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기(야구)

 

[image]
'''이름'''
김동기(金東基)
'''생년월일'''
1964년 3월 5일 (60세)
'''출신지'''
인천광역시
'''학력'''
인천신흥초등학교
동인천중학교
인천고등학교
인하대학교 (1982학번)
'''포지션'''
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6년 1차 1순위(청보)
'''소속팀'''
'''청보 핀토스-태평양 돌핀스-현대 유니콘스 (1986~1996)'''
'''지도자'''
안산초등학교 감독
인천신흥초등학교 감독
'''병역'''
병역특례[1]
'''청보 핀토스 등번호 35번'''
박정후(1985)

'''김동기(1986~1987)'''

팀 해체
'''태평양 돌핀스 등번호 35번'''
팀 창단

'''김동기(1988~1995)'''

팀 해체
'''현대 유니콘스 등번호 35번'''
팀 창단

'''김동기(1996)'''

조승현(1997~1999)
1. 소개
2. 선수 경력
3. 은퇴 이후
4. 선동열 천적
5. 기타
6. 연도별 주요 성적
7. 관련 문서


1. 소개


前 프로야구 선수. 출신이나 대학을 보면 알겠지만 김경기와 더불어 인천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인천 연고팀에서만 선수 생활을 한 인천야구의 프랜차이즈 스타이며 금광옥, 김진우의 뒤를 잇는 인천야구 주전 포수의 세 번째 주자였다.
인천고 1학년 시절인 79년부터 인천고의 황금기 속에서 성장했고 81년 청소년대표로 선발되어 우승에 일조했다. 84년에는 LA올림픽 대표팀, 85년 대륙간컵 국가대표 (준우승) 으로 선발되어 일찌감치 대형 포수로 주목을 받았다.[2]
짧은 활동연도(11시즌)에도 역대 포수 누적 sWAR 8위 (35.13), wRC+ 2위 (125.9)에 빛나는 그의 가치가 최근 재조명되고 있다.
2019년 종료 시점 스탯티즈 WAR 기준으로 김동기보다 위에 있는 7명은 박경완, 이만수, 김동수, 홍성흔, 강민호, 진갑용, 양의지 이다. 그 아래로 현역 중 가장 높은 순위가 이재원인데, 더블스코어를 넘는 차이라서 당분간 순위가 더 내려갈 일은 없다.
연평균 WAR로 따지면, 10년 이상 활약한 포수 중 연평균 WAR 3위이다. 이만수 - 양의지 - 김동기 - 강민호 - 박경완 - 김동수 - 홍성흔 - 진갑용 순. 심지어 3000+타석 기준 타석당 WAR로 따져도 이만수-양의지에 이은 포수 3위이며, 모든 포지션을 통틀어 역대 10위이다![3] 통산 OPS도 .785 로 포수 통산 7위 (1500타석 이상). 다만 규정타석 3할을 기록한 시즌이 없고, 1989년 2루타 1위에 오른 것 정도를 제외하면 개인타이틀을 딴 적도 없는데다, 우승도 하지 못하고 은퇴했기에 선수 시절에는 성적에 비해 많은 명성을 누리지 못했다.
그나마 당시의 야구전문지 <주간야구>가 1992년 중반에 최고의 포수를 꼽을 때 1위가 김동기, 2위가 김상국(빙그레), 3위가 장채근(해태. 그해 포수 골든글러브)으로 기록된 적은 있다.
그가 활동한 86~95년 동 기간 WAR는 이만수 40.98 에 이은 압도적 2위 (34.37) 로 3위 김동수 (22.87)를 제외하더라도 데뷔동기이자 활동시기도100프로 겹치는 김상국(18.63) 장채근(16)보다 2배 가까이 압도적이다.
아마추어 시절 청소년대표와 국가대표를 7년간 지켰지만, 프로 입단 후에는 약팀 소속이라는 이유로 저평가를 받았던, 그럼에도 인천야구 팬들에게는 태평양의 터줏대감이자 간판 스타로 기억되는 '무관의 명포수'다.[4]

2. 선수 경력


인천고 시절 형인 김상기와 함께 형제 투, 포수로 유명했다. [5]
고교시절부터 대학4학년까지 내내 김상국(빙그레 입단)과 함께 청소년대표, 국가대표 포수를 지냈다.
인하대학교를 졸업한 이후 고향팀 청보 핀토스에 지명된 후 팀의 주전 포수로 활약했다. 입단 당시에는 국가대표 출신의 고교 선배 김진우가 주전 포수로 활약했지만 화려했던 아마 시절에 비해 기력이 갈수록 퇴보했고 김진우의 백업이던 금광옥은 평범한 실력을 보여주는데 그쳤다. 결국 김동기에게 기회가 더 주어지게 됐다.
무엇보다 그는 투수진에 비해 타선이 허약했던 태평양 돌핀스에서 윤덕규, 김경기와 더불어 타선을 이끌었다. 특히 1990년대 초중반 4번타자 김경기-5번타자 김동기 타순은 "KK포"라고 불리며 팀의 물방방이 타선에서 그나마 제몫을 해주었다. 또한 이 당시 포수는 방망이가 약한 선수들이 많았지만, 김동기는 연간 10개 이상의 홈런을 뽑아냈기 때문에 80년대 후반-90년대 초중반 공격형 포수로써 명성을 떨쳤다. 특히 선동열에게 강했는데 선동열에게 만루홈런 두 개를 쳤다.
1988년 전기리그 종료 시점 때 타율이 0.379였고 후기리그 초반까지도 0.358의 타율에 10홈런으로 가공할 만한 타격감을 선보였으나 8월 12일 MBC 청룡과의 인천 홈 경기에서 기습번트를 하고 1루로 뛰다가 발목을 접질려 인대가 파열되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전력에서 이탈했다. 그해 타격왕은 MBC 청룡의 김상훈이 0.354의 타율로 차지한다. 타율이 앞서 서술했듯이 부상으로 잔여 시즌에 결장하여 규정타석에 미치지 못함으로 타격왕을 아깝게도 놓칠 수밖에 없었다.
다음 해인 1989년 '''KBO 리그 최초로 한 시즌 전경기 선발 출전 포수'''로 등극하며[6] 태평양의 돌풍을 이끌었다. 특히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는 연장 14회 끝내기 결승 3점 홈런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이 경기는 인천 연고팀의 사상 첫 포스트시즌 승리 기록이며 선발로 나선 박정현이 무려 14이닝 완투승을 거둔 경기이기도 했다.
1994년에는 이 다시금 상승세를 거두어 2위를 차지하였고, 선수 본인도 0.264의 타율에 15홈런을 쳐서 [7] 23개의 홈런을 쳤던 김경기, 3할타자 윤덕규와 클린업트리오를 이루며 좋은 성적 내는데 큰 역할을 하였으나 LG 트윈스와의 1994년 한국시리즈에서 1승도 못 하고 네 경기를 내리 내주는 바람에 아쉽게도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었다. 특히 통한의 끝내기 홈런으로 내줬던 1차전에서는 8회초 1사 만루에서의 병살타가 뼈아팠다. 또한 그 해 포수 부문 골든글러브 투표에서 김동수에게 2표 차이로 뒤져 골든글러브를 수상하지 못한다. 1988년때도 그랬지만 여러모로 상복이 없는 선수 시절이었다(...).[8]
1996년 5월 31일 포수로는 두 번째로[9] 1천 경기 출전을 달성했다. 그러나 백업포수가 없었던[10] 팀 사정으로 과부하가 걸렸고 고질적인 허리디스크로 오른다리가 마비되어 1996년 은퇴하였다.
타선이 빈약했던 팀에서 고군분투한 탓에[11] 선수생활이 길지 않았고,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경쟁자들에 밀려 골든글러브는 한번도 못 받았으며[12] 소속 구단이 대기업에 인수되어 팀 전력이 상승하려는 시점에 은퇴해서 인천의 오랜 야구팬들에게만 기억되고 있다.
그럼에도 기록을 보면 이만수의 시대가 가고 박경완의 시대가 오기까지의 사이에 김동수, 장채근과 함께 당대의 정상급 포수로서 당당히 경쟁했던 선수였음을 알 수 있다.[13]

3. 은퇴 이후


보험, 건설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모교 인천신흥초등학교 감독으로 2008년부터 맡고 있었으나 현재는 형인 김상기와 천안에서 야구교실을 운영하며 사회인야구 저변 확대를 위해 일하고 있다.

4. 선동열 천적


'''선동열의 천적 타자'''였다. 선동열과는 청소년대표시절부터 국가대표까지 대표팀에서 투, 포수로 한솥밥을 먹던 선후배 사이인데, 그래서 그런지 선수 시절 OB 박노준과 함께 선동열을 상대로 유난히도 좋은 타격을 기록했다.선동열에게서 정규시즌 2개의 홈런을 뽑아낸 4명 뿐인 선수 중 한 명으로[14] 1개는 선동열의 319.1이닝 1186타자 무피홈런을 깬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만루홈런이다.[15]
통산 대 선동열 타율은 .272 (81타수 22안타)로 역대 선수 중 선동렬을 상대로 가장 안타를 많이 친 타자. 타율은 세번째.
(타율 1위는 박노준 .288 (17/59) 이정훈 .275(14/51) )
선동열이 글러브 안에서 변화구하고 직구 그립 잡을 때 팔뚝 근육의 모양이 달라지는 특징을 읽었던 게 비결이었다고 한다.
1987년 5월 5일 경기에서는 선동열을 상대로 무려 4타수 3안타를 기록했다.

5. 기타


  • 선수 시절 야구 외의 재주로도 동료들 사이에 화제가 되었다. 소위 말하는 잡기에 능한 재주꾼. 당구는 500을 쳤고[16] 맥주는 1만5000cc 이상은 우습게 마시는 정도였다고 한다.
  • 통산 OPS가 .795로 준수한 장타율+출루율을 지닌 선수였다.

6.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출장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6
청보
87
230
.248
57
14
1
10
26
20
1
22
.448
.313
1987
105
350
.277
97
'''21'''
(4위)
0
9
48
47
3
55
.414
.374
연도
소속팀
출장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8
태평양
62
212
.358
76
18
1
10
39
41
3
33
.594
.441
1989
120
399
.251
100
'''25'''
(1위)
1
11
59
'''61'''
(5위)
7
84
.401
.378
1990
114
336
.250
84
20
1
14
46
52
5
53
.440
.352
1991
98
286
.262
75
9
1
7
34
37
9
41
.374
.354
1992
107
333
.294
98
15
2
15
58
53
2
53
.486
.391
1993
93
315
.244
77
22
1
3
34
33
1
46
.349
.340
1994
119
368
.264
97
16
0
15
50
49
3
50
.429
.352
1995
66
173
.173
30
4
1
9
28
16
1
23
.364
.269
연도
소속팀
출장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6
현대
48
99
.212
21
2
0
5
13
13
0
14
.384
.307
<color=#373a3c> '''KBO 통산'''
(11시즌)
1019
3101
.262
812
166
9
108
435
422
35
474
.426
.359

7. 관련 문서


[1] 1981년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 대회 우승#[2] 같은 학번 동기로 김상국, 장채근 등이 있었는데 청대부터 국가대표까지 김동기, 김상국이 늘 선발되었다.[3] #.[4] 대표를 함께한 김상국은 빙그레 전성기에 주전으로 뛰었고, 아마시절에는 두각을 내지 못했던 장채근이 당대 최강 해태에서 주전으로 뛰면서 골든글러브도 수차례 받았지만, 김동기는 그런 효과를 누리지 못했다.[5] 형인 김상기는 우투우타 포수인 동생과 달리 좌투좌타 투수였다. 인하대를 졸업한 후 삼미에 입단했지만 큰 인상을 보여주지 못한 채 87년 시즌이 끝나고 방출되었다. 동생과는 86~87시즌 청보에서 같이 뛴 경력이 있다.[6] 야구팬이면 잘 알겠지만 엄청나게 힘든 기록이다. 포수라는 포지션은 경기내내 쭈그리고 앉아있어야 되고 투수의 140~150km 시속 패스트볼을 받아내야 되는 포지션이라서 다른 선수들에 비해 피로도가 굉장히 높은 포지션이기 때문이다. 이 기록은 2006년 강민호, 2015년 김태군이 계승했다.[7] 홈에서는 .337 원정.190[8] 94년 포수 부문과 1루수 부문은 한국시리즈 우승 프리미엄이 적용된 대표적인 케이스. 김동기 VS 김동수, 김경기 VS 서용빈. 김경기 문서 참조. 94년도 규정타석은 태평양 김동기, 한화 김상국 2명만이 채웠으며 김동수 선수의 경우 규정타석 미달 (22타석 부족) 이었음에도 우승팀 프리미엄 영향이 크다 볼 수 있다. 다만 세이버매트릭스를 보면 김동수가 김동기를 모두 앞서긴 하지만 규정타석 미달이므로 무의미. [9] 역대 19번째. 포수 최초는 이만수였다.[10] 물론 백업포수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 당시 장광호가 김동기의 백업포수였다. 장광호는 수비 측면에서 상당한 합격점을 받는 선수였으나 타격 면에서 김동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약했다. 이재주도 이 당시 태평양-현대 소속의 포수였으나 이쪽은 수비가 부실한 탓에 1군에 중용되는 일은 별로 없었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96년 시즌 직전 한화 이글스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김상국을 영입했지만 포수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지 못했다. 결국 이 문제는 1998년 시즌 전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박경완'''을 사오고 나서야 해결된다.[11] 타선에 어느 정도 곧잘 치는 선수 몇 명이 더 있었다면 의존도가 덜 했겠지만, 태평양 시절에는 김경기와 김동기, 윤덕규 정도 외에는 믿을 만한 타자가 없었다. 때문에 그는 수비뿐만 아니라 타석에서 막중한 책임을 짊어져야 했다.[12] 주로 김동수장채근이 번갈아 수상했다.[13] 해태의 장채근과 활동시기가 정확히 겹친다. 1986~1995년. 1996년은 김동기도 부상으로 거의 출장을 못해서 장채근과 김동기의 활동시기는 100% 겹친다고 보면 된다.[14] 나머지 3명은 류중일, 전대영, 박승호이다. KBO 포스트시즌까지 포함하면 김성래가 있다.(86한국시리즈 홈런, 93페넌트레이스 홈런)[15] 1993년에는 0-4로 뒤진 9회말 2사 만루서 0점대 방어율에 빛나는 선동열을 상대로 동점 만루홈런을 작렬했다. 김동기의 그 해 홈런수는 단 3개뿐이었다.[16] 다른 곳도 아니고 점수가 짜디짠 것으로 소문난 인천의 당구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