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소왕

 


'''금 제7대 황제'''
'''衛紹王 | 위소왕'''

'''묘호'''
없음
'''시호'''
소왕(紹王)
'''작위'''
위왕(衛王)
'''제호'''
폐제(廢帝)
'''연호'''
대안(大安, 1209년 ~ 1212년)
숭경(崇慶, 1212년 ~ 1213년)
지령(至寧, 1213년)
''''''
여진어
온얀(Won-{g}ian)
중국어
완안(完顔)
''''''
여진어
과승(果縄)
중국어
영제(永濟)
'''생몰 기간'''
? ~ 1213년 9월 11일
'''재위 기간'''
1208년 12월 29일 ~ 1213년 9월 11일 (5년)
1. 개요
2. 여담
3.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시호는 소(紹), 또는 폐제(廢帝). 초명은 윤제(允濟)였으나, 즉위한 뒤 영제(永濟)로 개명했다. 금세종의 7남으로 장종선종의 숙부이다. 는 흥승(興勝)으로 즉위 전 작위가 위왕(衛王)이고 시호가 소(紹)라서 위소왕이라고 부른다.
장종이 아들없이 사망하자 서형 완안오도보(完顔吾睹補)가 있었지만 서자 출신이라 황제가 되지 못했고, 대신 위왕 완안윤제가 황숙의 자격으로 황제가 되었다. 사실은 장종의 후궁인 승어 가씨의 뱃속에 유복자가 있었으나... 위소왕이 장종의 원비였던 이사아를 싫어해서 가씨가 이사아의 꼬드김에 넘어가 장종의 자식이 아닌데도 장종의 자식이라고 주장한다고 개드립을 치는 바람에 가씨와 이사아가 피살되어 그대로 복중에서 죽었다. 아마 위소왕 입장에서는 자신의 정통성에 해가 갈까봐 그랬던 것 같다.
새로 즉위한 위소왕은 장신미남으로 검소한 인물이었지만 우유부단하고 어리석은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즉위 후 칭기즈 칸에게 사신을 보내 군신의 예를 갖추기를 요구하였으나, 칭기즈 칸은 무능한 위소왕의 명령을 거부했다. 칭기즈 칸은 장종의 명령은 들었으나, 위소왕이 즉위하자 말을 듣지 않았다. 한번은 새로 황제가 된 이가 누구냐고 금나라 사자에게 물었다가 위소왕이 황제가 되었다는 사자의 말을 듣자, 위소왕이 있는 남쪽을 향해 '''을 뱉으며''' '''“난 중원의 천자들은 하늘이 보내신 사람들만 하는 줄로 알았는데 위소왕 같은 인간도 할 수 있다니.”'''라고 디스를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위소왕은 부들부들했으나, 별 조치를 취하지 못했고 더불어 칭기즈 칸도 전혀 겁먹지 않고 오히려 정복 기회로 삼았다.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이었던 투르크계 웅구트인들이 몽골에서 만리장성으로 가는 산서성 북부의 길을 금나라를 위해 방어하고 있었다. 하지만 1211년 웅구트의 알라쿠쉬 티긴은 금나라를 정복하려는 칭기즈 칸에게 이 길을 열어주었다. 그는 북경의 옛 주인이었으나, 금나라에 의해 쫓겨난 거란인들과 연합하여 금나라를 공격하였다. 1212년 거란의 옛 영토인 만주 서남부의 요하에서 야율유가가 반란을 일으켰다. 1213년 몽골이 선화를 정복하고 산서 중부를 돌파하여 태원과 평양을 빼앗았다. 이 후 남으로 기수를 돌려 하북과 산동 평원을 가로질러 하간과 제남을 함락시켰다. 게다가 화북(華北) 일대까지 밀고 내려와 수도 중도 대흥부(中都大興府, 지금의 베이징)가 한 차례 위험에 빠진 적도 있었다. 칭기즈 칸이 북경을 봉쇄 작전으로 공격하려고 했을 때 금 조정에는 궁정 분란이 일어나 위소왕이 승상 흘석렬호사호(紇石烈胡沙虎)[1]에게 암살당하였고, 호사호는 위소왕의 조카 오도보를 제위에 앉히니 그가 선종이었다. 공성전에 자신이 없던 칭기즈 칸은 오도보의 화의를 받아들였으며 대신 선조인 카마그 몽골의 칸 암바가이의 유물과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받고 철수하였다.
이 후 선종이 흘석렬호사호를 처형하고, 자신이 직접 권력을 움켜쥐었지만 위소왕에 대한 복권 같은 것은 일체 없었다. 그 이유는 위소왕이 무능한 작자라는 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저 변경의 오랑캐였던 칭기즈 칸도 익히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지경이라서 복권을 시도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거기에 1211년 중도로 진격하는 몽골군을 막기 위해 완안승유 휘하의 50만 대군이 격돌한 오사보 전투에서 어이없이 패전하면서 대규모의 군대를 상실하는 통에 금나라의 척추가 부러지는 큰 타격을 입었으므로 누군가가 총대를 맬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위소왕은 '''이게 다 위소왕 때문이다.'''로 결론이 나 황제로서의 시호나 묘호를 받지 못하고 왕 시절의 시호만 유지해서 사실상 황제 취급을 하지 않은 것이다.
황후는 종단씨(徒單氏)였으며 자식으로는 황태자 양왕 종각(梁王従恪)을 포함한 네 아들과 원씨(袁氏) 소생의 기국공주(岐國公主)가 있었다. 기국공주는 칭기즈칸의 첩이 되었으며, 그 밖에 위소왕의 형제로는 동복형 정왕 윤도(鄭王 允蹈), 동복 동생 윤덕(允徳) 등이 있었다.

2. 여담


[image]
'''징기스칸 4 일러스트'''
징기스칸 4에도 나오는데 역시나 능력치는 매우 좋지 않다. 정치 26, 전투 48, 지모 42. AI 장종이 후사없이 사망하면 역사대로 위소왕이 뒤를 잇는다. 고증오류가 있는데 여기서 금나라 장제의 아내로 나오는 기국공주는 상술했다시피 위소왕의 '''친딸이다.'''

3. 둘러보기




[1] 남송 전선에서 나름 공을 세운 장수였으나 몽골 전선에선 졸전을 거듭해서 금나라를 위기에 빠뜨렸고, 근무태만에 백성들의 땅과 재산을 강탈하는 등 악명이 높았다. 따라서 역사가들 평가는 이자도 위소왕과 다를 바가 없다는 평. 반란을 일으킨 이유도 몽골 전선에서의 참패와 월권행위로 탄핵받을 것을 우려해 일으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