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덕

 

'''장덕
張德 | Jang Deok
'''
<colbgcolor=#878787><colcolor=#fff> '''본관'''
결성 장씨[1]
'''출생'''
1961년 4월 21일[2]
서울특별시 중구
'''사망'''
1990년 2월 4일 (향년 28세)
서울특별시 마포구
'''국적'''
[image] 대한민국
'''학력'''
안양예술고등학교 (졸업)
테네시주립대학교 (실용음악학과 / 학사)
'''신체'''
158cm, 46kg, O형[3]
'''가족'''
1남 1녀 중 둘째(오빠: 장현)
'''데뷔'''
1975년 노래 '꼬마인형'
1. 소개
2. 일생
3. 생전의 영상
4. 사망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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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대한민국싱어송라이터.
심수봉과 함께 대한민국 음악계 최초의 현대적인 여자 싱어송라이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장덕 사후 1990년대가 되어서야 이상은, 김윤아, 임현정 등 여성 싱어송라이터들이 등장할 수 있었다. 음악적으로는 당시 대한민국 음악계의 수준을 뛰어넘는 혁신적인 코드워크(코드의 진행)와 보이싱(화성을 구성하는 음의 배치를 바꾸는 것)을 보여주면서도, 단번에 신드롬이 될 만큼 뛰어난 멜로디를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녀가 활동했던 시기[4]에는 여자 싱어송라이터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던 때로[5], 1984년 데뷔한 이선희조차, '여자가 감히 작곡을 한다'는 편견 때문에 1996년 10집에 와서야 자신이 작곡한 곡을 앨범에 실으며 본격적인 싱어송라이터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심지어 여자가수가 바지를 입고 다니는 것마저 신기하다고, 정수라이선희, 장덕이 여자가수 바지삼총사라고 적힌 잡지기사마저 존재한다.
그러한 시대의 편견을 아름다운 음악만으로 뛰어넘었던 진정한 천재 싱어송라이터였지만 비슷한 시기에 세상을 떠난 유재하, 김현식이라든지 후세에 사망하여 재평가를 받는 김광석, 신해철 등의 음악가들과 달리 사후 거의 완전히 잊혀져서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2. 일생


1961년 4월 21일 서울특별시 중구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지 6개월만에 설암으로 세상을 떠난 그녀의 오빠 장현과 함께 '비운의 남매'라고도 불린다.
어려서부터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아버지의 영향이 컸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장덕의 아버지인 장규상[6]서울시립교향악단 첼리스트였고 어머니는 서양화가였다. 한마디로 전형적인 예술가 집안이라 할 수 있었다. 장덕이 음악에 재능을 보인것은 아버지의 영향이 컸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삶이 불행해진 것 역시 아버지 잘못이 컸다. 장덕이 초등학교 2학년이 될 때 그녀의 부모는 이혼했고, 장덕은 도봉산의 사찰인 청기와집에서 1년간 살았다고 한다. 당시 그녀의 아버지는 그 자신이 만든 '''뿐철학'''[7]이라는 것에 심취해 집을 비우고 술을 먹고 늦게 들어오기 일쑤였고, 그녀의 오빠인 장현도 남의 집 가정교사[8]를 해 밤 늦게 들어왔다고 한다.
<colbgcolor=#878787><colcolor=#fff> '''1976년 데뷔 앨범'''
결국 사춘기에 수면제를 먹고 자살기도까지 했다. 보다 못한 그녀의 어머니가 남매 듀엣인 '현이와 덕이'를 결성시켜 주었고, 미8군 쇼 무대에서 공연을 하다가 방송국 PD들의 눈에 띄어 TV로 데뷔하는 계기가 된다. 장덕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안양예고 1학년 때인 1977년 1회 MBC 국제 가요제에서 그가 작곡한 「소녀와 가로등」이 진미령의 노래로 입상하면서였다. 당시 작곡가와 가수가 함께 무대를 꾸미는 게 당시 대회 규정이었기 때문에 장덕이 직접 나와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그 후에도 3연속 입상을 하기도 했다.
1979년 오빠 장현이 결혼하면서 오빠집에서 나와 월세방으로 옮겼다. 하지만 아버지의 재혼 문제로 손목을 긋고 자살소동을 벌이기에 이르는 등 어려운 시기를 보내다가 결국 1979년 10월 그녀의 어머니가 살고 있던 미국으로 건너갔다. 1980년 델몬트 칼리지 음악과에 입학, 한학기를 마치고 테니시 주립대학 실용음악과로 옮겨 2년간 작곡 공부를 한다. 이때 한인 기독교 방송에서 MC로 활동하기도 했다. 81년 오모씨와 내쉬빌에서 결혼도 하여 남편과 가족보컬 <리 패밀리>를 결성하여 주로 한인회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삶이 순탄치 못해서 향수병에 빠졌고, 전자 포커게임으로 대학 등록금을 다 날리기도 했다. 결국 1983년 이혼했으며,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자식은 없었다고 한다. 그 후 1983년에 귀국했고 서라벌레코드사와 전속계약을 하고 "날 찾지 말아요"를 발표 순조로운 재기를 하게 된다. 하지만 얼마 안되 인기가 주춤하게 되자 오빠와 '현이와 덕이'를 재결성하기도 했었지만 음악적 견해가 달라 듀엣 활동은 다시 중단하게 된다. 이에 장덕은 솔로 활동을 준비하고 오빠 장현은 장덕의 매니지먼트를 전담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나온 곡이 바로 '님 떠난 후'이다. 당시 가요톱10에서 5주간 1위(골든컵)를 했었다고 하니 그 인기를 실감할 만 하다. 또한 1987년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ABU 가요제에 대한민국 대표로 나가기도 했다. 이후 가수 이은하에게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모습처럼"을 작곡하여 빅히트를 치게 되어 다시한번 작곡자로도 인정 받게 된다.
당대 여가수 중에서는 외모가 빼어났기 때문에 예능프로그램이나 단막극 드라마에도 자주 나왔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 1990년 설날 특집 드라마 "구리반지"의 주연 및 주제가를 불렀다.구리반지 풀영상

3. 생전의 영상




<rowcolor=#fff> ''''소녀와 가로등'. 1977년 서울가요제 당시 진미령이 부른 영상.'''[9]
'''장덕 음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님 떠난 후'. 1987년의 영상.'''
<rowcolor=#fff> ''''너 나 좋아해 나 너 좋아해'. 1987년의 영상.'''[10]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11]. 1987년의 영상.'''

4. 사망


하지만 그 행복할 것 같은 시간도 오래가지 않았으며 1989년 오빠인 장현이 설암에 걸렸고, 장덕은 그해 출시한 앨범 '예정된 시간을 위해'[12] 활동까지 중단하면서 장현의 병간호를 해야 했다.[13] 그런 가운데에서 그녀는 불면증까지 걸려서 수면제로 잠을 청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1990년 2월 4일에 서울특별시 마포구 염리동 진주아파트[14]에서 수면제와 기관지 확장제를 다량 복용해 신음하고 있는 것을 그의 매니저가 발견해 병원으로 옮겼지만, 결국 28세의 젊은 나이에 끝내 숨졌다. #
이렇듯 '''세 가지 약을 일시에 복용해 상승 작용에 의한 쇼크 사망''', 즉 '''자살이 아니었음'''에도 자살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여전히 많다. 아무래도 이전에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었고 여기에 약물 복용으로 인한 사망이기도 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오해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장덕의 안타까운 죽음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연예계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불과 며칠 전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노래를 부르던 가수가 갑작스레 사망했으니 모두의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당시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들은 장덕의 죽음을 추모하는 인사말로 방송을 시작했으며, 한동안 장덕의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가 신청곡으로 폭주했다. 당시 연예인의 사회적 신분상 신문 등에는 비교적 작게 부고 기사가 나갔지만, 그래도 거의 대부분의 일간지에서 그 기사를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오빠인 장현은 설암으로 투병 중이라 말을 할 수 없어서, 누이의 죽음에 인터뷰로 슬프다는 이야기를 메모로 보여주며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반년 뒤인 1990년 8월 16일에 장현도 결국 그녀의 뒤를 따라 갔다. 설암에 걸렸을 때 혀의 반을 자르면 살 수 있었지만 이는 가수를 포기하는 거와 마찬가지라서 거부했다고 한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1990년에 11명의 동료가수들에 의해서 리메이크와 미발표곡을 포함한 유고앨범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15] 가 발표되었고 이선희는 자신의 시집에 장덕 추모시를 실었다. 장덕의 30주기를 맞아 KBS 유튜브 채널 Again 가요톱10에서 2020년 2월 6일 생전의 출연 영상 모음을 올렸다.영상 모음
2013년 KBS 불후의 명곡 천재소녀 장덕 편이 방송되었으며,
2015년~2017년 오마쥬현이와덕이 음원이 동료, 후배가수에 의해 13곡이 리메이크 되었다. 그리고 2020년 12월 남이섬에 장덕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2021년 장덕 관련 도서출판, 전문다큐가 발표될 예정이고, 몇차례 리메이크곡도 발표 예정. 뮤지컬도 기획단계에 있다.
2018 남북공연 때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 추천요청곡이 현이와덕이 "뒤늦은 후회" 로 알려져, 많은 화제와 역주행되기도 하였다.

5. 여담


  • 한국어 위키백과 장덕 문서에 장덕에 관한 상세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으니 참고해 볼 만 하다.
  •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팬에게 다섯 번이나 납치를 당했다고 한다.
  • 심청전을 개그스럽게 패러디한 TV 드라마에 심청 역으로 출연했다. 상인 역은 박세민이었는데 인당수라고 인도한 곳이 웬 방죽... 심봉사가 '청아'라고 부르자 배우 김청이 '네?'하고 대답하는 장면도 있었다.
  • 그녀의 아버지인 장규상은 딸이 세상을 떠났다고 하자 그녀의 시신을 집으로 가져와 소생시키겠다고 심령술을 동원했었다고 하는데 당연하지만 그게 실현되진 않았다. 당시 관련기사. 소문에 의하면 장덕의 영과 소통하는데 성공했다고 하는데 그 영이 세상이 더러워서 다시 오기 싫다고 했다고 주장했다나, 게다가 장덕의 영이 오빠 현이의 병을 치료하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장현 역시 병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한편 장규상은 1996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 '현이와 덕이'는 오늘날의 악동뮤지션의 포지션이었는데, 당대 기준으로는 널리 알려졌던 미국카펜터즈와 엮이는 편이었다. 아무래도 '현이와 덕이'와 '카펜터즈'가 남매 듀엣이었던 데다가 장덕과 카렌 카펜터 둘 다 여동생에 안타깝게 운명을 달리했던 것도 연관되는 듯하다.
  • 이은하의 노래인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을 작곡하였는데, 이 노래는 이은하를 상징하는 기념비적인 노래이기도 하며, 굉장히 애절한 노래가 특징이기도 하다. 그 뿐만 아니라 임병수 5집에 나온 곡인 "사랑은 사랑대로, 이별은 이별대로"를 작사 작곡하였다. 임병수 5집은 1990년 12월에 발매되었는데, 사후에 발매된 것으로 보아 이 노래가 생전 마지막 작사곡이 된 셈이다.[16]
  • 일본에도 어느 정도 알려진 것 같으며 유튜브에 올라온 몇몇 장덕 노래 중에 다수는 일본팬이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 오카다 유키코처럼(이 사람은 자살했지만) 생전 큰 인기를 얻고 사망해서일 듯. 여담이지만 오카다 유키코와 장덕은 좋아하는 색깔이 흰색으로 같다.
  • 2013년 3월 16일 불후의 명곡에서 장덕 추모 특집을 방영해 다시금 회자되고 있다. 다만 ‘토이’의 이지형이 부른 곡은 신나게 편곡되어 대중평은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린다.
  • 2015년에 현이와 덕이의 매니저였고 추모앨범을 기획했었던 김철한을 중심으로 25주기 기념 재조명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관련 기사. 그러나 안타깝게도 김철한은 2017년 12월 27일 59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고 한다.
  • 2020년 8월 10일에 방송된 스타다큐 마이웨이에서 가수 양하영이 생전에 장덕과 매우 친한 친구였다고 언급했다. 나이대도 비슷하고 직접 음악을 만드는 싱어송라이터라는 공통점이 있고 의상실, 미용실도 같은 곳에 다녔으니 서로 돈독한 친분을 쌓았지만, 안타깝게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 마음이 아팠다고 회고했다. 장덕의 조카이자 장현의 아들인 장원을 만나고 같이 장덕의 유해를 뿌린 남이섬에 가기도 했다. 덤으로 장원은 아버지와 고모를 골고루 닮은 외모를 갖기도 했다.

[1] #[2] 장덕의 묘비. 참고로 저 묘는 장덕의 오빠인 장현의 묘로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대지공원묘원에 있다고 하며, 시신은 화장되어서 남이섬 상류에 뿌려졌다고 한다.[3] #[4] 1980년대 초반에 활동을 중단한 시기가 있어, 활동 시기는 1970년대 후반, 그리고 1980년대 중반~후반에 걸쳐 있다.[5] 여자 싱어송라이터가 드물었던 것이지 사람들이 여자가 작곡한다는 것을 수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비슷하지만 조금 더 이른 시기에 활동을 시작한 심수봉도 싱어송라이터다.[6] 1929년~1996년 11월 24일. 개성고보와 연세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의 수제자로 알려져있으며 천재적인 소질을 타고난 첼리스트인 그에게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첼로를 선물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1996년 향년 67세의 나이로 대장암으로 별세했다. 사망년도가 1999년으로 잘못 알려져 있으나 1996년이 맞다.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발췌기사[7] 우주는 착각이고 한낱 환상에 불과하며, 중요한 건 마음 뿐이고 필요한 건 사랑 뿐이라는 장규상 본인이 창조한 철학이었다. 이 때문인지 96년에 죽으면서 남긴 유언조차도 먼저 떠난 자식들에 대한 얘기가 아닌 "자유의 세계로 떠납니다. 좀더 사랑을 전해 주지 못하고 떠나는 것을 용서하십시오."라는 내용이었다.[8] 당시 가정교사는 지금의 과외와는 다르게, 아이 교육은 물론이며 집의 살림살이까지도 도맡았을 정도다. 경우에 따라서는 집에서 숙식을 했을 정도인데, 이런 이유로 당시 가난한 대학생들이 가정교사를 많이 했다.[9] 지휘하는 어린 장덕의 모습은 2분 57초 쯤 부터[10] 참고로 가운데에 있는 남자는 가수 김학래이고 우측은 조영남이다.[11] 장덕이 작곡한 이은하의 곡이다[12] 이 곡은 그녀의 마지막 활동곡이 되어버렸다. 애절한 멜로디와 이별을 준비라도 했다는 가사때문에 장덕의 추모곡으로 손꼽힌다. 특히 이 노래 마지막 가사로 인해 호사가들은 이를 두고 자살을 암시한게 아니었냐며 말이 많았다. 참고로 마지막 가사는 '이제는 시간이 됐어요 그대여 안녕'.[13] 해당 곡은 장덕 사후 동료 가수들의 리메이크 버전이 뮤직박스 순위에서 2위까지 올랐으며 활동중단의 여파로 정상은 밟지 못했다.[14] 2001년에 마포자이로 재건축되었다. 마포역 근처의 염리초등학교 옆에 있다.[15] 장덕이 부른 타이틀곡은 '예정된 시간을 위해' 이며 장덕이 생전에 마지막으로 TV프로그램에서 불렀다.[16] 이후 '샐러리맨의 블루스'로 인기를 얻은 강용욱의 앨범에 '좀 더 가까이', '비 그리고 사랑'이, 김성필의 앨범에 '우리 사랑 영원히'등의 미발표곡이 수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