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리 술탄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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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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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다나 왕조 멸망 후에 인도는 혼란기에 접어든다. 혼란기 중 이어진 이슬람 왕조[3] 의 침입 이후에 북인도에 세워진 다섯 개의 델리에 수도를 둔 투르크계 혹은 아프간계(또는 이란계) 이슬람 왕조. 16세기들어 인도 서북지역에서 일어난 무굴 제국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
이들은 남인도의 힌두교 왕국들과 대립하며 인도의 중세의 대미를 장식하였다. 뛰어난 건축물들로 유명하며, 노예 왕조 시기에 건립된 쿠트브 미나르가 이슬람의 인도 지배의 상징물로 유명하다.
2. 역사
델리 술탄 왕조의 역사는 하나의 왕조로 이어진 역사가 아니다. 이름은 그대로 델리를 사용했지만 다스리는 지배층의 가문은 달랐다. 이들 왕조는 노예 왕조 (1206 – 1290), 할지 왕조 (1290 – 1320), 투글루크 왕조 (1320 –1414), 사이이드 왕조 (1414 – 1451), 로디 왕조 (1451 – 1526)로 이어진다.
2.1. 노예 왕조 (1206 ~ 1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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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툽 미나르
고르 왕조의 무함마드가 암살당하자 가즈니에는 노예 출신의 얄두즈가 그리고 인도지역에는 쿠트브 우딘 아이바크가 각각 술탄이 되어 그 뒤를 잇게 된다. 야망에 불탔던 얄두즈는 델리 지역에도 눈독을 들이게 되고 지배권을 주장하며 펀자브를 공격하게 된다. 하지만 아이바크 술탄은 이를 막은 것은 물론 오히려 역공으로 가즈니를 빼앗게 된다. 그러나 가즈니의 주민들의 반란으로 아이바크는 이 지역에서 물러나게 되고, 이후 아이바크는 순수하게 인도의 술탄이 되어 중앙아시아에서 세력을 펼치던 이슬람 왕국의 정치권에서 독립한다. 이에 델리 술탄 왕조는 최초의 독자적인 이슬람 왕국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참고로 맘루크 왕조라고도 하는데 이는 이집트에 존재하던 동명 왕조와는 전혀 다르다.[4] 구분을 위해서 아이바크 왕조라고 불리기도 한다. 자세한건 해당 문서 참조.
2.2. 할지 왕조 (1290 ~ 1320)
노예 왕조시절 델리 술탄 왕조는 튀르크계가 주류였고 할지족들을 비롯한 타 민족들은 비주류로 차별을 받기도 하였다. 할지인들은 발반의 비(非)튀르크계에 대한 차별 정책으로 델리에서 공정한 대우를 받지 못하자 대부분 벵골이나 비하르 지역으로 이주하게 된다. 한편 군인으로 복무하는 사람들은 몽골 제국의 침입에 대비하여 대부분 서북지역에 배치되었었다. 역시나 할지족들에 대한 차별은 존재했고 이에 대해 많은 불만을 품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던 중 1286년, 발반이 죽고 후계자 문제로 인하여 튀르크계 귀족들 사이에서 내분이 발생하자 이 틈을 타 1290년 잘랄 웃딘 할지가 노예 왕조를 멸망시키고는 왕위를 차지하여 할지 왕조를 세운다.
할지 왕조는 발반과 달리 아프가니스탄계열이나 타 인도계 이슬람인들에게 높은 관직을 제공하는 등 이전 노예 왕조와는 보다 관용적인 정책을 내세우게 된다. 기존의 튀르크계 귀족들에게도 똑같은 대우를 하는 등 폭넓은 등용정책으로 잘랄 웃딘은 델리 술탄 왕조의 여러 민족들에게 환심을 사게 된다. 그가 1290년에 왕위에 오른 뒤 사망하는 년도인 1296년까지 6년간의 재위기간 동안 발반의 가혹한 정책과는 달리 백성들의 자발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완화정책을 실시한 것이다. 당시 대다수의 인도인들은 이슬람보다는 힌두교를 신봉하고 있었는데 잘랄 웃딘은 이들에게도 관용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런 관용정책에 대해 불만을 품는 무슬림들도 존재하였고 대표적인 인물로 잘랄 웃딘의 조카이자 양아들이던 알라 웃딘 할지가 있었다. 아와드의 총독이었던 알라 웃딘은 잘랄 웃딘의 관용정책에 반발하였는데, 잘랄 웃딘이 카라를 방문하던 중 그를 살해하게 된다. 그는 결국 1296년 스스로 술탄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를 반대하는 세력은 당연히 존재하였고 몇 차례 반란들이 일어나게 된다. 하지만 알라 웃딘은 그들을 제압하고 완전히 왕권을 장악하게 된다. 권력을 쥐어지게 된 알라 웃딘은 자신의 양아버지 잘라 웃딘과는 달리 강력하고 무자비한 통치를 행하게 된다. 반란을 꾀하는 자들에게는 자신의 가족이라도 가차 없이 처형시켰다. 그는 또한 잘랄 웃딘 시절에 델리에 정착하며 살고 있던 몽골인들을 대량으로 살육하기도 하였다. 구자라트지역에서 일어난 반란에는 반란군뿐만 아니라 그들의 처자식들까지도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또한 알라 웃딘은 귀족들에게 제공되는 모든 특혜들을 폐지시킨다. 거기다 반란의 음모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목적으로 귀족들 사이의 연회를 금지시키고 결혼 또한 자신의 허가 없이는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귀족들 사이에 스파이까지 심어둬서 그들의 사생활을 감시하도록 까지 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와 같은 생활들이 나날이 이어지게 되어 귀족들은 도저히 반란을 일으킬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독재 방책들은 임시방편의 수준밖에 될 수 없었고 이는 결국 그가 죽으면서 국가에 커다란 위험을 초래하는 원인이 된다.
이후인 1320년, 마지막 군주인 쿠스라우 술탄이 즉위했을 때 이러한 통치에 대한 불만은 극에 다르게 되고 결국 튀르크계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이들은 할지 왕조를 멸망시키고 투글루크 왕조를 세우게 된다.
2.3. 투글루크 왕조 (1320 ~ 1414)
투글루크 왕조의 첫 번째 술탄 기야스 웃딘은 이전 할지 왕조의 무자비한 통치에 반발한 튀르크계 출신 귀족으로 1320년 할지 왕조의 후스로 술탄을 무찌르고 자신이 술탄의 자리에 오르게 되어 투글루크 왕조를 세우게 된다.
투글루크의 2대 술탄 무함마드 빈 투글라크는 인도 대제국을 건설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남인도 정벌을 위해 수도를 다울라바트로 옮기게 되는데 이는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하게 되고 결국 1340년 다시 델리로 돌아오게 된다. 그래도 무함마드 술탄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남인도 정벌에는 성공한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반란이 일어나서 지방의 총독들은 중앙 정부의 강력한 도움으로 진압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무함마드는 페르시아나 중국쪽으로 방향을 틀게 되는데 연이은 반란으로 실패한다. 지속적인 반란으로 결국 바흐마니 술탄국, 자운푸르 술탄국, 벵갈 술탄국, 구자라트 술탄국, 말와 술탄국, 비자야나가르 왕국, 메와르, 물탄, 신드, 곤드와나 등등 여러 국가들이 독립하게 된다. 무함마드 술탄은 1351년 신드지역의 반란을 진압하러 갔다가 그곳 반란군에 의해 사망하게 된다.
1398년, 티무르의 몽골군이 델리를 침입한다. 이때 투글라크 왕조는 매우 큰 타격을 입게 되고 점차 멸망의 길로 빠져들게 된다.
1414년, 티무르의 도움으로 독립을 선언했던 물탄의 지배자 키즈르 칸이 델리를 점령하게 되면서 투글루크 왕조는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
2.4. 사이이드 왕조 (1414 ~ 1451)
1414년, 물탄의 지배자 키주르 칸은 쇠약해질대로 쇠약해진 투글라크 왕조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사이이드 왕조를 세운다. 비록 사이이드 왕조가 투글루크에 이어 델리의 지배국이 되지만 이미 여러 지역들이 독립한 상태여서 그들의 지배 영역은 이전만 못했다. 델리 주변만을 겨우 다스릴 수 있었을 뿐이다.
당시 펀자브 지역에서 아프가니스탄계의 로디족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통치자였던 바흐룰 로디는 펀자브 전 지역을 장악하고 말와 술탄국의 공격을 받고 있던 사이이드 왕조의 도움 요청을 받고 델리로 입성하게 된다. 그때 사이이드 왕조의 술탄이었던 알라우딘 알람 샤는 도저히 왕국을 이끌어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1451년 바훌 로디에게 술탄의 지위를 양위하게 된다.
2.5. 로디 왕조 (1451 ~ 1526)
로디족은 본디 아프가니스탄에 있던 아프간 민족으로 15세기에 이르러 펀자브 지역으로 진출하기 시작한다. 당시 펀자브 지역에서 그들은 서로 세력을 장악하기 위해 다투었고 결과적으로 바훌 로디가 승리하게 된다. 그는 이후 델리로 진출하여 델리 술탄 왕조의 마지막 왕조인 로디 왕조를 세우게 된다. 자세한건 로디 왕조 문서를 참조.
2.6. 수르 왕조
로디 왕조를 몰아낸 무굴 제국을 일시 축출하고 세워진 셰르 샤 수르의 인도 아프간 왕조이다. 세르 샤 사후 다시 돌아온 무굴 제국에게 멸망된다. 간혹 델리 술탄조의 한 왕조로 취급한다. 자세한건 수르 제국 참조.
3. 정치
12세기 말경 북인도 지역에서 투르크인들에 의해 세워진 왕조는 점차 강력한 힘을 가진 중앙집권적 국가 형태로 변모했다. 그후 15세기경까지 노예 왕조, 할지 왕조, 투글라크 왕조로 이어져 내려온 델리 술탄 왕조 시대는 점차 붕괴되면서 몇 개의 독립국가 형태로 남게 된다. 그러나 술탄의 행정 조직은 여전히 강한 힘을 발휘하였으며 무굴 제국시대까지 영향을 끼친다.
비록 인도 내에 있는 투르크계 술탄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바그다드에 있는 아바스 왕조 칼리프의 충성스러운 대리인이라고 선언하긴 했다만, 당시 아바스 왕조는 그 권위가 많이 약해진 상태였다. 이는 칼리프 그 자체를 형식적으로 이슬람 세계의 일부라는 사실을 확인할 뿐이고 실질적으로는 자신들이 정치, 사법, 군사의 모든 권한을 누리며 다스리는 지역들의 안전을 직접적으로 사용하여 책임졌다.
델리 술탄 왕조의 왕위 계승은 보통 그 후손이 물려받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장자가 그 지위를 이어가진다는 법칙은 없었다. 따라서 모든 아들들이 똑같이 술탄의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었고 실제로 몇몇은 장자가 아닌 다른자가 술탄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심지어 노예 왕조의 일투트미쉬의 경우 후계자로 아들이 아닌 딸이었던 라지야를 지목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내용은 노예 왕조문서를 참조. 거기다 술탄이 혼자서 그 후계자를 지목할 수도 없었고 귀족들의 동의가 필요했다. 그래서 술탄들은 지위를 성공적으로 계승시키기 위해서 군대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물론 그걸 유지시키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술탄들의 암살은 빈번하게 이루어졌으며, 여성으로 술탄의 자리에 오른 라지야 술타나 또한 재위 4년 만에 암살당한다.
술탄들은 보통 자신이 임명한 재상들과 함께 정사를 펼쳐나갔다. 그러나 재상들의 수는 일정하지 않았고 행정체계는 13세기 말경이 돼서야 확립되어진다. 행정 조직에 있어서 핵심은 와지르였다. 초기에 와지르는 장군을 뜻했는데 14세기에 이르면서 재정업무의 전문가로 성격이 변질되어 세입을 담당하는 분야에서 주로 일했다. 무함마드 투글루크는 재정분야의 조직에 관심을 기울여 원정을 나갈 때에도 당시 널리 신망받는 와자르인 크와자 자한을 반드시 수도 남겨두었다.
와지르 다음으로 중요한 부서는 국방을 담당하는 다완 이 아르즈 였으며 이 부서의 장을 아리즈 이 마마릴크라고 불렀다. 하지만 군대의 총사령관은 아리즈가 아니라 술탄 자신이 직접 맡았다. 그렇지 않으면 군대가 자신을 배반하고 쿠데타를 일으킬 위험성이 컸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이 국방부서를 처음으로 독립시킨 것은 할지왕조 때였다. 이 밖에도 종교적인 문제를 다루는 다완 이 리살라트가 있었고 그들의 수장은 사법부의 수장도 같이 맡았다. 그들은 이슬람의 율법인 샤리라에 근거한 법을 만들어 모든 무슬림들이 실행하도록 했다. 그에 반해 힌두교에 대해선 촌락과 도시의 경우를 따로 나누고 각 계급의 우두머리들에 의해 제정된 자신들의 법에 따르도록 했다.
튀르크인들은 정복한 지역을 튀르크계 귀족이 이끄는 이크타스라는 몇 개의 집단으로 나누었다. 후에 현이 되는 이크타스는 무크티스라는 독립적인 법을 제정하고 토지세를 받아 그것으로 관리들의 봉급을 지급하는 등 모든 업무들을 독자적으로 시행했다. 그들의 결집력은 중앙 정부의 힘에 반비례했다.
4. 사회
델리 술탄 왕조 시대의 일상인들의 삶은 생각보다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다. 주로 왕궁 사건들에 대한 기록들이 넘치는데 아무래도 당시 정치상황들이 워낙 이리저리 급변해서 사학기록들은 그쪽으로 쏠린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4세기에 인도를 방문하여 무함마드 투글루크의 궁정에서 8년간 머물며 인도 전역을 돌아다닌 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이븐 바투타이다. 이븐 바투타는 당시 상황에 대해 매우 귀중한 기록들을 남겨 놓았다. 그는 당시 델리 술탄 왕조 지방들의 산물을 일일이 열거했고, 땅이 매우 비옥하여 평균적으로 2번씩 작물을 수확했으며 쌀은 일년 삼모작을 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그는 또한 참깨, 사탕수수, 면화 등이 생산되어 촌락 산업의 근간이 되었다고 했다.
대부분의 평민들은 농업에 종사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상업의 발달이 있어 도시가 성장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븐 바투타의 기록에 의하면 델리는 동부 이슬람 사회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였으며 다울라바트 역시 델리 못지않은 지역으로 인도 북부와 남부의 교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 밖에 서북지역으로 라호르와 물탄, 동부에는 카라와 아크나우티, 서부는 안힐와라 캄바이 등 중요한 도시들이 성장한다. 델리 술탄 왕조 시대에는 이들 중요 도시를 거점으로 인도 전 지역에서 활발한 교역이 일어나 지방의 경제가 크게 활성화 되었다.
당시 외국 무역의 주도권은 주로 아랍인들이 잡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인도 무역상들을 제압하지는 못했다.[5] 인도에서 생산된 직물은 직조술의 발달로 페르시아나 홍해지역으로 수출되었고 이 품목들은 중국의 비단보다도 훌륭한 상품으로 인정받기도 하였다. 그 가운데 타밀인과 구자라트인들이 활발한 대외무역 활동을 했으며 북인도와의 연근해 무역은 자이나교도들이 거의 독점했었다.
델리 술탄 왕조 시대에는 이슬람의 세력이 인도를 지배했었지만 그렇다고 인도의 중심 중교인 힌두교를 변화시키는데는 실패했다. 일부는 이슬람으로 개종했을지언정 전체적인 사회에서는 여전히 브라만이 중심이 되는 카스트제도가 유지되고 있었다. 거기다 사회 내에서 여성의 지위 또한 변한 것이 없다. 여성은 여전히 조혼을 하고 남편에게 헌신하는 것을 최상의 의무로 여겼으며 어려서는 아버지에게 커서는 남편에게 늙어서는 아들에게 귀속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파혼이나 이혼은 몸에 불치병이 있다든가 큰 장애가 생겼다든가 하는 특수한 경우에만 허용되었다. 당연히 여자들은 재혼도 불가능했다. 남편이 사망한 경우 함께 화장하는 사티 제도에서마저 부인의 미덕으로 존속했을 정도였다. 여기다가 이슬람의 영향으로 여성들은 더더욱 남성에게 의존하는 위치로 전락한다.
델리 술탄 왕조시대의 이슬람 사회는 주로 종족과 인종을 중심을 나뉘어 있었다. 그래서 투르크인, 이란인, 아프가니스탄인, 인도인이 서로 결혼하는 경우는 정말 드물었다. 거기다 힌두교와 이슬람간의 결혼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6]
5. 파생된 국가 목록
[1] Ṭughlāq. 투글러크, 투글루크로도 불린다. 본문에서는 투글루크로 서술.[2] 힌디어와 우르두어로 분화[3] 우마이야, 가즈나, 고르 왕조 등[4] 얄두즈가 다스리던 왕조와 이라크에 존재했던 또 다른 동명 왕조도 있다. 역시 전혀 다른 왕조이다.[5] 그 유명한 중국 상인들도 인도 상인들 상대로 당해내지 못한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6] 특히 결혼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사회적인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힌두교도들은 이슬람교를 혐오하며 무슬림들을 수드라 취급했으니 이루어질 리가 없다. 근현대에도 이 종교들간의 분쟁은 정말 엄청났었는데 하물며 그 옛날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