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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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前 태평양 돌핀스, 현대 유니콘스의 투수, 現 KIA 타이거즈 1군 투수코치. 선수 시절 등번호는 28번. 은퇴 이후 그가 달았던 28번은 사실상 '''영구결번'''급으로 취급되었으며, 히어로즈로 재창단 되기까지 단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2]
은퇴 후에는 현대 유니콘스, 넥센 히어로즈, 두산 베어스에서 1군과 2군을 오가며 투수코치를 역임했고 2014년부터 kt wiz의 투수코치를 맡고 있다.[3]
통산 75승 54패 142세이브 ERA 2.56의 성적을 올렸다. 공식 분류기준인 1000이닝 이상 투구한 투수 중 그보다 통산 평균자책점이 낮은 선수는 국보급 투수 '''선동열'''과 무쇠팔 '''최동원'''밖에 없다. 선발로 나서건 마무리로 나서건 항상 든든한 선수였으나, 대개 마무리로 많이 언급된다.[4] 본인의 전체 선수 통산 기록에서도 선발보다 마무리 쪽이 더 월등히 높다. 통산 세이브 순위는 전체 8위다.[5]
2. 선수 시절
2.1. 아마추어 시절
야구 명문팀으로 유명한 군산상고 출신이였으나 원광대학교 시절[6] 그만큼까지 그저 그런 선수로 프로에 대한 욕심은 없었고 실업야구 리그로 가서 '''취직하며 소박한 인생을 살고자 했었다'''고 한다. 물론 그렇다고 그가 아주 별 볼 일 없는 투수였던 것은 아니다. 큰 키에서 내리꽂는 패스트볼이 워낙 강력했기 때문에 타자들의 배트를 곧잘 부러뜨린다는 소문이 지역에 널리 퍼졌다고 한다. 다만 문제는 그놈의 제구력. 긁히는 날은 제대로 포수 미트에 뻥뻥 꽂혔지만 그렇지 않은 날은 마음 먹은대로 공이 가지 않아 스스로 경기를 말아먹던 투수였다. 그야말로 미완의 대기, 조련되지 않은 야생마였던 셈.
다만 제대로 보여준 성과가 없었기에 호남 연고팀 해태 타이거즈의 지명을 받지 못했고 대신 투수난에 시달렸던 태평양 돌핀스가 1989년 신인드래프트에서 2차 2순위 지명을 하며 생각에도 없던 인천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7]
2.2. 태평양 돌핀스 시절, 인천 소방서장 등극
박정현-최창호와 함께 신인 트로이카[8] 를 형성하며 11승 4패의 성적을 기록, 태평양의 플레이오프 진출에 큰 역할을 했다.[9]
데뷔 첫 해 38경기 11승4패 6세이브를 거둔 이후에도 한동안 선발투수로 활동했지만, 신인시절을 넘어서는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다.[10]
흔히들 데뷔 시즌인 1989년 정명원이 태평양 2선발이었다고 알고 있으나 기록을 보면 거의 스윙맨이다. 38경기 중 선발등판 횟수는 18회에 불과하며, 38경기(당시 5위) 6세이브(5위)에 138이닝을 기록했다.[11] 박정현과 최창호가 선발로 혹사당하고 정명원은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혹사당했다는 것이다. 즉 전천후.[12] 게다가 정명원의 6세이브는 당시 팀 내 최다였다.
그러다가 91년에 부활해, 132이닝을 던지며, 12승6패 14세이브라는 다소 황당한 성적을 기록했다. 참고로 이 시기 정명원은 선발로 고작 5번 만을 나왔다. 7승은 불펜승으로 챙긴 셈. 롤코를 타다가 92, 93년은 부상을 당해 얼마 뛰지도 못 했는데, 93년 시즌이 끝나고 나서 1994년 스프링캠프 때 보직을 마무리로 바꾸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아무래도 선발로는 더 이상 가망이 없다 생각했는지, 91년의 활약을 보고 나서 마무리로 보직이 변경된 듯.
하지만, 93년 팀이 88년 이후 간만에 꼴찌를 하면서 팬들이 감독 차에 펑크를 내거나 선수들 차에 파손을 하는 기행을 일삼았는데
그러나 신임 감독으로 부임한 정동진 감독은 차라리 부상으로 신음한 선수들을 무리하게 기용하는 투수진을 박살낸 감독을 고려하여 아픈 투수들이나 타자들을 재활과 수술시켜 구단과 팬들을 위해 기다리는 것으로 정했다. 감독은 롯데에서 은퇴하고 두문불출 하던 옛 제자였던 김시진을 영입하는 초강수를 뒀고 태평양에서 은퇴한 김재박을 주루코치 및 수석코치로 기용하였다.
정명원은 1994년 본격적인 마무리 첫 해, 4승 2패 40세이브 ERA 1.36으로 투수 부문 골든 글러브를 받았다. '''이는 종전 선동열의 최다 세이브인 31세이브를 뛰어넘는 것이자, KBO 리그 최초의 40세이브 돌파 기록이다.''' 최소한 세이브 부문에서는 선동열보다 나은 투수가 있다고 생각하게 한 최초의 선수. 이후 오승환이 47세이브로 아시아 신기록을 기록하긴 했지만[13] 철저한 1이닝 마무리였던 오승환과 달리, 이 시즌 정명원이 거둔 성적은 50경기에서 105⅔이닝을 던지며 거둔 평균 2이닝 마무리였기 때문에 이 때 정명원의 포스는 가히 전성기의 오승환 그 이상을 연상해도 될 정도로 압도적이면서 타 팀의 타자들에게는 통곡의 벽 그 자체였다.
참고로 정명원 이후에도 정말로 수많은 마무리들이 있었지만 단일 시즌 40세이브는 오로지 정명원을 제하면 오직 3명만 기록했다. 진필중, 오승환 그리고 손승락. 그 정도로 달성하기 힘든 대기록이다. 괜찮은 구속을 가지고 있는 선수들이 마무리로만 가면 얼마 못 가서 불을 질러대는 걸 생각해 보면... 보통의 선수들은 10세이브도 힘들어했던 건 사실.[14]
이 차량은 그 당시 핫한 신차였던 쏘나타 II이며 친형인 교사 정상원 씨가 사용하였다.
올스타전에 출전해 3이닝 퍼펙트 투구를 보이며 (서군이 졌는데도) 미스터 올스타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는 1985년 김시진과 함께 투수가 미스터 올스타에 선정된 유이한 사례다.
이후 태평양 돌핀스가 현대그룹에 인수되어 현대 유니콘스가 되자 창단멤버가 된다.[15]
2.3. 현대 유니콘스 시절
1996년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최초이자 유일무이한 '''한국시리즈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 사실 정명원은 그해 마무리 투수였는데, 포시에 돌입하자 마무리 상황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많이 보여 코치들의 신임을 잃은 상태였다. 게다가 연이은 접전으로 현대의 자랑거리였던 투수진들이 지치자 맏형 정명원이 자원해서 선발로 등판했다. 그리고 그게 대박을 터트렸다.[16][17] 상대는 그 해 우승 팀 해태 타이거즈. 인천에서 4차전을 끝내고 잠실로 올라가는 길에 해태 타자들은 코감독의 무시무시한 몽둥이 찜질을 당했다는 카더라가 전해진다.
1998년 현대가 마무리 투수 조 스트롱을 영입하며 선발로 전환하였다. 첫 선발 등판 경기에서 5회를 버티지 못하고 6실점으로 탈탈 털렸는데, 그 다음 등판 경기에서 '완투승'을 시작으로 괴물 모드로 각성(...), 14승 8패 '''1.86'''의 성적으로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획득했고[18][19] 주장으로서 팀의 첫 우승을 맛보는 감격을 누렸다. 이 때 생방송으로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한 말이 '''"같이 고생한 창호와 정현이가 없어서 아쉽습니다."'''[20] 그야말로 사나이들의 인정과 의리가 물씬 풍겨지는 진심어린 인터뷰가 많은 팬들의 심금을 울렸다.
1999시즌은 스트롱이 재계약에 실패하자 마무리 투수로 뛰었는데[21] , 4점대 방어율을 찍으며 부진했다.
이 시기의 99현대의 투수진은 정민태와 김수경을 제외하면, 위재영, 최원호, 임선동 같은 선발자원이 단체로 부진했으며 조규제, 조웅천 등의 계투진도 시원찮았다. 이런 상황에서 마무리이자 투수진 최고참인 정명원까지 부진했으니....[22]
물론 99시즌이 역대급 타고투저도 감안해야 겠지만 투수진이 정민태와 김수경을 빼면 모두 부진해서 가을야구를 못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2000시즌은 5선발로 뛰면서 5승을 거두는데 그쳤으며[23] , 그 해 한국시리즈 4차전에 패전처리로 올라온 것이 그의 마지막 등판이 되고 만다.
그리고, 후배 염경엽과 함께 2001년, 개막전때 은퇴식[24] 을 치루고 연수를 갔다.
2.3.1. 1996년 현대vs삼성 빈볼 사건
1996년 6월에 2위 현대와 1위 삼성 라이온즈가 인천에서 3연전을 벌였을 때, 처음 2게임을 모두 승리한 현대는 뒤지던 5회 말, 박충식을 상대로 한 장정석의 '''역전 만루 홈런'''으로 역전에 성공하고, 이후 삼성 백인천 감독은 투수를 박충식에서 이상훈으로 교체하였다. 교체된 이상훈은 나오자마자 6-7-8회에 걸쳐 현대의 이근엽, 권준헌[25] , 박진만의 무릎[26] 근처를 연속 차례로 맞추었다. 현대 측 벤치에선 이를 고의적인 '''빈볼'''로 받아들이고,[27] 상당히 관중들에게나 시청자들에게나 흉흉한 분위기에 휩싸였었다.
이해에 마무리로 뛰던 정명원이 7:1로 크게 이기던 상황에 9회 초 등판했는데,[28] 일단 첫 타자 양준혁에게 위협구를 던졌다. 양준혁이 이에 반발하자 정명원은 양준혁을 맞췄다. 이때, 양측간 패싸움이 크게 날 뻔했으나 결국, 정명원보다 나이가 적었던 양준혁이 참고, 1루로 걸어가면서 사태가 일단락되는 듯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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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측은 정명원보다 '''나이가 4세 위였던''' 이종두를 양준혁의 대주자로 내보내 이후에 벌어질 만한 빈볼 상황에 대비했으며, 곧바로 정명원은 특유의 빠른 직구로 다음 타자 이승엽의 등 부분을 맞추었다.[29] 이에 곧바로 양 팀은 크게 패싸움에 들어갔으며 경기가 끝난 뒤,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목된 정명원이 10게임 출장 정지 및 벌금을 내는 것으로 사태는 마무리되었다. 이 사건으로 삼성과 현대와는 더욱 앙숙 관계가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으며, '''정명원은 현대 고위 간부로부터 금일봉을 받았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고 한다.'''
훗날 '''16년 후''' 두산의 투수코치로 옮기게 되었을 때의 인터뷰에서 '팀워크'와 '경기 출전 금지'에 따른 보상조로 '''금일봉'''을 받았으며, KBO에서 부과한 벌금까지 현대 구단 측에서 대납했다고 인정했다. 다분히 재계 라이벌간 자존심 대결의 성격이었음을 반영한 것.
당시 사건을 다룬 기사 "정명원이 이승엽에게 빈볼을 놓은 사연…현대와 삼성, 두 재벌의 대리전"[30]
여담이지만 위의 역전 만루홈런을 친 장정석이 넥센 히어로즈 감독으로 선임되어서 이 사건이 다시 회자되었다.[31]
2.4. 플레이 스타일
현역 시절의 트레이드마크는 삐딱하게 쓴 뉴에라(뉴에라라기 보단 챙이 펴진 야구 모자..)와 상대 타자가 오금이 저릴 정도의 강렬한 눈빛, 온몸을 내던지듯 와일드한 투구폼과 마운드에서 거침없이 욕설을 내뱉는 마초 스타일. 그리고 전매 특허의 포크볼.
189cm의 큰 키에 걸맞게 오버핸드의 높이에서 내리꽂는 직구와 포크볼로 리그에서 위력을 떨쳤다. 전문가들 사이에서 포크볼의 달인 할 때 제일 많이 언급되는 투수.
전형적인 상남자 스타일에 터프가이이며, 의리와 인정을 중요시하는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 특히 1998년 한국시리즈 우승 당시 마운드에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엉엉 울던 정민태를 부둥켜 안고 대성통곡하던 장면이나 언론 인터뷰에서 우승의 기쁨 대신 어려운 시절부터 오랜 시간 친형제처럼 동고동락하던 태평양 삼총사 박정현, 최창호와 함께하지 못한 안타까움을 뜨거운 눈물로 표현한 것이 임팩트가 컸다.
반면에 마운드 밖에서의 실제 성격은 차분하고 약간 소심한 성격이어서, 입단 당시 태평양 돌핀스감독이었던 김성근의 조련으로 마운드에선 거침없는 모습을 보여줬다. 판정이 이상하게 되면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팬들은 그 표정을 알 수 있다는 설이 있다.
김시진 감독의 경우는 그의 차분하고 소심하며 예민한 성격을 감안하여 밤에 몰래 어깨를 주물러 주는 등 마음을 다독여 주는 데 집중했고, 그것이 잘 먹혀들어가 그가 현대 시절 좋은 성적을 올리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3. 지도자 시절
3.1. 현대 유니콘스 ~ 넥센 히어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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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단은 은퇴 중용을 했으며, 정명원 이에 불응하지 않고 좋게 은퇴를 선언했다.
2002년 부터 2004년 시즌 까지는 현대의 2군 투수코치[33] 를 맡았다.
본격적인 1군 코치 데뷔는 2005년 1군 불펜 코치로 시작하였고 2007년 시즌은 1군 투수코치[34] 의 첫 길을 내밀었다.
안타깝게도 전년도 정규시즌 2위 최종순위 3위로 막을 내린 팀은 2007년에도 잘 되어 갈 것이라고 생각 되었으나, 시즌 초부터 현대의 매각 기사 및 1대 감독이던 김재박의 LG 트윈스 이적 및 그에따른 80% 떠나간 코치진들의 빈자리를 맡는 등 어수선 했다. 그야말로 개막전 4연패를 할때부터 투타 엇박자로 가면서 결국 최종순위 6위로 끝나면서 현대의 시작과 마지막은 그렇게 막이 끝났다. 한편 2006년에 지명 받고 1년간 2군에서 활약하고 1군으로 막 데뷔한 조용훈을 가장 신뢰 했던 것도 정명원 이였다. '''임태훈'''에 이어 신인상 투표 2위까지 한 것은 덤[35] 현대에 코치로 몸담을때 여러 유망주들을 육성했는데 조용훈 외에 노환수, 파이어볼러 김영민, 장시환, 이보근 등등 그의 손에 거쳐갔다.
2008년 시즌은 현대가 해체 되고 선수들 및 프런트를 승계받은 히어로즈 팀의 2009년 까지 재활군 코치직을 역임했고, 2010 시즌부터 2군 투수코치를 맡았다. 2010 시즌에는 좋지 않은 팀 분위기에도 넥센 히어로즈에서는 유능한 투수 자원들이 속속 등장해서 희망을 불어넣고 있는데, 팬들 사이에서는 실질적인 1등 공신이 '정명원'이라고 알려져 있다. 특히 고원준의 등장과 각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사실은 정명원 코치가 2008년 아주 잠시 1군에 올라왔다가 다시 내려간 전적이 있다. 잘하거나 못했거나 떠나서 본래 있던 감독의 사단도 아니고 어디에 속해 있지 않는 사람인지라 팬들도 히어로즈의 프랜차이즈 코치로 남겠지 라고 생각을 했으나... '''그런데''' 2011년 시즌이 끝나고 2012년 두산 베어스로 옮기기 전에 팀의 2군 감독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했다고 한다.[36] 사실 그럴 만한 게 여러 번 1군 승격을 부탁했으나, 김시진 감독이 거부했기 때문. 그것 말고도 외딴 동네인 2군 강진에 구단이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다 보니 혼자서 유망주를 키우느라 벅찼다고 한다[37] . 거기에다가 정명원 코치가 키운 선수도 김시진 감독, 정민태[38] 코치가 키웠다고 알려지는 경우가 있다 보니 여러 모로 안습..... 위 각주에 링크된 인터뷰 기사에도 나와 있다시피 '''23년 간 있어 온 팀'''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된 상황에 본인은 굉장히 허탈해했으며, 넥센 팬들은 이 같은 상황을 불러온 정민태를 대차게 깠다[39] . ~
3.2. 두산 베어스
3.2.1. 2012년
2012년 시즌부터 두산 베어스의 투수코치로 옮기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서한규 2군 수비코치의 페이스북에서 확인되었다.
그리고 두산 베어스 갤러리는 ''김태희(김상진) 바랬는데[40] 올리비아 핫세(정명원)가 와서 부왘을 올리고 있다.
넥센으로 두산으로 이적 과정은 넥센의 차기 2군 감독으로 내정된 상태에서 2011년 10월 30일경에 두산측의 영입 제안을 받고, “이제는 1군 선수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이유에서 옮긴 것이다. 본인 인터뷰 기사
2012년 아직 10경기를 치렀지만 엠팍이고, 돡갤이고 정명원 코치에 대한 찬양이 가득하다. 지난 시즌 동안 윤석환 전 투수코치가 마운드에 올라간 뒤로 털린 경우가 많았는데, 정명원 코치가 올라가면 마운드가 엄청나게 안정화된다고 카더라. 길게 믿고 던지게 하기에 지난 시즌까지 제정신이 아니었던 선발진이 엄청나게 안정화되었고, 선발 투수들이 던지는 시간이 늘어나 불펜 투수들도 작년보다는 안정감을 찾아가고 있다는 분위기.
... 인 줄 알았으나 4월 초기까지는 그럭저럭 했던 투수들이 5월이 지나면서 갑작스레 난타당하기 시작했고 5월 30일 현재 평균자책점 6위, 볼넷 2위로 투수진이 썩 좋지 못하다. 특히 더스틴 니퍼트와 임태훈[41] 가 급격히 무너진 게 치명적으로 작용하고 있는데, 우선 한 시즌은 끝나봐야 평가를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43] 그래도 6월부터 더스틴 니퍼트의 구위가 돌아오면서 평가가 다시 좋아지고[44] 있는 중인데, 선발들을 작년 시즌보다 길게 던지게 하고, 혹사를 자제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마운드에서 흔들리는 선수를 다독이고 격려하는 힘도 뛰어나, 두산 팬들은 '''명원갑'''이라고 찬양하고 있는 중.
현역 때 대표적인 포크볼러여서 포크볼 전수에 일가견이 있다. 2012년에 선발 에이스로 각성한 노경은, 역시 포크볼로 선발 10승을 달성하는 등 재미를 본 이용찬, 그리고 불펜 에이스로 다시 발돋움한 홍상삼 등이 그에게 전수받은 포크볼로 많은 재미를 봤다. 결국, 정명원 코치를 잃은 넥센은 그 해 같은 연고지의 모 구단 처럼 올스타전 이 후 역대급 내리막길을 내려갔고 정명원은 친정을 나와 두산에서 첫 가을야구를 즐기게 되었다[45] .
지도자로도 꽤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중. 그의 손을 거친 몇몇 투수들이 각성에 성공하였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탈탈 털리고 팬들한테 욕먹자 미니홈피에 카트라이더 하러 가야 한다고 키배를 떴던 선수.
3.2.2. 2013년
2013년 4월 코치로서 인터뷰를 했다. 지금껏 해온 선수 발굴과 육성에 많은 보람을 느끼는 듯. '나도 장인(匠人)이 되고 싶다’ 정명원 두산 투수코치
그러나, 별명답게 5월이 되면서 두산 베어스의 투수진이 무너지자 두산 베어스 갤러리 등에서 '''정석환'''이라고 까이고 있다. 그나마 후반기 들어와서 두산의 성적이 상승하면서 5월보다는 덜 까이는 중. 특히 두산 팬들에게 이해 가장 굴욕이자 대표적인 508 대첩때 투수들이 단체로 털리면서 그날 다른 팀들의 경기가 전부 묻히는 안습적인 날이였다.
2013 시즌 종료 후 김진욱 감독이 경질되자, 구단에 사표를 제출하였다. 구단 프런트 또한 두산 투수들 사이에서 스승이자 정신적 지주의 위치에 있는 그를 잔류시키기 위해 사표를 반려하려 했으나, 김진욱 감독의 해임에 대한 책임으로 인해 거절했다고 한다.[46] 그가 떠난 후 김민재, 조원우 코치도 사표를 제출하고 팀을 떠났다.[47]
두산 팬들은 김진욱 감독 재임 시기 동안 투수진 안정에 크게 기여한 코치가 허망하게 팀을 떠나는 것을 보면서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야기한 두산 프런트에 대해 이를 갈고 있는 중이다.
애제자 노경은은 김진욱 감독의 해임과 정명원의 사퇴에 대해, '''"두 아버지를 잃었다"'''는 슬픈 반응을 내비쳤다. 부모님 이상으로 이들을 잘 따랐던 노경은은 김진욱 감독과 정명원 투수코치가 떠난 후 이듬해 2014년에 무려 '''15패'''를 당하며, 최다패 투수로 거하게 말아먹었다.... 그리고 14 시즌 대부분의 두산 불펜들이 정명원이 떠나자 싸그리 방화범이 되고 만다.
노경은은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을 하다가 결국, 롯데로 고원준[48] 의 1:1 트레이드가 되어버린다.
두산에서도 나름 좋은 투수들을 키웠다. 2013년 1군에서 본격적으로 활약한 윤명준이나 신고선수인 옆구리 투수 오현택을 발굴하거나 성과는 나름 있었긴 했지만, 정작 정재훈이나 이재우 같은 베테랑들이 흔들릴때는 못잡아준게 나름 안타까운 케이스
3.3. kt wiz
2013년 12월 16일에 같이 두산을 떠난 김민재 수비코치와 함께 신생 팀 kt wiz의 창단 투수코치로 임명되었다. 현대 해체 후 7년 만에 수원으로 컴백!
kt의 리그 참가를 앞두고 2014 시즌 후 보호선수 외 전력보강선수 지명 때 넥센 히어로즈에서 사실상 포기하고 풀어 버린 '''장시환'''의 제구력을 끌어올리며 데뷔 첫 승[49] 을 얻게 된다. 여담으로 kt의 1군 데뷔 역사상 첫 승 상대겸 팀의 연패를 끊는 타이밍이 하필 친정팀이었다. 이를 감안하면, 이 이상 3배 4배 그 이상의 '''빅엿'''을 먹인거나 다름없다. 장시환을 불펜의 한 축으로 바꿨다. 포수 출신의 조무근[* 그해 2015 WBSC 국가대표로 뽑혔다.과 김재윤을 리그 수준급 필승조 중간계투 투수로 키워 내는 등, kt에서도 명 코치 어디 안 가는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발굴·육성했다고 알려진 선수들의 경우에 공통적으로 1군 안착 이후에는 성장이 정체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서 진정 1군 투수코치의 성과인지는 의문이 있고, 유명세에 비하여 구체적으로 어떠한 성과를 남겼는지 실체가 분명하지 않다.
2016 시즌에는 한박자 이상 느리거나 선수가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교체하는 짓을 남발하는 등 종잡을 수 없는 투수교체 타이밍, 좀처럼 성장하지 못하고 있는 신인 투수들 문제 등으로 인해 슬슬 비판의 목소리가 올라오고 있다. 사실 현대 말기의 1군 투수코치 시절에도 투수진 운영에서 그다지 평이 좋지는 않았다.[50]
1군에서 정명원 코치의 지도를 받는 투수들을 보면 공히 변화구를 중심으로 유인구 위주의 피칭을 하면서 타자와 정면승부 보다는 상황을 '''피해가려는''' 경향이 드러난다. 흔히 2볼을 내주고 시작하고 2스트라이크 이후에 세번째 스트라이크를 제대로 '''던지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따라서 대개 스트라이크-볼 비율이 좋지 않고 풀카운트 상황이 쓸데없이 자주 발생하며, 그 결과로 투구수가 불필요하게 '''늘어나''' 선발 투수진의 이닝 소화 능력이 떨어지며 계투진도 사사구'''를 남발하면서 스스로 어려운 상황에 빠지곤 한다.[51]
투수진 운용을 보면, 길게 던질 투수와 짧게 던질 투수에 대한 배치 계획이 없이 당장의 상황에 급급해 여러 투수를 잇달아 투입하며 계속 실점하다가 결국 남은 투수가 없어 그대로 방치하는[52] 무계획한 행태[53] 가 종종 나타난다. 결국 전체 투수진의 '''과부하'''를 초래하면서도 그다지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고 있다.
물론 투수진 운용에 관한 최종 결정은 감독의 권한이므로 이것을 전적으로 투수 코치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으나, 이와 같은 현상이 내내 지속되는 점에서 1군 투코로서의 보좌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 지는 의문.
한편, 두산에서 kt로 이적할 때 이미 kt 차기 감독?으로 약정되었다는 풍문이 있었고 실제 2016 시즌 kt가 연거푸 최하위에 머무르자 조범현 감독의 책임론이 제기되면서 정명원 감독을 주장하는 의견도 간혹 보인다.[54]
의아한 점은 투수진이 부진한 경우에는 대개 총책임자인 감독은 물론 투수코치도 함께 비판받는 것이 통례이나, 유독 정명원 코치의 경우는 그러한 비판 여론이 잘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조범현 감독은 본래 투수진 운용에 약점이 있다는 것이 통설이었고, 정명원 코치의 위상으로 볼 때 투수 운용과 관련하여 상당한 영향력이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유독 정명원 코치만 비판을 면하고 있는 상황은 꽤 부자연스러운 형국이다.
성적부진에 대해 코칭스탭을 비판하는 경우에 보통은 거론되지 않는 수석코치나 심지어 1군에 전혀 관여하지 않는 차명석 코치까지 뜬금없이 거론되는 경우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1군 투수진에 직접 관계하는 정명원 코치에 대한 비판이 거의 없다시피 한 점은 정상적인 여론의 흐름인지 상당히 의구심이 있다.
굳이 이런 이유를 추측해보자면 현대 시절부터 시작해서 수도권 팀인 넥센과 두산에서 워낙 평이 좋았고, 반대로 kt 팬들의 화력은 약한 반면 이들 사이에서도 NC에 비해 많이 얇은 kt의 뎁스에 대한 인식이 강해서일지도. 또 정명원 코치는 넥센과 두산에서 자신의 권한 탓이든 감독의 철학 탓이든 투수혹사와 조금 거리가 있었던 반면 조범현 감독 쪽은 전력이 있기도 하다.
김진욱 감독과 다시 만난 2017 시즌에는 초반이지만 지난 시즌과 달리 매우 정상적인 계투진 운영을 보여주고 있다. 아마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조범현 감독의 의견 반영이 크지 않았나 추정된다.
그런데 시즌초를 지나며 서서히 선발진이 공략당하고 불펜 운용이 중요한 상황이 되자 그다지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고 있다. 계투진의 평균자책점이 급상승하였으며, 선발 에이스와 필승조를 모조리 투입하며 정성곤하는 경기도 나오기 시작한다. 상황에 따라 투수진의 짜임새로 지켜내는 안정적인 운용은 찾기 힘들고, 육성 측면에서도 전년에 비해 부진한 투수들은 여럿 보이지만 반면에 새로 등장한 '''뉴페이스'''는 없는, 총체적 난국 상태.
결국 2018년 시즌 중에 가득염 2군 투수코치와 자리를 바꿔서 퓨처스 팀 투수코치로 보직이동을 했다. 한술 더 떠 2019 시즌부턴 잔류/재활군 투수코치로 이동했다.
3.4. KIA 타이거즈
2021년 KIA 타이거즈 투수코치로 임명되었다. 현역 시절 입지 못했던 고향팀 타이거즈의 유니폼을 오랜 시간을 돌고 돌아 지도자가 돼서야 처음 입게 됐다. 2020년 1군 메인 투수코치였던 서재응이 2군으로 이동하면서 1군 메인 투수코치가 됐다.
4. 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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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살 아래 동생인 정학원도 야구 선수로 활동한 적이 있다. 이쪽은 내야수로, 1991년 쌍방울 레이더스의 특별 우선 지명을 받아 입단하여 1995년까지 활동했으며 형제가 1995년 9월 5일 경기에서 투타 맞대결을 펼쳤는데 동생인 정학원이 대타로 나와서 유격수 땅볼로 물러났다. 이후 형제 투타 맞대결은 무려 25년이 지나서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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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한국시리즈에서 노히트 노런을 한 1996년에 태어난 차남 정동규 군이 상당히 미남이다. 위의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모델이며, 모델 에이전시인 에스팀 소속. 온스타일의 서바이벌 리얼리티 프로그램 '도전 수퍼모델 코리아 시즌 5'에 참가했다. 현재는 배우가 되기 위해 배우 수업을 받고 있다고 한다. 아빠와 아들의 인터뷰
5. 연도별 성적
[1] 사진속의 야구장은 현재 사라진 숭의야구장의 모습.[2] 이후, 히어로즈에서 28번을 단 선수가 그나마 현대 시절 불펜 에이스로 군림하던 신철인이였는데, 그 뒤로 달은 선수가 다름 아닌 선수 같지 않는 '''배힘찬'''이여서, 팬들은 뭐 이 따위 같은 새끼가 28번을 받느냐며 분노 하며 폭발.. 사실, 배힘찬은 현대에서 지명 했을때 김시진도 정명원도 굉장히 기대되는 유망주 였다. 하지만 포텐은 안터지고 1군와서 빈번히 불만 지르는 꼴만 하여 팬들 뒷목을 잡게 하던 원흉이였다.했었다. 배힘찬이 2차 드래프트로 이적한 2016년부터는 김해수가 28번을 받았다. 근데 김해수도 얼마 안가서 방출된건 안자랑...[3] 넥센에서는 2008~2011년 동안 재활코치로 활동한 적도 있었다. 2019년-2020년 역시 재활코치 일을 한 경험이 있다.[4] 이건 LG 트윈스의 레전드 김용수 코치와도 오버랩이 된다. 둘 다 한팀의 프랜차이즈 선수 이자 레전드 이며, 각각 팀의 코치 생활을 했었기 때문.[5] 2020년 현재 추세로 보면 젊은 선수들이 마무리로 정착하는 쪽으로 많아지면서 앞으로 뒤로 밀릴 가능성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6] 고교 동기 이광우가 원광대에 입단할 당시에 무려 '''8명'''을 끼워팔기 했는데, 정명원은 그 중 한 명이였다. 당대 1985년 전두환 정권 물가를 고려하면 엄청난 일이나 다름없다...[7] 1988년 청보 핀토스를 인수해 창단한 태평양 돌핀스의 투수진은 명투수의 요람이라던 인천 연고팀의 위용과 다르게 눈물만 나오는 상황이었다. 청보 시절 팀의 에이스였던 최계훈은 육군 현역병으로 복무하고 있었던 터라 10승 투수는 한 명도 없었다. 그나마 기교파 좌완 양상문과 재일교포 김신부가 9승을 기록한 게 팀내 '''최다승'''이였다. 심지어 양상문의 경우 '''완투만 8번, 완봉을 1번''' 하면서 9승을 겨우 따냈는데 같은 기간 해태 선동열은 시즌 9완투 1완봉으로 16승을 기록했다. 사실 태평양 돌핀스는 리그에서 손꼽힐 정도로 투타의 균형이 안 맞았던 팀이었다. 참고로 1988년 2차 1라운드로 입단했던 신인 투수 신완근은 전천후로 이리저리 구르며 139이닝을 던지고 부상으로 신음하다가 1993년에 쓸쓸히 은퇴했다.[8] 짠물 트리오 또는 마운드 신인 삼총사라고 불렸다. 기사까지 났을 정도였으니. 1994년 LG 트윈스에서 데뷔한 신인 트로이카 유지현,김재현,서용빈을 떠올려보면 딱 맞는다.[9] 이 시절 전지훈련에서 제구를 잡아줄려고 공이 벗어날 때마다 김성근 감독이 '''싸대기'''를 날렸다는 야사가 전해지나, 진위는 확인불명이다. 본인들도 (당연히) 언급하지 않고, 확실한 증언도 없고, 그땐 누가 이걸 물어볼 만한 용자도 없었으니(...) 본 설에 따르면 200~300개씩 던지는 제구 훈련을 하면서 포수 미트에서 10cm 이상 벗어날 때마다 한 대씩 맞았다고. 김성근은 2000년에도 삼성 라이온즈/2군 감독 시절에 영쑤라던가, 정노예 등이 제구가 안 될 때마다 죽빵을 후려갈겨 가며 틀을 만들었다. 이제는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만, 김성근은 한국 야구에서 폭력을 '''제일 많이 쓰는 감독'''이기도 하다. 맞은 선수도 굉장히 많다. 오죽하면, 배영수가 나중에 2015년에 한화에서 감독과 선수로 재회했는데, 부상으로 수술대 올라가는 와중에도 "감독님 죄송합니다."라고 인터뷰를 남겼을까? SK 와이번스 감독 시절에도 걸핏하면 때리고 특투를 시켰다고.[10] 당장 1990년에는 15경기 2승4패 2세이브에다 24.1이닝 밖에 못 던졌는데, 89년에 박정현과 같이 구른 탓이 크다. 박정현이 17완투 4완봉으로 19승10패 2세이브를 기록하며, 242.2이닝을 던졌고, 정명원은 11승4패 6세이브를 기록하며, 139.1이닝을 던졌으니.. 정명원이 부진하자, 박정현의 부담이 커졌고, 결국 191.2이닝을 던지며 전천후로 구르고 13승7패 7세이브를 기록했다.[11] 재미있는 점은 89년 태평양 신인 트리오는 똑같이 38경기에 출장했다.[12] 당시 4선발이었다는 양상문 또한 이런 식으로 굴려져 35경기 15선발 161.2이닝을 기록한다.[13] 참고로 이 기록도 2017년 소프트뱅크 호크스 마무리 데니스 사파테가 54세이브를 기록하면서 깨졌다.[14] 마무리 특성상, 연투를 밥먹듯 해야 하니..[15] 현대 유니콘스는 태평양 돌핀스를 공식적으로 인수하여 역사를 승계한다. 단, 넥센 히어로즈는 해체 후 재창단이므로 공식적으로 현대 유니콘스와는 관련없는 팀이다. KBO 연감 참조.[16] 정규 시즌이 아닌 포스트 시즌 경기에서 나온 기록이므로 비공인 기록으로 남는다. 비슷한 예가 2004년 한국시리즈 때 배영수의 10이닝 노히트 노런이 있긴 한데, 경기가 무승부로 끝나 비공인 기록으로조차 남지 못했다.[17] 참고로 당시 해태는 이종범이 20-20을 할 정도로 건재했고 홍현우도 20-20에 가까운 장타력과 눈야구를 했었다. 여담으로 96년 현대의 팀 타율은 7위(.243), 해태의 팀 타율은 5위(.245)... 두 팀 다 투수들이 빵빵했기에 가능했고 타자들은 정말로 몇몇 선수들만 있었다. 현대는 박재홍이나 김경기가 있었다.[18] 1998년 정명원이 평균자책점 1.86으로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차지한 이후로 1점대 평균 자책점을 기록한 선발 투수는 2010년의 류현진(평균자책점 1.82)뿐이다. 다만 저 쩔어주는 평균자책점에도 불구하고 승수가 겨우(?) 14승에 패수는 8패나 되는데, 타선 지원이 다소 살짝 빈약했던 감이 크다. 당시 현대 타선이 박재홍-스캇 쿨바-김경기로 이어지는 클린업 트리오에 박종호, 박경완 등 괜찮은 타자들이 포진되어 있었음을 감안하면... 그런 것도 있겠지만 당시 마무리였던 조 스트롱이 워낙 작가질을 많이 해서 승리도 몇차례 날아간 점도 감안해야 할 듯.[19] 후덜덜한 점은 선발이면서 당대 최고의 마무리였던 '''임창용보다 평균자책점이 낮았다'''. 물론 그 해 해태는 기적적으로 5위를 기록했다. OB가 마지막 게임에서 기적 4위를 하는 데는 3회에 나온 임창용을 탈탈 털어 버린 바가 크다. 0,03의 차이로 정명원의 우위.[20] 이 때 박정현은 시즌 중 쌍방울에 트레이드 되어있었다. 김성근의 '''엄청난 혹사'''로 살아나지 못할것이라고 판단, 트레이드 되었고, 최창호는 '''시즌 중''' LG 내야수 박종호를 상대로 트레이드되었는데, 하필 '''1998년 한국시리즈 상대 팀이 LG'''였다. 후에 최창호는 '그토록 염원해 왔던 우승이 이루어졌는데 내가 앉아 있어야 할 곳의 반대편에 앉아 있었다. 내가 원했던 것도 아닌데 다른 사람들의 손에 이런 상황이 만들어져서 너무 화가 나더라' 라고 회상했다.[21] 전년도 이적 후 선발로 뛴 조규제가 시즌 개막부터 마무리 역할을 맡았지만 부진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4월 말 이후에는 김수경이 기용되었으나 역시 기대 이하의 성적에 그쳐 정명원이 최종 낙점되었으며 그 이후 조규제는 전년도 때처럼 선발로 뛰었다[22] 특히 스트롱이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생긴 마무리 투수의 공백이 컸는데 전년도 이적 후 선발로 뛴 조규제가 시즌 개막부터 마무리 역할을 맡았지만 부진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4월 말 이후에는 김수경이 기용되었으나 역시 기대 이하의 성적에 그쳐 정명원이 최종 낙점되었으며 그 이후 조규제는 전년도 때처럼 선발로 뛰었다. 그나마 뒤에 들어온 박장희가 있어서 5위였지 안그랬다면 간소하게 뒤에 6위로 따라오던 LG에게 잡혔을지도 모른다.[23] 정민태, 김수경, 임선동 3인방은 '''18승을 거두며 공동 다승왕'''을 거두었다. 그렇다보니 4선발과 5선발이 이래저래 등판횟수가 적을 수 밖에 없었다고는 하지만, 5선발은 신철인과 마일영이 그 해 성공적인 데뷔를 하여 그나마 짐을 덜어줬다. 단지. 정명원의 개인사가 있었기에 좀처럼 선발 출장 비율이 중간계투로 나오는게 있었다.[24] 염경엽과 정명원은 코치직을 잠시 다른 팀에서 했지만, 원클럽맨이고 같은 동향 사람이고, 정명원이 염경엽의 팀에 선수생활을 할땐 2년 먼저 입단한 선배다. 정명원, 염경엽 은퇴.[25] 당시에는 타자였고 95년도에는 3할을 친적이 있다. 투수로 전향한지 2000년도에 되어서이다.[26] 삼성팬들이나 현대팬들이나 알아야 하는 것은 박진만은 이미 고교 시절 무릎 부상으로 유급한 케이스였다. 그만큼 박진만에게 무릎은 꽤나 신경쓰일 것이다. 결국, 요놈 때문에 박진만은 2005년 중순 무릎 부상으로 시즌 아웃으로 쓰러지고 만다.[27] 당시 경기의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면 몸맞은 공을 던지고도 삼성 투수 이상훈이 전혀 사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현대 타자들에게 '뭘 봐, 불만있어?'라는 듯한 표정을 지어 고의적 빈볼이라는 심증을 굳히기에 충분했다.[28] 삼성측의 처사에 분노한 정명원이 자진해서 등판한 것이었다. 애초부터 보복성 빈볼을 염두에 두고 나갔다는 의미.[29] 당시 경기 영상을 보면 정명원의 릴리즈 포인트, 투구 후 착지 각도가 모두 왼쪽으로 치우처져 있어서 명백한 고의 빈볼임을 알 수 있다.[30] 이후 이승엽은 99년 그해 홈 구장에서 정명원을 만나 한국 프로야구 '''최연소 100 홈런'''을 기록한다. 통쾌한 복수가 따로 없을 듯[31] 그러나 2019 한국시리즈가 끝나고 갑작스럽게 경질 되었다.[32] 지도자 시절의 사진[33] 1군 투수코치는 어디까지나 '''김시진'''.[34] 2006년은 조규제 코치가 2군 투수코치를 했다.[35] 2000년대 마지막 고졸 투수 신인상 이후 고졸 신인이 나오기 까지 무려 13년이나 걸렸다. 2020년 신인상은 KT 위즈의 소형준. 조용훈은 신인상을 못받았지만 일구회에서 주는 올해의 신인상에 뽑혔다.[36] 기사 참조[37] 이 시기에 2군에서 임창민과 전유수, ~ 등등 20대의 전도유망한 유망주들을 키워냈다.[38] 사실 정민태의 실적은 없었다. 1군에 올라오는 유망주들이 매경기 볼넷만 주면 인터넷 카페에서 온갖 비난은 김시진과 배터리코치인 김동수가 먹었다.[39] 정민태와 정명원의 차이점이라면 선수 은퇴 후 곧바로 코치 연수를 하지않고 현장으로 복귀를 한 정민태 / 은퇴 후 1년간 해외 2군팀 연수를 갔다온 정명원인데 의외로 정민태는 넥센/롯데/한화에 재적하면서 실적을 쌓은건 한화 시절에 있던 2018년 1시즌 빼곤 없었다. 그와중에 2군에서 탄탄대로 1군으로 승격 된 정명원과는 대조적 현대(05년~07년)/넥센(08년)/두산(12년~13년)/KT(14년~16년)에서 유망주들을 발굴하는데에 성공하였다. 이정도면 정명원이 1군에 있어도 할말 없는 편이며 그리고 선수들 기복은 누구나 있기 때문에 선수나 코치 둘 다 까이는건 마찬가지.[40] 김상진은 베어스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다. 90년대 베어스의 암흑기를 지탱하였으며 간만에 상위권으로 도약한 95년 OB베어스의 우승에 이바지했다. 또한 SK 코치로 있으면서 1군과 2군에서의 실적이 나름 있었던지라 팬들이 김상진의 복귀를 원했던 것이다. 그리고 김상진도 2020년에 와서야 베어스로 돌아왔다.[41] 임태훈은 허리가 고질적으로 아프므로 이를 정명원의 잘못으로 볼 수는 없을 듯. '''전임감독'''의 '''혹사'''가 뚜렷하게 나타났다.[42] 역시 전임감독의 무리한 등판으로 급격히 무너지고 있었다.[43] 두산 팬들은 등가교환이라고 치고 있다. 우선 조계현+윤석환 조합 때 빛을 발했던 김선우, 임태훈, 고창성[42] 이 무너진 것에 대해 씁쓸해하면서도, 이용찬, 노경은, 김승회, 홍상삼 등이 환골탈태한 것을 보면 일단 투수진이 확실히 나아졌다. 특히 노경은과 이용찬은 그야말로 토종선발 개막장의 역사를 지닌 2000년대 두산의 빛이요 소금이 되었으니... 그리고 앞의 셋은 투코보다 혹사와 나이 문제로 부진한 탓이 크다.[44] 사실 니퍼트는 더운 곳에서 잘했다. 추운 곳에서는 약간 성적이 나쁜편[45] 그리고 정명원을 내동댕이친 김시진과 정민태는 쌍욕을 먹고 팬들의 비난으로 재계약에 실패한다.그와중에 8월 중순 김시진은 경질 당한다. 정민태는 롯데로 이적[46] 김진욱 감독이 경질된 이유가 가을야구에서의 투수 운용이었고, 이에 대해 프런트 및 팬들의 질책을 김진욱 감독이 전부 지게 되자, 투수 전권을 쥐고 있던 정명원에게 상당한 중압감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넥센에서 나왔을 때 정명원을 받아 준 장본인도 김진욱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프런트의 행보와 실제 투수운용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팬들의 비난이 김진욱에 집중되었는데, 역설적으로 그 비난은 정명원이 생각했을 때 자신에게 향한 것으로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47] 조원우는 친정팀인 SK를 거쳐서 고향연고팀인 롯데 감독으로 갔으며, 김민재는 정명원과 조우하며 다시, KT로 가버렸다가 정명원도 기아로 떠나고, 김민재는 고향팀인 롯데로 근 20년만에 수비코치로 컴백을 했다.[48] 고원준 역시 2군에서 친정팀의 은사인 정명원 코치의 지도를 받은 적이 있었다.[49] 사실 2012년에 선발로 몇 경기 나가서 퀄리티 스타트 나름 하면서 데뷔 첫 승을 할 수 있었는데 당시 넥센 빠따들이 심각한 삽질을 하는 바람에 첫승을 올지 못했다. 이후로는 갑작스레 제구력 난조를 보이면서 완전 2군용 투수로 변해버린건 일품[50] 당시 코칭스탭들이 대거 LG 트윈스로 갔기 때문이다. 이유는 김재박 감독의 소위 김재박 사단이 팀을 이탈한 것이다. 기존 코치들을 거의 다 빼내가자 2군에 있던 코치들 및 연수한지 얼마 안 된 코치들을 바로 쓰거나 또는 프런트 였던 사람을 코치로 쓰거나 했었다. 그래서 준비도 못한 정명원이 1군 코치가 되었는데 의외로 신임 감독 김시진과 마찰이 꽤 있던 것으로 나온다.[51] 특히, 저런 상황을 즐기는 타입... 이라고 증명했다...[52] 본인은 혹사가 아니라고 자부했다.[53] 이듬해 이광환이 감독으로 오면서 몸이 망가져 버린다.[54] 근데, 이 낭설들을 퍼트린 기레기들은 이후 김진욱 신임 감독이 오니깐 정작 버로우를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