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원(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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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WKBL의 최고령 선수 타이틀을 가졌고, 현역으로 21시즌을 뛰었던 그야말로 살아있는 전설이다. 2011년 1월까지 최고령 여자 스포츠 선수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2]
'''정규시즌'''
10.34점 3.95리바운드 6.56어시스트 1.39스틸 필드 골 43.3% 3점슛 31.8% 자유투 72.9%
'''플레이오프'''
8.80점 3.61리바운드 5.64어시스트 1.00스틸 필드 골 40.5% 3점슛 29.3% 자유투 67.6%
2. 선수 시절
2.1. 실업시절
선일초등학교 5학년때 농구에 처음 입문. 선일여중고를 거쳐 1990-1991 시즌 현대산업개발에 입단, 성인 무대에 데뷔한다. 현대가 그녀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2억을 베팅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실업 1년차 시절에 국가대표로 발탁됐을 정도로 장래가 촉망되는 가드였다.
데뷔 당시로서는 대형 가드였던지라 농구포지션 1번부터 4번까지 뛰었으며 간혹 5번도 소화한 올라운드 플레이어였다. 그러나 그녀의 장점은 경기를 보는 시야가 넓고 리딩능력이 뛰어나 최종적으로 포인트 가드로 포지션을 자리잡았다. 포인트 가드로써 제 실력이 만개해 1990-1991 시즌 신인왕을 비롯 WKBL로 전환되기 전까지 한 해만 빼고 베스트5에 7회 선정됐다.(1991, 93~98)
트리플더블을 프로에서 두 차례, 농구대잔치에서 한 차례 기록한 바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트리플더블이 있는데, 바로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 쿠바와의 조별 예선 경기에서 올림픽 여자 농구 역사상 최초로 트리플 더블에 성공한 것이다. 본인 스스로는 미국 선수들이 풀타임을 뛰었다면, 충분히 달성했을 거라고 겸손하게 말하지만, 이 기록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것 맞다. 오오오.
1990년대 정은순, 유영주, 정선민 등과 함께 대한민국 여자농구의 간판으로 활약했다. 특히 이들과 함께했던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 4강에 오르는 기적을 만들어냈다.[3] 시드니 올림픽 4강은 1984 LA 올림픽 은메달 이후 최고 성적이며, LA 올림픽이 공산진영이 거부한 반쪽짜리 올림픽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가히 엄청난 성적이라 할 수 있다. 이 때가 전주원의 최전성기라 할 수 있다.
2.2. WKBL 시절
전주원은 2004년 여름리그 때 출산으로 잠시 빠진 것만 빼곤 거의 매해 꾸준히 출장하여 '''40세까지 현역으로 뛰었다.''' 선수 말년에 가서는 고질적인 무릎 부상으로 고전을 면치 못했으나,[4] 마침 최윤아의 성장을 적극적으로 도우면서 쏠쏠하게 활약했다. 프로화 이후 여자선수들의 선수 수명을 연장하는데 큰 공헌을 했는데, 특히 결혼-출산이면 으레 은퇴 크리를 맞았던 여자선수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줬다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 그녀의 현역 21시즌은 여자 스포츠 통틀어서, 아니 아니, 남자 프로스포츠(개인종목 제외)까지 범위를 넓혀도 가히 대단한 기록임에 틀림없고, 출산으로 인한 휴지기 1년 후에도 출산 이전 못지않은 활약을 보여줬다는 것은 그만큼 몸 관리가 철저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물론 출산한 후에는 잠시 코치를 맡기도 했으나, 2005년 5월에 코트로 복귀하였다.[5]
2000년대 초 즈음부터 선수와 코치를 겸하는 플레잉 코치이기도 했다. 어린 팀 후배들은 전주원을 '선생님'이라 부른다고 한다. 은퇴 뒤에는 정식으로 신한은행의 코치로 활약 중. 한때는 징그러울 정도로 우승 복이 없던 선수였지만 , 2002년 현대건설이 WKBL 리그 우승에 성공하고, 소속팀이 레알 신한이라 불릴 정도니 우승 복 없다는 이야기도 쑥 들어갔다. 상복도 은근히 없어서 정규리그 MVP가 선수 생활 내내 딱 한 번, 그것도 노장 반열에 들어간 2007년에 처음 받았다. 어시스트왕 타이틀은 상당히 많은데 무려 10번이나 어시스트왕을 차지하였다. 통산 어시스트는 2,164개/평균 6.56개.
2011년 4월 20일에 FA 자격을 얻었지만, 협상을 포기하고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팀 후배인 최윤아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포인트가드로 성장했고 전주원 자신도 은퇴 후 그동안 소홀했던 그녀의 딸 양육에 힘쓸 것이라고 밝혔다. [6] 2011년 10월 19일 안산 홈 경기에서 은퇴식을 가졌다. 그녀의 등번호 0번은 신한은행의 영구결번으로 정해졌다. 여담으로 대한민국 여자농구 역사상 한 시대를 풍미한 포인트 가드답게 각 팀의 포인트 가드들이 선호하는 번호가 전주원이 출산 전에 썼던 5번과 영구결번이 된 0번이라고 한다.
3. 지도자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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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은행의 코치.
은퇴한 뒤 2011-2012 시즌에 신한은행의 코치로 활동하다가, 2012-2013 시즌을 앞두고 위성우 코치가 춘천 우리은행 한새의 신임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위성우와 함께 우리은행으로 자리를 옮겼다. 무려 23년 간 함께 했던 평생 직장을 뿌리치고 옮기는 셈인데, 전주원 코치의 상징성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핵폭탄급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인터뷰에 의하면 그동안 미뤄 뒀던 공부를 하면서 코치직을 수행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팀을 옮기자마자 위성우 감독과 함께 우리은행을 2012-2013 시즌 정규리그 1위로 올려놨다. 오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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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피언 결정전이 시작된 후 모친상을 당했다. 2차전 때 선수들 몫으로 식혜까지 챙겨올 정도로 건강한 분이셨는데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것도 딸이 챔프전 치르는 거 생각해서 새벽기도 나가시다 일어난 일이라고.[7] 크게 충격을 받은 전 코치는 챔피언 결정전에 참가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구단 측의 권유로 참가하기로 했다. 빈소에 머무르다 3월 19일 챔피언 결정전에 코치로 합류했다. 검은 정장 차림으로 침착하게 선수들을 지휘했으며 선수들 또한 검은 리본을 달고 사력을 다해 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경기 결과는 66:53으로 우리은행의 챔피언 결정전 승리. 전주원 코치로서는 하늘에 계신 어머니께 바치는 우승인 셈이다. 감정이 북받쳐 울음을 쏟아내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아직 장례 절차가 남아 있어서 시상식에는 참석하지 않고 빈소로 돌아갔다고 한다.
2021년 1월 경에는 여자 농구대표팀의 감독으로 임명되어 도쿄올림픽부터 감독으로의 지휘봉을 잡게된다. 이는 한국 국가대표팀 최초의 여자감독이라고 한다.
4. 여담
- 정선민이 꼽은 한국 여자농구 최고의 포인트 가드이기도 하다.
- 현역 땐 대표적인 "미녀 농구선수"로 언론에 소개되곤 했다. 그리고 과거에 입가에 큰 점이 있었는데 2010년에 뺐다.
5. 관련 문서
[1] 2004년에는 출산으로 잠시 쉬었다. 그래도 WKBL에서 그 해 올스타전을 '전주원 출산 전 기념경기(?!)'로 성대하게 치러 줬다.[2] 여자배구 GS칼텍스 서울 KIXX의 장윤희 코치가 2011년 1월 27일 현대건설전에서 복귀하는 바람에 최고령 타이틀이 넘어가고 말았다. 잘 알려져있지 않지만 장윤희를 제외해도 2020년 현역인 핸드볼 인천광역시체육회의 오영란이 여전히 현역이다. 전주원과는 동갑(!)[3] 다만 유영주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했으며, 이듬해 은퇴했다.[4] 이미 전주원은 2003년 이후 출산과 부상 등으로 국대에 선발되지 못했다. 2010년 세계선수권 대회를 앞두고 국대에 차출될 것으로 기대됐으나 사실 이미 국대에는 이미선, 최윤아를 비롯한 후배 포가들이 충분히 그녀의 몫을 해내고 있었다.[5] 이 때 코치 자리가 공석이 되자, 신한은행의 이영주 당시 감독은 모비스에서 FA로 풀린 후 재계약하지 못하고 은퇴한 위성우에게 코치 제의를 하여 영입하였다. 곧, 전주원 덕분에 위성우가 신한은행의 코치로 선임될 수 있었던 것.[6] 몇 년 전 모 인터뷰에서 은퇴 뒤에 코 밑의 점을 뺄 것이라고 얘기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복점으로 유명했던 체조선수 신수지도 그 복점을 뺐다.[7] 보통 이렇게 많이 알려져 있는 듯한데, 사실 새벽기도 후 주무시다 돌아가셨다고 김현정의 뉴스쇼 전화 인터뷰 중에 전주원이 직접 얘기함. 4분 쯤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