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기조례
赤旗條例
Red Flag Act
1. 개요
영국에서 만들어진 법으로 '붉은 깃발법'이라고도 한다. 정식 명칭은 'The Locomotives on Highways Act'. 줄여서 'Locomotive Act'라고도 한다. 3번에 걸쳐 개정되었다. 이른바 '적기조례'라고 알려진 것은 1865년의 2차 개정법률.
'''세계 최초의 교통법'''이지만, 현대에는 제도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로 널리 알려졌다.
성격 자체는 러다이트 운동과 비슷하다. 하지만 러다이트 운동은 기득권에 맞선 폭력으로 실행하여 실패한 반면, 적기조례는 정치인에게 로비하여 법이 제정되었기 때문에 상당히 오랫동안 영향력이 있었다.
2. 역사적 배경
1826년 영국에서는 사상 최초로 실용화된 자동차가 등장했다. 증기기관을 탑재한 28인승 자동차였는데, 런던 시내와 인근 도시 간에 정기 노선 버스로 10대가 투입돼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이 증기 자동차가 실용화 단계를 밟을 즈음 현대의 눈으로 보면 헛웃음이 절로 나오는 법안이 통과돼 막 불이 붙기 시작한 영국의 자동차 산업에 찬물을 끼얹었다. 당시에 증기기관은 놀랄 만한 발명이었다. 이후로 끊임없는 증기자동차를 상용화하고자 노력하여 1820∼40년대에 걸쳐서는 '증기자동차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증기자동차가 보급이 늘어나자 문제가 생겼다. 마차자들이 반기를 들고 나선 데다, 종종 증기자동차가 폭발하는 사고도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제정된 법이 1865년 선포된 '붉은 깃발 법', '적기법' 등으로도 번역되는 적기조례(Red Flag Act)이다. 자동차가 등장하여 피해를 본 마차업자들이 하도 징징대자,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빅토리아 여왕이 성은을 내린 것이다.
3. 법안 내용
이유는 '마차를 끄는 말이 자동차에 놀라 날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조례 내용 중에 '''증기를 내뿜지 말 것'''이라는 조항이 있으므로, 조례의 실제 목적이 증기자동차가 아예 운행하지 못하도록 규제하기 위함임을 위함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4. 영향
4.1. 통설
동차의 속도와 운송 능력을 마차 시대의 의식 수준에 얽매인 어이없는 규제로 영국의 자동차 산업은 크게 위축되었다. 법안이 선포된 1865년, 자동차는 이미 시속 '''30 km''' 이상으로 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정부의 규제로 시속 '''6.4 km''', 그것도 마차 뒤에서 달릴 수밖에 없었다. 이는 영국 땅에서 자동차를 만들고 좋은 자동차를 개발할 의욕을 꺾었다.
말은 생물이기에 기분이 나쁘다거나 기상, 생물, 지형에 의해 놀라면 어디로 꺾여서 돌진할지 모르는 문제가 있다. 그에 비하면 자동차는 운전수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제동거리가 매우 짧았기 때문에 안전성 또한 초기부터 마차에 비하면 매우 높았다.
현대인들은 흔히 당시 마차를 퇴역 경주마가 이끄는 관광마차 정도로 생각한다. 하지만 운송수단으로 쓰인 마차는 그런 장난감 같은 크기가 아니었다. 당시 차량이 현대 승용차보다 크긴 했지만 마차의 사이즈는 그보다 훨씬 더 컸다. 역용마의 품종은 말 한 마리가 전고 1.8미터에 전장 2미터가 넘어서 말 한 마리가 승용차보다 컸다. 더군다나 마차의 구동방식상 엔진이라 할 수 있는 구동부가 마차 훨씬 앞쪽에 배치되어서 마차에 브레이크를 달아봐야 말이 내달리면 마차가 그대로 뒤집히는 전복사고가 날 수밖에 없다. 이런 말 4마리가 끄는 역용마차는 현대의 트레일러만 한 크기였다. 마차를 끄는 말들이 어떠한 이유로 놀라서 기수의 제어를 듣지 않고 내달리기 시작하면 말 그대로 브레이크 없는 대형트럭의 폭주나 다름없었다.
이 법은 이후 30여 년이나 효력을 발휘했다. 산업 혁명의 발원지로서 다른 나라를 앞서갔던 영국은 최초로 자동차를 상용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적기조례 때문에 아주 간단히 제2차 산업혁명(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까지)의 주역인 자동차 산업의 주도권을 프랑스, 독일, 그리고 미국 등에게 빼앗겼다. 같은 시기에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이미 내연기관을 사용하는 자동차를 발명한 데다 대량생산체제까지 갖추어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모델 T로 2백만 대를 찍어내 자동차로 세상을 뒤엎었다는 미국의 포드사가 1905년에 창립되었다.
사양산업인 마차를 보호하고자 입법한 규제가 결국은 마차와 자동차를 모두 잃게 한 셈. 영국은 자기 빼고 발전해가는 주변국들을 돌아보며 아마 땅을 쳤을지도 모르겠지만, '''한 번 제정된 법은 바꾸기 어려운데 산업이 망하기는 순식간이었다.''' 영국은 이미 산업국으로서는 내리막길을 탔다. 노면전차가 포함된 철도까지도 독일과 미국에 완전히 뒤쳐져 해외기술을 수입해야 깔 수 있는 처지에 이른 것이다.
1988년에 방송한 KBS 퀴즈박사 자동차 편에도 보면 적기조례 관련 내용이 나온다.(28분 22초~29분 40초 사이)#
이 법이 이렇게 오랫동안 유지된 것은 일단 정식 법률절차를 거쳐 '제정'되었다는 이유가 크다. 영국은 의회민주주의가 유럽에서 가장 빠르게 정착되었고 도시 빈민층이나 서민들도 이러한 정치체제를 이용할 줄 알았기 때문에, 마부의 권익을 보호하는 법을 제정하도록 했다. 그리고 일단 제정된 법을 폐지하기는 제정되지 않도록 막기보다 훨씬 어려웠기 때문이다.
전보에 대해서도 비슷한 규제법안을 제정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전보가 발명되자 당시 연락을 전담하던 전령, 주로 급사라 번역되는 메신저들도 어려움을 겪겠다 싶어서 비슷한 법을 제정해 달라고 호소했다. 어느 토리당 정치인은 '영국은 우수한 급사들이 있기 때문에 전보 따위는 필요없다.'는 말을 남겨 후대에 두고두고 회자되기도 한다.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의 본산으로서 수많은 발명이 나오고 산업이 급변하던 때였다. 그러나 엔클로저 운동이 농노를 도시빈민으로 내몬 것처럼 산업변화에 저소득층은 적응이 곤란해 저항했는데 러다이트 운동처럼 폭력적 수단을 통하기도 했고 합법적 청원과 로비운동을 통해 저항하기도 한 것이다.
4.2. 수정주의적 시각
해당 법안이 실제로 시행된 영국에서는 '''증기 자동차의 기술적인 자료가 많이 남아 있는 관계'''로 적기조례가 영국의 자동차 산업 발전 정체 및 퇴보에 미친 영향이 적었다는 수정주의적 시각도 널리 있다.
적기조례가 제정된 1865년 당시의 자동차란 '''증기자동차'''였다. 벤츠가 세계 최초의 현대적 자동차 특허를 출원한 건 그보다 20년 후 일이다. 증기자동차는 종종 '''폭발사고'''를 일으켰고, 증기의 소음도 시끄러웠으며, '''느린 속도'''로 도로 주행을 방해했고, 보행자와 마차의 '''안전을 위협'''했다. 현대로 치자면 트랙터에 가까운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도로는 지금보다 좁았고 사람과 아이들로 붐볐다. 이러한 도로 상황에서 육중한 증기자동차가 규제 없이 자유롭게 다니는 것은 '''도로의 확포장, 신호체계 완비, 대중들의 인식 개선'''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다.
속도제한 시속 6.4 km 역시 잘 살펴보면 그렇게 과도한 것이 아니었다. 우선 당시 시속 30 km 속도를 낼 수 있는 차량은 승용차가 아니라 버스였다. 그것도 최고속력이 그 정도였다. 기술력이 떨어지던 당시 시속 30 km로 달리다간 차가 고장나기 일쑤였다. 승용차는 당연히 최고속력이 그보다 훨씬 느렸다. 19세기 후반 벤츠의 가솔린 자동차조차 최고 속력이 시속 16 km에 불과했다. 따라서 시속 6.4 km라는 속도제한은 당시 자동차의 최고 속력에 비해 그렇게 과도하진 않았다.[1] 무엇보다 최고 시속 50 km지 낼 수 있는 말 역시 속도제한을 받았다.
적기조례 제정 당시 영국의 도로 주행조건도 생각보단 좋지 않았다. 최초의 타이어부터 '''영국'''의 로버트 W. 톰슨이 비포장도로에서 추락사고를 당한 것을 계기로 역마차용으로 1848년에 생고무를 붙여 발명되었다. 자동차의 하중을 견딜 수 있으면서 비포장도로를 주행할 수 있는 타이어는 1895년에 나왔다.[2] 서스펜션도 판스프링이 유일했고, 코일 스프링이나 에어 서스는 1900년대는 되어야 등장했다. 그리고 적기조례가 제정되기 한참 전인 1825년에 스톡턴-달링턴 철도가 개업한 이래로 장거리 고속 주행은 빠르고 편안한 철도가 담당하는 것이 당시 기준에선 당연한 상식이었다. 즉, 위에서 말한 "증기자동차의 황금 시대"라는 것은 존재한 적이 없었다. 좋은 예시로 아시아권에서는 위에서 혁신적인 기술이라고 하는 증기자동차가 도입된 사례가 거의 없다. 트럭도 처음부터 증기 자동차는 건너뛰고 매우 비싼 연료인 가솔린 엔진으로 도입되었으니...
연기나 증기로 말을 놀라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규정도 이상하지 않다. 당시 말의 위상은 현대의 자동차였다. 반면 증기자동차는 마치 트랙터와 같은 크고 시끄러운 쇳덩어리였고, 증기는 철도의 경적과 같은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오히려 현대의 경적 관련 규제가 당시보다 더 복잡하다.
게다가 증기 자동차는 증기기관 특성상 엔진 자체의 하중 + 당시 재료공학의 한계로 차체 중량이 매우 무거웠다. 마차처럼 목재로 만들 수가 없으므로 말 그대로 쇳덩어리였다. 당연히 법 제정 당시 영국인들은 자동차의 제동거리가 짧거나 제어가 쉽다는 생각을 전혀 못했다. 당시 증기자동차의 제동장치는 매우 원시적이라서 사람이 직접 레버를 작동시켜서 바퀴 접지면 자체를 멈추게 하는 방식이라 제동 성능이 매우 나빴다.
수정주의적 시각은 적기조례 때문에 영국이 자동차 기술 경쟁에서 뒤쳐졌다는 해석도 반박한다. 법안의 정식 명칭부터가 증기차를 제한하는 법령이지 내연기관을 규제하는 법령이 아니다. 비슷한 시기에 이후 20세기 자동차 산업의 메카가 될 미국은 정작 더 심한 규제들이 넘쳐났다. 예를 들어 1889년 일리노이주는 자동차나 기차가 시내를 통과할 때 속력을 시속 16 km이하, 화물차나 화물기차는 시속 10 km 이하로 제한했다. 1901년 자동차 산업이 발전하는 중에도 코네티컷 등 여러 주에서는 시내에선 시속 19 km, 교외에선 시속 24 km 등으로 규제했다.
또한 적기 조례로 제한 받아 고사했다던 영국의 자동차 산업의 출발선은 적기조례같은 악법 없이 자유롭게 발전할 수 있었다던 유럽 본토의 회사들의 설립 시기와 비교해도 몇 년 차이도 나지 않았다. 1910년대에는 이런 선도적인 국가였던 프랑스와 비슷하거나 앞서기도 했다. 또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극초기까지는 포드사가 대량생산체제를 만들기 전까지 전세계의 자동차 회사들 중 대량생산체계를 갖춘 곳은 없었고, 모두 소수의 주문생산에 의존했다.
수정주의적 시각은 마부들의 로비로 적기조례가 제정되었다는 의견도 반박한다. 위에서 서술한 대로 증기자동차의 단점이 워낙 컸기 때문에, 내연기관의 성능이 향상되어 대형 트럭, 버스에도 내연기관을 달고 1920-30년대에 자동차의 연료가 석탄에서 석유로 바뀔 무렵에는 석탄업계 및 증기자동차 조수들이 로비를 하는데도 불구하고[3] 급속하게 퇴출되었다. 마지막으로 실용적으로 증기자동차를 쓰던 곳은 트럭업계이다. 당시에는 북해 유전을 발견하기 전이라서 영국이 본토 밖에서 석유를 운송하는 운송비+관세가 많이 붙었는데도 결국 증기자동차는 퇴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