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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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성우의 수상 및 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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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L 챔피언결정전 우승 반지
2002




아산 우리은행 위비 감독
ASAN WOORI BANK WIBEE
위성우
魏誠佑

<colbgcolor=#0066b3> 출생
1971년 6월 15일 (52세)
[image] 부산직할시 부산진구[1]
국적
[image] 대한민국
신체
187cm|체중 82kg
직업
농구선수(슈팅 가드 / 은퇴)
농구감독
학력
부산성동초등학교(졸업)
경남중학교 (졸업)
부산중앙고등학교 (졸업)[2]
단국대학교 (졸업)
실업입단
1995년 현대전자 농구단
병역
[image] 상무 농구단 (1996~1998)
소속
<colbgcolor=#0066b3> 선수
[image] 현대전자 농구단 (1995~1997)
[image] 대전 현대 다이냇 (1997~1998)
[image] 안양 SBS 스타즈 (1998~2001)
[image] 대구 동양 오리온스 (2001~2003)
[image] 울산 모비스 피버스 (2003~2005)
감독
[image] 춘천-아산 우리은행 한새-위비 (2012~)
[image] 대한민국 여자농구 국가대표팀 (2013~2014)
코치
[image] 안산 신한은행 에스버드 (2005~2012)
행정
[image] KBA (2018~ / 기술이사[3])
1. 개요
2. 선수 시절
3. 지도자 경력
4. 위성우 떡밥
5.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前 프로농구 선수. 現 아산 우리은행 위비의 감독. 현역 시절 포지션은 슈팅 가드였지만, 주로 수비전문 식스맨으로 출전했다. 오리온스 시절에는 김승현과 룸메이트였다고 한다.

2. 선수 시절


부산중앙고 시절 작은 키로 센터를 보며 선배 오성식, 박세웅 등과 함께 뛰었고, 고 3때 추승균, 박훈근 등 장신 신입생들이 입학하면서 포워드로 전향했다. 고 3때 팀성적이 나빠 명문대 진학은 언감생심이었고, 대학농구 최약체 팀이던 단국대에 진학한 후 4년동안 대학농구연맹전에서 단 한 차례의 예선통과조차 하지 못했다;;; 그래도 4년간 단국대의 에이스 노릇을 하며 실업팀들의 눈도장을 받아, 1995년 당시 세대교체 중이던 명문 실업팀 현대전자이상민, 이지승, 이환우 등과 함께 입단하게 된다. 하지만 실업 초년생 시절 위성우는 김지홍, 이영주, 임근배 등 선배들의 높은 벽에 막혀 출장기회를 거의 잡지 못했고, 1년 후 상무에 입대한다.
1998년 제대 후, 화려한 선수층을 자랑하던 원소속팀 대전 현대에 복귀했으나, 전문수비수를 구하던 안양 SBS 스타즈에 현금 트레이드(3천만원)로 영입되며 프로선수로서 첫 발을 딛는다. 안양 SBS에서 위성우는 김상식, 홍사붕 등의 백업으로 전문수비수이자 괜찮은 3점슛을 가진 3&D 플레이어로 활약했고, 특히 99-00 시즌엔 평균 13분 남짓한 출장시간에도 경기당 1개의 3점슛(시즌 성공률 41.9%)을 기록하며 팀의 주요 식스맨으로 자리잡았다. 평범한 신체조건에 기술도 없었지만 체력하나만큼은 언제나 팀내 최고였다고 하며, 이를 바탕으로 악착같이 상대를 물고늘어지는 수비가 특기였고, 여기에 한경기에 3점 5개를 꽂은 적이 있을정도로(5/7) 폭발력도 있었다.
[image]
01-02 시즌을 앞두고 베테랑 선수를 원했던 대구 동양 김진 감독은 2:2 트레이드를 통해 위성우를 영입[4]하는데, 김승현, 마르커스 힉스 등 젋은 선수를 중심으로 정규리그 1위를 차지하는 등 돌풍을 일으키던 대구 동양에서 위성우는 팀의 맏형[5] 역할을 충실히 하며, 대구 동양이 01-02 시즌 사상 첫번째 챔프전 우승을 차지하는데 공을 세운다. 특히 루키였던 김승현과는 룸메이트로서 혈기왕성했던[6] 김승현을 잡아주는 역할을 했다고 하는데, 덕분인지(?) 김승현은 데뷔시즌에 신인상과 MVP를 동시석권하는 엄청난 데뷔시즌을 보낸다.
[image]
대구 동양에서 한 시즌을 더 보낸 뒤 FA가 된 위성우는 울산 모비스 오토몬스 최희암 감독의 부름을 받아 1년 계약을 맺으며 선수로서 마지막 불꽃을 태우지만, 03-04 시즌 모비스는 최하위에 그쳤고, 04-05 시즌 종료 후 다시 FA가 되었으나 어느 팀과도 계약하지 못하고 은퇴했다.

3. 지도자 경력


때마침 전주원 코치가 선수 복귀를 선언하면서 신한은행의 코치진에 공백이 생기자, 은퇴하자마자 신한은행 이영주[7] 감독의 부름을 받아 지도자로 전향하였다.
이영주 감독과 임달식 감독 밑에서 지도자 커리어를 쌓은 그는 신한은행의 우승을 도왔으며, 2008 베이징 올림픽 때에는 국가대표팀 코치를 맡았다.
2012년 4월 10일우리은행의 감독으로 선임됐다. 이 때 코칭스탭으로 함께하였던 전주원을 우리은행으로 빼왔다.
감독 부임 당시 우리은행이 수년간 꼴찌만 밥먹듯이 했을 정도로 팀 분위기가 엉망이었던 데다가, 정작 본인은 감독 경험이 전무했던 초보 감독이었던 탓에 부산 kt 소닉붐의 사령탑으로 지내고 있던 전창진 감독을 찾아가 사령탑으로서 필요한 부분을 물어보기도 했다. 별다른 친분이 없었던 전창진 감독은 사령탑으로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위성우에게 강조하며 애정어린 충고를 해 주기도 했다.
우리은행의 감독으로 오자마자 패배 의식에 젖어 있던 팀의 정신력을 개선하겠다며 강도높은 훈련으로 선수들의 달리기와 체력을 무엇보다 강조했다. 제대로 훈련이 되어 있지 않거나 훈련 패턴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밤 9시를 훌쩍 넘기기도 했다. 첫 부임 당시 위성우식 훈련이 얼마나 지옥같았는지 선수들끼리 취침 시간에 감독의 뒷담화를 할 정도였고, 저녁식사 시간까지 미뤄가면서 혹독하게 굴리다 보니 성북구 장위동에 있는 우리은행의 연습 체육관에서 선수들의 식사를 책임지는 식당 노동자들이 제 시간에 퇴근을 하지 못해 불평을 쏟아냈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위성우 감독에 의하면 "패배 의식을 지워버릴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은 강한 훈련밖에 없었다"고...
그리고 이러한 지옥 훈련은 결국 왕조의 시작을 알리게 되었으니...
부임했던 2012 - 2013 시즌부터 3시즌 연속 우승을 이뤄 내면서 우리은행대한민국 여자농구 최고의 팀으로 만들어 냈다. 2015-2016 시즌에는 5 실력이 하향 평준화됨에 따라 압도적으로 1위를 수성하고 4시즌 연속 통합 우승에 성공한다. 2016-2017 시즌에는 역대 최고승률로 정규리그 우승과 함께 통합 5연패를 달성. 5회 우승으로 WKBL 최다 우승감독 타이를 만들어내며 임달식 감독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러 악재가 겹쳤던 2017-2018 시즌도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WKBL 통산 최다 우승 감독이 되었다.
우승 후에 선수들에게 코트 위에서 밟히는 감독.(물론 장난스럽게 ) 평소에 혹독한 훈련을 시키는 만큼 우승 이후에는 꼭 한 번씩 선수들에게 밟힌다.[8] 챔프전 마지막 게임 4쿼터 중반쯤, 이미 승부가 갈린 상황이면 이제 슬슬 밟히겠구나 하며 공포감(?)이 밀려오기도 한다고, 그래도 자기가 고생시킨 게 있으니 선수들이 밟으면서 쌓인 걸 풀게 해주는 게 맞다며 쿨하게 받아들인다고. 여담으로 생긴 모습 때문인지는 몰라도 밟힐 때 표정이 꽤 재밌다.
[image]
바로 이 표정...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여자농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국가대표팀의 금메달을 이끌었다.
현역 시절을 식스맨으로 뛰다 보니, 식스맨들의 활약을 크게 칭찬해 주는 기사들이 좀 보인다. 선수 시절에 벤치에 있다가 자신이 들어갈 타이밍을 보아 온 게 경기의 흐름을 읽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2019년 3월 3일 2018~2019 시즌 통합 7연패의 꿈은 좌절되었다. 지난 6시즌 연속 통합우승(정규리그 및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차지하며 한국 프로여자농구의 왕조로 군림해왔지만 결국 최종 성적 2위로 2018~2019시즌을 마무리하였다. 청주에서 펼쳐진 청주 KB 스타즈가 2018~2019 시즌 정규리그 첫 우승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2019년 3월 18일 플레이오프 3차전 용인 삼성생명 블루밍스에 1승 2패로 패배하여 아산 우리은행 위비는 플레이오프 6년간의 기록을 허무하게 일찍 마무리 지었다. 경기 후 위성우 감독은 "아쉬움보단 베테랑 임영희에게 좋은 마무리를 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되지 못해 미안할 따름이다"라고 코멘트를 남기면서 울음을 터트렸다.
2019년 12월 18일 하나은행전에서 승리를 거두며 정규리그 통산 200승이라는 대업을 달성했다. WKBL 통산 최다승 감독에 등극함과 동시에 WKBL 최초의 200승 감독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한 것이다. 19-20 시즌은 코로나19의 확산 사태로 시즌이 조기 종료됐고, WKBL 측은 종료 당시 1위인 우리은행을 우승 팀으로 인정하며 챔피언결정전 없이 V11을 달성했다.[9]
2020-21시즌은 끝나기는커녕 장기화된 코로나19 때문에 전 구단이 외국인 선수를 쓸 수 없었고, 때문에 우리은행은 우승권에 들기 힘들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다. 여기에 주요 전력인 박혜진, 김정은이 차례로 장기 부상을 당했고, 몇 안 되는 포스트 선수인 최은실도 다치는 바람에 상황이 좋지 못했다. 실제로 시즌 초반에는 결과를 놓고 보면 하위권에서 경쟁했던 부천 하나원큐, 부산 BNK 썸에 연패를 당하는 등 불안했고, 외국인 선수가 없는 골밑에서 리그 최고의 센터 박지수를 앞세운 청주 KB 스타즈에 밀리는 시간도 길었다. 그러나 김소니아, 홍보람 등 꾸준했던 타 주전 선수들과 지난 시즌을 전부 쉰 김진희의 의외의 활약, 박혜진의 부상 복귀 후 폭발적인 경기력 등 좋은 요소들을 묶어 시즌 2경기가 남은 2월 중순 KB를 2위로 밀어내고 1경기 차로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정규시즌 최종전인 부산 BNK전에서는 상대 팀 BNK한테 시즌 최소 득점의 수모를 안기며 승리했다.

4. 위성우 떡밥


위성우 감독 관련 떡밥은 크게 2가지가 존재한다.
  • 위성우 감독이 부산 BNK 썸을 지도했을 때 우승할 수 있는가?
  • 위성우 감독이 KBL에 왔을 시 잘할 것인가?
첫번째 떡밥은 주로 여자농구팬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고, 두번째 떡밥은 주로 남자농구팬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첫번째 떡밥의 경우, 부산 BNK 썸이 구리 KDB생명 시절이었던 2011-12 시즌 이후 줄곧 봄농구를 하지 못하고 있는 점에서 언급이 된다. 물론 단순히 봄농구를 오랫동안 못한 것도 중요한 이슈겠지만, 부산 BNK 썸은 2011-12 시즌 김영주 감독 사퇴 이후 감독+구단 프런트와 고참들의 알력으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결국 김영주 감독이 2016-17 시즌에 다시 감독직을 맡고 팀을 젊게 만들면서 이 문제는 어느 정도 일단락되긴 했지만, 성적이 나오지 않는 건 여전해서 결국 팀이 네이밍스폰새 모기업 시대를 맞은 후에도 봄 농구를 하지 못하고 있다. 만약 위성우 감독이 부산 BNK 썸 감독으로 간다면 위 감독의 강한 훈련량을 부산 BNK 썸 선수들이 견딜 수 있을지, 그리고 그 훈련량을 좋은 성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을지는 여전히 여자농구팬들이 궁금해하는 떡밥이다.
두번째 떡밥의 경우, 과연 여자팀을 맡았던 감독이 남자팀을 맡을 때도 잘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인데, 이 질문에 대한 모범케이스가 김태환MBC SPORTS+ 해설위원이, 영 좋지 않은 케이스가 정덕화 前 감독이다. 김태환 前 해설위원의 경우 코칭스탭을 여중고 농구에서 시작했고, 농구대잔치 시절 여자팀인 국민은행을 두 번 우승시켰다. 이후 남자농구로 와서도 1990년대 후반 중앙대학교의 전성시대를 열고 2000년대 초반 창원 LG 세이커스을 강팀으로 이끈 경험이 있는 감독이다. 여자팀 감독 시절에는 강한 체력을 바탕으로 한 농구를, 남자팀 감독 시절, 특히 LG 감독 시절에는 KBL에서 가장 성공적인 런앤건[10]의 극한 공격농구를 선보였다.[11] 그러나 그 반대에 있는 정덕화 감독은 여자팀, 남자팀 모두 감독으로서는 별 성과를 내지 못했다. 역시 여자농구-남자농구 프로팀 감독을 모두 맡은 조성원 현 LG 감독 역시 KB에서는 계속되는 연패로 자진사퇴, LG에서는 첫 시즌 10위로 체면을 구기는 중이다. 그나마 現 부산 kt 소닉붐의 감독을 맡고 있는 서동철 감독이 상무, 고려대, KB스타즈, 오리온 등 아마추어, 대학, 여자 농구, 남자 농구 등지에서 코치 혹은 감독으로 활동한 이력으로 부임 첫 해에 이른바 양궁농구로 압도적인 최하위 팀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다. 과연 위성우 감독이 남자프로농구 감독으로 부임 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을까?

5. 관련 문서


[1] 문현동은 1975년 신설된 남구로 이관되었다.[2] 고교 때 부상으로 1년 유급했다고 한다.[3] 스승인 방열 회장의 영향과 함께 대선배 지도자인 유재학과 함께 맡고 있는 분야[4] 대구 동양 get: 위성우, 김도명 ↔ 안양 SBS get: 김광운, 정구근[5] 이라고는 하지만, 전희철, 김병철과 각각 2살차이, 학번으론 한 학번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당시의 위성우가 워낙 노안이었는데... 지금은 동안이긴 하다.[6] 비시즌 훈련 중 김진 감독에게 야단을 맞고 숙소에서 나갔다가 샛노랗게 염색을 하고 돌아오기도 했다;;;[7] 실업 현대전자 시절 팀 선배였다.[8] 처음 선수들에게 지옥훈련을 시킬 때 만일 우승하면 자신을 때려도 좋다고 했다고 한다.[9] 같은 상황이었던 KBLV-리그 남자부 및 여자부는 종료 시 1위 팀을 우승팀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때문에 당시 1위로 시즌을 마감한 서울 SK 나이츠, 원주 DB 프로미, 서울 우리카드 위비, 수원 현대건설 힐스테이트는 모두 '정규리그 1위' 로만 기록됐다.[10] 실패한 런앤건은 김상준 시절의 삼성이 대표적이다.[11] 김태환이 감독을 맡던 LG의 경기는 평균득점이 100점이 넘어갈 정도로 화끈해서 KBL의 인기몰이를 톡톡히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