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물포고등학교 야구부
1. 연혁
한국야구사 처음으로 야구 경기가 벌어진 웃터골 운동장 위에 건설된 제물포고등학교 소속 야구부. 이런 역사를 생각해보면 일찍이 창단되었어야 하나 이런저런 문제 등으로 고교야구 붐의 마지막이었던 1982년에 창단되었다.
창단 3년째인 1984년 허정욱[2] 이라는 에이스를 앞세워 청룡기에서 돌풍을 일으켰지만 탄탄한 전력의 구축했던 조규제와 이광우의 군산상고에게 패하면서[3] 준우승에 그쳐 첫 우승의 꿈은 날아갔고,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에는 최약체로 지냈다. 이후 90년대 후반 잠시 반짝하여 비록 메이저 대회는 8강에 그쳤지만, 1999년 부산에서 열린 화랑대기 우승에 성공하는 등 어느 정도 반등에 성공했다. 그리고는 다시 인천지역의 명문인 인천고와 동산고의 위세에 눌려 쭉 하락세를 보였다.
제물포고 야구부가 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후반부터였는데 동문들의 전폭적인 투자들을 등에 업고[4] 전국 8강권 팀으로 성장했다. 2009년과 2010년에는 지역 전국대회인 미추홀기에서 2년연속 우승을 하였다. 메이저 대회와 우승을 노렸던 2010년에는 이현호를 앞세운 투수력으로 청룡기 결승 진출에 성공하며 우승에 도전했지만, 심창민-한현희가 버틴[5] 경남고에 패하면서 우승의 꿈은 다시 사라졌다. 그래도 이 때 이후로 인천야구에서 양 강에 뒤쳐지는 3자가 아니라 동등한 세 팀으로 인정받는 추세. 그리고 4년 후 동국대 포수 이현석은 SK의 1차 지명, 단국대 투수 이창재는 KT의 2차 1라운드 지명을 받아 2010년 졸업반은 고졸로 이미 두산에 지명되었던 이현호와 함께 대박을 쳤다.
2. 지역 학교와의 라이벌리
2.1. vs 인천고등학교
인천고와 제물포고는 지역 최고의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관계다. 운동부 때문에 생긴 라이벌이 아니라 학교 자체 간의 자존심 싸움이다.
원래 제물포고의 뿌리는 일제시대 부터 있던 인천중학교다. 더불어 당시 인고는 인천상업학교로서 전국 탑클래스의 상업학교로 있다가 한국동란 중 학제개편과 더불어 인천고등학교로 개편되었고 인중은 제물포고, 인중으로 분리가 되었다. 당시에는 중고교 병설 시스템이었던 관계로 인고도 병설중학교를 만드는 데 이것이 상인천 중학교이다. 이는 당시 인고가 배다리, 현재의 정보산업고 자리에 있었는데 동인천을 상인천, 인천역을 하인천으로 부르던 까닭에 이렇게 명명한 것이다.
1981년 이전까지 인천은 경기도 소속으로 제고와 인고는 도내 1,2위를 다투는 명문고로 한 때 "누가 서울대를 더 많이 보냈느냐?"를 두고 선의의 경쟁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82년 제물포고가 인천고에 대항하기 위한 방안으로 야구부를 창단했다. 자연스럽게 자존심 싸움의 현장은 야구장으로 넘어왔다. 문제는 신생팀인 제물포고의 실력이 인천고에 한참 못미쳤다는 점. 일제 강점기 때부터 야구부를 운영한 학교와 1980년대에 창단한 학교가 비교의 대상이 될 리는 없었다. 그래도 인천의 진짜 명문이 누구냐를 두고 벌이는 자존심 싸움이었던지라 양 교는 치열하게 경쟁했다. 물론 10번 경기를 하면 8~9번은 인천고가 이기는 형국. 그것도 콜드게임(...). 제물포고 안습
두 학교 대결의 백미는 1991년부터 시작된 양교 정기전. 매년 5~6월에 열리는 인천고-제물포고 정기전은 야구, 배구, 농구 등의 종목에서 우열을 가리고 있다. 이 중에서도 하이라이트는 단연 야구다.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인천고가 제물포고에 한참 앞섰지만 제물포고 동문회가 야구부에 공격적인 후원을 단행하면서 제물포고의 성적이 많이 올라왔다. 그러나 이 정기전은 2014년 이후로 단 한번도 열리지 않고 있다.
현재는 서로 엇비슷한 전력을 두고 있다.
2.2. vs 동산고등학교
제물포고와 동산고는 라이벌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감이 있다. 70년에 가까운 동산고의 야구 역사에 비해 제물포고의 야구 역사는 절반 밖에 안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야구 실력까지 동산고에 밀리면서 라이벌이라고 하기 어려운 상황이 있었다.
2000년대 중반부터 제물포고 동문회의 공격적인 후원에 힘입어 제물포고의 실력이 급상승했지만 여전히 두 학교는 라이벌이라고 하기 보다는 그저 지역 내 평범한 경쟁학교 수준에 불과하다. 다만 두 학교의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기 때문에 심리적으로는 매우 가까운 관계다
3. 여담
4. 출신 선수[6]
[1] 나무위키 등록선수 한정. 졸업 연도 순.[2] 제물포고가 배출한 최초의 프로야구 선수로 고려대학교를 졸업한 후 1989년 신인 지명 당시 고향팀 태평양 돌핀스의 1차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그러나 프로 선수 생활은 길지 못했는데 1989년부터 3시즌동안 41경기에 출장해 10승 12패의 성적을 냈고 그나마 1990년 한 해에만 7승 2패의 성적을 기록했다. 이후 현대 유니콘스에서 스카우터 생활을 시작해 현재는 SK 와이번스에서 신인 영입 업무를 책임지는 스카우트그룹 매니저로 활약하고 있다.[3] 1984년 청룡기 결승전 중계 영상에도 나오지만 제물포고 야수진의 허술한 수비가 결정적 패인이었다. 한 경기에 무려 7개의 실책을 남발한 탓에 자멸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군산상고에 5점 밖에 주지 않았던 것은 그만큼 허정욱이 잘 던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실제로 허정욱은 결승전에서 5실점했지만 이 실점이 모두 실책으로 발생했기에 비자책점으로 기록됐다.[4] 학교 문서에도 나오지만 이 학교 출신 인물들의 면면이 상당히 화려하다. 고교 평준화 실시 이전인 1960~1970년대 당시 서울대학교에 수십명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으며 정치권부터 학계, 법조계, 경제계, 언론계 등 곳곳에 여러 인물들을 배출했다.[5] 서진용, 그리고 김우경도 마운드를 지켰다. 김우경은 고3때 지명받지 못하고 롯데 신고선수로 입단했다.[6] 나무위키 등록선수 한정. 졸업 연도 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