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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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 프로야구 선수였으며 포지션은 내야수.
유격수와 3루수를 오가다 3루수로 정착했다. 2015년 좌익수로 포지션 확장을 시도했지만 실패. 2017년 다시 좌익수로 출장한 경기가 있었지만 역시 실패하였다. 김태균이 노쇠화가 심해지자 종종 1루수로도 출장하였다. 한화 이글스에서만 선수생활을 했던 원클럽맨이기도 하다.
2. 아마추어 시절
한화 이글스의 연고지인 대전광역시 태생으로 어린 시절부터 빙그레-한화의 팬이었으며, 대전 신흥초등학교 4학년 때 동네 친구 정민혁과 함께 야구를 시작했고, 지역 야구 명문인 공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2002년 한화의 2차 10순위 지명을 받았고 동국대학교에 입학하여 야구부 주전으로 활동했다.[11]
3. 선수 경력
3.1. 한화 이글스 시절
3.1.1. 2006 ~ 2010년, 그리고...
2006년 동국대학교를 졸업하고 한화 이글스에 입단했으며, 2군 남부리그에서 독보적인 3할 타율을 기록한 후 8월 1군에 콜업되며 이후 꾸준히 1군에 남아 김민재와 더불어 한화의 유격수 자리를 지켰다. 2006 시즌 후에는 김대우, 이현승 등과 함께 대륙간컵 야구 대회에 국가대표로 참가했다.
리그내 빅뱃 유망주였으나, 베테랑과 안정된 수비를 선호하는 김인식 감독으로 인하여 출전기회는 보장받지 못하였다.
송광민이 두각을 나타낸 건 2009 시즌. 김태균과 이범호가 모두 부상으로 부진하였고 마지막 시즌을 소화하던 김민재의 노쇠화가 가시화되는 가운데에서도 이도형과 함께 한화 타선에서 고군분투했으며, 내야 수비를 안정시키는데도 크게 기여했다. 이 때의 활약으로 소속 팀이 정규 시즌 꼴찌였음에도 2009 시즌 KBO 골든글러브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다른 경쟁자들에 비하면 출루율이 부족하고 삼진 비율이 높아 살짝 타격이 부족했으나 타율 0.261에 109안타 14홈런 43타점은 결코 만만치 않은 수준이며, 부족한 정교함을 상당한 장타력과 빼어난 수비로 만회하였다.
2009 시즌이 끝나고 이범호가 팀을 떠나자 3루수의 공백이 생긴 한화 이글스는 그에게 이범호의 등번호 7번을 주었고, 송광민은 이범호의 포지션이었던 3루수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동국대학교 시절 은사인 한대화 감독과 재회하게 되었다. 한화 역사상으로도 손꼽히는 암울한 시즌이었던 2010년에도 송광민은 뎁스가 바닥난[12] 한화 타선 속에서 그나마 기본적인 타격과 함께 안정적인 3루 수비로 이범호의 빈 자리를 그럭저럭 메워 주었다. 한화 팬들은 송광민의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대표 선발을 기원하며 '''송광저우민(...)'''이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2010년 6월부터 갑자기 실수가 잦아지고, 타석에서도 영 힘을 쓰지 못해서 한화 팬들에게 미친 듯이 까였는데, 알고 보니...[13]
3.1.1.1. '''갑작스런 시즌 중 군입대'''
한화 이글스는 2010년 6월 27일, 송광민이 시즌 중에 입대를 하게 되었음을 발표했다. 해당기사. 이 기사대로라면 송광민 본인의 책임이 크다. 지금이야 군복무 기간도 줄고 해서 유망주들이 시즌 중 입대하는 경우가 많아졌지만 이건 방금전까지 1군에서 멀쩡히 뛰던 선수가 입대를 하는 거니 차원이 다른 문제다.
그나마도 빨리 병역을 해결하고 나왔으면 그나마 나았을텐데, 발목에 문제가 있어서 훈련소에서 퇴소를 당했고, 그 발목 부상의 여파로 수술과 재활을 거쳐야 했고 2011년 6월에야 간신히 공익근무 입대를 했다. 총 3년을 날린 셈.해당기사
공익 시절 죽어라 몸을 만들고 연습하며, 서산 야구장 완공 뒤에는 소속기관인 교육지원청의 배려로 대전에서 서산으로 근무지를 옮겼다.
그가 복무를 시작하게 된 이후 한화 이글스의 3루는 정말 답이 안 나왔다. 그리고 김태완에 이어 송광민까지 빠져버린 한화 타선은 '''붕괴되다 못해 나락으로 완전히 빠져 버렸다'''. 그나마 투수진이 여러 젊은 투수들의 합류와 중고참들의 부활 또는 각성으로 조금씩 정상화가 되어가고 있는데 반해, 타선은 점점 심각해지면서 '''이미 바닥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밑에 더한 바닥이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있다'''. 그나마 2011년은 최진행이 홈런기계로 발전하고 시즌 중에 카림 가르시아가 왔고, 한상훈과 고동진도 각성해서 조금은 나은 편이기는 했으나 2012년에는 말짱 도루묵.
3.1.2. 2013 시즌
시즌 중 입대라는 초유의 사태의 장본인답게 시즌 중 소집해제되어 팀에 복귀했다. 6월 19일 정식으로 선수 등록을 마치고 선수단에 합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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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기사
6월 20일, LG와의 2군 경기에서 제대 후 처음으로 공식 경기에 투입. 결과는 4타수 3안타 3타점. 3안타도 2점 홈런 1개에 2루타 2개로 다 장타라서 한화 팬들을 설레게 하고 있다. 수비력도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최소한 두 경쟁자보다는 낫다는 평가.
곧바로 1군에 콜업되어 유격수나 3루수 포지션에서 뛰었으며 7월 11일에는 더스틴 니퍼트를 상대로 복귀후 첫 홈런을 만루홈런으로 쳐냈다. 프로 데뷔 첫 만루홈런.
이후로는 유격수 포지션으로 고정되어, 3루로 옮겨간 이대수, 2루의 한상훈과 함께 한화 내야수비를 급격히 안정화시켰다. 물론 간간히 꼴칰스러운 수비도 나오긴 하지만 말 그대로 간간히. 내야수비가 안정화되면서 루키 투수가 많은 한화 투수진에 보탬이 되고 있다.
또한 장타력을 상실한 김똑딱을 대신하여 한화 중심 타선에서 장타를 날려대고 있다. 홈런수는 5개로, 시즌 초부터 뛴 최진행의 8개, 김태균의 7개의 뒤를 이어 3위다. 6월 말에 복귀한 타자가 팀내 홈런 3위에 1, 2위와 숫자차이도 얼마 안난다. 때문에 8월 말 김태균이 이탈해도 팬들은 차라리 잘 되었다고 하는 중.
그 기세를 이어 8월 30일 롯데와의 경기에서 데뷔 후 처음으로 4번타자로 선발출장하였다. 성적 또한 기대에 부응하여 2점 홈런 하나 포함 4타수 2안타 3타점. 하지만 이날 팀은 6:4로 패배.
이후로도 3번, 4번타자로 출장하고 있으나 타격감이 점점 떨어지는 모습이다. 김태균, 최진행이 다 빠지고 김태완은 여전히 헤매고 있는 상황에서 팀 타선의 중심을 잡아야 하는 상황이기에 부담이 되는 면도 있을듯.
9월 13일 NC 다이노스와의 경기에서 5타수 1안타 1홈런을 기록하며 시즌 7호 홈런을 기록했다. 시즌 중인 6월에 콜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최진행에 이어 김태균과 함께 팀내 홈런 공동 2위를 차지하고 있다. 8홈런의 최진행이 이미 시즌 아웃된 상황이고, 7홈런의 김태균 또한 여전히 부상으로 출장을 하고 있지 못한것을 보면, 시즌 끝날때쯤엔 팀내 최다 홈런선수가 될 것이 유력한듯...했으나 김태균이 10홈런을 침으로써 팀내 홈런 3위(...)에 머물렀다.
시즌 최종 성적은 67경기 .261 64안타 7홈런 33타점 18볼넷 '''62삼진''' 6실책 .322 .400 .722를 찍으며 3년만에, 그것도 공익으로 시즌 중반에 복귀한 것 치곤 대성공을 거뒀다. 다만 여전히 선구안이 시망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14]
3.1.3. 2014 시즌
김태균, 펠릭스 피에와 함께 타선을 지탱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3.1.4. 2015 시즌
3월 12일 시범경기에서는 놀랍게도 '''좌익수로 출장했다(!)'''. 유격수 수비는 생각보다 별로라는 것이 2014 시즌에 입증되었고, 그의 포지션인 3루수에는 거포 자원 김회성이 겹치다보니 김성근 감독이 스프링캠프 기간동안 포지션을 전환시켰다고. 생각보다 괜찮은 수비[15] 에 최진행은 까였다.
시즌 시작 직후에는 부상으로 출장하지 않다가, 4월 29일 KIA와의 경기에서 8번 '''좌익수'''로 선발 출장했다. 그 날 경기에서 타격은 3타수 3안타 1타점으로 괜찮은 모습을 보여줬으나 수비에서 본헤드 플레이를 2번이나 저지르며 실점의 원인이 되었다. 이 날 경기 이후 팔꿈치 통증으로 다시 엔트리에서 말소되었다. 이후에도 나아지지 않아 8월 25일 일본으로 건너가 이태양이 수술을 받은 병원에서 토미존 수술과 뼈 사이 신경을 옮기는 수술을 함께 받으며 잔여 시즌 동안 재활하게 되었다.
3.1.5. 2016 시즌
'''커리어하이 시즌'''
'송천재'로 불리며 팀 타선의 핵심으로 활약
3.1.6. 2017 시즌
3.1.7. 2018 시즌
3.1.7.1. FA
시즌 후 FA신청을 했으나 무조건적인 온정주의를 거부하는 프런트 때문에 협상이 장기화된 상태다. 일각에서는 여러가지 옵션이 붙은 계약을 제시받았다는 말들이 나오는데 출루율(...)도 있는 것으로 추정.[16]
결국 해를 넘겼다. 박종훈 단장은 "선수들이 FA를 선언했다면 팀을 나갈 수도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할 정도로 FA에 굉장히 야박한 편인데, 협상은 계속 제자리걸음인 상황.
그러나 1월 7일 저녁에 올라온 인터뷰 단 한번으로 송광민에 대한 일말의 긍정적인 감정마저 다 사라져 버렸다. KBS와의 인터뷰에서 '''"나이 먹은 사람들은 FA 선언하지 말고 죽으라는 소리지. 보상 선수만 없어도 저희 아무 데나 갈 수 있어요."'''라는 폭탄 발언을 해버린 것이다.[17] # 자신이 이적하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제도 때문이며 제도만 아니었으면 자신을 받아줄 팀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표현한 것인데, 시즌 중에도 감독과 트러블을 빚은 선수가 이런 발언을 한다는 것은 팀에 대한 불만 및 낮은 충성도를 명백히 보여준다고밖에 해석할 수 없다. 그리고 그 다음날 선수들의 인터뷰가 모두 삭제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송광민의 발언은 짤방과 보이스리플로 이미 박제된 지 오래라 송광민에 대한 이미지는 FA 선언 이후 싸늘하게 돌아설 정도였다.
결국 1월 27일 한화 이글스와 2년 최대 16억에 FA 계약을 맺었다.# 계약금 3억에 연봉 2.5억, 옵션 연간 4억이다. [18] 팬들은 저렇게 대우를 해줬는데도 저런 발언을 했냐며 의아해하는 반응.
3.1.8. 2019 시즌
3.1.9. 2020 시즌
5월 5일 SK와의 시즌 개막전에서 4타수 3안타 2득점 중 2루타를 두개나 때려냈으며, 두개의 2루타 모두 득점으로 연결되며 승리에 크게 기여했고, 5월 6일 개막 2차전에서는 3타수 2안타 1홈런으로 9회초 2사 상황에서 하재훈의 144km/h 직구를 받아쳐 홈런을 만들었다.[19]
5월 7일에 열린 3차전에서도 5타수 3안타 2타점으로 불방망이를 이어갔다. 특히 6회초에만 두 차례 타석에 들어서 선두타자 안타로 출루했고, 타순이 한 바퀴 돌고 다시 들어선 2사 만루에서는 승부에 쐐기를 박는 2타점 적시타를 터트렸다. 여러 번의 호수비는 덤.
하지만 SK전 시리즈 이후 언제 그랬냐는듯 22타수 1홈런을 기록중이다. 5월 16일 기준 19타수 연속 무안타, 무볼넷 행진을 이어가며 아름다운 1주일은 끝나버렸다. [20]
5월 26일 무안타 1병살을 기록하면서 리그 병살 1위를 기록하였다. 중요한 상황에서 단 2구만에 병살을 치면서 은퇴식이고 뭐고 빨리 쫓아내라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5월 29일 SK전에서 5타수 무안타 2삼진을 기록하였다. 특히 9회 초 턱밑까지 추격한 상황에서 마무리 타자 삼진을 당하면서 폭풍같이 까였다. 그와중에 WAR*는 마이너스인건 덤.
5월 30일 SK전에서 치명적인 실책으로 동점을 허용한것도 모자라 2타수 무안타로 이쯤되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쓰는건지 궁금할정도.
5월 한달동안 보면 기껏 치는 것도 (결과적이지만) 역전되어 의미가 퇴색되는데다가 거의 대부분은 기회가 왔을 때 병살, 삼진, 뜬공으로 기회 날리는 것도 한두번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대체제가 없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넣는건지 감독이라는 사람은 3,4,5번 중 한 곳에 무조건 넣고 본다. 그렇다고 실책을 안 하는 것도 아닌데다가 실책 후 실없이 웃으면서 팬들의 화를 배로 만들고 있다.
6월 4일 멀티 실책으로 팀의 10연패에 기여했다.
최원호 감독 대행이 부임한 후 2군으로 내려갔다.
야구부장채널에서 송광민을 비롯한 한화의 노장 선수들이 야구도 못하면서 입만 댓발 나와서 팀 분위기를 망쳤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송광민에 대한 비판이 커지고 있다.
이후 6월 16~18일 SK퓨처스 상대로 10타수 6안타 6타점을 쓸어 담으며 노시환의 심각한 부진이 계속되면 1군에 올라오려는 시동을 거는 듯 하다.
6월 28일 KT전 쿠에바스의 공을 받아쳐 투런홈런을 쳤다.
7월 3일 두산전, 1:0으로 팀이 앞서있는 상황에서 7회말 무사 1루 상황에서 정수빈이 번트를 대 뜬 공을 기가 막히게 잡아내 5-3 더블아웃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아쉽게도 불펜이 불을 지르면서 팀은 2:1로 패배.
7월 7일, 11회 말 5:4로 팀이 리드당하던 중 2사 1.2루에서 동점 2루타를 쳐냈다. 그러나 경기 이후 어깨 통증을 느끼면서 8일 말소되고 말았다.
8월 15일, 0대 0 주자 1,3루에서 대타로 나와 시원한 병살타를 쳤다. 스탯티즈 기준 병살타 9위, 심지어 다른 선수들은 300타석 이상 타석에 들어서서 송광민과 비슷한 수치를 기록하고 있는데 송광민은 고직 134타석만에 9개의 병살타를 만들어냈다.
1,000경기 출장을 달성했다.
8월 21일 kt전에서 도망가는 쓰리런으로 팀의 5대 1 승리를 이끌었다.
8월 25일 대타 타석에서 병살을 치며 1사 만루의 기회를 제대로 걷어차 버렸다. 158타석 11병살이라는 엄청난 병살 기록을 계속 이어나가고 있다.
8월 26일 7회 초 1사 1, 2루 상황에서 대타로 나와 초구를 쳐 병살을 만들어내며 연이틀 대타병살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작성하고 159타석 12병살이라는 대기록을 또!!! 이어나가게 되었다.
8월 27일 1회 1사 1루 상황에 3번 타자로 나와 병살을 때려내며 160타석 13병살이라는 엄청난 기록과 함께 현재 시즌 병살 2위라는 업적도 달성하게 되었다.
9월 5일 7회말 2사 1루에서 노수광의 대타로 나왔으나 삼진으로 물러났고, 우익수 임종찬으로 교체되었다.
9월 6일 KIA전에서 1회부터 수비실책으로 1점을 내주더니 강재민이 등판한 이후 평범한 1루 땅볼을 잡지 못해 강재민에게 3자책을 안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공격에서도 삽질을 하면서 무려 7타점을 해먹었을 정도로 최악의 폼을 유지 중이다.
9월 8일 삼성전에서 10회초 2사 만루에서 지명타자 이성열의 대타로 들어갔으나 3구만에 중견수 플라이로 물러났다.
9월 9일 삼성과의 DH 1차전에서 선발 출장해 2회초 안타로 통산 1,000안타를 달성했고, 5회초 역전 투런포를 쳤다.
9월 11일 SK와의 시즌 최종전에서 8회말 2사 만루에서 정진호의 대타로 나와 추격의 2타점 적시타를 쳤다. 다만 후속 안타가 터지지 않으며 팀은 3:4로 패배했다.
9월 20일 KIA전에서 9번 1루수로 나와 136일만에 3안타를 기록했다. 나지완에게 선물받은 배트를 썼더니 공이 잘 맞았다고.
9월 22일 두산전에서 7번 지명타자로 출장해 4회말 아무도 기대하지 않은 도망가는 쓰리런을 쳤다. 8회말엔 1점 더 도망가는 적시타로 팀의 5:1 승리에 기여했다.
9월 25일 롯데전에서는 8회말 내야를 벗어나는 안타를 기록했고, 이 안타로 득점에 성공하며 팀의 승리에 기여했다. 4번째 타석에서 안타를 치고 출루할 때 나지완이 선물해 준 배트가 부러졌는데, 출루하고 나서 부러졌다고 엄청 아쉬워하는 모습이 잡혔다(...). 나지완이 준 배트를 쓰면서 16타수 7안타로 날아다녔으니 그럴 만도 했다.
10월 28일 연장 11회초 상대가 반즈를 고의사구로 거른 2사 1, 2루 상황에서 결승타를 쳤다.
시즌 내내 흐름 끊어먹는 병살타와 노쇠화로 인한 기량 약화로 욕을 미친듯이 먹었으나 문제는 송광민의 2020년 누적 스탯은 팀내 상위권이다(...) 이제 은퇴를 바라 볼 시점이 되긴 했으나 빈약한 1루와 3루 뎁스를 채우기 위해서라도 다음 시즌에 볼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11월 6일 한화에서 웨이버 공시되었다. 기사
4. 은퇴
웨이버 공시된 후 본인은 현역 연장 의지가 강하다고 밝히고 개인 훈련을 하며 다른 팀들의 연락을 기다렸지만, 어느 팀에도 불러 주지 않아 2021년 1월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 은퇴 후에는 고향 대전에서 유소년 야구 육성과 슬로피치[21] 활성화를 위해 힘쓸 계획이라고 한다. 현재 대전시 야구소프트볼협회 전무이사로 임명되었다고.
5. 플레이 스타일
소속팀에서 클린업 트리오에 배치되어 주로 3번 타자로 출장하기는 하나 전혀 중심타자 감은 아니다. 선구안이 나쁘고, 선수 본인이 차분히 보고 칠 생각도 안 한다. 에고도 강한지라 그 날의 분위기와 컨디션에 크게 좌우된다.[22] 주전으로 뛴 2014년, 2016년, 2017년 초구타율이 언제나 TOP3 안에 들 정도로 초구타율이 4할을 넘나든다[23] . 싱커, 포크볼 등의 떨어지는 변화구에 잘 속으며 상대가 포크볼을 한 번 잘 던졌다 싶으면 여지없이 스윙, 직구 킬러도 아닌지라 스트존에 오는 직구를 헛스윙해 팬들의 마음을 답답하게 하기도 한다. 스트라이크 존에서 살짝 떨어지는 변화구나 150km 초중반의 강속구에 약하며, 그런 투수가 선발로 나올 경우엔 투수의 변화구 제구가 삐끗하지 않는 이상 타격은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다.
또 투수와의 수싸움에 취약해 공을 길게 보지 못하고 팀배팅보단 한방으로 뒤집는걸 선호한다. 상대 투수가 흔들리던 말던 스트라이트 존 안도 아니고 그 근처 비슷하게라도 들어오는 공이 들어온다면 카운트에 관계없이 초구부터 배트를 휘두르고야 말아 타선에 찬물을 뿌리는 경우도 많다. 중심 타자에게 클러치 기회가 오면 기대해야하는데 오히려 위기 상황이라고 자조하는 팬들도 많다. 상대 투수는 투구수를 절약해 한 이닝을 더 나오는 효과까지 누리게 된다. 더군다나 최근에는 유격수 땅볼이 많아져 주자라도 1루에 있으면 병살타로 이어지고 있다.[24]
하지만 스트라이크존에 들어오는 변화구들은 여지없이 홈런, 상대가 커브나 체인지업을 제구 안된 곳에 넣는다면 가차없이 담장으로 넘기고 빠던을 날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25] 그래서 더 극적인 경기를 만들어내는 주인공으로 등극할 때도 많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직구 킬러는 아니지만 150대의 강속구가 아닌 이상 어느 정도 대처는 하고, 배드볼 히터인 만큼 컨디션이 좋은 경우에는 140대 직구는 충분히 잘 쳐낸다. 장타력은 시즌 초 산술계산으로는 풀타임 20홈런 100타점이 나오지만 밑에 서술할 유리몸 때문에 홈런은 10개 초중반, 타점은 70~80타점이 맥시멈이다. 18시즌에는 극심한 타고투저에 힘입어 18홈런을 기록했으나 출루율이 3푼 가까이 떨어지고 wRC+가 96.8로 리그 평균 이하로 떨어져 타격 생산성은 오히려 떨어졌다.
어깨는 외야수 전업을 시도했을 정도로 강견이다. 수비에선 맨손 캐치후 그림같은 레이저 송구를 할 때도 있지만, 상황판단이 오락가락해서 어쩔 땐 바운드 판단을 못해 클러치 실책을 하기도 한다. 아마시절에는 유격수였고 처음으로 주전으로 뛴 2009년에도 유격수로 뛰었으나 체격이 크고 잔부상이 많아 프로 1군 유격수론 힘들지 않겠냐는 지적이 많았고 소집해제 이후 유격수로서 실책이 너무 늘어나 3루수로 전업, 가끔 1루수로 나선다. 3루수로서 수비력은 16, 17시즌 모두 리그 3위 정도로 무난하다.
주루는 주력과 주루 센스 모두 평범한 수준. 똥차 소리 들을 수준은 아니나 단독 도루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위에 상술했다시피 산만한 피지컬에 안 어울리는 유리몸이다.[26] 소집해제 이후 부상으로 엔트리에서 빠질 때가 많은데, 햄스트링 통증으로 엔트리에서 빠지는 광경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종합하면 전성기에도 엄청 잘 하는 선수는 아니었지만 WAR 2.0 이상은 꾸준히 찍으며 한 팀의 주전으로 쓰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선수였다.
6. 연도별 성적
7. 기타
- 키움 이지영과 마찬가지로 초구를 좋아한다. 별명은 초구광민, 초구왕. 그런데 송광민은 볼카운트를 가리지 않는다. 초구건 원쓰리건 그냥 그때그때 자기 존에 들어오면 그냥 휘둘러 버린다. 가히 짐승의 영역.[27] 생각보단 감각에 의존하는 스타일이고 에고가 강하다보니 카운트 싸움에서 유리하든 불리하든 자기 스윙을 가져간다. 그래서 더 극적인 결승타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 스포츠 매거진 개인 인터뷰에서 초구를 노리는 부분에 관한 질문이 있었는데 그에 대한 답은 초구를 통하여 상황 판단을 한다고 한다. 자신의 몸 상태 등을 초구로 체크를 한다고 한다. 초구에 헛스윙을 한다고 해서 심적으로 위축이 되진 않다고 하였다.
- 배드볼 히터로 퍼올리는 스윙을 하기 때문에 슬럼프가 시작되면 꽤 길어지는 편인데... 2016년에는 긴 슬럼프 없이 꾸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냥 슬럼프를 씹어 먹는 짐승이 되었다. 한편 슬럼프가 오면 같은 이름을 가졌던 손아섭을 따라[28] 개명하라고 반장난으로 송아섭(...)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한다.
- 판타지 스타디움의 선수 기본 일러스트에서는 시원하게 풍기질을 하고 있고 이글이가 바람을 맞고 있다.[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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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학교 졸업사진이 아주 귀엽다. 출처
- 한화 이글스 갤러리의 아이돌 중 하나이다. '동바형', '송천재', '바보 아니면 천재', '치어리더 팡숙' 등 순박하고 친숙한 이미지와 선수 본인의 야구밖에 모르는 성실하지만 순수한 이미지가 뒤늦게 터진 포텐과 더불어 한화 이글스 갤러들에게 큰 인기를 끄는 중. 하지만 인스타그램을 하면서 이 이미지가 깨지고 있는데. 칰키워 어디 안간다는 듯이 한화팬들은 송광민의 문제로 게임을 지면 그의 인스타를 털어버리는데 물론 잘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송광민은 그것에 대해 제대로 해명 없이 그냥 해당 글을 쓴 아이디를 차단시켜버리는 병크를 저질러서. 올스타 이후 후반기에는 그의 별명이 '송차단', '그 인스타'라는 아주 좋지 않은 별명이 추가되어 버렸다. 더군다나 칰갤에 올라온 팬들의 항의 맨션 대부분이 인스타는 나중에 하고 연습해라, 요즘 야구하기 싫은 티가 난다[30] 등 욕이 없고 팩트만 쓰는 중인데도 그렇다. 결국 뒤늦게 시작한 인스타 계정을 닫아버렸다. 그런데 AG 이후 전반기때 보여주던 하드캐리하는 모습이 다시 나타나자 바로 "프로 스포츠에서 팬과의 소통은 중요합니다.", "인스타, 페북, 텀블러(...)까지 다 열어라."며 태세전환되었다. [31]
- 아버지가 택시 운전을 하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분의 택시에 타게 되면 높은 확률로 아들 자랑을 듣게 된다고. FA 계약 이후 송광민 본인이 직접 개인 택시를 선물했다고 한다.
- 은퇴를 한다면 절대 야구 일을 다시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었다. 코치진이니 뭐니 하기 싫다고 그랬는데 정작 2020 시즌 후 은퇴를 하고나선 대전 동구에 다목적 야구센터 건립을 추진 중이고 대전광역시 야구소프트볼협회 전무이사가 되면서 소프트볼 보급에도 힘을 보태고 있는 등 야구와 관련해서 여러가지 일을 하고 있다.
8. 관련 문서
[1] 2008년 김인식 감독 재임 시절 아직 수비 포지션이 자리잡히지 못했을 때 우익수로 시즌을 치른 경험이 있다. 이후 다시 유격수로 복귀. 2015년도에는 김성근 감독이 좌익수 전향을 시도하려다 부상이 커졌다. 그래서 다시 3루수로 복귀.[2] 포지션 변화 - 유격수-3루수-우익수- 유격수-3루수, 1루수로는 주로 경기후반에 교체되어 들어간다.[3] 동국대학교 (2002학번) 진학으로 실제 입단은 2006년.[4] 우_ -_-_-_~ 우 우~~[5] 한화 송광민~ (한화 송광민~) 이글스의 송광민~ 승리를 위해 워 ~ ~ ~ ~~ 빨라지면서 ×4[6] 바로 너야!(너야!) 한화의 카리스마 너야!(너야!) 한화의 슈퍼파워 너야!(너야!) 승리를 위하여 송!광!민![7] 수원 현대건설 힐스테이트 양효진의 응원가와 같은 원곡을 사용한다.[8] 2020시즌부터 인격권 문제 때문에 못쓰는 수준이라고 홍창화 응원단장이 인스타 라이브에서 얘기했다. 결과는 이번주 인스타 라이브에서 나올 예정이라고.[9] 날려라 날려라 날려보자(후~) 한! 화! 송광민! X4 [10] 올라잇~ 한화의 카리스마 한화의 슈퍼파워 바로 너야 그건 바로 너야×2 송!광!민! [11] 여담이지만 이 때 동국대 감독이 한대화다. 대학 동기생 박희수는 6라운드에 SK 와이번스로부터 지명됐다. 2010년 한대화가 한화 감독으로 오면서 잠시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12] 시즌전에 트레이드로 급하게 데려온 이대수와 두산에서 방출되었다 한화에 입단한 정원석이 핵심으로 활약했고, 김태균과 이범호의 이적에 전시즌 맹활약을 펼친 이도형까지 부상으로 아웃되어 섹시가이 전근표가 4번으로 출장하기도 한 꿈도 희망도 없는 라인업이었다.[13] 송잉여라고 불리다가 내야를 함께 지키던 대학동기 이여상과 엮여서 송잉여상이라고 주로 불렸다.[14] BB/K비율이 0.29다. 통산 62볼넷에 301삼진인데...통산으로 봐도 0.20언저리다(...).[15] 펜스플레이는 물론에 중계도 괜찮은 모습을 보여줬다. 외야 펜스 앞에서 2루까지 노바운드로 송구했다.[16] 후술하겠지만, 송광민은 전형적인 배드볼 히터다.[17] 이 발언은 박제되어서 보이스리플로 간간이 쓰인다.[18] 보장액이 8억, 옵션이 8억으로 정말 송광민이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연봉이 결정나는 구조가 되었다.[19] 하재훈의 한화 상대 통산 첫 피홈런이자 첫 자책점이다.[20] 5월 23일 한화 카트라이더 팀이 카트라이더 리그 팀전과 개인전에서 모두 우승을 거두면서 일부 한화팬들이 '''"고작 2시즌 운영한 카트라이더 팀이 35시즌 째 운영중인 야구단보다 우승을 많이 했다."'''면서 나온 드립. 카트라이더 팀 운전기사 하라는 말도 나왔다(...) 동반 부진중인 이성열도 같은 말을 듣는 중. [21] 소프트볼을 이용하는 생활 스포츠의 일종으로, 공을 높고 느리게 던져준다.[22] 같은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중심타자인 김태균과 정반대 스타일이다. 물론 에고가 강한 건 공통점이지만.[23] 의외로 나성범, 이대형 등에게 밀려서 1위는 하지 못했다.[24] 발이 느리지 않음에도 타구속도가 빠르기에 그럴 수도 있다.[25] 이 점을 알고 있는 차명석 해설이 코치 시절 절대로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가는 변화구를 던지면 안된다고 지도했다.[26] 이건 김인식 시절 2군에서 다 같이 썩던 빅뱃 유망주 김태완, 최진행도 공유하던 문제점이었다. 모두들 덩치는 산만한데 수비 못하고 잔부상을 달고 다녔다. 타고난 것도 있겠으나 개판이었던 한화 관리시스템에도 원인이 있는 걸로 보인다.[27] 이런 플레이 스타일 때문에 기록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 바로 133경기 체제에서 규정타석을 채운 선수 중 단일 시즌 최소볼넷 1위(09년, 12볼넷)라는 기록. [28] 손광민에서 손아섭으로 개명하였다.[29] 참고로 송광민의 2016기준 통산 볼넷이 118개이고 김태균의 2016시즌 볼넷이 108개로, 단 10개 차이다.[30] 특히 태업을 의심케하는 의욕없는 스윙으로 물러난 후 한용덕 감독에게 공개적으로 질책당하는데 뚱한 표정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본 후 더 팬심이 돌아섰다. 나중에 부상때문에 제 기량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속사정이 있었다만...[31] 사실 이건 거의 모든 디시 야구팀 갤러리가 지닌 문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