'''이스라엘 민족의 후예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공언하였다.
이 자랑에는 과장이 섞여 있겠지만 그 시기에 이스라엘이라고 불린 특정 민족집단이 이미 가나안에 살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문제는 이들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언제 이스라엘 민족이 되었냐 하는 것이다. 정말 이집트에서 이주해온 집단인가? 아니면 가나안 토착 민족인가? 그것도 아니면 여러 집단이 섞인 것인가?왕들이 엎드려 외친다: “자비를 베푸소서”
아홉개의 활 아래 머리를 들 수 있는 자는 없다.
테헤누(Tehenu)에는 쇠락이, 하티에는 평화가 왔다.
가나안은 약탈당하고 각종 재난을 맞이하였다.
아스겔론(Ashkelon)은 정복되었다.
게제르(Gezer)는 함락되었다.
야노암(Yanoam)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황폐해졌다. 이스라엘의 후예는 이제 없다.
탈출기 속에는 여러 시대의 역사적, 지리적 사실들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에 이집트 탈출이 벌어졌을 단 하나의 특정한 시대를 가려내기가 어렵다. 고대에는 이집트로 가는 이민의 물결이 주기적으로 끝없이 계속되었다. 중기 청동기 시대에 힉소스 족이 삼각주 지역을 지배한 구체적인 사실도 있다. 또한 람세스 시대의 이집트와 관련된 몇 가지 요소를 연상시키는 내용들이 성경에 등장하고[29] , 이러한 내용들이 탈출기와 일정한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집트 역사의 특정한 시대에 이집트 탈출이 일어났다고까지 콕 찍어 주는 것은 아니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할 '전기설과 후기설' 참고.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탈출기에 묘사된 기본적인 상황, 즉 야곱의 가족들이 정착한 것처럼 이민 집단이 가나안에서 이집트로 내려와 이집트 동쪽 국경의 삼각주 지역에 정착한 현상은 고고학적인 발견과 역사기록 문서에 의해서 충분히 확인된다. 초기 역사시대 이후 고대세계에서, 가뭄과 기근 혹은 전쟁으로 생활이 견디기 어렵거나 힘들어질 때마다 가나안인들에게 이집트는 안전한 피난처로 생각되었다. [30] 고고학 연구 결과 청동기 시대에 가나안 남부 지방에서 이집트 삼각주 지역으로 이주한 셈족은 여러 차례에 걸쳐서 대규모 집단을 이루어 이동했음이 밝혀졌으며, 그 집단마다 이주 동기 역시 다양했고 이주한 뒤 성공한 정도에도 큰 차이가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농사지을 땅이 없어서 이집트 공공 건축사업의 노동자로 고용되었다. 문제는 '''이 셈족이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이집트학 학자인 도널드 레드퍼드는 힉소스 족이 이집트를 점령한 사실과 그들이 삼각주에서 무력에 의해서 추방된 대규모 사건들의 반향이 여러 세기 동안 전승되어 가나안 주민들의 공통적인 기억의 핵심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집트에 정착하여 삼각주의 지배권을 장악한 후 나중에 쫓겨나 고향땅으로 되돌아온 이 가나안 출신 식민 통치자들에 관한 각종 이야기가, 후기 청동기 시대에 이집트가 가나안에 대한 통치의 고삐를 더욱 조일 당시 가나안인들의 단결과 저항의 구심점 역할을 했을 수 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민족적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민족적 정복설[31] , 평화이주설[32] , 농민 반란설[33] 등이 제기되었는데, 최근에는 평화이주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후기 청동기시대(기원전 1500~1200년)와 초기 철기시대(기원전 1200~1000년)에 걸쳐 있다고 추정되는 고대 가나안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면, 팔레스타인 북쪽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향하는 산간 지대에서 고고학적 출토물이 나왔음이 확인된다. 고고학자들은 이 중앙 산간 지대에, 기원전 1250년 이후 갑자기 생긴, 성곽이 없는 몇 백 개의 작은 마을들이 있었음을 밝혀냈다. 팔레스타인의 초기 청동기 시대에 중앙 산간 지대의 인구는 초기 청동기시대에는 1만 2,000명, 12세기는 5만 5,000명, 200년 후에는 7만 5,000명이나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인구가 대폭 늘어났던 현상을 해당 지역의 작은 유목민들이 정착한 것으로만 설명하기는 어려우며, 결국 12세기경에 가나안 외부로부터 대규모 이주가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이들 중 일부가 이집트에서 나온 노예들과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만들었다고 보인다.
즉 가나안의 도시 군주 국가들에게서 억압받고 도망 나온 다양한 하층 민중들이 팔레스타인의 중앙산악지대에 거주할 때, 사회적 하층민에 있던 '하비루(Habiru)'[34] 들이 이집트에서 노예로부터 탈출해 해방하여 나왔고, 광야와 가나안 남부의 사막지역에서 그들의 신으로 야훼를 선택한 후에 이 두 집단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대략 1,200년경 가나안에 정착했다는 가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유대인으로 고대 로마의 역사학자였던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살았던 시절에는 아예 "'''이집트에서 살던 히브리인들 사이에 나병이 돌아서 파라오가 이집트인들에게까지 나병이 전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 히브리인들을 이집트 바깥으로 추방시킨 것'''"이 탈출기의 진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던 모양인데,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이에 대해서 직접 '아피온에 대하여 반박함'이라는 제목의 글을 써서 반박하기도 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항목 참조.
5.3.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문화적 연결성
히브리인들이 정말 이집트 치하에서 노예 생활을 했다면, 히브리인들의 문화에 자연히 이집트적 경향이 강하게 발견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어느 정도인지의 여부가 탈출 사건의 진실성을 말하는데 근거로 작용할 수 있다.[35]
일단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문화적 영향을 (강하냐 약하냐와는 별개로) 받았는가 받았지 않았는가하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확실하게 "받았다"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유대교에서 창조주와 인간이 맺은 계약의 증거로 여기는 할례를 보자. 헤로도토스는 이집트의 풍속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했다.
즉 헤로도토스는 시리아와 페니키아 사람들의 할례 풍습을 명백히 이집트에서 찾고 있다. 또한 이스라엘과 페니키아는 상당히 많은 문화적 요소를 공유하는 이웃이기도 하며, 지리적으로는 이스라엘을 시리아 지역과 세트로 묶기도 한다. 굳이 이런 민족적 근연 관계를 말하지 않더라도, 근동 지방의 할례 풍습이 이집트에서 나왔음은 (적어도 헤로도토스의 주장을 신뢰한다면) 부정할 수 없다.[36] 또한 일부 성 윤리 역시도 이집트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다른 나라 사람들은 — 이집트인의 풍속을 배운 자는 예외로 하고 — 성기를 타고난 그대로 두는데, 이집트인은 할례를 한다.
(중략)
페니키아인 및 팔레스티나의 시리아인은 그 풍속을 이집트인으로부터 배웠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고, 테르모돈 및 파르테니오스 두 강변에 사는 시리아인 및 그들과 인접해 사는 마크로네스인은 최근에 이르러서야 이것을 콜키아인으로부터 배웠다고 말하고 있다. 요컨대 세계에서 할례를 행하는 것은 위의 민족들뿐이고, 게다가 그 방법도 명백히 이집트와 똑같다.
<역사> 2권 中
고대 근동은 성적으로 굉장히 문란한 사회였는데(심지어 문란하다고 알려진 고대 그리스인의 눈에도 이건 좀 아니다 싶을 정도로), 이스라엘은 특이하게도 여기에 대해 매우 엄격한 편이다. 이를테면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적지 않은 경우 신전의 신녀는 매춘부를 겸하기도 했고, 창세기의 유다 역시도 며느리가 신전 매춘부인 줄 알고 착각하여 관계를 맺은 적이 있다.[37] 반면 이스라엘 왕국은 성적으로 굉장히 엄격했으며, 레위기에는 다음과 같은 규정을 두고 있다.성역 내에서는 여자와 관계를 갖지 못하며, 또한 여자와 관계한 뒤에 목욕을 하지 않은 자는 성역에 들어올 수 없다는 등의 계율을 정한 것도 이집트인이 처음이다. 왜냐하면 이집트인과 그리스인 이외의 민족은 거의 모두 성역 내에서 여자와 관계를 갖는가 하면, 관계를 한 뒤에 목욕도 하지 않고 성역에 들어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도 딴 짐승들과 다름없다는 사고 방식에서 비롯된다. 그 주장에 따르면 모든 짐승과 새가 신전이나 경내에서 교미하고 있는 것을 늘 볼 수 있는데, 그것이 신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라면 짐승들이라 해도 그러한 짓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그러한 구실하에 그들이 하고 있는 행위를 좋다고 보지 않는다.
<역사> 2권 中
또한 학자에 따라서는 이스라엘에 이집트가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39] 특히 구약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인들의 인명은 그 어원을 이집트어에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가령, 이집트 탈출 이야기의 등장인물 중 한 명인 비느하스(아론의 손자/개역개정판 표기 기준. [40] )의 어원은 이집트 이름 Pa-nehasi에서 왔다는 게 중론이다.[41] 레위의 자손 므라리, 한참 후대인 사무엘서의 등장인물인 홉니 등의 이름도 이집트어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여겨지며, '모세'는 매우 흔한 이집트식 이름이다.[42] 게다가 구약의 이스라엘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정의할 때 "이집트인들이 하듯이 ...하면 안 된다"라며 제약을 거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직접적인 영향이었든 반면교사로서였든 이스라엘에 대한 이집트의 영향력이 매우 컸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다.[43] 더욱이, (이하의 '전기설과 후기설'에서 살펴볼) 아케나톤의 일신교 개혁이 이스라엘의 종교문화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누구든지 고름이 나왔을 경우에는 온몸을 물에 씻어야 한다. 그는 저녁때가 되어야 부정을 벗는다. 고름이 묻은 옷과 가죽은 모두 물에 빨아야 한다. 그것은 저녁 때가 되어야 부정을 벗는다.
여인이 남자와 한자리에 들었으면, 두 사람은 목욕을 해야 한다. 그들은 저녁 때가 되어야 부정을 벗는다.
레위기 15장 16-18절[38]
5.4. 탈출기의 시기 문제
5.4.1. 일반론
고고학과 과학적 연구 성과들을 보면 그 당시 오랜 시간 동안 이집트에서 기상이변에 따른 여러 재해들이 발생했고, 이것이 해충의 대량발생이나 전염병 발발, 적조 현상 등의 '여호와의 징벌'로 기억되었던 것이 아닌가 여기고 있다. 이런 역사적 배경에 의해 모이고 모인 '이주의 기억'들이 구전되며 쌓이고 쌓이다가 모세라는 아이콘에 정리되어 하나의 이집트 탈출 이야기가 만들어졌다고 본다.
이러한 이야기가 최종적으로 완성된 시기는 위에서도 살펴보았듯 바빌론 포로기(BC 6세기, 바빌론 유수)에서 페르시아 치하 시기(BC 5세기)로 짐작된다. 포로로 끌려가고, 강대한 외세의 압제[44] 를 받아야 했던 민족 수난의 시기에 "우리 민족은 야훼에게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민족주의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러한 문헌이 쓰여진 것은 자연스럽다. 성경에는 "주님이 이집트에서 친히 인도해 내신 우리 민족"과 같은 표현이 반복적으로 나온다.#
그 외에도 모세 휘하의 이집트 탈출 행렬을 추격하던 파라오의 아들이 갈대밭에서 탈출 행렬의 호위 병력들에게 기습을 당해 죽은 사건이 홍해로 와전되면서 모세가 바다를 가른 사건과 이집트의 장자들이 죽은 사건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5.4.2. 전기설과 후기설
유대인들의 출애굽, 즉 이집트 탈출의 연대에 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대별하면 BC 15세기설과 BC 13세기설 2가지가 있는데 각각 전기설, 후기설로 불린다.
'''전기설'''은 열왕기상 6장 1절에 묘사된 후대의 연대 계산에 의한 것으로, 아멘호테프 2세 치하설이 대표적이다. 열왕기상 6장 1절에는 솔로몬 왕이 '그의 치세 제4년', 즉 '이집트 탈출 후 제480년'에 성전을 짓기 시작했다고 되어 있다. 솔로몬 직후 르호보암(남유다 왕국)과 여로보암(북이스라엘 왕국)에 의해 왕국이 분열된 시기가 아마도 BC 931년~930년경으로 추정되며, 열왕기상 11장 43절에 따르면 솔로몬은 40년 동안 통치한 것으로 되어 있으므로, 역산하면 솔로몬은 BC 971~970년부터 BC 931~930년까지 통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솔로몬왕의 치세 제4년'은 BC 968~967년경이 되며, 만약 그것이 이집트 탈출 후 480년에 해당한다면 출애굽은 BC 1448~1447년경의 일이 된다.[45] 순서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ㄱ. BC 1448~1447: 이집트 탈출
ㄴ. BC 971~970: 솔로몬 즉위
ㄷ. BC 968~967: 솔로몬 치세 제4년, 성전 건축 시작
ㄹ. BC 931~930: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 분열
ㄹ로부터 솔로몬의 40년 재위 기간을 고려하여 ㄴ을 상정할 수 있고, ㄴ 기준으로 4년째인 ㄷ과 ㄱ의 간극이 480년이라고 했으니 ㄱ의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전기설의 정황적 근거를 살펴보면 이렇다. 이전에 요셉이 출세하고 유대인들이 대거 이주했을 때의 이집트 왕조가 제15왕조인 이민족 힉소스 왕조였으리라는 것. 그게 맞다면 이집트인들이 힉소스를 몰아낸 이후 남아 있는 유대인들을 힉소스에 대한 일종의 '''부역자'''로 간주했을 가능성은 높아진다. [46] 유대인들이 이집트의 노예가 된 것 역시 일종의 보복 차원이었을지 모른다. 전기설은 여기에서 시작되는 셈인데, 이 해석에 따르면 이집트 탈출 시기는 (위에서 살펴보았듯) 대략 투트모세 3세 내지 아멘호테프 2세가 된다. 두 파라오 모두 힉소스 왕조를 몰아내고 이집트를 재통일한 제18왕조의 파라오들이다.
'''후기설'''은 탈출기 1장 11절의 '유대인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켜 파라오의 곡식을 저장해 둘 비돔과 라암셋(람세스) 성을 세웠다'라는 기록에 근거한 것으로, 람세스 2세 치하 설이 대표적이다.[47] 1920년대 이후까지만 해도 위에서 언급한 열왕기상 6장 1절이나, 이집트의 카이로 남쪽 약 300km에 있는 '텔 엘 아마르나'에서 발견된 아마르나 문서(BC 14세기)에 기록된 '하비루(≒히브리)의 활동, 영국의 J.가스댕에 의한 예리코의 발굴 조사 등을 들어 대체로 전기설(기원전 15세기설)을 신뢰하였으나, 최근의 학자들은 이 후기설(기원전 13세기설)을 더 많이 따르고 있다. 후기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성경에 '라암셋(람세스)'라는 지명이 나오는 것을 볼 때 모세의 출생과 출애굽 사건이 제19왕조의 세티 1세와 그의 아들 람세스 2세 시대에 일어난 게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히브리인들이 강제로 동원되어 건설되었다는 라암셋(람세스) 성의 이름은 파라오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인데[48] 전기설이 주장하는 제18왕조 시기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람세스'라는 이름을 따서 이런 성이 언급될 수는 없다.[49] 따라서 이집트 탈출은 제18왕조가 아니라 제19왕조 시대에 있었던 일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모세는 람세스 2세 시기인 BC 1290년 전후에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한 것이 되며, 이에 대해 당시 이집트를 둘러싸고 있었던 국제관계의 정황상 람세스 2세가 자발적으로 유대인들을 이집트에서 떠나도록 허락한 것이라는 설이 유력시되고 있다. 그러나 BC 13세기의 어느 해를 이집트 탈출의 기점으로 잡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가령 W.F.올브라이트는 BC 13세기초로 추정하고 있으나 T.J.미크는 BC 13세기 말로 추정하고 있다.
후기설의 정황적 근거는 다음과 같다. 파라오 아케나톤이, 아몬 라를 중심으로 한 종래의 다신교 대신 아톤 신을 내세운 일신교를 주장하였기에 이스라엘 민족은 덩달아 번영을 누렸다.[50] 그러나 아케나톤의 실각 이후 재등장한 아몬 라 신앙에 의해 이스라엘 민족은 박해를 받았고, 결국 19왕조의 람세스 2세 때 탈출했다는 건데, 전기설의 근거인 열왕기상 6장 1절의 '480년' 기록에 어긋난다는 약점이 있다. 단, 성경, 특히 구약에선 숫자를 정확히 명시하기보단 수비학적인 비유를 더 자주 썼던 관행이 있기에, 저 '480년'이라는 기간이 실제 기간이 아닐 수도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즉 480이라는 수는 성서에서 완전수로 여겨지는 12와 40의 곱인바, 12는 이스라엘 열두 부족을 의미하는 수[51] 이고 40은 한 세대(30년)를 포괄하는, 온전한 한 시대를 의미한다.[52] 이 해석에 따르자면 이집트 탈출 이후 480년 만에 성전을 짓기 시작했다는 성서 기록은 이스라엘 '''열두''' 부족에게, 노예생활로부터 성전 건축으로 완전히 '''새로운 시대(40년)'''가 시작되었다는 뜻이지 정확히 480년이라는 실제 숫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 후기설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마냥 부정할 순 없는 이유다.
후기설의 또다른 근거는 위에서 언급된 파라오 메르넵타 비문이다. 이 비문에서 '이스라엘'은 도시나 국가가 아닌 부족으로 표기되고 있다. 이 말은 이 비문이 쓰여졌던 BC 13세기에는 이스라엘이 아직 가나안에 온전히 정착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도 후기설을 뒷받침하는 정황 증거가 된다.[53] 전기설대로 BC 15세기에 출애굽이 이루어졌다면 애초에 국가를 이루었어야 한다는 것.[54]
여하간 전기설과 후기설 모두 떡밥으로는 양질이라서 인기가 있다. 각각의 설을 대표하는 파라오인 아멘호테프 2세와 람세스 2세의 장자는 모두 일찍 죽었다는 것 역시 떡밥 중 하나. 물론 람세스 2세는 당시로서는 비정상적으로 장수하여 8~90대까지 살았기 때문에, 그 당시 평균 수명과 평균 결혼 연령을 생각해 보면 아들이 아버지보다 일찍 죽었다고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55] 한편, 아멘호테프 2세의 다음대 파라오인 투트모세 4세는 그의 장자가 아니다. 보통은 장자가 파라오가 됨을 생각해 보면 뭔가 어마어마한 떡밥거리. [56]
그러나 한편으로는 연구가 더해짐에 따라 후기설의 허점이 많이 드러나는 상황. 후기설의 근거 중 하나인 '라암셋(람세스)' 성의 명칭은, 당시에 흔했다.[57] 제18왕조의 투트모세 3세와 그의 아들 아멘호테프 2세가 실제 역사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을 점령한 시기 역시 전기설의 기간과 묘하게 일치한다. 또한 창세기 말미 부분에서 요셉에 대해 묘사하는 내용들 중 일부는 후기설과는 전혀 맞지 않고 전기설의 관행과 더욱 관련이 있다. 즉 서열 제2위인 요셉 총리에게 금사슬을 드리우는 건 한참 후인, 앗시리아에게서 막 독립한 이집트 시절[58] 의 이야기지만, 자체적으로 수레를 몰 수 있도록 허용하는 부분은 힉소스 시절 이후부터의 관습이므로 전기설로 설명이 가능하다. 그러나 셈족들이 이집트 왕자들과 매우 동등한,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이집트식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가,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집트에서 그대로 관직을 받으며 이집트인으로서 살아갔던 사실은 전기설의 시기도 후기설의 시기도 아닌 훨씬 이전인 중왕국 때에도 있었다는 것이 새로운 난점. 물론 전기설의 치명적 단점은 투트모세 3세와 아멘호테프 2세 때는 이집트 제18왕조의 최전성기로 메기도 전투에서 광야와 가나안 지역에 대한 지배가 공고해진 때라 과연 히브리인들이 가나안으로 탈출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는 점도 있다. [59] 게다가 이때 이후 19왕조 때인 메르넵타 때까지 이스라엘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난점.[60] 즉 성경의 이집트 관련 기록에는 멀리는 중왕국 시대 이집트부터 가까이는 앗시리아 이후 이집트 시절까지의 몇 백 년 넘는 시대상이 한정된 본문 안에 나와있기 때문에 정확한 연대를 추정하기에는 이래저래 난점이 많다. 애초에 성경의 기록 자체가 장구한 시대를 따라 전해내려져 오며 많은 수정과 가필을 거쳤을 뿐만 아니라, '일반론'에서 보았듯 중층적인 성격이 있으므로 해석이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그렇기에 이집트 탈출의 시기를 확정하는 것 자체는 오히려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문제일 수도 있다. 위 '일반론'에서도 언급한 내용이지만, 성서학자들이 주장하듯이 "몇몇 부족들이나 사람들이 이집트에서 시나이 반도로 탈출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다수의 이집트 문서들도 그러한 탈출을 저지하려 했다는 기록들을 남겼다."[61][62] 그중 몇몇 드라마틱한 탈출 이야기가 출애굽기의 모티브가 되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즉 출애굽기의 탈출 이야기는 오랜 시기에 걸친 수차례의 탈출과 관련된 기억이 나중에 이스라엘을 구성하게 된 여러 부족들에게 독립적으로 전승되다가 이후 하나의 탈출 사건으로 종합 편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따라서 전기설의 근거가 되는 시대적 정황과 후기설의 근거가 되는 정황이 탈출기에 공존하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성경 내 파라오에 대해서 중요한 또한가지 사실은 출애굽기에 파라오가 2명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모세가 성장기를 보내고 미디안으로 피신해 있던 기간 중에 재위한 선대 파라오와 모세가 히브리인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할때 재위한 후대 파라오이다. 이중에 선대 파라오는 모세가 감독관을 죽였다는걸 알고 모세를 죽이려 했고 모세가 이 파라오가 죽기까지 오랜 세월 미디안에 있어야 했을 정도로 강경했던 인물인 반면 후대 파라오는 모세가 대화를 시도해볼만하다고 여길 정도로 선대 파라오보다 온건한 인물이었던걸로 보인다.[63] 때문에 이 두 파라오의 성격을 비교해보는것도 성경과 이집트사를 교차비교하는데 써볼만한 요소이다. 후기설을 토대로 이점을 고려해보면 이집트사에서도 강력한 위상을 구축하고 모세가 미디안에서 때를 기다리다 늙어버릴 정도로 재위기간이 길었던 람세스 2세가 선대 파라오에 근접해보인다. 특히나 람세스 2세는 토목공사를 자주 벌인걸로도 유명하기에 출애굽기 초반 모세가 탄생하던 무렵에 묘사된 파라오의 모습과도 잘 맞아떨어진다.
5.5. 10가지 재앙 문제
'''10가지 재앙 문서 참조.'''
5.6. 이집트의 노예제 문제
탈출기 초반부의 유대인들이 노예로 혹사당하는 부분이 과장되었을 거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당시 이집트에서의 건설은 나일강의 범람으로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농민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뉴딜정책의 일종이었는데 그것을 노예에 의한 혹사로 왜곡시켰다는 것. 단, 히브리인들이 건축한 것은 피라미드가 아니라 도시였고 이 때는 피라미드가 지어지던 고왕국, 중왕국 시대로부터 수백년이 흐른 뒤였기 때문에 피라미드 건축에 대한 기록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다. 거기다가 위의 전기설에 따르면 소위 힉소스 앞잡이들에 대한 보복 차원도 되므로. 이방인 집단인 하비루에 대한 대우가 이집트인과 같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한편, 먹고 사는 것 자체는 오히려 이집트 시절이 좋았던 것 같다. 민수기에서는 만나가 지긋지긋하다며 불평하는 구절에서 이집트에 있을 때는 생선, 오이, 참외[64] , 부추, 파, 마늘 같은 온갖 먹거리가 공짜였는데 이집트 나가면서 개고생한다는 식으로 불평한다. 심지어 만나 전에는 이집트에 있을 때는 고기라도 먹을 수 있었고 나름 먹고 살았는데 우리를 죽이려 하냐 라는 걸로 봐서는 나름 대우는 받은 것 같다. 애당초 고대 이집트에서는 노예에 대한 개념이 신왕국 시절이 되어서야 제대로 들어선 것도 있고, 그마저도 다소 애매하여 보통의 임금 노동자와 다를 바 없는 대우를 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생각해보면 딱히 이상한 것은 아니다. [65]
혹은 '''2등 시민 대우''' 때문에 사실상 노예라는 표현을 썼다는 해석도 있다. 위에서 나온 성경 속 내용들을 종합해보자면 노예 노동력의 비중이 그리 크지 않았던 이집트 사회에서 일단 제도적으로는 히브리인들도 이집트의 시민들이긴 하였으나, 사실상 이집트인들에게 받는 대우 자체가 노예나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 위에서 나왔듯이 이집트에서 오히려 먹을거리들이 풍족했다는 점과 그럼에도 노예라는 표현과 거기에 걸맞는 차별대우라는 상반된 면모를 보면 2등 시민이라는 해석도 충분히 말이 된다. 인종차별이라는 것은 고대에도 존재했기 때문. 더군다나 원문에 쓰인 표현 "에벧(עבד)"[66] 은 노예제의 노예신분 뿐만 아니라 한국어의 "종", 영어의 "servant" 처럼 지배 받는 상태를 지칭할 때 두루 쓰이는 단어이며, 보통 한국어 성경들에서도 "종"으로 번역하는데, 이집트에서 속민으로서 지배층의 갈굼을 받는 처지를 두고 "이집트 종살이"라고 표현해도 딱히 이상할 것은 없다.
당시 힉소스인의 왕좌가 막 들어선 때였다는 추측을 종합하였을 때, 소수 힉소스 민족으로 이루어진 정부가 당시 수가 늘어나던 히브리인들을 경계하여 제재했다는, 즉 학살과 차별과 노예 대우가 있었으나 오랫동안이어지지 않았다는 설도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만 당연히 충분한 기록이 없는 이 시대의 일은 의견이 분분하다.
5.7. 현재 학계의 중론
이집트 탈출의 전설은 순전히 역사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순전히 문학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 둘의 분리할 수 없는 혼합물이며, 우리가 지금 '다큐드라마'라고 부르는 것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67]
1970, 80년대에 시작된 미니멀리스트 학자들[68] 의 공격은 기존 올브라이트가 세운 가설, 즉 출애굽기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믿을 만한 역사적 사실이라는 가정을 효과적으로 허물었다. 현재에 와서, 일부 근본주의자들을 제외하면 이집트 탈출에 대한 성경 본문을 글자 그대로의 역사적 사건을 묘사한 문서로 보는 학자들은 거의 없다.[69] 성경의 역사성을 가장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맥시멀리스트 학자들도 성경 본문만으로는 이집트 탈출과 관련된 역사 서술에 필수적인 특정한 시간과 연대를 확정할수 없다고 인정하고 있다. 물론 모든 학자들이 탈출기는 아무런 역사적 가치가 없다는 미니멀리스트의 주장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대다수의 학자들은 탈출기의 성경 본문이 역사적 사실을 문자 그대로 반영한다는 주장과, 전혀 반영하지 않는 후대의 창작에 불과하다는 두 극단적인 주장의 중간 어디쯤에 있다.'''어린 시절 감탄을 불러일으켰던 신성한 이야기의 아름다운 이미지를 추억으로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우리 중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중에 이집트로 내려간 요셉과 이집트에 내린 열 가지 재앙, 모세의 지휘 아래 이루어진 탈출, 발을 적시지 않고 홍해를 건넌 사건, 시나이 산과 십계명, 약속의 땅 정복, 여호수아가 태양을 멈추게 하고 제리코의 성벽을 나팔 소리로 무너뜨린 이야기 등이 있다. 위대한 서사시, 유대인 역사의 영웅시대를 구성하는 이 일련의 이야기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와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충분한 개연성이 있고 역사적이며 어림잡아 연대를 정할 수 있는 사건들이 이 전설의 외투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학자는 오늘날 흔치 않다.'''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이스라엘)에게서 기원한 일부 부족들이 이집트에 들어간 것과 요셉이 파라오의 왕실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한 것은 힉소스 중간기(기원전 1684~1567년)에 아주 잘 들어맞을 것이다. 학자 대부분은 출애굽이 람세스 2세의 치세인 기원전 1260년경에 일어난 것으로 추정한다. '''시나이 사막에 오래 거주하는 동안 모세라는 이집트 이름을 지닌 천재적인 인물이 아직 다신교적 성향이 있는 이 부족들로 하여금 유일신을 숭배하도록 인도했다는 사실을 의심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우주적인 신에 관한 계시를 받은 적이 있는데, 이 신이 바로 야훼다. 훨씬 나중에 무함마드가 이와 비슷한 일을 하여 성공을 거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나안 정착에 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없지만, 이 정착은 갑작스러운 정복이라기보다는 느리고 힘겹게 한 부족씩 이루어진 침투로서 거의 한 세기 동안 띄엄띄엄 이어진다.
-조르주 루(Georges Roux), 《메소포타미아의 역사 II》(La Mésopotamie), 김유기 옮김 (서울: 한국문화사, 2013), 65-66쪽
따라서 고대 이스라엘 역사를 연구하는 현대 학계의 대다수 학자들은,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히브리인들이 대규모로 엑소더스를 하여 광야를 방랑했다는 이야기의 역사성은 입증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인들의 대부분은 이집트 출신이 아닌 팔레스타인 토착민들이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많은 학자들은 이후 이스라엘 역사에 등장하는 이집트 탈출의 기억[70] 은 상당한 진실성을 가지고 있어, 쉽게 부정될 수 없다고 본다.
이러한 정보들은 탈출기의 내용이 문자 그대로의 사실이라고 입증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나 초기 이스라엘을 구성한 이들 중 이집트에서 탈출해온 이들이 일부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71] 이러한 소수 집단이 이집트를 탈출했으며, 이들의 기억이 이후 성경 전승의 일부가 되었을 가능성은 회의적인 학자들도 완전히 부정하지 않는다. [72]
5.8. 기타 의견
캐런 암스트롱은 그녀의 저서 <축의 시대>에서 아예 출애굽기의 사건 자체를 부정한다.[73] 이는 당시 이스라엘 지역이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극심한 분열과 혼란을 겪고 있었기 때문인데, 그중 한 부족이 기존의 낡은 가나안 문화와의 작별을 선언하고 다른 부족과 차별되는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하여 출애굽기의 서사를 만들어 냈고, 이것이 이후 성경 편찬 때에 다른 이야기와 섞여 들어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모세라는 인물이 타나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압도적인데 과연 이 인물의 생애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그의 출신 이야기 자체를 각색해 내는 것이 가능하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한편 모세가 건넌 바다가 과연 홍해인가에 대한 의문도 있다. 성경 원문에는 '얌 수프'(Yam Suph)라 되어 있는데, 오늘날 학자들은 이를 '붉은 바다'보다는 '갈대 바다'로 번역하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이때 이 '갈대 바다'의 유력한 후보는 지중해를 코앞에 둔 이집트 북부의 만잘라 호(بحيرة المنزلة)이다. 이 호수는 수심이 얕아서 바람이 거세면 호숫물이 일시적으로 모두 날아가 버리고 그 밑의 땅이 드러나는데, 이것이 바로 모세가 행한 기적이라는 것이다. 이 가설을 수용할 시 아라비아 반도 쪽으로 멀리 돌아가는 모세의 이동 경로 문제도 해결된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이 가설을 다뤘다.#
또 다른 설로는 출애굽 경로가 통상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다른 사우디아라비아를 거쳐서 갔다는 설이 있다[74] . 성경 고고학자인 론 와이어트 박사와 사우디아라비아 왕립 한방병원 주치의를 맡았던 김승학 박사가 주장하는 설로,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증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