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정수

 


'''심정수의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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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수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펼치기 · 접기 ]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95'''
'''2003'''
'''2004'''
'''2005'''
'''2006'''



'''KBO 포스트시즌'''
'''2000 플레이오프 MVP'''


'''2007 KBO 리그 홈런왕'''


'''2007 KBO 리그 타점왕'''


'''2003 KBO 리그 장타율왕'''


'''2003 KBO 리그 출루율왕'''

[image]'''2002,2003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선정 올해의 선수'''

보유 기록
133개
한 시즌 최다 4사구


'''심정수의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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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 베어스 등번호 4번'''
김광수(1982~1993)

'''심정수(1994)'''

윤기수(1995-1996)
'''OB / 두산 베어스 등번호 32번'''
윤기수(1994)

'''심정수(1995~2000)'''

빅터 콜(2001~2002)
'''현대 유니콘스 등번호 44번'''
윤인섭(2000)

'''심정수(2001)'''

장광호(2002)
'''현대 유니콘스 등번호 32번'''
장광호(2001)

'''심정수(2002~2004)'''

오윤(2005~2007)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32번'''
손주인(2003~2004)

'''심정수(2005~2008)'''

강희성(2009)



[image]
'''이름'''
심정수(沈正洙)
'''생년월일'''
1975년 5월 5일 (49세)
'''출신지'''
[image] 서울특별시 강북구
'''국적'''
[image] 대한민국
'''신체'''
182cm, 100kg
'''출신학교'''
서울수유초-동대문중-동대문상고[1]
'''포지션'''
'''우익수'''[2], 좌익수[3], 지명타자[4], [5]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4년 고졸 연고구단 자유계약 (OB)
'''소속팀'''
'''[image] [image] OB·두산 베어스 (1994~2000)'''
[image] '''현대 유니콘스 (2001~2004)'''
[image] [image] 삼성 라이온즈 (2005~2008)
'''응원가'''
Joan Jett - 'I love Rock AND Roll'[6]
'''배우자'''
홍성순(1975년생)[7]
'''자녀'''
장남 심종원(미국명: 제이크 심)(1997년생)[8]
차남 심종현(미국명: 케빈 심)(2002년생)[9]
삼남 에릭 심[10]
'''종교'''
불교
1. 소개
2. 선수 경력
3. 타격 스타일
4. 은퇴 후
5. 약물 의혹 누명
5.1. 반박
6. 선수 평가
7. 기타
8. 연도별 기록
9. 관련 문서


1. 소개


OB/두산 베어스, 현대 유니콘스, 삼성 라이온즈 소속의 외야수.
'''헤라클레스'''로 불리우며 '''이승엽과 함께 2000년대를 대표하는 홈런타자'''이자 2003 시즌 WRC+ 210, 2002-2003 2년 연속 3할-40홈런-100타점을 기록한 리그 최상위의 거포였지만[11] 이승엽의 기록과 스타성에 가려진 '''2인자 슬러거'''다.[12]
타이틀보다 각종 질적 수치를 강조하는 팬들은 2003 MVP는 이승엽보다 심정수에게 더 자격이 있다는 주장도 있지만, 2014년도에 WAR, WRC+ 1등이던 강정호도 200안타 서건창에게 밀렸고 2018년도에는 박병호가 WRC+ 1위였지만 약물 시비를 받던 홈런/타점왕 김재환에게 MVP를 주고 말았다. 김태균도 2012년도에는 박병호보다 타율, OPS, WAR, WRC+ 모두 앞섰지만 박병호에게 골글, MVP 모두 내주었다. 이승엽은 2015년도에도 최준석보다 성적이 밀렸지만 골글을 탔다. 어느 리그든지 MVP는 주요 기록의 가치, 타이틀, 인지도를 중시하는게 현실이다. 지금 2003년도 MVP를 투표해도 당시의 기록이 한국(+아시아) 최고 기록이었음을 감안하면 심정수가 56홈런 타이나 4할이라도 기록하지 않는 한 이승엽이 수상할 가능성이 크다.[13]

2. 선수 경력



2.1. OB/두산 베어스 시절


[image]
'''풋풋했던 신인 시절'''
[image]
<color=#373a3c> '''두산 시절, 특유의 기마자세 타격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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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한 웨이트 트레이닝이 제대로 빛을 발한 1999년'''[14]
[image]
<color=#373a3c> '''공포의 클린업 우동수 시절'''[15]
[image]
<color=#373a3c> '''공포의 클린업 우동수 시절'''[16]
학창 시절에는 동대문상고에서 유격수로 뛰었다. 이 때 보디빌딩을 하는 친구들로부터 근육 만드는 법을 배워서 일찍부터 감자, 달걀 흰자, 우유 등을 먹으며 몸을 키웠다고 한다. 덕분에 미래의 거포 감으로 OB 베어스에서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접촉했고, 한양대학교로의 진학과 프로 입단 사이에서 최종적으로 프로 입단을 선택했다. 이 때가 1994년. 같은 년도에 데뷔한 '''김재현'''과 라이벌로 보지않고 '''김동주'''를 라이벌로 엮으며 오히려 '''조인성'''과 엮는 팬들이 종종 있었다. 왜 엮어놓았는지는 불명.
첫 해에는 1군과 2군에서 사이에 방황을 하였다가 2년차인, 1995년에 본격적으로 1군에 콜업되었다. 내야수 주로 3루수를 봤지만 1루 송구시 대부분 내야 그물로 빗나갔다고한다. 이 때 별명이 소년장사[17], 공포의 8번타자. 그러다가 김인식 감독과 면담으로 외야수로 전향, 감독의 배려로 부담감 없이 장타력을 마음껏 발휘해 보라는 차원에서 8번에 들어갔다. 심정수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김인식 감독은 예의 '''믿음의 야구'''를 시전, 10경기 연속 '''무안타'''를 쳐도 서너번 연속 '''삼진'''을 당해도 심정수를 계속 내보냈다고 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너는 삼진 먹어도 되니까 니 마음껏 돌려."였다고. [18]
결국 .282, 21홈런, 59타점이라는 8번타자로서는 가공할 만한 성적을 내며 1군 데뷔시즌을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마무리하게 된다. 당시 장타율(.508)은 팀 선배이자 그 해 홈런왕이자 MVP였던 김상호보다도 높은 팀 내 1위. 물론 이것은 김상호의 타격 정확성이 나쁘기 때문이기도 했다.잠실더비
이후 2년 동안의 조정기를 거쳐서[19] 본격적인 활약은 1998년 타이론 우즈, 김동주와 함께 '''우동수 트리오'''가 구축된 시점부터 시작되었다.[20] 우동수 트리오의 5번 슬롯에서 활약하던 3년(1998~2000) 동안 심정수의 성적은 .311 79홈런 274타점 OPS '''.935'''. 이 기간 동안 심정수보다 좋은 성적을 낸 타자는 타이론 우즈와 이승엽 둘 뿐이었다. (동기간 중 둘의 바로 밑급이던 김기태, 양준혁, 마해영과 동급) 특히, 2000년 LG와의 라이벌전인 플레이오프 4, 5, 6차전에서 연속으로 결승 홈런을 날려 팀을 한국시리즈에 올리는 1등공신이 되었다. 해설자 모두들 함성을 짓게 만든 덕아웃 시리즈였다.[21] 당연히 플레이오프 MVP도 그의 몫이었다. 이 활약으로 심정수는 한국판 '미스터 옥토버'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2001년 현대에서도, 2005년삼성으로 넘어가서도 심정수는 가을야구 때 큰 거를 쳐준다. 그리고 또 얼굴 생김새가 비슷하게 생긴 먼 후배뻘 정수빈도 가을에 펄펄 뛰고 다닌다.[22]
바야흐로 본격적인 잠실 거포 시대를 여나 했는데...

2.2. 현대 유니콘스 시절


[image]
'''그 누구도 반박 할 수 없을 심정수의 최전성기'''
현대에서의 4년 동안 521안타와 133홈런이라는 클래식 스탯과 0.301-0.417-0.584에 '''OPS 1.001'''이라는 숫자를 만들어내며 현대 왕조의 중심타자로 활약했다.
2000년 말의 제2차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사태에서 마해영, 양준혁, 송진우, 김재현 등과 함께 핵심 멤버로 활동했다.[23] 선수협 건은 결국 공정거래위원회의 중재로 잘 마무리되었지만, 선배들이 맞은 트레이드 후폭풍을 그 역시 비켜갈 수 없었다. 2001년 초 두산은 심정수보다 나이가 많고 공격력은 떨어졌던 외야수 심재학현대 유니콘스에서 받는 대가로 심정수를 트레이드 처리한다.[24] 이 때 정들었던 두산을 떠난다는 생각에 펑펑 울었다고 한다.[25]
그리고 '''이 때부터 그의 본격적인 각성이 시작되었다.'''
새로 옮겨간 현대 유니콘스는 심정수가 딱 좋아할 만한 '''연습덕후'''(…) 분위기였다.[26] 김용달 타격코치의 조언을 받아 타격자세를 수정한 심정수는 2001년 시즌 초 무서운 성적을 냈으나, 그 해 6월 롯데 자이언츠 투수 강민영의 투구에 얼굴을 맞는 바람에 '''광대뼈가 함몰되는''' 부상을 당하고 좋았던 페이스를 잃어버리게 된다. 당시 시즌 아웃이 유력했으나, 1달 만에 복귀하였고, 이후 심정수가 1군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 쓰고 있던 헬멧이 안면부를 보호해 주는 이른바 검투사 헬멧. 그에게 있어서 선수생활때 팬들은 헬멧을 중요시 여겼다. 참고로 심정수는 2003년 초에 롯데와의 경기에서 투수 박지철의 공에 '''같은 부위를 맞고 또 부상을 당해서''' 검투사 헬멧을 다시 써야 했다.[27] 안 그래도 롯데가 심정수를 '''3번'''씩이나 맞히면서 사태가 더 커졌다.
2002년 이후 심정수는 타격 폼을 마크 맥과이어같은 폼으로 확 바꾸면서 홈런을 40개 이상 기록하는 등 홈런개수가 확 늘어난다. 당시 김용달 타격코치는 정말 집요하게 심정수에게 자신의 말대로 타격폼을 바꿀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28] 심정수의 방까지 찾아와서 괴롭힐 정도였다고. 심정수는 자기 나름대로의 야구 철학이 있었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김용달의 의견을 처음에는 외면하다가, 정말 집요하게 자신에게 매달리는 코치의 모습을 보면서 딱 한 번만 믿어보자 싶었다나. 결국 그 결정이 대박을 냈다. 김용달 타격코치는 늘 자신의 의견을 지나치게 선수들에게 강요한다는 악평이 따라다니는데,[29] 그의 고집이 빛을 발한 드문 케이스. 여하간 2002년, 2003년 두 해에 46홈런과 53홈런을 연달아 쏘아올리면서 이승엽과 본격적인 선의의 경쟁을 펼쳤지만 두 해 다 아쉽게 홈런 2위에 머물렀다. 2002년엔 정규시즌 마지막 날에 이승엽이 연장전에서 홈런을 쳐서 공동1위는 아쉽게 무산되었다.
[image]
'''자신의 라이벌인 이승엽과 함께 홈런왕 경쟁을 하던 2003년'''
특히, 2003년은 심정수 본인뿐 아니라 한국야구 역사에 남을 기록을 작성한 해였는데, 연초에 이승엽과 함께 초청선수 자격으로 참가한 플로리다 말린스의 스프링캠프에서도 당시 스카우트들에게 "지금 당장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와도 좋을 선수"라는 평을 받았으며 MLB닷컴 메인에도 올라가는 등 화제를 뿌렸고, 정규시즌에서는 53홈런뿐 아니라 .335 / .478 / .720 OPS 1.198이라는 말도 안 되는 높은 생산성을 과시했다. 삼진은 63개였는데 '''볼넷이 124개인데다가, 이 해의 4사구 개수는 133개로 역대 KBO 단일시즌 1위의 기록이다.''' 그야말로 타석에서 '''공포'''의 존재였다. 지금 저렇게 친다면 홈런왕 따위는 기본적으로 따놓은 당상이겠지만 하필 이 해에 또 '''이승엽'''이 홈런을 56개 치는 바람[30]에 또다시 2인자로 남고 말았지만, 그 해 소속팀의 승리에 가장 많은 공헌을 한 선수는 명실공히 심정수였다. 이는WAR 11로 타자 단일 시즌 중에는 랭킹 3위다.(이승엽 .301 / .428 / .699, 심정수 .335 / .478 / .720)
실질적인 타자의 득점공헌도를 판단하는 WRC(weighted runs created)는 이승엽이 139.3, 심정수가 153.6[31] 또한 이승엽이 1루수였던 반면 심정수는 우익수였으며 심정수의 소속팀은 그 해 정규시즌과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끝내 홈런왕, 타점왕, MVP를 이승엽이 가져가자 심정수의 아내는 속상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대신에 타율, 출루율과 장타율은 이승엽보다 높아서 출루율과 장타율 부문 1위. 타율은 2위.[32] 그리고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도 2002~2003 2년 연속 수상. 그리고 한국시리즈 우승은 덤, 팀내에서 정민태와 함께 최다 연봉인 7억을 찍었다. 당시만 해도 정민태의 7억은 김광현양현종이 경신하기 까지 투수로는 장기간으로 남아있던 기록이였다.
여튼 2003년은 이승엽도 대단하지만 심정수같은 성적이야 말로 충공깽 같은 성적이다.[33] 단순 홈런 수치로만 봐도 현대에서 4년 간 통산 133홈런을 쳐내 OB-두산에서의 7년간 통산 홈런 121개를 월등히 뛰어넘는다. 이 시절이 심정수의 진정한 리즈시절.
그리고 이 화려한 세월이 지나가면서 그의 몰락이 곧바로 시작되었다. 몰락의 원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부상, 또다른 하나는 라섹수술. 특히 무릎과 어깨가 문제였다. '''지나치게 송구 연습을 열심히 한 탓에'''[34] 심정수의 어깨 회전근은 2003년 시즌 이전부터 심각하게 손상되어 있었고, 바꾼 타격 폼을 정착시켜서 장타를 늘리기 위해 무리하게 스윙연습을 하는 통에 무릎에 무리가 갔던 것이다. 김용달 타격코치의 조언에 따라 바뀐 타격폼이 기존보다 무릎을 많이 사용하는 폼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장종훈과 비슷하게 지나친 훈련이 도리어 해가 된 케이스.
결국 2004년 시즌 심정수는 우익수와 지명타자 자리에서 뛰며 전 시즌보다 1할 가까이 낮은 타율을 기록했고, 이러한 부진 때문에 평소 갈망하던 메이저리그 진출을 완전히 접게 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04년 초 라섹 수술을 받았는데, 이후 밤에 움직이는 물체의 빛이 번져 보이는 야구선수로서는 치명적인 후유증을 약 1년여 간 겪었다고 한다. 그 결과 타격 정확성이 저하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홀로 분전하던 양준혁의 뒤를 받쳐 줄[35] 우타거포를 물색하던 삼성 라이온즈가 2004 시즌 후 FA로 풀린 그에게 손을 내밀게 된다. 결국 박진만에 이어 심정수까지 삼성에 내준 현대는 이어지는 해 거짓말처럼 7위를 기록했다.[36]
현대가 만약 돈이 많고 팬들이 많이 있었더라면, 심정수를 물론 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현대2000년 서울 연고를 선언하고 인천을 박차고 나오면서 팬층이 다 떨어져 비인기 구단으로 전락한 데다[37] 2001년 모기업 현대전자의 '''부도'''로 돈까지 없어진 상황이었다. 결국은 공인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 박진만을 놓치고, 프랜차이즈로 등극(?)할 수 있었던 심정수마저 떠나게 되었다. 이후 현대가 개박살나고, 몇 년 후 새로운 연고지 팀이 들어왔다.
게다가 신인 1차 지명권 박탈, 유망주 농사 폭망[38]이 겹치면서 그렇게 현대는 멸망했다.

2.3. 삼성 라이온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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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올스타전에서 친정팀 두산 동료 박명환, 정수근, 홍성흔과 함께.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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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런왕에 오른 2007년 시즌
2008년 시즌. 저 유니폼이 출시 된 지 1년조차 되지 않아 은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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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섹 수술을 받은 후 시력 저하의 후유증을 겪고 있었던 심정수는 시력 검사로 인한 메디컬 테스트 탈락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눈을 문제 삼는 구단과는 얘기 안한다'''는 선언을 했고, 마침 이승엽마해영의 이적[40]으로 인해 약해진 타선을 다시 보강할 겸 우타 거포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삼성 라이온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4년 최대 60억 원'''[41] 이라는 엄청난 돈을 들이며 심정수를 영입한다.
이후 그가 먹튀로 전락했기 때문에, 팬들은 심정수의 메디컬 테스트 거부가 정당하지 못한 행동이었다고 비판했다. 이는 기본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문제는 삼성 라이온즈에서도 심정수의 부상을 알면서 영입했다는 점이다. 심정수의 은퇴 즈음하여 삼성 구단 관계자들은 심각한 부상이 있더라도 '''심정수는 성실한 선수이기에 재활에 쉽게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삼성 프런트에게는 최악의 선택이 되고 말았다... [42]
한 마디로 삼성판 갈락티코스 정책.
계약 첫 해였던 2005년에는 롯데 자이언츠와의 개막 2연전에서 2년차 신예 장원준에게 만루홈런을 뽑아내는 등 5월까지는 엄청난 활약을 보였으나 6월부터 부상이 악화되며 부진을 거듭했고 7번타자로 내려가는 등 수모를 겪으며 .275, 28홈런 87타점 OPS .903으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망한 시즌이라는 게 OPS 9할[43] 이다.''' 게다가 시즌 홈런도 2위!(참고로 1위는 래리 서튼) 이 시기부터 어깨 부상과 수비 범위 감소로 인해 좌익수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리고 2006년 초 수술을 결심, 왼쪽 무릎과 오른쪽 어깨를 독일에서 수술하고 그 해를 통째로 재활에 날리게 되었지만[44] 한국시리즈에는 정상적으로 출장했다. 다음 해인 2007년에는 안경을 스포츠 고글에서 옛날의 뿔테로 바꾸고 타석에 등장, 31홈런과 101타점을 기록하며 53홈런을 칠 때도 해보지 못했던 타점왕과 홈런왕 타이틀을 함께 거머쥐었다. 그러나 타율은 막장. 1995년 한때 팀선배였던 OB 베어스의 김상호가 세운 25홈런, .272를 뛰어넘는 .258라는 '''최저타율 홈런왕과 타점왕'''[45] 기록을 수립하였다. 당해 시즌 초반에 극심한 타격슬럼프가 원인이기도 했고, 거기에 이 해 심정수는 단 한번도 3안타 이상을 기록한 경기가 없었다. 그러나 출루율이 무려 '''.381'''로 타율보다 1할 2푼가량이 높았고 OPS는 0.896이었으며 거기에 2007년은 2006년에 이어 투고타저가 여전한 해였다. 덕분에 WAR은 5.15에 wRC+는 153.8이라는 대단한 스탯을 기록했다.[46] 낮은 타율로 인해 생산성이 저평가받은 케이스. 반대로 높은 타율과 출루 생산성으로 타점보다 득점 기여도가 높은 KIA 시절의 '''장성호'''가 이런 케이스였다. 팬들은 심정수의 정확도 하락에 대단히 아쉬워하면서도 여전히 장타력은 살아 있음을 확인했고, 2008년에는 더 나아질 거라며 기대했다.
그러나 2008년이 돌아오자 왼쪽 무릎 부상이 재발했다. 결국 시즌 아웃. 역시 한 시즌을 통째로 날리며 재기와 명예회복을 노렸지만, 그의 선수생활에 결정타를 날린 것은 바로 라섹 수술이었다.[47] 안경을 쓰는 것이 불편했던 탓에 한 안과 의사를 소개받아서 라섹 수술을 받았는데, 그 수술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그로 인해 발생한 두통과 어지럼증 등의 후유증 때문에 야구를 하기 어려워졌던 것이다. 결국 이 때문에 은퇴하기엔 이른 33세의 나이에 갑작스러운 '''은퇴'''라는 것을 선택했다. 다음 시즌에 부활하리라는 보장이 어려운 상황에서 현명한 판단일 수도 있겠지만, 삼성 팬들에게는 안 좋은 기억이 될 수밖에 없었다.(…) 팬들 입장에서도 여러 모로 아쉬움이 많이 남는 선수.

3. 타격 스타일



심정수 커리어 홈런 하이라이트

4. 은퇴 후


은퇴 직후에는 잠시 삼성의 어린이 야구교실에서 리틀야구 팀을 지도하다가,[48]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스포츠 매니지먼트와 야구이론을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 양준혁이 했던 "내가 야구하면서 본 야구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이승엽과 심정수다"라는 칭찬답게 타격이론에 해박하고 평소 영어에도 관심이 많아, 국내 복귀 후 어느 팀이든 간에 지도자 생활이 가장 기대되는 선수이다. 덤으로 선수 시절 내내 끊임없는 영어공부를 많이한 성실한 선수로 기억되는 선수이다.[49]
이후에는 미국에 아예 정착한 듯. 다만 미국에서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다가 실패하고 정리한 적이 있다고 한다.
2009년 기사
2011년 3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 연수 간 전준호가 심정수 집에 들러 찍은 사진. 샌디에이고 주립대(UCSD)에서 스포츠 심리학을 전공 중이라고 한다.
2015년 1월 LG 스프링캠프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야구하는 아들들 뒷바라지하는 재미에 빠진 듯. 조만간 그라운드에서 심정수 2세들을 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2020년에 그의 장남 심종원이 KBO 신인 드래프트 참가를 신청하면서 오랜만에 매스컴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는데, 이 덕분에 5년 만의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5. 약물 의혹 누명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근거가 부실한 억측'''에 불과하며 이미 대다수의 야구팬들은 악의적으로 퍼트리지 않는 이상 '''쉰 떡밥'''으로 취급하는 수준의 낭설이다. 하단의 내용은 예전에 떠돌아다니던 주장들.
심정수 금지약물복용설은 은퇴시기였던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야구 커뮤니티에서 심심치 않게 나오는 떡밥이었다. 평균 20~30홈런 내외를 기록하던 선수가 갑자기 50홈런 가까이 치게 된 것에 대해서도 의심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으며,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OB 시절과 전성기인 현대 유니콘스 시절의 심정수를 비교해보면 야구선수에서 보디빌더 수준으로 몸이 불어났다가, 삼성에 간 이후로는 다시 몸이 작아져 은퇴 후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 즈음엔 '''전준호보다도 몸이 작아져 있다.''' 그리고 선수 생활 마지막인 삼성 시절에 시력저하와 무릎부상 등으로 결국 은퇴했는데, 금지약물을 장기간 사용했을 시 나타나는 전형적인 부작용이 시력저하와 무릎부상이라 의혹을 사기가 충분했다. 한창 리즈시절 때 국가대표를 계속 불참한 것도 의구심을 증폭시키는 데 한 몫했다.[50] 그래서인지 KBO 선수 중에서 직접 걸린 소수의 선수를 제외하면 비공인 약물 의심 선수 1순위이다.
가장 의심가는 행동은 2004년 FA 때 삼성이 영입하면서 계약서 작성 전에 기본적으로 해야 되는 '''메디컬 테스트를 거부'''한 것. 당시 거부하면서 했던 말이 명언인데, '날 못 믿는 팀에서는 선수 생활 안 한다'였다.

5.1. 반박


  • 급격히 늘어난 홈런
심정수가 20~30개만 치던 시절은 리그가 '''투고타저'''였던 시절인데다 가장 홈런이 나오기 힘든 '''잠실구장을 홈으로 썼을 때'''의 이야기다. 일반적으로 잠실을 홈구장으로 쓰면서 두자리수 홈런을 꾸준히 기록하는 정도만 되어도 확실한 일발장타력을 갖춘 선수라고 평가받으며, 20홈런을 넘겨본 타자일 경우 적어도 파워만큼은 확실하게 검증된 선수로 평가받는다. 체격이 꽤나 슬림했었던 프로 2년차에 이미 1위 김상호와 불과 4개밖에 차이나지 않는 21홈런을 기록하기도 했으며 OB-두산 시절 100경기 이상 출전했던 다섯 시즌에는 언제나 18홈런 이상을 쳐줬다. 따라서 없었던 파워가 생긴 것이 아니라 체격과 관계없이 원래부터 톱클래스의 파워 포텐셜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후 두산에서 홍성흔이 잠실구장을 벗어나 사직을 쓰는 홍성흔이 롯데로 갔을때도 18홈런이 커리어하이였던 홍성흔이 커리어하이 26홈런에 잠실에서 4할 초반대의 장타율이 5할이 된 것을 보면 클래스가 있는 선수가 잠실 이후 다른 구장에 가서 타격이 늘어나는 경우는 계속 나오고 있다.[51]
결국 엄청난 투수친화 구장인 잠실구장에서 훨씬 타자친화 구장인 '''수원구장'''[52]으로 홈구장을 옮겼고, 때마침 1999~2003년의 기록적인 '''타고투저''' 시기에 접어든 상황에서, 이승엽이라는 당대 최고의 강타자이자 경쟁 라이벌이 생기면서 홈런 레이스를 발맞춰주게된 영향까지 자연스러운 전개가 된다. 또한 김용달 코치와 함께 타격 폼도 바꾸면서 홈런 양산에 불붙이기 시작했다고 볼 수도 있다. 비록 이것이 선수 생명에 발목을 잡았지만.
  • 줄어든 몸
200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몸이 불어났다고 알려진 것과 달리, 심정수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웨이트 트레이닝'''에 관심을 가졌고[53] 프로 입단 후 본격적인 웨이트를 하여 10kg를 찌운 결과 이미 두산 시절에 몸을 완성하였고 그 몸을 계속 유지하였다. 두산 시절 항목에 있는 근육자랑하고 있는 사진도 흔히 현대 시절에 몸을 불리고 찍은 사진으로 알려져있지만, 사진에 적혀있듯이 1999년, 즉 두산 시절에 촬영한 사진이다.[54] 비슷하게 현대에서 같은 팀으로 뛰던 송지만도 현역시절 웨이트 트레이닝을 꾸준히 하여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어 항상 꾸준하게 유지 한 적이 있다. 2013년 은퇴 할 나이에 몸이 확실하게 줄어든 몸이 보였기도 했다.
심정수는 당시 신체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던 한국야구에서 웨이트트레이닝의 선구자였으며, 안경현이 보기 질릴 정도로 경기 내내 '''삶은 계란'''을 까먹었다고 알려져 있다.[55] 당시는 지금처럼 웨이트트레이닝 방법론과 영양학이 널리 퍼져 있던 시기가 아니었으며 진짜 몸 만들기에 관심이 많던 사람들이나 신경쓰던 시절이다. 90년대만 해도 힘 쎈 사람이라면 지금처럼 식스팩 복근을 단련한 몸짱이 아니라 씨름선수를 떠올리던 시절이었다. 단백질 관련 식품 따위는 당연히 없었는데, 그 시절부터 집중적인 단백질 섭취[56]와 벌크업을 반복하면서 올바른 웨이트 트레이닝을 했다는 수많은 증거가 있다. 하루에 계란 한 판을 까먹는다는 건 말이 쉽지 하루에 5개만 먹어도 물리는 게 보통 사람이니 정말 영양섭취에도 대단한 노력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그런 증거들은 싸그리 무시하면서 심정수의 벌크업을 약물 덕으로 치부하는 건 선수의 노력에 대한 인격 비난과 모욕에 가깝다.
벌크업한 모습과 그 이후 빠진 모습을 비교해서 "저렇게 차이가 나니까 약물일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것도 순도 높은 헛소리인데, 근육이라는게 한번 생기고 나면 죽을 때까지 지속되는게 절대로 아니다. 운동을 쉬거나 하면 다시 근육이 위축되면서 양이 줄어들게 된다. 괜히 깁스 등으로 인해 오랜 시간동안 못 움직일 경우 그 부위만 근력 부족으로 반대쪽에 비해 왜소해보이는게 아니다. 결국 근육이 빠진 것도 그냥 은퇴 후 그렇게까지 웨이트 트레이닝을 할 이유가 없으니 그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근육이 빠져버렸다는 소리다.
한편 2015년 심정수가 LG 트윈스 선수단 캠프에 방문해서 LG 선수들과 LA 다저스 소속 시절의 류현진을 만난 사진들이 기사화 되었는데, 류현진만큼 당당한 팔뚝을 선보였고 갓 은퇴한 이병규보다 여전히 큰 체격을 보여주었다. 이쯤되면 문제의 전준호와의 사진이 각도상 이상하게 나왔다고 보는 것이 옳다.
심정수는 2001년 야구 월드컵에 출전했다. 야구 월드컵은 항상 도핑 테스트를 실시하며,[57] 두산의 김재환이 여기서 걸리기도 했다. 게다가 2004 올림픽 예선에 출전하려다가 부상을 당해서 중도에 하차한거지, 안 나간게 아니다. 이승엽, 김한수, 정민태, 박경완 등등 당대 최고의 슈퍼스타들을 드림팀으로 꾸렸으나, 이건 얼마안가 소속팀이 다시 빼오거나 선수들이 부상 때문에 제대로 호흡이 맞지 않았었다.
  • 메디컬 테스트 거부
흔히 말하는 '날 못 믿는 팀에서는 선수생활 안 한다'란 발언은 심정수에게 관심을 보이던 삼성이 '''시력에 문제를 제기하자''' 대답한 발언이며 와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심정수의 시력 저하는 라식 수술 부작용 때문이란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의 커리어 자체를 발목잡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약물 복용 의혹을 키우기 위해 거의 의도적으로 끼워맞춘 수준이다.
  • 문제의 핵심
심정수가 가장 억울한 점은 프로야구 약물 떡밥에서 '''쉴드를 쳐줄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두산팬들에게는 그저 OB 베어스두산 베어스 초기 시절의 옛날 선수이다.[58] 전성기를 보냈던 현대 유니콘스는 처음부터 (엘롯기 에 비하면) 팬이 많지 않았는데 그마저도 수원으로 알아서 도망간 시절에는 더더욱 줄어들었고 2008년 해체와 키움으로의 재창단 그리고 연이은 장돌뱅이 구단주가 트레이드 파동을 거치면서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만큼 대부분 흩어졌다.[59] 그렇다고 넥센 팬들에게는 딱히 관계가 없는 인물.[60] 선수생활의 마지막을 보냈던 삼성팬들에게는 어느 정도의 먹튀로 좋지 않은 이미지가 있다. 즉 현재 야구팬들 중에 열성적으로 나서서 심정수를 옹호해주고 반박해줄만한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진짜 약물 복용이 확실시된다면야 쉴드쳐줄 가치가 전혀 없으므로 별 의미가 없겠지만, 심정수처럼 단지 의혹인 상태에서는 쉴드와 반박을 해줄 사람들이 별로 없을 경우, 그 '''의혹이 점점 믿음과 확신이 되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야빠들은 심정수가 약을 하지 않았다 라고 오히려 쉴드를 쳐준다.
예를 들어 약물 떡밥이 풀릴 때는 보통 무릎 부상이 심했던 다른 강타자들도 어느 정도 언급되는데, 김재현이나 김상현처럼 무릎부상을 크게 겪었던 선수들에 대해서 약물 떡밥이 언급되면 대개의 경우 "그 부상 이후에 큰 부상 없이 고령의 나이까지 꾸준히 활동했다.", "스테로이드로 인한 근육량의 증가가 없다.", "원래 힘만큼은 장사였다.", "심리적인 안정으로 포텐이 터진 것이다.", "첫 풀시즌에 무릎에 무리가 온 것이다." 등의 납득할만한 반박을 여러 팬들이 해준다. 그러나 심정수 같은 경우에는 약물 의혹을 반박할 만한 사실이나 정황은 상당히 많지만, 정작 이런 얘기를 나서서 해줄 사람들이 별로 없다. 게다가 당시 프로야구의 인기가 침체기였고 심정수의 소속팀은 그 상황에서도 가장 인기가 없는 현대였기에 반박을 할 만한 사실들도 꽤 묻혀있다. 이러다 보니 약물 떡밥에서 약물 복용이 확실한 리오스 다음으로 집중 포격을 받기가 쉬워지며 많은 사람들이 심정수를 약물 복용을 했을 것이라고 믿게 되는 것이다.
정리해보면, '''"원래 힘이 장사인 선수가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힘이 더 커지고, 투수 친화 잠실을 벗어나 타자 친화 구장으로 간데다가, 기록적인 타고투저 기간 동안에 이승엽이라는 훌륭한 경쟁상대 덕분에 역사에 남을 만한 성적을 기록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리즈시절을 거쳐 라식수술과 과도한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인한 각종 부상 때문에 일찍 선수생활을 접게 된다."''' 이렇게 굳이 약물 복용을 포함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연결이 된다.
약물 의혹에 대해 좀더 세분해서 반박한 글
또한 이 약물 의혹은 기존 국내야구계가 "야구선수는 유연해야 한다.", "웨이트를 많이 하면 유연성이 떨어져서 수비가 망가지고 부상이 많아진다." 식의 일본프로야구도 안 하는 지금 생각해보면 궤변에 지나지 않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도 한몫한다.[61] 동양인은 웨이트해봤자 "몸이 버티지 못한다", "파워는 안늘어난다"는 편견도 상당했다. 이 때문에 심정수의 벌크업과 파워증가를 웨이트 트레이닝이 아니라, 약물로 해석한 것이다. 90년대 초중반의 야구영상을 보면 대체로 마른 체격의 선수들이 많았던 것도 이러한 속설에 따른 트레이닝이 이루어졌던 것에 있다.
그러나 2012년 이후 넥센 히어로즈이지풍 코치의 주도아래 체계적인 웨이트트레이닝으로 엄청난 장타력을 선보이자, 국내야구계 분위기가 변하기 시작했다. 특히 김민성유한준이라는 걸출한 성공사례를 통해서, 벌크업의 효과를 다들 체감하였다.[62]
또한 박동희가 메이저리그에 취재를 갔을 때, 거기서 인터뷰한 메이저리그 코치가 다르빗슈 유도 메이저리그에 와서 "이 좋은 걸 왜 여태 안 했을까..." 라며 웨이트 트레이닝을 안 한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그보다 앞서 메이저리그 안착에 성공했던 박찬호도 늘상 운동을 했고, 류현진또한 웨이트를 포함한 모든 피나는 재활훈련으로 어깨수술과 팔꿈치수술이란 연속 악재에서 성공적으로 재기했으며, 강정호가 메이저리그 포스팅을 앞두고, 메이저리그에 대비하기 위해, 몸을 만들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다르빗슈 유는 웨이트를 경시하는 일본야구를 깐 적도 있다. 팀 린스컴이 그 임팩트를 두고도 전성기가 짧았던 이유는 바로 웨이트를 경시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린스컴은 그 작은 체격에 웨이트를 안 하니 몸이 버틸 수가 없었고, 그의 전성기는 정말 짧았다.
이런 사례들을 통해서 심정수도 약물이 아니라 성공적인 웨이트 트레이닝 예시로 설명할 수 있었으며, 약물 의혹 역시 문단 상단에 적혀있듯이 모두 사장된 이야기들이 되었다.

6. 선수 평가


'''이만수-장종훈-심정수-박병호 계보의 한국야구의 최고 우타거포''' 중 한 명이다.[63]투타 합쳐서 역대 WAR 15위권안에 들어가고, 단일시즌 WAR으로 보면 03 심정수가 97 이종범보다 높다.[64]
이승엽박병호와 함께 '''단일 시즌 50홈런'''을 넘긴 단 셋 뿐인 타자이며, 외야수로서는 유일하다. 또한 역대 top 5에 들어가는 단일시즌 기록을 남긴 선수이다.[65] 그리고 너무나도 아쉽게 50홈런 치고도 MVP를 수상하지 못한 채 선수생활을 끝마쳐야만 했던 비운의 '''2인자'''.
파워는 물론 출루율도 좋은 편이다. 심정수의 통산 출루율은 .388로서 자신의 타율인 .287보다 1할 이상 높다. 통산 wRC+는 152.6이다. 현역 선수중에서 이보다 높은 선수는 박병호가 유일하다.[66] 통산 WAR은 56.17이다. 33살까지 저 커리어를 쌓고 일찍 은퇴했다는게 매우 아쉬울뿐이다. 그리고 먹튀, 2인자 이미지, 전성기를 당시에도 팬 적고 지금은 사라져버린 현대에서 뛰었다보니, 저평가 받는 감이 없지않다.

7. 기타


  • 대표적인 별명은 헤라클레스,[67] 소년장사, 계란장사,[68] 심장사,[69] 심봉사(...)[70]
  • 현역 시절 홈런을 치고 그라운드를 돌며 자주 팬과 감독 그리고 선수단에 거수경례를 하곤 했다.[71]
  • 넥센 히어로즈에 있다 2015 시즌에는 한화 이글스로 이적한 오윤이 심정수와 비슷하게 닮아서 짭정수, 오라클레스로도 불린다. 재밌게도 오윤은 현대 유니콘스 시절에 지명되어 심정수와 같이 선수생활을 했었다. 그리고 심정수가 삼성으로 갈 때 등번호를 오윤이 물려받았다.[72]
  • 2013년 10월 2일 마구마구에서 레전드 카드가 나왔는데 , 최고의 기록을 남긴 현대 유니콘스가 아닌 우동수 트리오를 이끌었던 시기를 감안해 두산 베어스의 레전드로 나왔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프로야구 매니저에서는 현대의 레전드로 나왔다.[73] 나중에 심재학이 두산 레전드로 추가되자 대부분의 OB-두산팬들이 "무슨 마약하시길래 이런생각을 했어요??"라는 질타와 함께 차라리 두산 심정수를 레전드로 내달라고 요청하기도. 실제로 박재홍도 SK와 현대로 나누어서 레전드 카드가 나왔다는 점에서 실현 불가능하진 않을텐데... 2014년 말 성명권 문제로 인해 선수카드명이 본명이 아닌 '심경수'로 변경하게 된다.
  • 이사만루 시리즈의 2015에서 희귀한 가명 중 하나인데, 류현진(류한제) 등등 사진이 나와있지 않는 가명 선수들이 대부분인데, 심정수는 심종선으로 나오면서 대놓고 사진이 나와있다
  • 슬하에 아들만 셋인데, 사실은 재혼이다. 프로 입단 초기 때 주위의 소개로 만난 여자와 사이에서 1997년 첫째 아들을 얻으며 혼인신고도 했지만, 여자 쪽에서 아이 양육에 대한 부담을 느껴 결국 정식으로 결혼식도 못 올린 채 이혼했다. 2002년 재혼한 후에 둘째 아들이 태어났고, 은퇴해 미국으로 건너간 후 셋째 아들이 태어났다.
    • 장남 심종원(제이크 심, Jake Sim)은 대학 졸업을 앞두고 2020년 9월 KBO 리그 해외선수 트라이아웃에 참가를 신청했다. 포지션은 외야수로, 아버지와 달리 우투좌타다. 2021년도 신인 드래프트가 오랜만에 복귀 해외파가 없고 비선수 출신은 모든 것이 미지수라 일부에서는 심정수의 아들이라는 점 때문에 1라운드 지명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으나 그가 재학 중인 애리조나 크리스천 대학은 NCAA가 아니라 NAIA 소속이며 성적도 그리 뛰어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져[74] 트라이아웃에서 어떤 결과를 보이느냐가 중요할 듯. 결국 드래프트에서 지명되지 못 한채 나중에 육성선수로 입단을 노려봐야 될 듯 싶다. 이영미의 인터뷰 기사를 참고할 수 있으나 이영미 특유의 감성팔이가 이 기사에서도 예외가 아니기에 필터링이 필요하다. 경기 감각을 살리기 위해 연천 미라클에 일시적으로 합류한 상태다.#
    • 차남 심종현(케빈 심, Kevin Sim)은 미 현지에서 상당히 유망한 고교 유망주로 꼽혀, 2019년 올-아메리칸 팀의 멤버로 MLB닷컴에도 소개되었다. 영상의 5:17, 51:24에 케빈 심이 나온다. 영상의 소개에 따르면 케빈 심은 캘리포니아 주의 No.1 3루 유망주이자, 전미 top 50 유망주 중 한 명이라고 한다. # 곧바로 메이저리그에 도전하지 않고 샌디에이고주립대로 진학했다.
  • 의외로 꽤 달변이다.

8. 연도별 기록


  • 붉은 글씨는 1위 입상 성적. 진한 글씨는 리그 5위 내 입상 성적. 푸른 글씨는 KBO 리그 역대 최고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4
OB
32
61
.164
10
4
0
3
9
4
0
4
.377
.215
1995
116
362
.282
102
19
0
'''21'''
(4위)
59
63
4
37
'''.508'''
(4위)
.344
1996
107
371
.248
92
15
3
18
54
51
4
48
.450
.331
1997
40
122
.246
30
5
0
5
22
17
2
22
.410
.359
1998
126
477
.294
140
29
4
19
73
71
4
39
.491
.346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9
두산
132
480
'''.335'''
(5위)
161
'''35'''
(4위)
1
31
'''110'''
(5위)
79
1
61
.606
.408
2000
126
454
.304
138
21
2
29
91
75
3
79
.551
.400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1
현대
107
381
.294
112
19
1
18
70
67
8
71
.491
.404
2002
133
502
'''.321'''
(4위)
'''161'''
(4위)
22
1
'''46'''
(2위)
'''119'''
(2위)
'''101'''
(2위)
2
72
'''.643'''
(2위)
'''.404'''
(5위)
2003
133
460
'''.335'''
(2위)
154
16
1
'''53'''
(2위)
'''142'''
(2위)
'''110'''
(3위)
6
'''133'''
(1위)
'''.720'''
(1위)
'''.478'''
(1위)
2004
102
367
.256
94
14
1
22
78
64
0
81
.480
.385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5
삼성
124
433
.275
119
14
0
'''28'''
(2위)
'''87'''
(3위)
'''77'''
(3위)
3
93
'''.501'''
(5위)
'''.402'''
(4위)
2006
26
85
.141
12
1
0
1
7
8
0
10
.188
.229
2007
124
427
.258
110
17
0
'''31'''
(1위)
'''101'''
(1위)
64
6
86
.515
.381
2008
22
68
.235
16
0
0
3
7
8
0
20
.368
.409
<color=#373a3c> '''KBO 통산'''
(15시즌)
1450
5050
.287
1451
231
14
'''328'''
(7위)
1029
859
43
856
.533
.387

9. 관련 문서



[1] 엄밀히 말해 동대문상고와 청원고는 다른 학교이다. 청원고는 동대문상고와는 별도로 설립한 일반계 고등학교이고, 동대문상고는 청원정보산업고로 교명을 바꿨다가 2001년 폐교했다. 그러나 '''야구부만큼은 청원고에서 별도로 창단한 게 아닌 동대문상고에서 이관된 것'''이기에 동대문상고 출신 선수들에게 (현 청원고)라고 표기하는 것이다.[2] 2003년까지 주로 우익수로 출전하였다.[3] 삼성으로 이적한 2005년부터 은퇴할 때까지 주로 좌익수로 출전하였다.[4] 04시즌에 주전 지명타자로 출전했고 이 밖의 시즌에도 간간히 지명타자로 나왔다.[5] 입단 첫해인 94시즌에 2경기 출전했으며 알려진 바와 달리 입단 첫해에도 외야수로 더 많은 경기에 나왔다.[6] 홈런 심정수 넘겨버려 넘겨버려 홈런 심정수 랄라라라라라라(X2)[7] 두번째 결혼이다. #[8] 첫 결혼에서 낳은 아들이다. 애리조나 크리스천 대학에 재학 중으로 2020년 8월 7일 KBO 해외 출신 및 중퇴 선수를 대상으로 한 트라이아웃에 신청서를 내면서 KBO리그 무대 도전을 선언했다.##[9]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토리파인스 고등학교에 재학 중으로 고교 졸업 후 곧바로 메이저리그 무대에 도전하는 대신 샌디에이고주립대로 진학할 생각이라고 한다. 기사마다 나이가 다른데 대학진학 이야기가 나오는것으로 봐서 2003년생이 아닌 2002년생으로 보인다.# # #[10] 형들과 다르게 미국 국적자라고 한다.[11] 훗날 에릭 테임즈가 2016년 40-40을 기록했을 때의 시즌 WRC+가 222에 근접한 수치다.[12] 지금으로 치면 2010년대의 최형우랑 비슷한 사례다. 최형우도 우승 많이하고, 타격왕, 홈런왕, 타점왕 모두 해보았지만 홈런 타자로서는 박병호에게 밀리고, 완성형 타자로는 이대호에 밀리고, 인지도로는 자신보다 성적이 낮은 김현수에게 밀린다. 이대호, 박병호, 김현수는 모두 팀의 대표 프랜차이즈 스타이고 이에 비하면 심정수나 최형우는 대표 프랜차이즈라기엔 밀리는 감이 있다. 더불어 국제대회에서의 활약도 이들 셋보다 미약하다.[13] 메이저리그에도 이런 경우는 꽤 있다. 그 예가 바로 2012년 AL MVP 투표인데, 당시 세이버메트리션들은 마이크 트라웃을 MVP로 밀었으나, 그 해 MVP는 트리플 크라운이라는 확실한 타이틀과 임팩트를 가진 미겔 카브레라가 가져갔다. 또한 2017년 AL MVP 역시 세이버 및 클래식 스탯 모두 애런 저지에 비해 밀렸던 호세 알투베가 수상했다. 알투베가 선수들과 기자들에게 워낙 인기가 좋았기 때문에 나온 결과로, 심지어 세이버메트리션들조차도 알투베를 밀었을 정도였다. 저 옛날로 돌아가면 아예 기자들과 사이가 나쁘다는 이유로 모 본에게 어이없이 MVP를 강탈당한 알버트 벨도 있다. 야구를 비롯한 어느 스포츠든 복잡한 분석, 통계를 따지는 학구적인 팬들보다는 이해하기 쉬운 중요 성적이나 양적 기록을 근거로 선수의 활약도를 평가하는 팬들이 많다.[14] 그 해 30홈런 100타점 이상을 기록하며 두산에서의 커리어하이를 기록했다.[15] 참고로 타순은 이 사진의 역순이다.[16] 이것이 원래의 타순이다.[17] 이 별명의 기믹은 최정이 이어 받는다.[18] 3루에는 안경현이 있다가 안경현은 심정수의 친구인 '''김동주'''가 입단하자 2루로 컨버젼을 하고 김동주는 3루를 은퇴 할 때가지 보게 된다.[19] 밑에 통산 성적에도 나와 있듯이 1997시즌은 40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했는데 군 문제(결국 면제가 되었다)와 부상이 겹쳤고 2000년이 되어서야 밝혀졌지만 가정적인 문제(이혼을 했다)도 겹쳤다.[20] 이마양과 비교하면 우동수 쪽으로 좀 더 위로 쳐준다.[21] 당시 플레이오프에서 심정수가 기록한 안타는 이들 3개의 홈런이 전부였는데, 그게 '''모두 결승홈런'''이었던 것. 특히 마지막 6차전의 결승 홈런은 연장전 승부에서 쳐낸 것이어서 더욱 두산 팬들의 환호를 이끌어냈다.[22] 다만, 2009년에 활약이 저조했으나 2015년 한국시리즈에서 정점을 찍는다.[23] 심정수 본인은 후의 인터뷰에서 이 때는 후배로서 동기이자 라이벌팀 친구 김재현과 함께 주로 선배들의 결정을 따르는 쪽이었다고 말했다.[24] 심재학이 저평가받는 ops형 타자이기는 하지만 급이 안 맞는 트레이드여서 현금 트레이드 의혹도 있었다. 근데 당시 현대의 경우 돈을 예년처럼 쓰기는 커녕 쓰지 못하는 사태라 진실은 저 너머에...[25] 이때 두산 베어스의 팬 카페인 곰들의 대화에서 두산 구단에게 당장 트레이드를 철회하라는 비난을 했었다.[26] 왜냐면 두산 시절에도 저 큰 몸집을 불리기 위해 감자,달걀,닭고기 같은 몸에 좋은 음식들을 먹으며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근육을 만들었기 때문이다.[27] 이 때 심정수를 위해서 급하게 검투사 헬멧을 제작한 사람이 당시 현대 유니콘스 운영팀 과장이었던 염경엽이다.[28] 현재 박병호도 넥센으로 트레이드 된지 얼마 안되어 이듬해 박흥식 전 타격코치가 집요하게 쫒아다닌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의 호흡이 닿았는지 박병호는 이승엽 이후 전인미답 '''4년 연속 홈런왕 + 2년 연속 50홈런'''이라는 대기록의 타이틀을 만들었다.[29] 현재 LG의 레전드인 박용택과 한화에서 뛰고있는 이성열인데 박용택은 김용달의 스윙을 배웠지만 전혀 맞지 않아 자신만의 루틴으로 해법을 찾았고, 이성열의 경우 라식수술로 인한 후유증도 있고 거기에 김용달이 멋대로 타격까지 뜯어고치다 망했다. 나중에 기자에게 하는 말이 가관인게 "아무리 해도 안될 놈은 안된다." 라고 말을 해버렸다. 허나, 그는 라이벌 팀으로 트레이드 되며 '''20홈런'''을 치게 된다.(...)[30] 이는 당시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레전드인 왕정치의 아시아 홈런 신기록을 넘었기 때문이다. 왕정치는 55개를 때렸다. 이후 정확히 10년 뒤인 블라디미르 발렌틴이 60개 홈런을 치며 현재의 신기록이 되어있다.[31] 파크팩터 보정도 같이 판단하는 Wrc+는 스탯티즈 기준 210.7.[32] 그해에 심정수의 3관왕을 저지했던 선수는 .342를 기록한 두산시절의 친구 김동주였다.[33] 사실 이승엽의 2003시즌은 여러모로 의미가 깊은 시즌이기는 하지만, 세이버 스탯으로 따지면 오히려 99이승엽과 02이승엽이 더 고평가를 받는다. 베이스볼 랩 Wrc+기준(타격 스탯만 보는 지표로 수비는 평가하지 않고, 리그 평균을 100으로 잡는다.) 03이승엽, 99이승엽은 190, 02이승엽은 197이다. 그러나 03심정수는 '''208'''로 이승엽의 어떤 해보다 더 높다. 참고로 14강정호가 185, 18박병호가 190, 10이대호가 192(07이대호 194), 94이종범이 198, 15테임즈가 219(...), 82백인천이 225(...) [34] 심정수는 심재학, 심성보와 함께 1990년대 말~2000년대 초까지 KBO 최고의 강견 중 3심의 한 명이었다.[35] 2004년 한국시리즈 진출은 양준혁배영수 단 둘이서 멱살잡고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36] 이 때 삼성에서 나온 명언이 그 유명한 '''"구단이 돈이 없잖아요"'''. 이 때문에 삼성은 거지성이라는 별명으로 조롱당했다. [37] 더군다나 현대가 '''임시''' 연고를 두었던 수원시는 한동안 축구가 강세였지만, 훗날 kt wiz가 들어오고 나름 정착하는 것을 보면 야구의 암흑기 와중에 현대의 정착 의지가 없었던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38] 다만, 멸망 직전년도인 2006년의 유망주들은 현재도 뛰고 있는데 현대 유니콘스 역대 드래프트 중 1996년, 1998년과 함께 가장 좋게 볼 수 있다.[39] 여담으로 익히 알다시피 이 짤방에서 두산 유니폼을 입고있는 사람 모두 본인과 그 옆에있는 사람처럼 FA로 유니폼을 갈아입게된다. (...)[40] 마해영은 당초 협상에서 양준혁 보다 높게 대우를 요구하거나 조금 낮게 요구했으나 결렬되자 KIA 타이거즈에 28억원으로 FA 계약을 맺었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41] 이 계약에는 계약금 20억, 연봉 7억 5000만×4년, 플러스 옵션 10억, 마이너스 옵션 10억(연간 2억 5000만원) 걸려 있었다고 한다. 플러스 옵션은 매년 타율 0.300 이상 시 +1억, 100타점 이상 달성 시 +1억을, 출루율 0.400 이상 시 +5000만원을 추가 지급하고, 반대로 일정 목표 달성 실패 시 연봉이 삭감되는 마이너스 옵션의 경우 규정타석 미달 시 -1억, 출장경기수 110경기 미만 시 -1억, 출루율 0.400 미만 시 5000만원이 삭감되는 조건이었다. 다만 삼성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할 경우''' 마이너스 옵션이 실행되지 않는다는 조건이 추가로 걸려 있었다고 한다. 그 덕분에 무릎 부상으로 시즌을 거의 날려 먹튀의 정점을 찍었던 2006년 시즌의 경우 위에 서술된 마이너스 옵션 조건이 모두 걸리게 되었으나 삼성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덕분에 마이너스 옵션이 실행되지 않았다고...하지만 반대로 이듬해인 2007년 홈런왕에 올랐지만 출루율 4할을 넘기지 못해 마이너스 옵션이 실행되면서 5000만원이 삭감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 써 있는 조건을 토대로 계산을 해 보면 그의 실제 계약 총액은 4년 49억이 된다. 물론 49억이라고 해도 당시 기준 역대 최고액이긴 하지만, 60억이라는 금액에서 나오는 충격 때문에 나름 홈런왕도 먹었음에도 진필중, 홍현우 급으로 까이는걸 생각하면 심정수나 심정수를 지지하는 팬들 입장에선 조금은 억울하다고 볼 수 있다.[42] 실제로 STC가 삼성 라이온즈 선수들에게 개방된 것은 심정수가 은퇴하고 난 바로 다음 해였던 2009년이었다.[43] 심정수 기점으로 삼성에서 망한시즌이지 현대에서 8할 중순 언저리 였던 2004년이 최악이였다.[44] 에피소드로, 독일 재활 당시 2006 독일 월드컵 직전이라 바이어 04 레버쿠젠에서 최종 훈련을 하고 있던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들을 만나며 선전을 기원하기도 했다.[45] 하지만 득점권타율은 4할대라는 흠좀무한 여포였다. 당연히 밥상은 3번타자 양신 혼자서 차릴때가 많았다.[46] 다만 출루율 4할을 달성하지 못해 위에 상기한 마이너스 옵션 조건에 걸리면서 5000만원을 반납해야 했다고 한다.[47] 심정수 본인이 밝힌 바로는 무릎 부상 정도는 3~4년 정도는 더 참고 뛸 수 있었다고 한다.[48] 심정수의 아들도 당시 삼성 리틀야구팀에서 활동했었다.[49] 양준혁은 저 둘과 함께했었기에 충분히 말할 자격은 있다. 단, 이승엽과 심정수가 한 팀에서 뛴 적은 없다. 저렇게 뛰었으면 삼성이 리그 지배를 했을 것이다. 그래도 이승엽 시절심정수 시절 팀 메이트를 하면서 우승반지 경험을 했기 때문에 양신 입장에서는 다행. 심정수와는 선수협 동지라서 그런지 2007년 심정수 홈런왕, 타점왕 푸쉬를 오지게 해주기도 했다. 심정수가 홈런 1위하기 전까지 홈런 1위는 양준혁이었기 때문이다.[50] 2001년 야구 월드컵에 국가대표로 출전한 적이 있긴 하다. 그러나 심정수의 홈런 개수가 급격히 증가한 시점이 2002년이라는 점과 그 이후부터 국가대표를 불참한 것 또한 명백한 사실이다.[51] 이후 홍성흔은 2차 FA로 두산에 돌아왔을때 귀신같이 장타율 5할을 넘기지 못했다. 물론 이것은 홍성흔의 에이징 커브 시기와 맞물린 영향도 있긴하다.[52] 수원구장의 사이즈는 좌우 95m 중앙 120m 펜스높이 2.5m이고, 잠실은 좌우100m 중앙 125m 펜스높이 2.6m이다. 전체적으로 못해도 5m라는 어마어마한 이득을 보는 상황. 당연히 홈런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후 kt wiz가 창단 후 홈으로 쓰게 되고 리모델링 하면서 좌우가 98m로 멀어졌다지만 빅데이터를 통해 분석한 결과 바람이 우타자에게 유리하게 부는 성향을 토대로 댄 블랙(양타자), 마르테, 유한준, 박경수, 김상현을 영입했고, 2015년 외야 중앙의 펍을 넘긴 2명의 선수도 박병호 그리고 (홈런 라이벌 테임즈가 아닌) 이호준임을 생각하면 더 규격이 작은 시기인 현대의 수원 임시 홈 시절은 심정수의 홈런이 늘어나도 당연할 상황이다.[53] 계란 먹방과 (대부분이 흰자만 먹거나 아님 삶은 계란 한 두판을 치어 먹거나...)함께 상당히 잘 알려진 사실임에도 이상하게 약물 떡밥만 나오면 잊혀지는 사실이다.[54] 그 해 심정수는 31홈런 OPS 1.014를 기록했다.[55] 후에 정수근도 박명환야구TV 방송에서 밝힌 바로는 방귀 냄새가 너무 독해서 무지하게 욕했다고. 단, 박명환은 그걸 모르고 듣고 엄청 웃었다. 이유는 투수조와 야수조의 버스가 달랐기 때문.[56] 당시에 사람들이 심정수와 같은 벌크업을 잘 하지 않았던 건, 지금처럼 닭가슴살 상품이나 단백질 쉐이크, 프로틴바 등 단백질을 단기간에 보충할 수 있는 수단이 없어 대량의 단백질 섭취가 대단히 고역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57] 모든 대회가 그렇지만 전체인원을 테스트하지 않는다 무작위로 선정하여 검사한다[58] 게다가 현재 두산 팬덤은 김경문 감독과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거치면서 새로 유입된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그렇다고 OB랑 두산이 다른 팀이 아니다. 같은 팀이다. 팀의 역사가 궁금한 위키러들은 한번은 검색해서 찾아보는것도 나쁘지 않다[59] 의외로 박재홍이 역대급 성적을 거두고도 상대적으로 이종범, 양준혁보다도 인기가 적었던 이유가 현대의 적은 팬덤이다. 기아에서는 태업의혹과 신인시절 고향팀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60] 재창단 과정을 거치며 넥센으로 온 현대팬들도 있지만 넥센이 확실히 자리잡은 2012년 이후 유입된 팬들에게는 현대가 막연하고 생소할 수밖에 없다. 이말은 서건창과 박병호가 터지면서 서서히 기억을 잊혀지게 된 원흉이기도 하다. 허나 가끔 분탕팬들이 와서 삼청태현 역사는 우리꺼임 이라고 개소리를 하고 하는데 현대랑 키움은 공식적으로 서로 남남이다.[61] 아직까지도 이런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 지도자들도 상당히 많다. 대표적으로 웨이트트레이닝할 시간을 주지 않고 무조건 살을 빼게 시키게 하는 김성근 감독. 참고로 염경엽 감독도 김민성이 웨이트트레이닝으로 몸이 커지자 유연성 부족에 대한 우려로 유격수를 시킬 수 없다고 언급을 한 점도 있어서 아직까지는 그 편견의 영향이 남아있다고 볼 수도 있다. [62] 유한준은 당시 두자릿수 홈런을 쳐내던 김하성과 함께 2015년도 약물 의심 선수로 지목받았지만 결국 한화 최진행이 걸리면서, 순수 실력으로 이루어냈음을 증명했다. 강정호, 황재균, 서건창 모두 벌크업으로 성적이 상승했다. 에릭 테임즈도 메이저 초창기 시절 보다 몸이 매우 커졌지만, 약물과는 무관하다. 이와 반대로 박용택은 벌크업을 해서 오히려 손해본 케이스다. 잠실구장을 쓰면서 오히려 홈런을 치겠다는게 독이된 케이스. [63] 추신수, 이승엽, 양준혁은 모두 좌타자이다. 이종범은 거포라 보기 힘들며, 이대호는 거포보다는 완성형 이미지다.(KBO 40홈런 1번이고, 찐전성기는 모두 일본에서 보냄)[64] 참고로 스텟티즈 기준으로 단일시즌 WAR은 94이종범-15테임즈-03심정수-97이종범-96이종범순이다.그나마 2010년대 부터는 최정이 우타 거포의 명맥을 이어가는 중이다.[65] 리그 Top 5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보통 94이종범, 82백인천, 91장종훈, 96양준혁, 99/03이승엽, 15테임즈, 01호세, 10이대호 등과 함께 03 심정수가 꼭 언급된다. 대체로 (연도 순으로) 82백인천-94이종범-99이승엽-03심정수-15테임즈를 뽑는 경우가 가장 많다.[66] 현역 중 wRC+ 150이상은 박병호, 최형우, 김태균 이 세명밖에 없다.[67] 야구 해설가 하일성씨가 붙여준 별명. 신기하게도 그가 학창시절 불량써클 이름이 헤라클레스 였다고...[68] 계란에 다른 별명들을 합친 것으로 현대 유니콘스 시절, 경기 중에 삶은 계란을 한 판은 먹어야 직성이 풀린다고 해서 생긴 별명. 이 별명답게 경기 중 현대쪽 벤치를 보여줄 때면 삶은 계란을 땅콩먹듯 먹고 있는 심정수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이런 심정수마저 침몰시킨 오키나와 캠프의 위엄 http://sports.news.naver.com/kbo/news/read.nhn?oid=109&aid=0000005941# [69] 당시 '이승엽은 허리로 치고 심정수는 힘으로 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힘 하나는 장사였다.[70] 라식수술 후 공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처참하게 몰락하면서 생긴 별명으로, 공이 보이지 않아서 귀로 공이 오는 소리를 듣고 친다는 청각타법 드립이 심정수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71] 비슷하게 제이 데이비스도 이랬었다.[72] 다만 현대에서 히어로즈로 바뀔 때는 32번이 아닌 다른 번호로 바꿨다.[73] 덧붙히면 최초 레전드 16명 중 한 명이다.[74] 2019년 타율이 0.337라서 꽤나 잘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당시 NAIA는 4할 이상을 쳐야 타율 100위 안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극도의 타고투저 성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