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석

 


'''김광석'''
'''金光石 | Kim Kwang Seok'''
'''국적'''
[image] '''대한민국'''
'''출생'''
1964년 1월 22일
경상북도 대구시 남구 대봉동
(現 대구광역시 중구 대봉동)
'''사망'''
1996년 1월 6일 (향년 31세)
서울특별시 마포구 서교동
'''본관'''
경주 김씨
'''신체'''
164cm, 58kg
'''가족관계'''
아내 서해순[1], 딸 김서연[2],
누나 2명, 형 2명[3]
'''학력'''
서울창신초등학교(졸업)
경희중학교(졸업)
대광고등학교(졸업)
명지대학교(경영학 / 학사)
'''직업'''
가수, 싱어송라이터
'''종교'''
불교(법명: 원음(圓音))[4]
'''데뷔'''
1984년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 1집,
김민기 음반 참여
'''그룹'''
동물원, 노찾사
'''별명'''
'''가객(歌客),''' 노래하는 철학자,
노래하는 시인, 통기타의 제왕
1. 개요
2. 발자취
2.1. 학창시절부터 데뷔 전까지
2.2. 활동 초기부터 노찾사 활동까지
2.3. 솔로 활동
3. 사망
4. 사망 후
5. 성격
6. 가창력과 천재성
6.1. 그의 천재성에 대하여
7. 김광석이 떠난 뒤, 김광석 다시 보기
7.1. 노래
7.2. 도서
7.3. 뮤지컬
7.3.2. 바람이 불어오는 곳
7.3.3. 디셈버: 끝나지 않은 노래
7.3.4. 그 여름, 동물원
7.4. 남긴 것
7.5. 그외 정보
8. 부른 곡
8.1. 기타
8.2. 사후 출시된 앨범
9. 관련 어록
10. 참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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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가수, 싱어송라이터, 사회운동가[5] 주 장르는 포크. 대구시 출신으로 남구 (당시) 대봉동 태생으로 명지대학교 경영학과에 진학 후 서울에서 음악활동을 시작한다.
짝사랑할 때는 '사랑했지만', 입대할 때는 '이등병의 편지', 이별에는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서른 살 때는 '서른 즈음에'로, 사랑하는 사람을 잊지 못할 때는 '사랑이라는 이유로', 좌절을 극복할 때는 '일어나', 정의를 외칠 때는 '광야에서', 인생의 황혼기에는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로 함께했고 한국인들의 인생과 감성을 그 누구보다도 가장 감미롭게 표현한 가수이다.
그야말로 '''가객''', '''노래하는 시인''', '''노래하는 철학자'''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드문 예술가이며, 대중들에게 가수 김광석이라는 이름 뿐만이 아닌 광석이 형, 오빠, 아저씨로도 남은 가수.
대표곡으로는 <서른 즈음에>, <이등병의 편지>가 많이 꼽힌다. 2000년,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 삽입. 대한민국의 많은 남성들을 울리고 있다. 군대하면 생각나는 노래다. 이 곡이 김광석 개인에게도 의미가 큰데 그는 군에서 사고사한 형으로 인해 이등병으로 전역했다. 아울러 <사랑했지만>,<바람이 불어오는 곳>,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일어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사랑이라는 이유로> 등이 있다.

2. 발자취



2.1. 학창시절부터 데뷔 전까지


중학교 때부터 바이올린, 오보에, 플루트 등의 다양한 악기를 배우며 악보 보는 법을 익히며 1978년 대광고등학교에 입학해서는 합창단에서 활동하기도 했었다. 1992년 6월 13일, 충남 예산에서 책마당 운영기금 마련을 위한 초청공연에서 안치환과 함께 나와 노래 부르는 유튜브 영상들이 있는데 안치환이 '마른 잎 다시 살아나'를 부를 때 김광석은 바이올린을 주섬주섬 꺼내들고 연주한다.(#)
이렇게 다양한 악기를 연주할 수 있었는데 반해 그의 상징과도 같은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한 것은 다소 늦은 편인데 1982년 명지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하게 되고 1학년 때 대학 연합동아리 '연합메아리'에 가입하여 본격적으로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2.2. 활동 초기부터 노찾사 활동까지


[image]
왼쪽이 안치환, 가운데가 김광석, 오른쪽은 노찾사, 해오라기에서 활동한 배훈
1984년 그는 김민기의 「개똥이」 음반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이때 함께 한 이들과 의기투합해 '노래를 찾는 사람들'을 결성한다. 이때 김민기의 학전에 들어가지 못했다면 김광석은 가수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게 김광석은 김민기의 학전에 무턱대고 들어가 가수가 되게 해달라고 하였는데 김민기는 김광석을 계속 거절했으나 학전의 상황과 김광석의 의지를 보고 김민기의 학전에 들어오게 해준 것이기 때문이다.
1985년 1월 김광석은 군에 입대했으나 큰 형님이 이전에 군에서 사고사했기 때문에 6개월을 복무한 후 7월 제대하게 된다. 제대 후, 김광석은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 앞에서 '고리'라는 카페를 열었지만 워낙 후배 가수들과 동료들에게 밥과 술을 공짜로 대접하는 바람에 얼마 영업하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고 한다.
1987년 10월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관에서 열린 노찾사의 첫 정기 공연에 참여했다. 호소력이 담긴 '녹두꽃'이란 노래로 관객들을 열광시켰다. 단숨에 노찾사의 간판 가수로 떠오르며 각종 집회에 단골로 초대되었다.
1987년 여름, 김광석, 김창기 등 평소 노래를 좋아하던 청년 7명이 모여서 자그마한 노래 동아리를 만들었고, 산울림김창완이 이들의 노래를 듣고 정식으로 음반을 내자고 권유하여 1988년 7인조 그룹 동물원의 1집이 세상에 나온다.
별 생각없이 낸 음반이었기에 김창완은 이들의 음반을 작업하면서 반농담으로 "이걸 사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일 거다."라는 생각을 했고, 미약한 팬층이라도 확실히 확보하자는 의미에서 '가수 이름을 ''''이대생을 위한 발라드''''라고 하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그만큼 그들 자신 또한 성공에 대한 확신이 적었다.
'거리에서', '변해가네',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혜화동' 등 동물원의 노래는 상업주의에 오염되지 않은 밝은 이미지를 구축, 천편일률적인 사랑 타령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던 주류 대중음악의 작은 대안이 되었다.
하지만 동물원의 구성원들에게 있어서 가수는 부업 내지는 취미 생활이었고 동물원은 기본적으로 듣기 쉽고 편한 곡을 지향했기 때문에 김광석의 개성이 너무 돌출된다는 의견이 제기되었고 김광석은 친구들과의 우정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완전히 프로로 데뷔하기 위해 동물원을 나온다.

2.3. 솔로 활동


1989년 김광석은 '기다려줘', '너에게'를 담은 솔로 1집을 내놓으며 계몽문화센터에서 첫 개인 콘서트를 시작했다. 음악 활동을 하던 중에 1년의 열애 끝에 90년에는 결혼에 성공한다.
1991년에 발표한 2집은 한동준이 제공한 <사랑했지만>과 김형석의 <사랑이라는 이유로>, 김창기의 <그날들> 등이 사랑을 받으면서 김광석을 더욱 대중적인 위치로 올려놓았다.
1992년 김광석은 <나의 노래>와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등이 담긴 3집을 발매하면서 민중가수 출신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했다. 민중가수로의 입지가 다시 재조명받은 것이 3집 이후이다.
1992년부터는 불교방송에서 송출된 라디오 프로그램인 <밤의 창가에서>의 DJ로도 활동하기 시작했다. 1992년 5월 4일, 즐거운 사라의 외설 문제로 당시 사회에 큰 파문을 던졌던 연세대학교 마광수 교수 가 방송의 게스트로 출연하여 방송 수위를 넘는 발언을 한것이 화제를 불러 일으키면서 김광석은 더욱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진행자 김광석은 동조를 했다는 이유로 마교수와 함께 청소년 프로그램에 한 해 동안 방송 출연 정지 조치를 요구 받았지만 방송법에 이러한 권한은 명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마광수 교수는 3개월, 김광석은 1개월 동안 불교방송에서만 방송 출연금지를 받았다. 뉴스1 뉴스2
1993년 7월, 김광석은 자신의 노래 생활 10년을 결산하는 취지에서 대학로 학전소극장에서 한 달 간의 장기 공연을 열고 '다시 부르기' 1집을 발표했다. '거리에서'와 '광야에서' 등이 수록된 다시 부르기 1집은 대중 음악계를 강타한 '리메이크' 선풍의 도화선이 되었다.
1994년 <일어나>가 실린 4집의 성공으로 김광석은 한국의 소시민을 대표하는 가수로 확고한 위치를 잡는다.
1995년에는 김민기, 김의철, 이정선, 백창우, 김목경, 양병집 등 1970년대 포크 1세대로부터 이어져 오는 한국 포크 음악의 계보를 하나의 앨범으로 정리한 '다시 부르기 2집'을 발표하면서 전국 8개 도시를 순회하는 'Green Tree Story' 투어 콘서트를 열었다. '다시 부르기 2'는 그가 90년대 한국 모던 포크의 진정한 계승자로서 자리매김하게 해준 명반이었다.
워낙 많은 공연을 했던지라 '또 공연을 하느냐'는 의미로 '또 해'라는 별명이 생겨났을 정도로 매해마다 음반 발표와 소극장 라이브 공연을 병행하며 관객과의 직접적인 교감에 전력을 쏟은 김광석은 1995년 8월 마침내 대학로 학전 소극장에서 '''1000회 기념 공연'''이라는 금자탑을 이뤘고 기념으로 2개월 간 전국 투어를 돌았다. 20대 여성층은 물론 30대 남성 직장인까지 몰려드는 김광석의 공연은 대학로를 중심으로 한 소극장 공연 문화를 정착시키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11월에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 뉴욕 맨하탄 머킨 콘서트홀에서 공연을 했다.
법정 스님으로부터 '원음'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둥근 소리라는 뜻. 예전부터 김광석 팬클럽 네임이었으며, 지금까지도 김광석 팬페이지 이름이다.
1996년 1월 5일 박상원이 진행하던 HBS '겨울나기'에 출연을 하였는데 여기에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그녀가 처음 울던 날' 을 부른 것이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참조 블로그

3. 사망


[image]

“한동안, 뭔가 모르게 마음이 무겁고 답답했을 때에요. 뭐, 정말 '그만 살까?' 이런 생각도 하고 그럴 때, 어차피 그래도 살아가는 거 좀 재밋거리 찾고 살아봐야 되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 하면서 만든 노랩니다. '일어나' 불러 드리면서 물러가겠습니다. 행복하십시오.”

작고 1년 전, 슈퍼 콘서트에서

1996년 1월 6일, 전날 아내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잠들었던 김광석은 새벽 4시 30분 마포구 서교동의 원음빌딩[6] 4층 자택 거실 계단에서 전기줄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향년 31세 349일, 그것도 32세 생일이 16일 남았던 날이었다. 그의 죽음에 관련해서 '사고사이다', '빚을 졌기 때문이다', '숨겨둔 병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했다', '아내가 죽였다' 등의 온갖 음모론이 난무했는데, 경찰 발표에 따르면 김광석은 새벽에 술을 마시던 중 평소 우울증으로 자살한 것으로 발표되었다고 한다.
이후, 그의 죽음에 여러 의문이 제기되었지만 결국에는 자살로 결론이 났다.
사망 후 시신은 화장되었는데 이 때 승려들을 화장하면 나온다는 사리가 아홉 과[7]나 나왔다고 한다.
2017년 그의 죽음에 대한 의혹을 제기한 '''김광석(다큐멘터리)'''가 개봉하였다. 영화 및 '''김광석 의문사 의혹'''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4. 사망 후


1996년 1월 8일 서울 대학로 학전 소극장 앞에서 유가족들과 김민기, 백창우, 안치환, 노찾사, 동물원 등 50여 명의 동료 가수들이 참여한 가운데 노제가 치러졌다.
그의 음악선배 백창우는 김광석의 미발표곡 '부치지 않은 편지 1, 2'를 담은 추모 음반 '가객'을 1주기 기념으로 발표했다.
소시민적 감성과 아름다운 노랫말 등으로 대표되는 그의 곡은 여전히 수많은 후배 뮤지션들에 의해 리메이크되고 있다. 그가 죽은 지 벌써 20년을 훌쩍 넘겼지만 여전히 추모 음반이나 추모 콘서트의 인기는 웬만한 뮤지션을 뛰어넘는다.
2001.01.27 MBC 수요예술무대에선 김광석 추모 공연을 녹화해 방송했다.
그의 사후에 저작권 문제로 법적 분쟁이 이어졌다. 1996년 김광석이 사망하자 부인은 김광석의 딸이 상속하였음을 주장하였고 아버지는 자신이 김광석을 대리하여 킹레코드(현 신나라레코드)와 계약할 당시 김광석으로부터 권리를 양수하였다고 주장했다. 둘 사이에 소송이 있었으나 법원이 중재에 나서 지적재산권을 나누어 행사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아버지는 기존 4개 음반에 관한 권리를 갖고 부인은 라이브 음반에 관한 권리를 갖는 것으로 상호 인정. 이때 아버지는 자신이 사망하면 권리를 손녀(김광석의 딸)에게 상속하기로 명시하였다. 2005년 김광석의 아버지가 사망한 후 이번에는 어머니와 형이 신나라뮤직이 합의가 무효임을 주장하며 부인과 딸에 대하여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2008년 대법원에서 패소하였고 판결 내용에 따라 저작권이 김광석의 딸에게 있음을 확인하는 조정합의로 최종 종결되었다.## 그러나 2017년 9월 19일, '''10년전 이미, 김광석의 딸이 이미 사망했음이 밝혀졌고, 김광석의 부인은 잠적중임이 밝혀졌다.'''
2009년 독일의 언더그라운드 힙합그룹인 Die Orsons가 김광석을 추모하는 <Kim Kwang Seok>이라는 노래를 발표하였다. 이 노래는 유튜브에 공개되었는데 가사는 죽은 김광석을 찬양하면서 추모하는 내용이었다. 보러가기
이 노래 덕분에 상당수의 독일인들이 김광석이라는 가수에 대해 알게 되었다. 유튜브에서도 유럽에서 가장 많이 김광석의 영상을 클릭한 나라는 독일이다. 2010년에는 일본에도 김광석의 영상이 인터넷으로 소개되었는데 한국인이라는 국적을 넘어서서 넷상에서 좋은 호응을 얻었다. 지금도 종종 유튜브에서 김광석 영상을 찾아보면 "한국의 커트 코베인"[8]이라든지 "한국의 밥 딜런" 같은 외국인들이 남긴 댓글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김광석은 우리나라에서도 매해 가장 많은 추모 콘서트가 열리는 가수 중 한 명이며 그가 출근하듯이 공연했던 대학로 쪽에 김광석의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성시경, 박효신, 타이거 JK, 김범수, 리쌍, 장기하 등 수많은 가수들이 아직까지 존경하는 가수이기도 하다. 가창력은 물론이고 인간적인 면에서도 기억될 만한 사람인 데다가 그의 자살을 둘러싸고 논란이 많기는 하나 어쨌든 공식적으로 음악적 고뇌 때문에 목숨을 버린 몇 안되는 가수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수들 뿐이 아니라 국내 작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로 뽑힌 적도 있다. 가요를 전혀 듣지 않고 클래식 음악만 듣고 살았다던 소설가 윤대녕도 김광석의 노래를 듣자마자 빠져들어 팬이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작가 정이현도 김광석을 추모하는 글귀를 쓴 적이 있고 김경욱은 출판한 책에서 김광석에 관한 기억을 회고하기도 했다. 시인들도 종종 김광석을 추모하는 시를 쓰고는 했으며 소설가인 신경숙은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란 노래로 김광석이란 가수를 알게 되었다가 라디오에서 김광석의 자살 소식을 듣자마자 그만 울음을 참지 못하고 엉엉 울어버렸다는 일화도 있다.
김광석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가 문학가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김광석의 노래에 가사를 써준 시인도 있는데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가사를 쓴 류근이라는 시인이다. (KBS 역사저널 그날에 출연) 2014년 2월 9일 E16편에서 본인이 작사한걸 밝혔다. 정작 본인은 곡과 김광석의 유명세와 달리 조용히 지내다가 2010년 등단 후 첫 시집 《상처적 체질》을 내면서 이 사실이 알려져 주목받기도 했다. 해당 곡의 가사는 실려있지 않으나, 〈너무 아픈 사랑〉이라는 시에 "그 유행가 가사, 먼 전생에 내가 쓴 유서"라는 부분이 있다.
2016년 정규 시즌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에서의 첫 경기에서 김광석의 "일어나"와 "먼지가 되어"가 울러퍼졌다.
2016년 12월 28일 KBS1의 교양프로그램 '감성과학프로젝트-환생'에서 김광석의 모습과 목소리를 6개월의 기간 동안 그대로 복원하였다.[9]
2021년 1월 29일 SBS 신년특집으로 기획딘 세기의 길 ai vs 인간 4부작에서 ai합성기술로 재현된 김광석의 목소리로 부른 노래들을 확인해볼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해 김광진의 편지와 김범수의 보고싶다[10]를 부르는 김광석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재 경대병원역이 있는 대봉1동 일대에 "김광석 다시그리기길"이라는 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그의 대표곡 중 하나인 '나의 노래' 가사를 곱씹어보면 그의 죽음이 더욱 슬프게 느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또다른 대표곡인 '일어나'를 들으면 그 노래의 가사처럼 일어서지 못하고 떠난 그의 마지막이 더욱 슬프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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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활짝 웃는 영정 사진은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모티브가 되기도했다.
>"작품을 처음 생각하게 된 동기는 그 김광석 씨라고 가수가 자살을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영정 사진이 굉장히 제가 봤을 때 느낌이 있었어요. 영정 사진인데 이렇게 활짝 웃고 있더라구요. 거기서 어떤 아이디어를 받아가지고 시나리오를 쓰게 됐는데 죽어가는 사람의 일상에서의 밝은 부분이 있을 거 같아요. 물론 고통도 있지만. 그런 밝음에 초점을 두고 시나리오 작업을 했습니다."
>
>허진호 감독, Q채널 ‘영화보다 재미있는 영화 이야기’ <8월의 크리스마스> 편 인터뷰 중에서

5. 성격


좋은 인상답게 성격도 무척 좋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김광석 평전) 한마디로 '''대인.''' 특히, 후배들을 많이 아껴서 돈이 궁한 후배가 있으면 돈을 빌려주기도 하고 무대에 서기가 힘든 후배들을 위해 노래를 할 수 있는 무대를 주선해주기도 했다. 치킨같은 먹을거리를 사서 후배들이 있는 대기실에서 곧잘 나누어 주기도 했다고. 그래서 김광석이 오는 날에는 대기실에서는 치킨냄새가 퍼진 날이 많았다고 한다. 갓 가수가 된 후배들을 위해 술자리도 자주 가졌다고 한다.
성격 까칠하고 주위 가수들과 자주 트러블을 일으킨다는 이은미도 방송에서 종종 김광석 이야기가 나오면 그리움과 슬픔에 눈물을 참았으며 가수 윤종신도 신인 시절에 자신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친절히 말을 걸어 주었던 김광석을 회고하며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윤도현은 무명시절이 길었는데 힘들었던 무명시절에 김광석은 윤도현의 가능성을 간파하고 많은 정신적, 물질적인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11] 이에 윤도현은 김광석이 죽은 이후 매해 그의 추모 콘서트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답을 하고 있다.
폐쇄적인 성격의 이소라도 김광석에 대한 기억 때문에 방송 활동을 최대한 자제하고 라이브 공연 활동에 집중할 수 있다고 말할 정도다. 또한, 가수 채환히든 싱어 2-김광석 편에서 김광석을 좋아해서 그가 태어난 동네까지 알던 정도로 김광석을 좋아 했다고. 이것만으로도 그의 인간성이 증명되는 셈이다. 김광석의 후배 가수들이 그가 눈을 감은 후 그에게 보낸 메시지가 있으니 한 번 보는 것도 좋다.(링크) 알쓸신잡2에서 유희열이 김광석을 '''"광석이형."'''이라고 부르자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국내에서 유희열이 가진 유일한 특권이라며 부러워할 정도로 국내 팬들과 가수들 사이에서 김광석은 여러모로 받는 대접이 남다르다고 볼수있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면 그와 마주해서 좋은 인간성에 감동을 받았다는 팬의 이야기도 여럿 눈에 띈다. 한 팬은 김광석의 콘서트를 보러 갔다가 캔커피를 하나 사서 김광석에게 주었다고 한다. 김광석은 "보답할 수 있는 게 노래밖에 없네요"라는 대답을 하면서 즉석에서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불러주었다고. 또 한 팬은 춘천으로 입대를 하는 길이었는데 김광석을 춘천가는 길에 만났다고 한다. 김광석은 "입대하세요?"라고 물어보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길거리에서 "이등병의 편지"를 불러주었다고.

6. 가창력과 천재성


타계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감정 전달, 가사 전달 부분에서는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 '''본좌'''로 대접받는다.
김광석의 음악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이유는 그의 목소리, 더 정확히 말하면 음색과 거기에 실린 짙은 감정 때문이다. 특히 김광석의 바이브레이션은 바이브레이션이라고 부르기에도 애매하다. 기교를 위해서 목소리를 떠는 것이 아니라 마치 '''울음을 참듯이 목소리가 떨리기 때문'''이다.[12] 김광석의 그 창법은 따라한다고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라서 완벽한 모창은 불가능하다는 게 정론[13][14]이다. '서른 즈음에'도 그렇고 영화 클래식 OST에 사용되면서 영화에 너무나도 잘 매치되는 꽤나 주목받기도 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같은 노래들을 김광석보다 잘 부를 수 있는 가수는 없을 것이다.
김광석은 노래할 때 또박또박하게 발음한다. "광야에서"의 가사 중, '흙이여'는 흔히 [흐기여]로 잘못 발음되는데, 김광석은 [흘기여]로 아주 정확히 발음한다. 라이브를 할 때에도 놀랄 만큼 또박또박 발음을 한다. 다만 처음 이 곡을 부른 안치환 또한 '흙이여'를 [흘기여]라고 발음하므로 이 점 또한 감안해야 할 것이다. #
하지만 '사랑했지만'을 부를 때는 후렴구에서 발음이 살짝 뭉개지는데, 부정확한 발음이라기보다는 감정을 많이 실어서 그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 공연 영상을 보면 일부러 입을 꾹 다문 채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고음낼 때 후두가 너무 올라가서 짜내듯이 소리가 나오는 인골라, 작게 벌리는 입,[15] 목을 잡는 소리[16] 등 발성이 안 좋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발성이 어느정도 이상 원활히 되어야 테크닉도 정확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발성과 테크닉이 떨어지는 이유는 김광석이 프로로 데뷔하기 이전에 오늘날의 전문적인 보컬 트레이닝은 커녕 과거의 미8군 무대와 같은 트레이닝도 받은 적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테크닉으로 점철된 교과서적인 기준으로 그의 가창력을 논하는 것은 섣부른 짓이다. 비유컨대 프로바둑선수에게 왜 정석대로 두지 않느냐고 하는 꼴이다. 그의 목소리에는 자신만의 느낌과 감성과 연륜[17]이 있고 그 목소리로 '''자신이 부른 곡에서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감성의 영역을 보여준다.''' 가창력이란 결국 노래를 표현하는 능력, 그런 관점에서 보면 김광석은 자신의 곡에 한정해서는 최고의 가창력을 지닌 가수이므로 엄청난 가창력의 소유자이며 가수가 표현의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본다면 그가 노래를 부르며 감정을 표현하는 점에 있어서는 가히 '''표현력의 교과서'''라고 할 만하다. 또한 음악, 나아가 대중예술이라는 범주는 대중과의 소통이 가장 중요한 것인데, 김광석은 그것에 있어서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영역에 다다른 예술가인 것이다.
그리고 김광석의 히트곡들 중 많은 곡이 김광석이 다른 사람이 부른 곡 중 자기에게 맞는 곡을 골라 부른 것이며 편곡에 관련돼서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경험이 없을 진데, 자신이 고른 곡은 완벽히 자신에게 맞게 편곡했다. 자신에게 맞는 곡을 고르는 능력과 자신에게 맞게 편곡하는 능력에서도 천재성을 보인다는 소리. 자신에게 맞는 영역을 정확히 알고 정확히 그 영역을 드러내며 편곡할 줄 알았으며 자신에게 맞는 영역에 한정해서는 최고의 가창력과 표현력을 가진 천재 뮤지션이다.
가창력과 관련한 비판점은 '''비판을 하기 위한 비판'''이라는 느낌이 없잖아 있다. '''김광석 음악의 핵심은 잘 다듬어지고 세련된 가창력 같은 것이 아니고 거기에 담겨진 진정성이다.''' 음악은 예술이고, 예술에 있어서 기술이 중요하긴 하지만 기술(기교,테크닉)이 예술의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다.[18] 김광석이 위대하다고 평가되는 이유는 첫 번째, 현대 소시민들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한이나 슬픔, 고뇌, 행복 등의 감정들을 아프면서도 아름답게 풀어내었다는 점이며, 두 번째는 시대의 뒤편으로 사라지던 노래들을 재발굴하여 김광석만의 방식으로 해석하여 새로이 들려주었다는 점, 세 번째는 90년대에 들어서는 거의 사장되었던 포크장르를 다시 살려내어 한국 모던 포크의 맥락을 이어갔다는 점이다. 즉 여기까지의 내용들을 총 종합해보면 김광석에겐 음악적인 기교와 테크닉 면에서 결핍된 부분들이 있으며, 개인적인 인생의 고통[19]에서 기인한 결핍이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그는 그런 결핍들을 노래라는 예술로 승화시켜 대중들에게 들려준 것이다.
여기에 김광석과 같은 가수가 다시 나오기 힘든 이유가 있다. 김광석이 독특하면서도 큰 울림을 선사한 것은, '큰 울림'은 그가 보여준 뛰어난 가창력의 결과인데, '독특함'은 그가 효율 좋은 발성법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 김광석만큼의 가능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김광석과 같은 발성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좋은 발성이 아니니까 김광석과 같은 발성을 추천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김광석의 노래는 우리의 마음을 읽는다. 김광석과 같은 가수가 다시 나오기 어렵기 때문에, 더더욱 김광석을 그리워한다고 할 수도 있겠다.
김광석의 친구였던 김창기씨가 말하길 김광석은 박치라고 한다. 때문에 노래를 들어갈 타이밍에 들어가야 하는데 들어가지를 않아 앨범 녹음할 때 꽤나 고생했다고 한다. 공연을 할 때도 발로 박자를 맞췄다고 했으니 말이다. 실제로 공연 시 김광석의 모습을 유심히 보면 기타를 치면서 발을 살짝씩 구르며 박자를 맞추는 모습을 간간히 볼 수 있고 박자를 조금씩 틀리는 모습도 보인다.

6.1. 그의 천재성에 대하여


소위 '''천재'''라고 불리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그러하겠으나 김광석도 사실 타고난 천재라기 보다는 엄청난 '''노력가'''였고 성실한 인물이었다. 가장 유명한 천재들 중 하나라고 알려진 모차르트의 천재성도 실은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받은 조기교육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연구자들도 많다.(물론 그의 천부적인 재능도 한몫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모차르트 역시 거의 일중독자로 볼 수 있을 만큼 수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즉 많은 이들이 말하는 소위 '''천재성'''이란 것은 사실 그들이 기울인 노력은 보지 않고 결과물들만 본 후에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판타지'''에 가깝다는 것이다.

마찬가지 맥락으로 한번 김광석이 만들거나 참여한 초기 앨범들과('''김광석 1,2집''' 혹은 노래만 몇곡 부른 정도긴 하지만 동물원1,2집) 중기 앨범(김광석 3집, 다시부르기1집)~후기 앨범(김광석 4집, 다시부르기2집)들을 비교해서 들어보자. 초기 앨범들이 그 뒤의 앨범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완성도라는 측면에서 뒤떨어진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론 초기 앨범 속에서도 몇곡의 노래들은 그 나름대로 빛나는 좋은 음악들이지만,[20] 그럼에도 적지 않은 곡들이 그 음악적인 면에서나 가창력 즉 노래적인 측면에서나 훌륭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곡들이다.

실제로도 많은 평론가들이 그의 4집 앨범이나 2장의 다시부르기 앨범 중에서도 특히 2집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3집이나 특히 다시부르기 1집은 일종의 과도기적 앨범, 달리 말하면 김광석이 자신의 음악적 색깔을 찾고 정립해나가는 과정에 있는 앨범으로 평한다. 이것이 무슨말인가 하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김광석을 높게 평가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그의 후기 앨범들(4집과 다시부르기 2집)이 이룬 성과에 기반해있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상대적으로 뒤늦은 음악적 성취를 (그는 84년도에 음악 커리어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으며 그의 4집은 94년에, 다시부르기 2집은 95년에 발매되었다.)그의 성실성이나 노력이 아니면 대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대체 그가 성실하고 노력가였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라는 반문이 있을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그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무려 소극장 공연을 1000회나 했다. 그가 처음 소극장 공연을 한 시기는 대략 91~92년도였고 1000회를 달성한 년도는 대략 95년 8월로 알려져 있는데 91년~95년 기준으로 계산해보면 한해 동안 약 200회의 공연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솔로 앨범 발매 년도를 살펴보면 1집(89년) - 2집(91년) - 3집(92년) - 다시부르기1집(93년) - 4집(94년) - 다시부르기2집(95)년 순이다. 1집에서 2집의 2년 공백을 제외하면 전부 1년 마다 앨범 작업을 한 셈이며 새 앨범들은 전의 앨범들 보다 음악적으로도 성장한 면모를 보였다. 이러한 점들로 판단컨대, 그의 음악적 성취라는 것은 그의 재능이라기 보다는(물론 그의 타고난 재능도 일부 있겠지만) 그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

7. 김광석이 떠난 뒤, 김광석 다시 보기



7.1. 노래


그의 음색과 그의 전반적인 음악색은 삶에 지친 사람들의 감정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80년대 후반 민중가수로 김광석을 기억하던 사람들은 김광석의 음반을 혹평하기도 했다. 민주화를 이뤄내고 그 직후 노태우 정권 하에서 민주화에 대한 열기가 뜨겁기 그지없던 시절, 김광석이 처음 내놓은 음반은 (발라드, 댄스 가수 등이 내놓은 음악과는 색채가 전혀 다르긴 했으나) 사랑 노래 위주였다. 원래는 사랑 노래 일색은 아니었는데 1집 앨범에서 유명해진 노래들이 대부분 사랑 노래('너에게', '기다려줘' 등)라서 이런 이미지가 생겼다. 대부분 이 때문에 '변절자', '대중성만 추구한다'는 평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90년대에 들어 민주화 운동 시기의 음악을 리메이크해 음반에 수록했으며, 3, 4집에서는 리메이크를 넘어선 자작 명곡들을 본격적으로 쏟아내며 자신의 음악 세계를 확고히 해나간다. 당시 김광석의 곡은 주제의 분화 또한 다양하게 일어나고 있었기에 김광석이 (하필) 이 시기에 비운의 가수로 세상을 떠나간 것 또한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김광석의 모든 노래는 기타 하나로 연주할 수 있는 포크송이라 세월이나 세대를 타지 않는다. 말 그대로 10대부터 80대 노인까지 동감하고 같은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김광석 노래의 힘은 그의 이름을 계속 기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2011년 6월 즈음부터 SK텔레콤에서 아이유와 듀엣으로 서른 즈음에를 부르는 내용의 광고가 제작, 방영되었다. 링크 CG로 재현된 것.
김광석을 좋아하는 팬들 중에서는 이 광고를 ''''본좌의 노래를 망친다''''며 싫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실상은 본좌의 노래를 망친다기보다는 싱어송 라이터의 본좌인 김광석의 이미지에 편승해서 아이유를 그만큼 노골적으로 띄워주려는 얄팍한 수작으로 보는 시선이 더 크다. 애초에 김광석만큼 서른 즈음에를 잘 부르는 가수 찾는 게 너무 힘들다. 아이유의 팬들로서는 기분 나쁠 수도 있겠지만, 이런 류의 합성 CF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어울리는 것 같으면서도 잡음처럼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해서 호불호가 갈린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다만 아이유 본인은 해당 광고 제안에 김광석에 대한 오마주의 의도로 응한 것으로 보이며[21], 이 문단 하단의 훗날 행보를 통해 아이유 역시 김광석을 좋아하고 존중하는 입장이었음이 드러나게 되었다.
2013년 김광석의 노래들을 기초로 한 뮤지컬 <그날들>이 대학로에서 초연되었다.
2013년 지산월드락페스티벌에서 미국의 유명 밴드 Weezer가 김광석이 리메이크해서 화제가 된 '먼지가 되어'를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한국 팬들에게 제대로 된 팬서비스였다는 후문이다. 보러가기
히든 싱어 시즌 2 12회는 김광석 편으로 꾸며졌다.
이미 고인이 된 가수였던 데다가, 당시 음반도 전부 아날로그 방식이었던지라 불가능할 듯했으나, 제작진은 김광석의 음성을 디지털로 변환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엄청난 화제였던 만큼 시청자들이 다시 보고 싶은 레전드 TOP 10의 1위를 차지했다.
2014년 3월에 김광석 오마쥬 '나의 노래' vol 1,2,3가 발매되었다. 인디씬 아티스트들이 곡들을 재해석한 앨범이다. ###

2014년 5월에 아이유의 리메이크 앨범인 꽃갈피에 '꽃'이 수록되었다. 2017년 9월 발매된 아이유의 두번째 리메이크 앨범 꽃갈피 둘에는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가 원래 타이틀곡으로 실릴 예정이었다고 한다. 아이유가 해당 년도 팬미팅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뮤직비디오 촬영과 실물음반 초도분 4만장에 대한 사전제작까지 마쳤으나 김광석의 죽음과 관련된 논란이 같은 시기 재점화되면서 아이유 본인이 고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뜻으로[22] 해당 곡 발매를 무기한 연기하고 실물음반 초도분 역시 출고를 막고 전량 폐기처분하도록 했다. 그리고 2018년 김광석의 기일에 뮤직비디오만 유튜브를 통해 공개하는 방식으로 곡을 공개하였다. 유튜브 코멘트를 통해 아이유는 "비록 앨범에 담진 못했지만, 소중히 불렀고 여전히 아름다운 이 곡을 고인의 음악을 사랑하는 한 명의 팬으로서 존경과 추모의 마음을 담아 바칩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7.2. 도서


사진작가 임종진은 김광석 팬으로 유명한데, 2008년에 그가 소장하고 있던 미공개 사진과 작가 자신의 자전적 수기, 작가 주변 인물들의 김광석과 관련된 이야기를 포함한 <김광석, 그가 그리운 오후에>를 출간한다. 2017년 기준으론 절판된 상태이다.#
2013년 말에 김광석이 생전에 남긴 메모, 편지, 문서 등을 모아 만든 에세이 <미처 다 하지 못한>이 출간되었다. 책 뒷면에 김광석이 남긴 작곡 노트가 있는데, 원본의 느낌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미완성된 가사들을 그대로 실었다. 이로 인해 페이지의 절반 넘는 부분이 미완성된 채 비어 있는데, 보고 있으면 '''만약 김광석이 살아 있었으면 이 페이지가 다 차서 노래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든다는 평이 많다. 이 외에도 <김광석 악보집>과 노래 가사 모음집 <김광석 부치지 않은 편지>, <김광석 앤솔로지>등이 있다.

7.3. 뮤지컬


2013년 김광석 탄생 50주년을 맞아 무려 3개의 김광석 쥬크박스 뮤지컬이 초연되었다. 일정한 주제를 가지고 이미 발표된 곡들을 묶어서 뮤지컬을 만드는 형식으로 흔히 한 가수가 발표한 노래를 묶어서 뮤지컬을 만드는 경우가 많다. 최초의 작품이자 가장 유명한 '맘마미아!'(아바) 외에도 '올슉업'(All Shook Up, 엘비스 프레슬리), '위 윌 락 유'(퀸), '락 오브 에이지즈'(70년대 록 음악) 등이 있다. 2016년에 김광석 20주기 기념으로 뮤지컬 '바람이 불어오는 곳'과 '그 여름, 동물원'이 시작한다. 2016년은 김광석 20주기가 되는 해이다.

7.3.1. 그날들


2013.4.4 대학로 뮤지컬센터 대극장 초연을 시작으로 2016년 충무 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세번째 공연이 올라갔다.
김종욱 찾기, 오! 당신이 잠든 사이, 형제는 용감했다 등으로 유명한 장유정 연출가의 주크박스 뮤지컬. 장유정 연출이 최초로 발표하는 대극장 작품이기도 하다. 장유정 연출이 극본을 썼고 나는 가수다 출연으로 유명한 장소영 음악감독이 참여했다. 유준상, 지창욱, 오종혁, 오만석, 강태을, 양요섭 등이 출연했다.(#)
김광석의 곡들을 완전히 뮤지컬 작법으로 편곡하고 일부는 매쉬업했다. 이런 탓에 혹자는 김광석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거의 없다고 비판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혼자 남은 밤'은 김광석 본인은 방에 앉아서 기타치면서 부르던 편한 노래지만 그녀가 이 노래를 부르는 상황은 부모님께 '보내주긴 한다는데 슬슬 불안하다'라는 편지를 보내며 부르는 노래다. 하지만 뮤지션의 감성에 구애받지 않고 독자적인 감성을 구축한 것이 단점이자 장점으로 꼽히기도 한다. 연출가 장유정은 이런 비판에 대해 그의 음악 특유의 정서는 극을 관통하는 '그리움'이라는 정서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고 인터뷰 하기도 했다.
장유정 연출답지 않게 스토리라인이 다소 빈약하다는 평을 받았다. 그래도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나 '디셈버'보다는 훨씬 평이 좋은 편. '그날들'은 청와대 경호실을 배경으로 과거와 현재 넘나드는 구성을 취한다. 한중수교의 비밀을 덮으려는 정부와 그 사건에 휘말린 두 남녀의 실종사건이 발생하는 과거와 영애양이라는 지위의 무게에 환멸을 느끼는 영애양과 경호인 대식의 실종사건이 발생하는 현재가 대응을 이뤄 이야기가 전개된다.
작품집 '오 당신이 잠든 사이'에 따르면, 장유정 연출은 이 작품 이전에 김광석의 음악으로 쥬크박스 뮤지컬을 준비한 적이 있다고 한다. 여러 번 재공연되고 있는 형제는 용감했다가 바로 그 작품. 다만 공연 준비 단계에서 새 노래들을 작곡해서 넣는 것으로 수정되었다.

7.3.2. 바람이 불어오는 곳


2012년 11월 30일 대구 떼아뜨르 분도 극장에서의 초연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공연을 이어오고 있는, 김광석 추모 뮤지컬의 대표주자이다.
(사실, 2008년 5월 15일 홍대 상상마당에서 한 회의 공연을 한 적이 있다. 그 당시는 뮤지컬이 아니었음)
대구 초연 이후에 바로 서울로 올라와서 `어쿠스틱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개척하며 공연을 이어가고 있다.
(2013.3.15 ~ 5.19 대학로 아트센터 K 네모극장 이후, 현재 2017.11.10~2018.1.21 예그린 시어터까지)
참고로, LP STORY 기획사(대표:이금구)에서 제작한 공연이 바람이 불어오는 곳의 오리지널리티를 가진다.
소극장 뮤지컬로 김광석의 유족들과 팬클럽이 후원하는 작품. 최근 유행인 콘서트 형식의 뮤지컬이다. 박창근 최승렬 박정권 등이 출연했다.# 정통성을 따지자면 가장 앞선다. 특히 라이브 무대를 중심으로 김광석 노래들의 감성을 충실하게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을 받았다.
주인공 이풍세 역의 최승열은 히든 싱어 김광석 편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바 있다. 우승은 김광석... 의외로 표차는 크지 않았는데 김광석 45표 최승열 35표.

7.3.3. 디셈버: 끝나지 않은 노래


(2013.12.19 ~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 장진이 연출을 맡은 작품. 세 개의 뮤지컬 중 가장 규모가 큰 작품으로, 박건형, 김준수 등이 출연했다.# 가장 혹평을 받았다. 장진 특유의 연극적인 정서가 뮤지컬에는 맞지 않는다는 의견이 대다수. 여주인공 이름은 또 화이. 유화이라는 이름은 장진이 제일 많이 써먹던 여주인공 이름이다. 무엇보다 '''스토리라인이 조잡했다.''' 인생의 굽이굽이마다 만나는 가수라는 평이 있을 정도로 김광석의 노래들은 삶의 진정성을 노래하는 것들인데, 이런 노래들을 싣고 흘러가기에는 줄거리가 지나치게 빈약했다. '''그럼에도 또 김광석의 이름에는 지나치게 의존했다.''' 공연 초기에는 2막 시작과 함께 김광석이 홀로그램으로 관객들 앞에서 노래하는 장면이 있을 정도다. 이 장면은 프리뷰 1회 공연 후 어색함을 이유로 삭제되었다. 대중적으로는 성공한 작품으로 특히 김광석을 그리워하는 중년 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않았다. 후에 제작을 맡은 NEW 대표 김우택은 영화 7번방과 뮤지컬 디셈버의 흥행수익이 엄청났다고 회고했다

7.3.4. 그 여름, 동물원



7.4. 남긴 것


국내의 장덕, 김현식, 유재하, 신해철과 함께 '조금만 더 오래 살아서 노래해줬다면'이라는 아쉬움을 남기는 '비운의 천재'로 평가받는 가수 중 하나이다. 그의 예술적 재능이 우선된 이야기지만, 인품마저 겸비했으니 '조금만 더 오래 살아서', 그를 본받는 가수들이 계속 나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그만큼 존경받을 만한 가수이고 인물이었다.
그는 1990년대의 마지막 정통 포크 가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실제로 그의 죽음 이후로 포크 음악은 메이저로 치고 올라오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2010년대에 들어서 버스커버스커의 장범준이 그 뒤를 잇고 있고 대중적인 지지를 얻고 있음은 다행한 일이다. 물론 그의 음악적 성과를 단지 포크라는 장르 하나만으로 국한시킬 수만은 없다.
그는 늘 소극장 무대를 고집하며 관객들과 함께 호흡하길 원했고 결국엔 1000회라는 기록적인 공연 횟수를 달성했다. 또한 소박한 포크 음악에 애착이 깊었다. 김광석의 바이오그래피는 주류에서 밀려난 모던 포크를 살려내기 위한 혼신이 담긴 노력의 연속이었다. 끝까지 라이브와 콘서트를 고집했으며 이런 모습은 아직까지 많은 후배 가수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가수 이적은 "콘서트장에서 기타를 연주하며 열창하는 그의 모습은 나에겐 가수의 원형처럼 남아 있다"라고 회고하기도.
2000년대 이후로 인터넷에서 본명이 아닌 익명으로 활동하는 시기에 이르고, 사람을 칭찬하는 것이 쿨하지 못하다는 시대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김광석만은 까는 사람이 없다. 처음에는 그의 음악적 전달력에, 그리고 그 이후에 알게 된 그의 인품에 대해 모두가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공연 중간중간 남긴 이야기 또한 유머러스하면서도 진지한 사색을 담고 있어 호평. 그의 사후 발표된 추모 음반에는 아예 이 이야기 네 가지가 수록되어 있다. 이 네 가지 중 '이야기 하나'에서 루저의 설움을 너무나 명확히 표현하고 있다...

(...) 얼마 전에 후배를 하나 만났는데 올해 갓 서른이에요.

"형. / "왜?" / "답답해." / "뭐가?" / "재미없어." / "아 글쎄 뭐가?" / "답답해."/ "너만할 때 다 그래."

/'''그 친구 키가 180이에요. / "형이 언제 나만해 봤어?"''' / '''"...그래 나 164다. 숏다리에 휜다리다. 왜?"'''

또한 그는 모터사이클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도 수록이 되어있다.

(...) 마흔 살 되면 오토바이 하나 사고 싶어요. 돈도 모아놨어요.

그 얘기를 했더니 주변에서 상당히 걱정을 하시대요?

'''"...다리가 닿겠니?"'''(...)

그거 타고 세계일주 하고 싶어요. 괜찮겠죠?(청중들 웃음 & 박수)

일부분만 잘라내서 이렇지 '이야기 하나'의 진지한 부분은 한 번쯤 자신의 나이를 생각하게 하는 좋은 내용이다. 이 부분은 EBS지식채널e(#)로 제작되기도 했으니 한 번쯤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박찬욱2000년에 감독한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이등병의 편지', '부치지 않은 편지'가 OST로 삽입되었으며 영화의 히트와 함께 많은 주목을 받았다. '부치지 않은 편지'는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식에서 추모곡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간혹 이 노래를 처음 들은 사람들이 가사에서 반복되는 '그대 잘 가라'를 제목으로 착각하기도 하였다.
2007년에, 그가 부른 노래 중 하나인 <서른 즈음에>가 음악 평론가들에게서 최고의 노랫말로 선정되었다.
2012년 9월, 네이버 지식인에 누군가가 "가수 김광석이 유명한 이유가 뭔가요?"라는 질문을 올렸다. 그리고 이런 답변이 달렸다.

'''"이 사람 노래가 내 마음을 읽습니다."'''

이 촌철살인급 답변은 사람들의 많은 공감을 받아 성지가 되었다.(#)
여담으로 '다시 돌아온 그대' 라는 미발표곡이 히든 싱어 2에서 방송 최초로 공개되었다. 김광석의 유작을 정리하던 중 발견된 것인데 김광석의 음악을 사용하는 디셈버라는 뮤지컬의 출연진들이 나와 미리 부른 것이다. 그런데 이날 방송에 패널로 출연한 김광석의 절친인 동물원 출신의 김창기는 이 노래는 자기가 만들어 김광석한테 줬으나 김광석이 버린 노래라고 하였다.

7.5. 그외 정보


  • 법정 스님, 마광수 교수와 서로 인연으로 연결된다. 법정 스님에게는 직접적으로 법명을 받은 바 있고, 윤동주 연구로 명성이 높은 마광수는 김광석의 고교 선배이면서 동시에 위의 불교방송에서의 일 때문에 개신교 사학인 연세대학교에 속한 인물이 불교 쪽에서 오히려 두둔받았다는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동시에 마광수가 발굴한 안도현 시인은 백석을 롤모델 삼았는데, 그 백석에게 자야라는 필명을 받은 김영한은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자신이 소유한 요정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해 현재의 길상사가 되었다.
  • 김광석이 생전에 사용하였던 기타 목록 (어쿠스틱 기타 혹은 클래식 기타는 ☆, 일렉트릭 기타는 ★) / 출처는 #
    • Gibson J-200 클래식 ☆
    • Guild D-100NS ☆
    • Tayler 910 : 슈퍼콘서트에서 김광석이 연주하는 밝은 색상의 기타.☆
    • Santa Cruze : 켈리포니아에서 수공으로 소규모 제작되는 기타라고 한다 ☆
    • Ibanez 12현 기타 ☆
    • Fender stratocaster : 70년산을 구입하였다고 한다 ★
    • 삼익 클래식 기타 ☆
    • Godin : 캐나다산 어쿠스틱 일렉트릭 기타 [23]라고 한다.
    • Ovation 1717 : 88년도에 구입한 기타로, 김광석의 형이 김광석이 음악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기 위해 처음으로 김광석에게 사줬다는 그 기타로 추정됨 ☆
    • Martin D-45 ☆
    • Martin M-36 : 일명 '김광석 기타'라고도 알려진 기타. 테일러 910 기타와 마찬가지로 슈퍼콘서트에서 김광석이 연주한 누런빛을 띠는 기타☆
    • Martin Backpacker : 일명 '트래블러스기타'로 작게 만들어서 야외 캠핑장이나 여행을 갈때 들고 다니기 편하게 만들어진 기타이다. ☆
  • 김광석은 포크라는 형식 말고도 다양한 형식의 음악에 목말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는 얼터너티브, 슬라브, 컨트리, 특히 락이나 블루스 형식의 음악을 앞으로 해보고 싶다는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24] / 출처# 34번문항에 앞으로 해보고 싶은 장르
  • 죽기 얼마 전에 김광석 본인이 제일 존경하는 해외 가수는 나가부치 쯔요시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 김광석의 외동딸인 서연씨가 10년전인 2007년 17세의 나이로 아버지의 곁으로 갔다는 소식이다. 하지만 왜 서해순이 딸이 죽은 후에도 최근까지 주변인들에 딸이 미국에서 잘 지내고 있다고 이야기했는지는 미스터리다.

7.6.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




8. 부른 곡



김광석이 살아 생전에 발표한 음반들이다. 정규 앨범을 따졌을 경우 4장이며, 리메이크 앨범인 다시부르기 1,2집을 포함하면 총 6장이다.

8.1. 기타


김광석이 부른 곡 중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곡으로[25] 김광석이 생전에 작사와 작곡을 모두 본인이 직접한 정말 몇 안되는 노래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방영되었던 'Super Mario Bros. Super Show!'의 한국어 비디오판의 오프닝이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그 속편인 The Adventures of Super Mario Bros. 3과 월드의 오프닝이다.(관련 기사)

8.2. 사후 출시된 앨범


김광석이 직접 낸 게 아니라 세상를 떠난 후 추모앨범,다시부르기1,2,김광석 베스트, 김광석 나의 노래 BOX등의 앨범이다. 김광석의 사후 앨범 확인 정보는 비트(BEAT),[26] 네이버 뮤직로 확인.
  • 김광석 인생 이야기,노래 이야기(1996.7.1) : 김광석이 생전 소극장에서 부른 노래들를 모은 앨범이다. 즉 쉽게 말하다면 라이브 음반.
  • 1+2(1998.7.1) : 1+2가 발매된 같은 날 가객- 부치지 않은 편지도 같이 발매.
  • 가객-부치지 않은 편지(1998.7.1) : 같은 날 1+2도 발매.
  • 다시부르기 1(2000.7.1) : 생전 다시부르기 1를 다시 판매 한것 같다. 이등병의 편지 라이브 버젼도 있다.
  • Anthology 1(2001) : 김광석이 세상을 떠난 후 2001년에 낸 추모앨범,김광석의 대표곡과 김광석이랑 친분이 있던 가수들이 부른 앨범이다. 참여한 가수들은 윤도현,이소라,김건모,안치환,김창기,박학기,여행스케치등 꽤 인기가 있는 가수들나 김광석의 절친한 친구들이 김광석의 노래를 불렸다. 타이틀 곡인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는 이 앨범에 참여한 가수들 모두가 함께 녹음한 합창곡.
  • 5집 The Classic(2001) : 김광석의 대표 곡들을 클래식으로 낸 앨범. 5집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보니 김광석의 정규 앨범으로 착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절대 정규 앨범이 아닌 그냥 컴필레이션 앨범이다!
  • Collection - My Way (1964 ~ 1996)(2002) : 김광석의 정규 앨범중에 인기가 좋았던 노래만 묶어서 판매한 노래. 즉 다시부르기에서 녹음한 노래가 아닌 원곡 노래만 모은 앨범이다. disc3에서는 미공개곡들이 담겨져 있다.
  • 김광석 베스트(2005) : 김광석의 인기 곡(베스트 노래)들만 모음.
  • 김광석 셋,넷(2006) : 김광석의 정규앨범 3,4집을 묶음.
  • 다시부르기1,2(2006) : 다시부르기 1,2를 묶음.
  • 인생+노래 이야기(2007) : 1996년에 냈던 인생+노래 이야기를 묶음.
  • 나의 노래 BOX SET(2012.7.9) : 김광석의 정규앨범+다시부르기1,2+인생,노래 이야기가 들어 있는 앨범.
  • Unforgettable(2012.8.9) : 소개 저작권 때문인지 이 앨범의 경우 직접 앨범을 사서 들을수 밖에 없다.
  • 김광석 4집 리마스터링 앨범(2014.11.11) : 4집을 리마스터링 한 앨범.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였음을에선 원곡과 꽤 차이가 있다.
  • 연결의 신곡발표 프로젝트(2015. 10. 30) : 김광석의 미완성곡을 심현보, 성시경, 정재일[27], 이지혜[28] 등 여러 사람들이 완성시켜 만들어진 신곡이다. 부른 가수는 성시경. 편곡은 심현보정재일. 하지만 김광석의 곡이라는 느낌보다 성시경-심현보의 느낌이 너무 강했는데다가 이 프로젝트 자체가 대기업 SK에서 내놓은 프로젝트인지라 호불호가 갈렸다. 호불호가 갈렸던 것과는 별개로 성적은 꽤 좋았던 편.
  • 김광석 다시부르기 1&2 2LP(2016.4.27.) : 김광석 다시부르기 1, 2를 재발매한 앨범. 광야에서, 그대 웃음소리 등 몇 곡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LP에 스크래치에 손자국이 많아 수많은 구매자들이 환불을 요구한 바 있다. LP 표지는 민중화가 이종구가 디자인했고, 더블게이트식 양장형 LP커버, LP속봉투 2종으로 구성되어 있다.
  • 김광석 다시부르기 1&2 2LP아트 콜렉터스 에디션 #2(2016.8.25) '전작과 다른 공장에서 제작되었습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판매되고 있다. 저번 레코드판에 흠집이 많아 구매자들의 항의가 빗발쳐서 다시 발매한 것으로 보인다. 이창우 화가가 LP표지를 디자인했다. 제작 공장과 표지만 다르지 내용은 바뀐 것이 없다.
  • 김광석, 다시(2016.12.7) : 12월 1일에 가수 정인과 콜라보한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가 먼저 공개되었고 12월 7일에 로이킴과 콜라보한 김광석의 1집노래인 너에게 등 9곡이 추가로 공개되었다.

9. 관련 어록


'''“사실, 상식적이지 않은 것이 상식화되어가는 그런 모습들이 많습니다. 주변에.'''

'''오늘 뭐, 또. 비상식적인 일들이 또 한번 벌어졌더군요. 삼풍백화점 무너졌다고 그래서... 일찍 오신 분들은 모르시죠?'''

'''900명이 뭐 이렇게 깔려있다고... 뭐 여튼 정확한 숫자는 모르겠고요. (객석이 술렁이자) 술렁거리시네.. 다 끝나고 확인해보십시오.'''

'''무너졌다 그래서 걱정돼서 집에 전화해봤더니 집사람이 삼풍백화점에 갔대요. 그래서 어떻게 된거냐고 물어봤더니 3시 반에 나왔대요.(웃음소리 들리자)'''

'''무슨 얘기인지... 에 참, 황당한 일이 많이 벌어져서 마음이 좀 붕~뜨는 것 같습니다. 많이 들 안 다쳤으면 좋겠고요.”'''

'''두바퀴로 가는 자동차' 시작하겠습니다."'''

― 1995년 6월 29일, 슈퍼콘서트 중[29]

'''“문명이 발달해 갈수록 오히려 사람들이 많이 다치고 있어요.'''

'''그 상처는 누군가 반드시 보듬어 안아야만 해요.'''

'''제 노래가 힘겨운 삶 속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이들에게 비상구가 되었으면 해요.”'''

― 1995년 샘터 9월호 김광석 인터뷰 중에서

'''“그, 사랑이 아니라고 우기고 싶겠지만 뭐, 스스로 투자한 시간이나, 주었던 정이나,'''

'''이게 아까워서 아플수도 있구요. 혹은, 자기 마음을 전혀 몰라줘서, 그럴수도 있구요. 그저 자존심이 상해서 아플수도 있습니다.'''

'''여튼. 근데 안아프면, 사랑이라고 할수가 없겠죠? 그만큼 희생이 따르고, 그러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 1995년 6월 29일, 슈퍼콘서트 중


오마니 생각나는구만. 근데 광석이는 왜 그렇게 일찍 죽었다니?

야, 야! 광석이를 위해서 딱 한 잔만 하자우.

― 오경필 중사(공동경비구역 JSA송강호의 배역)

Q:가수 김광석이 유명한 이유가 뭔가요?

A: '''이 사람 노래가 내 마음을 읽습니다'''

― 네이버 지식인 답변에서 나온 명언. 김광석과 그의 음악에 대한 정의.

김광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우리는 그가 있어서 80년대를 버텨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찬욱

'''"행복하세요"'''

― 콘서트를 비롯해 그가 언제나 사람들과 헤어질 때의 인사말.

'''김광석의 노래는 인생의 길목길목 우리가 지나가는 문 옆에 있습니다.'''

― 박학기, 라디오 스타에서


10. 참고 문서



[1] 본명은 서순애. 1965년 9월 14일생. With33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 김광석이 생존했던 그 해 나이를 따서 이름을 지었다. 서해순과 처남이 2002년에 세웠다고. 김광석 4집 리마스터링 앨범과 김광석:다시 앨범이 여기에서 나왔다.[2] 1991년생이었다. 자폐성 장애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고인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전에는 미국 유학 중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2017년 9월 20일에 이미 10년 전인 2007년 12월 23일에 16세로 아주대학교병원에서 사망했던 것으로 밝혀졌다.[3] 큰형 김광동(군복무 중 사고로 숨졌다고 김광석이 생전 언급한 바 있다), 둘째형 김광복(김광석의 가족을 대표해서 서해순을 고소하러 법정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이다) [4] 불교방송에 나온 적이 있다.[5] 민중가수 출신으로 노찾사 출신 학생운동가였다.[6] 상수역 근처이며, 홍대거리 내에 있다. 현재는 이정빌딩으로 변경.[7] 사리의 개수를 세는 단위[8] 위저의 프론트맨 리버스 쿼모가 2020년 줌 공연에서 먼지가 되어를 커버하며 이 별명을 언급했다.[9] 김광석의 모습은 홀로그램과 특수 분장으로 복원되었으며, 목소리는 생전에 자신이 얘기한 내용에서 단어들을 재조합해 편집한 것이다. 모든 과정은 김광석의 유족들의 동의를 받았다.[10] 참고로 보고싶다는 '''2002년'''에 발매되었다.[11] 대표적으로 위에 언급한 치킨 에피소드. 치킨이 귀했던 당시 윤도현이 대기실에서 대기할 때 마다 KFC 치킨이 놓여져 있었고, 공연 순회를 하는 내내 함부로 이 치킨을 먹지 못한 무명 시절의 윤도현은 중간에 김광석에게 이 치킨을 먹어도 되냐고 물었다. 그러자 김광석은 웃으면서 먹어도 된다고 답했고, 그 다음 윤도현이 대기실에 들어갔을 때 치킨 통이 2개로 늘어났다고 한다. 이 추가된 한 통에는 김광석이 자필로 '''"도현이 거"''' 라고 써놓았다고.[12] 김광석 특유의 바이브레이션이 나오는 이유는 첫번째. 김광석이 사람이 울음을 참을 때처럼 목을 잡고 노래를 부른다는 점과 두번째. 울음을 참다가 터뜨릴 때 목을 잡은 상태에서 힘을 줘서 소리를 내듯이 바이브레이션을 해서 그렇다.[13] 타고나지 않은 일반인은 김광석처럼 발성하기에도 무리가 있다. 거기다가 완벽한 모창이면 김광석이 노래를 부를 때 느껴지는 필링과 연륜까지 모창해야 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14] 히든 싱어 김광석 편에서 예상과 다르게 4라운드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틀렸지만, 가수가 직접 부르는 게 아닌 음원 특성상 음원에 맞춰 연습을 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해당 방송에서도 "~계절은~" 부분이 결정타가 되어 최종 우승을 김광석이 했다. [15] 이게 뭔 대수인가 하겠지만... 발성에서 소리를 가장 많이 울려주는 주 공명기관이 입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굉장히 안 좋은 습관이다.[16] 목을 잡는 소리는 우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김광석은 나의 노래란 곡을 들으면 밝은 노래에서도 목을 잡고 노래를 부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목을 잡으면 노래에 힘을 싣기도 더 어려워져서 밝은 노래 부를 때는 오히려 방해된다. 즉 김광석을 노래를 부를 때 발성적으로 안 좋아서 목을 잡으면서 부른다는 소리. 게다가 목을 잡는 것은 목에 무리도 많이 가는 습관 중 하나다. 김광석의 후배 가수 중 (전성기 시절의)김장훈이 김광석과 창법이 굉장히 똑같다. 목을 잡으면서 입을 작게 벌리는 창법으로 인해 모음에서 발음이 오그라지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김장훈은 그상태에서 고음을 마구 내지르는 바람에 성대가 망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광석은 공연을 1000회를 해낸 것은 김광석이 성대를 얼마나 좋게 타고났는지를 보여준다.[17] 대단한 것은 고작 서른초반의 젊은 나이인데도 특유의 감성과 연륜이 느껴진다는 것이다.[18] 만화계의 예를 들어 보자면, 대부분의 화풍을 잘 구사하는 무라타 유스케가 소년만화풍의 화풍만 잘 구사했던 데즈카 오사무보다 기술적으로는 원숙할지는 몰라도 역사성의 측면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예술적인 측면에서도 우월한 만화가는 아니잖은가.[19] 가족과 관련한 문제 [20] 2집의 사랑했지만, 그날들, 사랑이라는 이유로나 1집의 기다려줘 등이 대중들로부터 사랑받은 초기 대표곡들 일것이다.[21] 김광석 다시부르기 콘서트에도 참석한 바 있다[22] 음악감상에 음악 외적인 감정이 들어가 김광석의 음악을 좋아하던 이들의 마음이 무거울 것 같다고 표현했다.[23] 일렉기타 같이 픽업장치가 달린 어쿠스틱 기타[24] 위 발언을 한 시기가 죽기 1년전인 95년경이므로 아마 그가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포크에서 몇발자국 나아가 락이나 블루스, 컨트리 적인 음악을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25] 정확하게 말하면 노래는 알아도 김광석이 불렀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26] 미투데이를 관리하던 회사가 만든 음악 어플리케이션이다. 2016년 11월 30일 이후에 서비스 종료 되었다.[27] 2000년 긱스로 데뷔한 싱어송라이터.[28] 번역가로 활동하는 사람인데 이번에 가사를 응모해서 당선되었다. 심현보가 어느 정도 가사를 다듬긴 했을텐데 정작 심현보는 작사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29] 응답하라1994 12회 # 이 영상 51초 지점에 1995년 김광석 슈퍼 콘서트 장면이 잠깐 나오면서 '사랑이라는 이유로'가 배경음악으로 깔려서 나온다. 위 영상 1분14초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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