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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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남자 싱어송라이터다.
짧은 생애와 단 한개의 앨범만을 남겼지만, 그야말로 대한민국 대중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긴 위대한 인물이란 말이 아깝지 않은 가수. '''지금 나오고 있는 발라드는 모두 유재하의 모방'''이라는 평까지 듣는다. 1집이자 유작인 사랑하기 때문에는 지금 들어도 놀라울 정도로 세련되고 단아한 앨범이다. 어눌하지만 솔직한 보컬, 절제를 아는 악기, 가슴 시릴 정도로 쓰라리고도 담백한 가사가 인상적이다.
2008년경 MBC 창사 47주년 특집 MBC FM4U의 '한국 대중 음악, 시대를 걷다' 에서 음악 평론가 임진모는 "대한민국의 발라드는 이영훈에 와서 문이 열리고 싱어송라이터의 세계, 즉 창작과 작곡 편곡의 세계로 발라드의 지평으로 올린 사람이 유재하다"라고 평가했다.
2. 일생
1962년 6월 6일, 경상북도 안동군(현 안동시) 풍천면 하회동 하회마을에서 태어났다. 종교는 천주교이며, 세례명은 미카엘이다. 서울 대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1년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에 진학하였다.
소박한 이미지와는 달리 김광민 등 생전 유재하의 친구들의 증언에 따르면 의외로 유복한 집안 출신이었다고 한다. 여러가지 루머가 있는데 실제로는 큰 탄광을 경영하는 사업가 집안이었다.
순수음악을 전공했다. 한양대 재학 시절 과제로 제출하기 위해 작곡한 곡을 보고 교수가 "아무리 급해도 모차르트를 베껴 오면 어떻게 하냐"고 혼을 냈다는 일화가 있다. 그의 음악이 모차르트만큼 훌륭한 나머지 교수가 착각했다는 뜻이다. 그의 데뷔 앨범 <사랑하기 때문에>의 수록곡들 중 5번 트랙 "Minuet"는 아예 고전음악이다. 대중 음악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작곡과 작사, 편곡 외에도 바이올린, 피아노, 기타, 키보드 등 여러 악기의 연주에 능통했던 그는 대학 졸업을 앞둔 1984년 클래식과 재즈를 대중 가요에 접목하는 음악적 지향점을 세웠다.
한양대 재학 중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키보디스트로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이때 조용필은 나중에 유재하의 대표곡이 되는 ''''사랑하기 때문에'''' 를 자신의 7집 앨범에 먼저 취입했다. 하지만 조용필의 일본 공연 동행에 필요한 학교의 허가를 받지 못하여 위대한 탄생에서 탈퇴하게 된다.
최고의 히트곡이자 명곡인 <사랑하기 때문에>는 사실 조용필의 앨범에 먼저 수록되어있다. 7집이 발매되기 약 반년 전인 1984년 11월 일본에서 발매된 조용필의 <아시아의 불꽃> 앨범에 한국어 버전과 일본어 버전('芙蓉の花のように') 두가지로 먼저 실린 것. 이것은 유재하의 곡 중 최초로 레코딩된 버전이다. 그런데 양인자 작사 조용필 작곡으로 표기되어 있다.
7집 발매 당시인 1985년 '위대한 탄생' 의 멤버였던 23살 새파란 청년 유재하의 재능을 꿰뚫어본 조용필이 '''"너 곡 좀 써봐라"''' 라고 이야기하고 유재하가 감격해서 10곡 이상을 작곡했는데, <사랑하기 때문에> 한 곡만 쓰여서 유재하가 실망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그런데 봄여름가을겨울은 이 에피소드를 조용필이 아닌 김현식과 연관 지어 얘기한 적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김현식 관련 문단을 참조할 것.
당시 위대한 탄생의 리더였던 송홍섭은 이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했다. 송홍섭이 유재하의 집에 방문하게 되었을 때 유재하가 그에게 자신의 노래를 조용필이 부를 수 있도록 소개해달라고 부탁했고, 악보를 전해 받은 조용필이 (당시로서는 드물었던) 장조 발라드의 곡이라며 유재하 곡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녹음을 했다는 것이다. 당시 유재하가 조용필에게 준 곡은 '사랑하기 때문에'와 '우리들의 사랑'. 다만 유재하는 조용필이 녹음한 '사랑하기 때문에'를 듣고는 본인이 생각한 곡의 정서와 맞지 않아 아쉬워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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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곡 중 하나인 '우리들의 사랑' 악보, 조용필에게 주었던 버전이다. 현재 불리는 가사와는 다른 부분이 보인다. 1983년 이문세의 1집 앨범인 나는 행복한 사람에 유재하의 그대 내 품에가 수록되어 있다. 유튜브에 찾아 보면 음질이 좋지가 않다.
한양대 졸업 후 1986년에는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에서 활동하였다. 라디오 스타 김현식 특집에서 <봄여름가을겨울> 멤버들이 당시 3집을 준비 중이던 김현식이 멤버들에게 곡 좀 써오라고 하니까 유재하가 그때까지 자신이 썼던 자작곡 10여곡을 다 가져다 줬다. 그런데 형평성 맞춘다고 멤버당 한 곡씩만 넣는다고 하자 유재하가 삐져서 <봄여름가을겨울>을 나갔다고 밝혔다. 이때 김현식이 받은 곡은 희대의 명곡이자 유재하 1집의 수록곡인 <가리워진 길>.(이후 김현식은 유재하 사후, 추모의 의미로 <그대 내 품에>를 자신의 4집에 수록했다.) 그리고 유재하의 대타로 급히 영입된 박성식이 김현식 3집 때 내놓은 곡 또한 희대의 명곡인 <비처럼 음악처럼>이다. 다만 유재하가 밴드에서 나간 뒤에도 김현식과 유재하는 술친구로서 서로 잘 지냈다고 한다.
어쨌든 자신만의 음악을 추구하고 싶었던 유재하는 돈 800만 원을 들여서 자신이 모든 곡의 작곡, 작사, 편곡을 한 솔로 앨범 사랑하기 때문에를 1987년 8월에 서울음반을 통해 내놓는다. 당시에도, 지금도 작곡, 작사를 맡는 싱어송라이터들은 흔하지만 편곡까지 혼자서 맡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런데 신중현이나 조용필같은 거장들도 하기 힘든 작업을 유재하는 만 25살에 한 앨범 통째로 해버린 것이다. 게다가 유재하는 오케스트라 반주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악기를 혼자서 연주했다. (피아노, 기타 등 스스로 연주할 수 있는 악기는 혼자 맡았다)
오케스트라 반주 역시 유재하가 대학교를 다니면서 알게 된 후배들이나 지인들을 섭외해 녹음했다고 한다. 당시 유재하 앨범의 반주를 연주했던 후배들은 처음에 대중 음악의 반주를 녹음하게 될 줄은 몰랐다는 듯. 그래서 '이런 거 해도 되나? 걸리면 학교에서 짤리는 거 아냐?' 식으로 걱정도 많았다고. 유재하는 그런 후배와 지인들을 다독여주면서 앨범 녹음을 끝냈다.
오늘날 유재하가 수많은 후배 가수들의 존경을 받는 이유는 이런 예술 작품을 만드는 듯한 정성스러운 자세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사실 이 앨범이 처음 나왔을 때도 이래저래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가창력 미달을 이유로 출연 금지를 당하기도 했다. 당시의 평론가들은 클래식과 가요를 접목한 유재하의 앨범을 높게 평가하지 않고 "이상한 노래" 정도로만 치부했다. 당시에 라디오 프로그램이나 TV 가요 프로그램에 나가기 전에는 PD들에게 사전에 테스트를 받는 제도가 있었는데, 그 테스트에서도 가창력 미달을 이유로 번번히 통과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노래는 라디오를 통해 청취자들의 큰 반향을 일으키며 인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 이문세가 진행하는 MBC 라디오의 '별이 빛나는 밤에'에서는 한 주간의 신청 엽서와 방송 횟수를 집계해 가요 순위를 선정하는 '별밤 차트'란 코너가 있었는데, '지난날'이 기록적으로 장기간 1위를 질주하기도 했었다.
한편 당시에는 팝송이나 클래식 음악을 고상한 문화예술로 치는 반면 가요는 대중 오락의 한 종류로만 치부하는 분위기였고, 클래식 전공자들 입장에서는 클래식 음악을 전공했던 유재하가 대중 가요를 만든다는 건 고상한 문화 음악을 포기하고 질 낮은 딴따라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유재하는 학교를 그만둘 생각도 했었다고 한다. 그 여성의 증언에 의하면 '''"학교 때려칠까..."''' 라고 유재하가 말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유재하가 1집을 녹음하기 직전 지인들이 유재하에게 작곡한 음악을 들려 달라고 부탁하여 유재하의 음악을 들을 때면 항상 유재하는 자신의 음악을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알아요 형편없죠…" 하며 푸념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여러 에피소드가 있다. 유재하의 앨범 녹음 과정을 참관했던 여성의 증언에 따르면(명작스캔들 참조) 무척 수줍어하고 조용한 인상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술을 조금 들어가면 말이 많아지면서 쾌활해지는 성격이었다고. 유재하는 술만 마시면 말도 많아지고 피아노가 있는 술집에 가면 끝도 없이 즉흥 연주를 계속했다고 한다. 주인들이 나중에 참지 못하고 나가라고 할 때까지…
한편 김현식의 소속사 사장이자 유재하를 데뷔시킬 뻔 했던 동아기획의 김영 사장은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유재하의 성격을 개그맨에 비유할 정도로 밝고 쾌활한 타입이라고 소개했고 잘 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주위 사람들이 처음 보면 '바람둥이'같이 보일 것이라는 표현을 할 정도로 여성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었던 면모를 소개하기도 했다.
한영애는 유재하의 일화를 공개했는데, 유재하는 항상 대중음악인들과 소통하고 싶었으며, 유재하한테 팬레터가 왔을 때에 모두 모이라고 하였던 것과, 어제 뭐했냐는 질문에 팬레터 쓰느라고 밤 꼬박 샜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유재하의 쾌활하고 순진한 성격을 알 수 있다.
가톨릭 교회에 다녔는데, 성당 앞에 레코드 가게 주인에게 당시 유재하가 앨범 내기 전에 데모 테이프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가게 주인은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이 가장 괜찮다고 했고, 유재하도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이 가장 좋았다고 한다.
2.1. 사망
그러다가 1집을 발표한 직후인 1987년 10월 31일 저녁에 웬일인지 잘 가질 않던 동창회를 갑자기 간다고 나섰다.[5]'''형, 잠시 나갔다 올게. 가수 됐다고 동창이 찾아왔는데 빨리 해치우고 올게~'''[4]
다음 날인 11월 1일 새벽에 술에 취한 친구가 몰던 포니2를 얻어 타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그 차가 용산구 한남대교 근처 강변북로에서 중앙선을 침범하여, 마주오던 택시와 정면 충돌하는 바람에 25세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사후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現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오산리 천주교 용인공원묘원에 안장됐다. 유재하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그를 만났던 사람에 의하면 유재하는 1집의 완성도에 아쉬워했고 만약 2집을 발매할 수 있다면 그 앨범은 더 좋은 앨범으로 만들겠다는 그의 강한 의욕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음주운전을 하던 친구 성낙헌도 이 사고로 숨졌으며 유재하 유족들은 성낙헌의 아버지 성순용과 충돌한 택시 업체인 한도콜택시를 상대로 4억 1,600여 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였고, 1988년 8월 3일 서울민사지법 합의 15부에서는 "승용차를 모는 친구가 술에 취한 것을 알고도 같이 타고 가다 사고가 났으면 피해자도 50%의 과실이 있다"며 "피고 성씨는 유씨 가족에게 4,460여 만원을 지급하면 된다"고 판결했다.
KBS 젊음의 행진에 나와 1집 앨범 수록곡인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을 부른 영상이 남아 있는데 이게 유재하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방송에 출연한 모습이다. 방송에 꼭 나가고 싶어했던 유재하는 알고 지내던 한영애에게 "누나 나 방송 나가!" 라고 자랑했다고 한다. 한영애는 유재하 자신의 앨범에 싣지 않은 2곡을 받은 뮤지션 중 하나. 나머지 한 곡은 이문세가 받았다. 한영애가 받은 곡은 '비애'라는 노래이다. 한영애 2집 바라본다에 수록되었고, 이문세가 받은 노래는 '그대와 영원히'다. 이문세의 3집 앨범인 난 아직 모르잖아요에 수록되었다.[6]
유재하 사망 직후 라디오에서는 갑자기 '사랑하기 때문에'와 '지난날'이 정말 물릴 정도로 많이 나왔다. 생전에 크게 대중적인 주목을 받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사후 오히려 인지도가 올라가며 뒤늦은 인기를 얻었다는 것이 더욱 사실에 가깝다.
앨범 사랑하기 때문에에 실린 곡들은 사실 유재하 자신의 자전적인 사랑 이야기로, 유재하가 곡을 바친 주인공은 바로 해당 앨범의 기악 파트 중 바이올린, 오보에, 플루트을 담당한 김애란이라는 여성 연주자라고 한다. 한양대학교 1학년 때 그녀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라고 알려져있지만 사실 그녀는 초등학교 동창이었으며 대학에서 기적처럼 만났음이 라디오스타 유재하편과 본인이 먼 지인이라고 주장하는 유튜브의 몇몇 댓글에 의해 밝혀졌다. 라디오스타 유재하편에서 피아니스트 김광민에 따르면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그녀를 대학에서 만나 '다시 돌아온 그대 위해'라고..) 어찌어찌 해서 결국 그녀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했다고. 유재하가 죽자 당시 사귀는 중이었던 이 여성은 충격을 받고 한동안 잠적하며 은둔 생활을 하며 슬퍼했다. 그렇게 몇 해동안 살다가 보다 못한 부모가 해외 여행이라도 하며 안정을 취하게끔 했다고한다. 스위스로 여행가서 한 카페에 들렀는데 난데없이 카페에서 유재하 노래가 나와서 기겁했다고. 카페 주인에게 이 노래에 대하여 묻자 한국인 여행자가 준 음반인데 가수나 가사는 몰라도 너무 애절하여 종종 틀어준다는 답변을 했다고 한다. 이 여성은 나중에 다른 사람과 결혼하여 잘 살고 있다고.
유재하 사망 당시 65세였던 아버지 유일청 씨나 61세이던 어머니 황영 씨도 큰 충격을 받았다. 나이를 보면 알겠지만 유재하는 요즘 기준으로도 엄청난 늦둥이로 태어났는데 아들이 음악 좋아하여 연주하는 걸 시끄럽다고 꾸짖은 게 두고두고 한이라고 1988년 한 월간지의 인터뷰에서 어머니가 언급했다. 당시 아들의 생전 음반 연주 사진을 방구석에 두고 말없이 쳐다보던 아버지 사진이 이 잡지를 보던 유재하 팬들을 가슴 아프게 했다. 해당잡지 스캔자료[7]
명곡 <사랑하기 때문에>의 중간에 들어가는 깔끔하고 가슴 쓰라린 기타 연주나 <우울한 편지>의 우울한 피아노 간주는 2020년대 기준으로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조용필, 이문세, 김현식같은 선배 가수들이 왜 그렇게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는지는 앨범 한 장으로 명료하게 드러난다.
김현식 등 당대 음악 선배들이 유재하를 그토록 아꼈던 이유는 당시 기준으로 대중음악계에서 보기 드문 음대 출신(게다가 명문대) 음악가 후배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대중음악계의 환경이라는 건 개인의 음악성과 음악을 만드는 기본기가 전혀 딴판이어서 대부분의 대중 가수들 중 일부를 빼놓고는 악보를 그려서 작곡할 수 있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악보를 제대로 볼 줄 모르는 가수도 많았었던 시대였다. 그렇게 제대로 된 음악 교육 기회 없이 그저 개인이 가지고 있는 '삘'로만 음악을 하고 있는데 한양대 음대 작곡과 출신이 대중 가요를 한다고 나타났으니 선배들 입장에서는 대중음악계에 큰 기대주였던 셈이다.
특히 김현식은 유재하를 무척 아꼈다. 김현식은 후배들을 폭력으로 이끄는 스타일이었는데, 김종진이나 전태관 등 당시 봄여름가을겨울 멤버였던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유재하는 항상 그 구타와 집합의 대상에서 열외였다고 한다. 평소 가요계 군기반장이자 성질 있기로 유명한 김현식이 얼마나 유재하를 높게 평가했나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김현식은 '''유재하 3주기'''인 1990년 11월 1일에 간경화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김현식이 유재하가 세상을 떠난 이후 슬픔에 빠져 술을 가까이 하다가 간경화를 얻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두 뮤지션에게 바치는 헌정곡으로, 2004년 에픽하이가 '11월 1일'이라는 노래를 자신들의 정규 앨범에 수록했다. 두 뮤지션의 기이한 인연을 모르는 젊은 음악 팬들도 해당 곡을 듣고 비화를 알게 된 케이스가 상당히 있었다.
그리고 신승훈이나 윤종신, 김현철 같은 가수들이 유재하의 영향을 받아 그의 음악을 재발견하기 시작했다. 이문세의 경우에는 유재하가 생전에 전혀 유명한 가수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망 소식을 듣자마자 라디오 방송에서 울면서 뉴스를 전했다.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재하 노래 <지난 날>에서 이문세가 바로 코러스로 참여하기도 했고, 유재하는 죽기 전에 이문세에게 노래를 한 곡 써주었다. 나는 아직 모르잖아요가 실린 이문세 3집에 그대와 영원히가 그 노래이다. 3집 녹음 당시 이문세는 당대 최고 가수가 아니라 1, 2집의 실패로 인한 아쉬운 가수였다. 이문세의 히트가 3집 이후이니 이문세의 황금앨범(3, 4, 5집)대열에 그대와 영원히라는 뛰어난 곡으로 서막을 여는데 참여했다고 보는 게 맞다.
대한민국 대중음악사가 유재하 이전과 유재하 이후로 나뉜다는 말은 바로 이러한 그의 음악적 배경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음대 작곡과 출신답게 그의 음악은 기존의 대중음악과는 사못 다른느낌을 주는데 쉽게 말해 기존 대중가요가 일률적으로 가졌던 소위 '뽕끼' 가 그의 음악에서는 완전 사라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8] . 그의 노래 대부분이 다소 슬프고 애잔한 느낌을 주지만 이전의 가요처럼 신파조는 아니다. 오히려 슬프지만 무언가 깔끔한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다. 한국 가요 발라드계의 양대 원조격인 이영훈의 음악들조차 사실 저 '뽕끼' 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뽕끼' 라는 것이 다소 신파적인 멜로디를 선호하는 한국인들의 특성에 기인한 것으로 순전히 단점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그러나 유재하의 경우 한국 가요계의 흐름과는 전혀 다른 장르를 그 어린 나이에 새롭게 길을 텄다는 점이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이다. 단순하게 봐도 조용필이라는 전무후무한 황제가 압도적으로 지배하던 가요 지평에 1980년대 후반 이후부터 이어지던 발라드의 두 시초라는 것에 대단한 점이 있다. 이문세-변진섭-신승훈으로 이어지는 한국형 발라드 계보의 스타트는 이영훈과 유재하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2021년 SBS에서 방송한 전설의 무대 아카이브 K에서는 실제로 이영훈과 유재하를 한국형 발라드 계보의 시초라 평가하는 방송을 진행하였다. 특히 여기서 강조한 점은 발라드에 팝적 요소를 가미하고, 브릿지 부분을 도입한 것을 그의 업적으로 바라봤다.
후배 가수들, 특히 발라드 가수들에게 끼친 영향이 상당하다. 사실 소위 말하는 현대의 한국 발라드는 지금도 유재하 1집과 이영훈이 전곡을 작사/작곡한 이문세 4집, 5집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 이적은 작곡, 작사, 음악을 대하는 자세 등 거의 모든 부분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가수 중 하나가 유재하라고 한다.
- 유희열이 클래식 음대를 진학하게 된 계기가 유재하라고 한다. 게다가 유재하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위치에 있지 못했으리라고 그에게 존경심을 표시하기도 했다.
- 유영석은 유재하에 대해서 놀라움, 질투, 존경을 한 번에 느낀다고 한다.
- 김동률은 유재하의 죽음으로 한국 발라드 계열의 음악은 100년은 퇴보되었다고 말할 정도고, 신승훈은 그를 추모하기 위해 일부러 11월 1일을 자신의 데뷔일로 잡았다.
- 윤종신은 라디오 스타에서 '이 사람의 노래를 듣고 음악을 하겠다고 마음 먹었고 마음 속의 라이벌로서 그를 따라가려고 했지만 특히나 작사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 는 이야기를 하였다.
- 이상은도 유재하 노래를 상당히 좋아해서 특히 라디오 방송 같은데서 '사랑하기 때문에',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등을 자주 부르곤 했다. 이문세가 내 노래중에 어떤 곡을 제일 좋아하냐고 이상은에게 물어본 적이 있는데 '그대와 영원히(유재하 곡)'라고 답했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지난 1997년, 조규찬 등이 참여한 그의 추모 앨범인 "다시 돌아온 그대를 위해"가 제작되었다. 물론 이 앨범도 서울음반을 통해 출시됐다.
2003년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에 '우울한 편지'가 실리면서 다시 주목받았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유재하의 앨범이 '가창력 미달'로 금지곡이 된 적이 있다고 한다.#
2010년 10월 10일 1박 2일 방영분을 통해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이 방송되었다.[10]
2011년 MBC 우리들의 일밤의 나는 가수다의 5월 26일 방송분에서 박정현이 유재하의 "그대 내 품에" 를 불렀다. 나는 가수다 스포로 그녀가 이 노래를 선택했다는 사실이 알려져서 우려의 목소리가 많았지만 잔잔하게 이 노래를 소화해내 좋은 평가를 받았다. 박정현은 한국에 와서 제일 먼저 선물받은 것이 유재하 1집이었고, 그 때 많은 영향을 받았었다고 <나는 가수다> 방송 중의 인터뷰에서 언급하기도 했다.
2011년 6월 28일 KBS의 명작스캔들에 유재하편이 방송되었다.
2012년 11월 2일 방송된 KBS의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는 <땡스 투 유재하> 특집을 방영하여 유재하와 관련있는 가수들을 초청해 '''유재하가 만든 노래 전곡을 TV 방송 최초로 공연했다'''. 이 방송에 출연한 이적의 말에 따르면 라디오 방송을 제외하고는 TV에서 유재하의 노래 전곡을 방영한 적이 없다고 한다.
2013년 7월 20일 KBS의 불후의 명곡 전설을 노래하다에서 유재하 특집을 방영하였다. 문명진이 '사랑하기 때문에'를, 조원선이 '우울한 편지'를, 홍경민이 '지난 날'을, JK김동욱이 '가리워진 길'을, 하동균이 '그대 내 품에'를, 원모어찬스가 '그대와 영원히'를 불렀다.
2014년 10월 29일 라디오 스타에서 유재하를 주제로 한 유재하이기 때문에 특집을 방영했다. 일단은 토크쇼가 베이스다 보니 친구들(김광민, 장기호)이 들려주는 잡설(EX: 목소리가 맹구같았다.)들과 나머지 게스트 (조규찬, 박원)들이 들려주는 유재하에게 영향을 받은 점 + 바치는 노래까지 해서 재미와 감성을 둘 다 잡는데 성공했다.
유재하 30주기를 기념하여 그를 소개하는 글이 올라왔다. 그의 음악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사랑하기 때문에 전 곡이 수록되어 있으니 읽어볼 만 하다. 30주기 기념 소개
2020년 유재하와 김현식의 인생을 다룬 너와 나의 계절이라는 영화가 제작중이다.
3. 앨범 목록
3.1. 1집 사랑하기 때문에
3.2. 추모 앨범
3.2.1. 1997년 앨범
1997년 유재하 10주기를 맞아 김현철의 프로듀싱으로 추모 앨범인 '''"유재하를 추모하는 앨범 1987 다시 돌아온 그대 위해"'''가 발매되었다. 음악 포털 등지에서 1997, 1987을 혼용하고 있는데 이는 1987의 8을 9와 8을 동시에 표현하는 문자로 디자인해 1997년에 1987년의 유재하를 추모한다는 의미의 앨범 타이틀이였다. '~그대를 위해' 등으로 기재된 곳도 있으나 이는 맞춤법에는 맞으나 원 앨범 제목과는 거리가 있다. 김현철이 전체 프로듀싱을 하고 그야말로 후덜덜한 라인업이 가창과 편곡으로 참여한 앨범.
김현철의 프로듀싱 치고는 과소평가받는 앨범이지만 추모 앨범에서 흔히 일어나기 마련인 '보컬/편곡 미스매칭' 이 거의 눈에 띄지 않을 뿐더러 전체 프로듀싱을 한 명의 프로듀서가 담당함으로써 전체적인 완성도도 높다. 다른 추모 앨범들이 편곡에 힘을 쏟지 않았거나 음악적 역량이 떨어지는 일부 아이돌 내지 댄스 가수를 섭외하여 제작된 OME 트랙을 꼭 포함했던 걸 보면... 다만 음악적 완성도와는 별개로, 서정적인 스트링 편곡으로 가요계에 새 전기를 마련한 유재하의 추모 앨범임에도 당시 김현철의 음악 스타일이던 도회적인 브라스 위주 편곡으로 원곡과 정서가 많이 달라진 곡들이 좀 있어서(대표적으로 '지난 날'), 호불호는 좀 갈리는 편이다.
같은 해 발매된 신중현 헌정 앨범과 더불어 대한민국 대중음악 헌정앨범의 효시격인 앨범으로 꽤 괜찮은 앨범으로 평가받는다. 수익금은 전액 유재하 기념 사업에 쓰였다고 한다.
- 트랙리스트
- 다시 돌아온 그대 위해
배훈이 작사작곡한 오리지널곡. 여러 뮤지션들이 소절을 나누어 부른다. 출연순으로 김현철, 나원주, 유영석, 한동준, 신해철, 일기예보, 김동률, 정재형, 김광진(더 클래식), 이적, 여행스케치, 이소라, 고찬용, 조규찬. 맨 마지막은 역대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출신들의 합창으로 이루어졌다.
- 지난 날 (유영석)
- 그대 내 품에 (나원주[11] )
- 텅빈 오늘밤 (신해철)
-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더 클래식)
- 가리워진 길 (일기예보&여행스케치)
- 우울한 편지 (고찬용[12] )
- 우리들의 사랑 (이적&정재형)
- 비애 (엉클(권혁진&한동준))
- 그대와 영원히 (이소라)
이문세 3집 '난 아직 모르잖아요(1985)' 에 실린 유재하의 곡. 한영애의 '비애' 와 더불어 유재하가 쓰고 1집에 실리지 않은 두 곡 중 하나다.
- Minuet (인공위성)
연주곡이었던 'Minuet' 을 인공위성의 아카펠라로 연주.
색소폰으로 연주된 '사랑하기 때문에' 가 배경으로 흐르는 가운데 조용필, 봄여름가을겨울, 이문세 등 생전의 유재하를 기억하는 여러 선배 뮤지션들이 유재하를 그리워하며 한 마디씩 녹음했다.
3.2.2. 2017년 앨범
2017년 12월 7일. 유재하 30주기를 맞아 김형석의 프로듀싱 하에 헌정 앨범 '''"유재하 30년, 우리 이대로 영원히 '''"가 발매됐다. 앨범 제작과정을 수지가 브이앱으로 실황중계 하며 관심을 모았다. 프로듀서 김형석이 자신의 수하에 두고 있는 뮤지션을 모두 참여시킨 것도 특징이다.
- 트랙리스트
- 우리들의 사랑 (닉앤쌔미)
- 그대 내 품에 (이진아)
- 텅빈 오늘 밤 (G.SOUL)
-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Prod. 이든) (P.O)
- Minuet(Prod. 김형석) (Maytree)
- 가리워진 길 (조원선)
- 지난 날 (Prod. 김조한,뮤지) (김조한, 킬라그램)
- 우울한 편지(Prod. 윤종신) (박재정)
- 사랑하기 때문에 (수지)
- 그대와 영원히 (Prod. 스페이스 카우보이) (김우주)
- 비애 (리차드파커스)
3.3.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유재하음악장학재단 홈페이지
사후 유족들은 1집인 "사랑하기 때문에" 의 수익금을 이용해 유재하 음악 장학회를 세우고 1989년부터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2005년에는 재정 문제로 중단되었으나 2006년에 싸이월드의 후원으로 재개되었다. 2013년 역시 스폰서를 구하지 못해 경연대회 개최가 힘들었으나, 100명에 가까운 이른바 '동문(역대 수상자들)'의 힘을 모아 겨우 개최가 가능하게 되었다. 근데 후원단체가 고정되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힘들어질 상황이다. 2019년 30회 대회는 CJ문화재단의 후원을 받아 열렸다.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는 그동안 수많은 음악인들을 배출해냈다. 단순히 음악인이 아니라 한국 음악계의 최전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물들. 그 라인업이 대중음악 레전드급인데, 조규찬, 유희열, 방시혁, 루시드폴, 이규호, 나원주[14] , 정지찬[15] , 심현보, 김연우, 정준일, 임헌일, 노리플라이, 오지은, 박원, 박세진, 고찬용, 스윗소로우 등이 대표적 인물이며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유재하 음악 경연대회가 배출한 인물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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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재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윗 사진에서도 보이듯 유난히 목이 굵고 길었다고 한다. 보통 목이 짧고 굵은 사람이나 얇고 긴 사람은 많아도 목이 굵으면서 긴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문세가 실제로 유재하를 처음 봤을 때 무척 신기해했다.
- 유재하의 이름을 한자로 풀면 柳在夏. 즉 원래 한자 표기대로라면 이름을 류재하로 쓰는 게 맞지만 당시 'ㄹ'이 'ㅇ'으로 바뀌는 두음법칙으로 인해 대중들에게는 유재하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그의 부친도 언론에 소개될 때는 류씨라고 표기했었다. 항렬로는 류시원의 조카뻘이다.
- 세계적인 설치미술가 서도호와는 초등학생때부터 각별한 친구 사이라고 하며 서도호는 유재하의 데뷔 앨범의 자켓 사진을 그려 주기로 약속했었다. 그러나 서도호의 미국 유학행으로 불발 되었고 먼 훗날 서 작가는 유재하의 추모앨범 커버 그림에 참여하였다.
- '사랑하기 때문에'의 기타 연주는 유재하가 한 것이다. 동갑내기 친구였던 김종진에 의하면 원래 유재하는 기타를 칠 줄 몰랐고 본인이 먼저 기타를 배웠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배운 유재하가 기타 실력이 엄청나게 늘어나서 주위 사람들이 당황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악보가 없는 외국 기타리스트의 기타 연주를 순전히 하루만에 귀로 캐치해서 연주했다고 한다.
- 보컬은 약간 음정이 불안정하고 어눌하긴 하지만, 그것조차 매력이라고 평가받는다. 유재하의 노래를 처음 듣는 사람들은 '에이, 이 정도는 나도 부르겠다' 식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직접 불러보면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 유재하 특유의 어눌하고 담백하고 순수한 느낌은 잘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노래 방식이기 때문. 이에 대해서 가수 박정현도 유재하의 음악을 듣고 단지 기교가 전부가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 유재하의 노래인 <사랑하기 때문에>와 동명의 제목을 가진 영화가 개봉했는데 여기서 주인공인 진이형의 삶이 유재하와 흡사하다. 일단 좋아하는 여자가 음악을 하는 사람이고, 참고로 진이형이 좋아하는 여자는 첫사랑인데 유재하가 좋아했던 여성도 첫사랑이다. 그리고 이 여성에 대한 순애보적인 면도 비슷하다. 그리고 사고를 당하는 장면도. 아마도 제목도 그렇고 이 주인공의 모티브는 유재하인 듯하다.
- 잘 알려지지 않는 이야기인데 유재하의 그대와 영원히는 원래 문관철이라는 가수[16] 에게 1984년에 1집 앨범 작업을 위해 유재하가 주었다. 당시 문관철은 1984년 때 시나브로 라는 카페를 운영 중이었는데 당시 한양대학교 작곡과 후배가 유재하였고 둘이 2살 차이였다. 문관철이 60년, 유재하가 62년생이다. 그 카페에는 김현식, 유재하, 들국화, 시인과 촌장, 빛과 소금, 봄여름가을겨울, 김광민, 한상원, 해바라기, 조하문, 권인하 등 많은 뮤지션이 왔었다. 유재하는 1984년에 그대와 영원히라는 노래를 이문세보다 앞서 문관철에게 주었다. 하지만 그때 당시 본인의 자비로 자체 제작을 해서 늦게 앨범이 발매되었다. 결국 1985년 이문세 3집이 나와 그대와 영원히를 발표했고 문관철은 앨범을 본인 자비로 해서 1987년에 1집 앨범을 발매한다. 문관철은 이문세의 그대와 영원히가 있다는 것을 어느날 라디오에서 이문세의 그대와 영원히가 나오는 것을 듣고서야 알게 되었다고 했다. 이문세가 어느 프로그램에서 이 일화를 언급했는데 술을 마시면서 이문세가 유재하에게 곡좀 달라고 하였고, 그래서 줬던 곡이 그대와 영원히라고 이문세가 가로챈 것도 아니고 그냥 유재하가 이문세에게 준 것으로 보인다.
- 유재하가 본격적으로 음악활동을 시작한 것은 군 전역 이후였다.# 하지만 당시 육해공군 복무기간이 최소 30개월 이상이었고, 군 복무 기간에는 대부분의 활동이 제한되는 데도 불구하고 복무기간으로 추정되는 85~86년 사이에 음악활동의 행적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복무기간이 14~18개월 정도로 짧고 출퇴근이 가능했던 방위병으로 복무했을 가능성이 높다.
[1] 인근의 광덕리와 함께 풍산 류씨 집성촌이다. 배우 류시원, 류돈우 전 국회의원도 이 마을 출신이다.[2] 27세 '''하(夏)''' 신(信) 문(文) 항렬.[3] 이에 대한 설명은 기타 부분 참고.[4] 동창회에 가기 전 수술 후 칩거 중이던 형에게 한 말.결국 이 말이 유언이 되고 말았다.# [5] 김종진에 의하면 유재하가 면허를 딴 기념으로 술자리를 가다가 사고를 당한 거라고 말하였다.[6] 이 노래가 군사정권 시절 때 심의에 걸렸는데 그 이유가 붉은 바다가 빨갱이를 연상 시킨다는 근거 없는 개소리 때문이였다. 결국에는 푸른 바다로 고치라고 했으나 유재하가 눈물로 호소하여 가까스로 막았다는 일화가 있다.[7] 네띠앙 메일로 된 주소가 나왔는데 2000년 초반에 스캔한 자료로 지금은 스캔자료조차 레어가 된 셈이다.[8] 다만, 같은 곡이라 하더라도 한세대 위의 가수인 조용필이 부른 '사랑하기 때문에'는 뽕끼가 상당히 느껴진다.[9] 유재하가 워낙 일찍 요절한 탓에 사람들이 많이 오해하는데 김현식과는 4살밖에 차이가 안 나고 김광석보다 2살 더 많다. 그리고 유일하게 20대에 죽었다. 공교롭게도 셋 모두 사인이 다른데 유재하는 교통사고, 김현식은 병사, 김광석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10] 한국어 위키백과를 참조 및 인용.[11] 제 7회 유재하음악경연대회 대상 수상자[12] 제 2회 유재하음악경연대회 대상 수상자[13] 제 1회 유재하음악경연대회 금상(당시 최고상) 수상자[14] 남성 듀오 ‘자화상’의 멤버로 현재는 작곡가, 피아니스트, 영화음악 감독으로 활동중이다.[15] 나원주와 함께 ‘자화상’의 멤버[16] 이 인물은, 싱어송라이터 김현철 문서에도 언급되는 '오페라'라는 곡을 불렀으나 해당 곡은 훗날 김장훈이 불러 히트시켰다. 또한 해당 음반의 발매가 사정상 늦어진 사이에 김현식이 노래를 듣고 작곡가에게 곡을 부르게 해달라고 사정해 먼저 음반을 내버리고 유명세를 가져간 명곡 비처럼 음악처럼이 있다. 여러모로 명곡이 두 번이나 사람을 비껴간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