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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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일본 정부에 바라는 요구사항
3. 일본 정부의 반응
3.1. 배상
3.2. 인정
3.3. 사과
3.4. 일본 교과서 기재
4. 위안부 평화비 건립 마찰
5. 네덜란드의 화요집회
7. 같이 보기


1. 개요


1992년부터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군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하였던 정신대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 중 정의기억연대(구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소속 할머니들의 주도로 서울 종로구 중학동에 있는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매주 수요일에 열리는 집회. '수요시위' 또는 '위안부 할머니 집회' 라고도 한다. 1993년에 100회를 기록하였고, 2001년에는 500회를 기록하여 '''동일한 주제로 열린 최장기간의 시위'''로 이 기록은 매주 갱신되고 있다.[1] 2011년 12월 14일에 1,000회 집회가 열렸다. 2016년 새해 첫 수요일인 1월 6일, 수요집회가 1,212회에 도달하였다.
2019년 8월 14일 수요집회가 1,400회를 맞이했으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이기도 하다. 때마침 일본의 경제보복으로 일본 불매운동이 활발한 시기인데다가 광복절 전날이라서 그런지 평소보다 더 많은 약 2만여명이 옛 일본대사관 앞에 모였다. 또한 12개 나라 37개 도시에서도 수요집회가 열렸다. #1 #2 #3 #4 #5 #6 영상1 영상2 영상3 영상4
특이하게도 수요집회의 창시자는 '''구 일본군 출신이다'''.
노태우 정부시절인 1992년 1월 당시 일본 총리를 지냈던 미야자와 기이치가 방한(訪韓)하여 한일정상회담을 갖게 된 계기로 일부 위안부 및 정신대 피해 할머니들을 중심으로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시작하였고 그 이후에는 이들을 지지하고 동조하는 할머니들이 뜻을 같이하게 되면서 정기적인 시위로 진화되어 매주 수요일을 시점으로 할머니들이 시위와 발언을 하는 장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참가자 대부분이 고령의 할머니들인데다가 일부는 건강이 악화되어 와병(臥病) 신세를 지거나 끝내는 노환으로 작고하시기도 하고 도중에 건강 문제 등으로 포기를 했던 경우도 있었지만 일본 정부의 성의없고 변화없는 태도를 보게 되면서 할머니들의 시위와 발언은 더욱 높아져서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처음 집회가 열렸던 당시에는 234명의 할머니들이 뜻을 같이하여 시위에 동참하였지만, 위에서 말한 것처럼 대부분이 고령인데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 할머니들이 건강문제와 악화일로 등으로 인하여 시위를 포기하고 와병이나 노환 등을 앓게 되었거나 끝내는 작고하시기도 하는 등, 여러가지 변화가 있었다. 2013년 현재 꾸준히 참석하시는 할머님은 2분 뿐. 하지만 항상 같이 해주는 학생들이나 시민단체들이 있다. 그나마 이 할머니들도 워낙 고령이라 건강도 좋지 않을 것이라는 문제도 있어 향후가 걱정이 되기도 한다. 최근에도 도중에 일부 할머니들이 병세악화 등으로 고인이 되었거나 병세를 이유로 도중에 포기하거나 집회에 불참하는 경우도 있다. 집회에 불참한 또다른 경우는 비판 및 논란 참조.[2]

2. 일본 정부에 바라는 요구사항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에 바라는 요구사항은 다음과 같다.
  • 일본군 위안부 범죄에 대한 일본의 범죄를 인정하고 사과할 것.
  •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상을 즉시 규명할 것.
  • 일본 정부일본 국회에서 할머니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할 것.
  •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공식 보상.
  • 일본 역사 교과서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공식 기재 및 교육
  • 위령탑 및 사료관을 건립할 것.
  • 전범자 및 책임자 처벌 및 징계.

3. 일본 정부의 반응


일본의 행태를 보아 당연히 이러한 요구와 시위에 대해 일본 정부는 '''우리는 사죄와 배상을 다했다. 이제와서 무슨 사죄를 더하라는 것인지 이해가 안 간다'''는 반응이다. 다만, 원래 이랬던건 아니고 적어도 사죄에 관해서는 과거에도 한적이 있다. 문제는 후대 정권들어 계승이 되지 않아서 그 동안의 완화된 감정이 다시 격화되고 (일본 입장의)과거사 청산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등 사실상의 실책을 저지른 것.

3.1. 배상


일본 정부는 징용공 배상 관련 문제는 1965년 6월 22일 박정희 정권과 맺은 한일기본조약으로 끝났다는 입장이다. 이 때 일본이 준 배상금은 일부만이 피해자에게 돌아갔고 대부분은 당시 한국 정부 주도의 경제발전에 썼다. 일본 입장으로는 이 때 해결하는 것으로 대한민국 정부와 합의를 본건데 이제와서 같은 문제를 다시 배상해라 요구하니 반박할 논리가 생긴 거다. 그래서 많은 한국 국민들이 일본이 아예 배상을 한 적이 없다고 아는 사람이 많은 게 한국 정부나 민간단체들이 한일기본조약에 대해 은폐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일본 측의 비판을 받고 있다. 심지어 한일기본조약에 대해 알고 나자 일본 정부에 대한 옹호 입장으로 돌아서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 한일기본조약은 애초 애매모호하고 광범하게 맺은 조약이라 해석에 따라 달라질 요소가 많은 조약이다. 당장 고노 다로 외무상이 "'''개인적 배상청구권 소멸은 안했다'''"라면서도 "그런데 피해금은 한국 정부가 줘야 할 일."이라고 말한게 2018년 11월이다.[3] 그리고 위안부 문제의 핵심 조약은 이것이 아니다.
위의 한일기본조약이 그나마 해석에 따라 갈릴 수 있는 사안이라면, 한일 위안부 합의는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이란 문구까지 넣어서 '''단돈 10억엔에 '위로'해버렸다.''' 이에 대해 앞으로 딴말하기 없다는 문구까지 합의문에 넣은 것은 덤.
결국 피해자들 입장에선 사죄도, 배상도 못 받고 어디갔는지 모를, 대충 좋은데 쓰였다는 그 '독립 축하금'과 '위로금'들만 남았다. 더구나 합의 이후 아베 정권이 위안부를 비롯한 역사 의식이 시궁창임을 드러내면서 이 합의의 '10억엔'과 '사죄'는 억지 푼돈과 유감표명이나 받은 셈이 되었다. 한 마디로 양국이 정부 차원에서 첫 단추부터 나중 단추까지 단단히 잘못 끼운 것이다.

3.2. 인정


사실 일본 정부는 1993년 고노 담화에서 공식적으로 위안부의 존재와 당시 정부의 개입과 강제동원 등을 인정했''''었''''다. 하지만 자위대 재무장및 우경화로 언제 그랫냐 마냥 다시 극우화가 되어 가고 있다. 아베 신조 총리는 2014년 '고노 담화 검증팀'까지 동원해서 결국은 강제 동원 사실은 없었다는 결론을 이끌어내어 한일관계 파탄의 원인을 제공했다.

3.3. 사과


일본이 이제까지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단 한번도 사과를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데, 사과 행위는 이미 수 차례 했다.
그러나 이것에 모순되는 정치인들의 언행 역시 계속 나오고 있으니 문제가 된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천황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무라야마 도미이치만 해도 담화 발표 직후 천황의 책임을 인정하냐는 기자의 물음에 미리 준비한 쪽지를 바로 읽어내리며 부정했다.[4]
여담으로 아키히토 천황은 김대중과 비공식적으로 침략했던 일에 대해선 사과를 한 적이 있다. #
또한 비슷한 시기에 오부치 게이조는 "일본이 과거 식민지 지배로 한국 국민에게 커다란 피해와 고통을 안겨준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통절한 반성과 마음에서의 사죄(痛節な反省と心からの謝り)"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명확하게 가해자=일본, 피해자=한국이라고 명시했다. 위안부 문제를 콕 집어서 이야기 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위의 담화들 보다 더 정확하게 한국에 대해 직접 사죄한 바가 있다. 이른바 김대중-오부치 게이조 선언이다. # 그러나 오부치의 후임인 모리 요시로가 다시 망언을 일삼았고, 그 뒤를 이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역시 본인은 싫어했다고 하지만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하는 등 이전의 일본 총리나 장관들의 담화가 그랬듯이 순식간에 빛이 바래고 말았다.
다만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 그 자체는 일본 정부의 잘못이라고 보긴 힘들다. 한국의 정치인들 중 일부가 5.18을 폭동이라고 주장하거나 6.25전쟁을 남한의 북침이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이것이 한국 정부의 책임도 아니고 한국 정부가 5.18폭동설이나 6.25 북침설을 옹호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이런 일이 있을 떄 625 전사자나 518 희생자 유가족들은 이 정치인들을 고소하지 한국 정부에 사과나 배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의 사례와 일본의 사례가 다른 점은 단순히 일본의 정치인들 뿐만 아니라 사과발언들을 계승하고 이와 관련된 노력을 실천해야하는 '''내각의 수장인 총리 이하 장, 차관급 고위 인사들 조차도 망언을 일삼거나, 역사반성을 위한 정책을 실천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에 있다. 예를 들어 2007년 당시 외무성 장관이던 아소 타로의 위안부에는 강압성이 없었다는 망언이나, 같은 해 신조 아베 총리의 비슷한 발언에서 일본 정부의 여전히 뒤떨어진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일본 총리들은 한국과 중국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전범들을 기리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기도 했으며, 1994년부터 이어져 온 위안부 서술을 삭제했다. 아베 정권이 자학사관 운운하며 삭제한 것. 이렇게 과거사 청산과 관련한 노력은 전무하거나 오히려 역사왜곡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부 일본의 정치인뿐만 아니라 총리와 내각대신들 조차도 이러고 있으니 일본의 사과에 진정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게 당연한 것. 국민감정을 무시할 수 없는 민주주의 국가들 간의 외교에선 큰 실책이다.

3.4. 일본 교과서 기재


의외로 일본 역사교과서에도 1994년부터 일본군 위안부 관련 내용이 실려왔다. 2013년 현재까지도 다수의 교과서에 위안부 관련 서술이 있다. 다만 일본 사회가 점점 우경화되면서 위안부 기술이 축소되고 개정되기를 반복하고 있다. 우익 교과서에는 위안부 관련 서술이 아예 없는 경우도 있다.

4. 위안부 평화비 건립 마찰


2011년 12월 1,000번째 수요집회에 맞춰서 대한민국 정부서울시 및 관할 종로구와의 합의하에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위안부 할머니들의 소녀시절 모습을 본딴 위안부 평화비를 건립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일본 정부가 외교관계에 관한 비엔나 협약(1961년 체결, 1964년 발효) 제22조를 내세워 평화비를 건립하는 것에 반대하여 한국 정부와 마찰을 빚게 되었다.
물론 외국 공관은 위 협약에 따라 불가침을 보장받는 외교특권을 갖지만, 일본의 경우 과거 일제강점기 때 위안부 및 정신대 할머니들을 강간하고 성 노리개감으로 삼았던 과거의 만행이 있었으며 피해자 할머니들이 반드시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위안부 평화비를 건립해야 한다는 주장을 대한민국 정부에 건의함에 따라 이와 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일본 정부가 자국 대사관에 인접한 평화비 건립을 강하게 반대하고 있고 "접수국은 어떠한 침입이나 손해에 대하여도 공관 지역을 보호하며, 공관의 안녕을 교란시키거나 품위의 손상을 방지하기 위하여 모든 적절한 조치를 취할 특별한 의무를 가진다"는 위 협약 제22조를 침해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어 평화비 문제는 연말 양국간의 화두로 떠오를 전망이다.
하지만 국내 세간에서는 외교특권의 침해라기보다, 과거사의 만행을 강하게 부정하고 있는 일본이 이제는 타국의 기본권에 대한 내정간섭까지 하면서 반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뻔뻔하기 짝이 없고 죄악의 과거를 숨기려는 비열한 행동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입장이 짙은 편이다. 거기다 평화비가 건립된 곳은 대사관 길 건너편이기 때문에 공관 지역이 아니고, 수요집회도 길 건너편에서 하는데다 대사관 내부로 진입하려는 일도 없기 때문에 일본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비엔나 협약 위반으로 보기에는 이래저래 무리가 많다. 어차피 대사관 경비를 위해 경찰 인력이 항상 상주하고, 수요집회 때는 경찰 인력도 그에 맞춰 보강되기 때문에 한국 정부가 협약을 불이행하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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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11년 12월 14일 마침내 1,000번째 수요집회를 맞이하여 드디어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위안부 평화비 동상[5]이 세워지게 되었다. 이에 일본은 정부 명의로 자국대사관 앞에 평화비를 세운 것에 유감을 표명하였으며 향후 철거 요청을 할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외교통상부종로구청에서 국민감정을 이유로 철거 요청을 거부하였다.
2012년 6월 평화비 동상에 말뚝테러를 하는 일본 우익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걸 영상으로 찍어 올리는 짓까지. 일부 단체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비난하는 반대시위를 벌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SBS 뉴스
이에 맞서 일본 우익들이 주일(駐日) 한국 공관 입구에 '''다케시마의 비(竹島の碑)'''를 세우겠다고 하였으나 일본 정부에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6]

5. 네덜란드의 화요집회



네덜란드서도 20년 간 "日 과거사 사죄하라!"
네덜란드에서도 우리나라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 집회'같은 모임이 20년 넘게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한다. 이 집회는 1994년 한 시민단체 주도로 처음 시작됐으며, 침략의 과거사를 외면하는 일본정부를 규탄하기 위해서 매달 둘째주 화요일이면 일본 대사관 앞에 모여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정부는 아직까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고 한다.

6. 의혹, 비판 및 논란


'''학생들이 (수요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귀한 돈과 시간을 쓰지만 집회는 증오와 상처만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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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수 위안부 피해자

초창기에 참여했던 할머니 중 일부는 수요집회가 정치적인 목적을 가진 좌파세력을 위한 운동이라 여기면서 자기들을 '''팔아먹으면서 정치활동을 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2004년쯤 무궁화 할머니회라는 이름으로 떨어져 나가는 사건도 있었다. 무궁화 할머니회나 위안부 피해자 심미자로 검색하면 규탄 전문을 볼 수 있다.
무라야마 당시 일본 총리가 아시아여성기금이라는 기금을 마련하여 일본 총리의 사과 편지와 함께 돈을 지급하였는데 정대협은 이 돈을 받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피해자 할머니 중 33명이 이 돈을 받기로 하면서 분열했다. #
당시 심미자 할머니는 "위안부는 종군 위안부와 일본군 위안부가 있다"며 "일본군 위안부는 강제로 끌려갔지만 종군위안부는 돈을 벌기 위해 매춘을 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한파 추위에도 계속되는 위안부 할머니의 외침
상식과 정신이 올바른 단체라면 '''영하 12도'''의 한파가 몰아닥친 날에는 할머니들이 참석하지 않아야 마땅하다. 다행히 이후에는 폭염이나 한파인 날에는 할머니들이 참석하지 않았다.
프랑스 정보부 DGSI가 북한 간첩 혐의로 체포한 프랑스 상원 공무원 케네디 브노#가 윤미향이 파리에서 개최한 수요 집회에 참가하였다.[7]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에도 집회를 강행하는 것에 대한 비판도 있다. 건강이 좋지 않은 고령의 할머니들까지 집회에 참가시키는 등[8] 너무 위험한 시위를 하고 있다는 것.
수요집회에 대한 의심이 계속되다 결국 2020년 5월 7일,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92) 할머니가 기자회견을 열어 정의기억연대(옛 정대협) 등 관련 단체를 비판, 의혹을 폭로했다.
수요집회에 대해 "수요집회를 없애야 한다. 하나도 도움이 안 된다. 참가한 학생들이 낸 성금은 어디 쓰는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며 "다음 주부터 수요집회에 참석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 특히, 21대 총선에서 더불어시민당 비례대표로 당선된 윤미향 전 정의기억연대 이사장을 향해서는 "윤 당선인이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할머니가 윤 당선인을 지지하고 덕담을 나눴다는 얘기는 모두 윤 당선인이 지어낸 말" 이라며 비판했다. #
이에 대해 정의기억연대에서는 "'이용수 할머니가 92세로, 심신이 많이 취약한 상태다", "할머니 기억이 왜곡된 부분이 있다. 또 서운한 감정이 논리를 덮는 부분이 있어서 감안해서 봐야 한다'" 는 발언을 하였다. # 그러나 위안부 피해의 증언은 오직 할머니들의 기억만을 의존하고 있는게 현실이면서 정작 그 기억의 주체인 할머니들의 기억력을 치매 노인 취급하고 있다.[9]
의혹과 논란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수요집회는 일단 여전하다. 이용수 할머니는 학생들의 수요집회 참여가 달갑지 않다고 말했지만 일부 학생들은 여전히 집회에 동참하고 있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수요집회에 대해 이용수 할머니는 지나가던 길에 대구 수요집회에 잠깐 참석했지만 이는 정의연이 아닌 자신의 주장을 믿으라는 의미 였으며, 여전히 기존 수요집회와는 대립하고 있다.
이후 정의연에 따르면 이용수 할머니는 7월 3일 정의연 이사장을 포함한 위안부 관련 시민단체장들과의 만남을 가진 자리에서, 평화의 소녀상 세우기 운동과 수요 시위를 지지한다는 의견을 공유했다. 다만 현재의 시위 방식을 바꿔서 한일 청년 세대 교류와 역사 교육에 방점을 맞춰야 한다고 했으며, 소녀상 건립에 더욱 힘을 쏟아 도쿄 한복판에까지 세워야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1 얼마 후 7월 9일엔 서울 종로구 대사관 앞의 소녀상에서 연좌농성을 벌이고 있는 반아베반일 청년학생공동행동 회원들을 찾아가 그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8월 14일. 오전 충남 천안 국립망향의동산에서 열린 기림의 날 기념식이 끝나고 이용수 할머니는 끝내 '''수요집회를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을 거듭 밝히면서 이용수 할머니가 수요 시위를 지지한다고 했던 정의연의 발언은 모두 거짓임이 드러났다.#
자세한 내용은 정의기억연대 위안부 피해자 이용 논란 참조.

7. 같이 보기


[1] "'''동일한 주제로 열린 최장기간의 시위'''로 기네스북에도 등재되었다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실제 최장기간의 시위로 정대협 측에서 등록을 하려 하였지만, 등록시 등록비를 내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정대협에서 등록 신청을 하지 아니하였다."고 2013년 9월 4일 수요집회에서 정대협 윤미향 대표가 발언하였다.[2] 초창기까지는 할머니들의 연세가 대부분 5,60대였기 때문에 활동이 왕성하였지만 지금은 80대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건강 문제가 걱정되기도 한다.[3] 그럼에도 손해배상을 안하는 것은, 국가적 손해배상은 한국 정부에게 했다고 보고 한국 정부가 피해자들에게 해야된다는 논리다. 나머지 민간적 손해배상은 전범기업들이 전후에 파산했으므로 현재 기업들은 전범기업임이 성립할 수 없다는 논리다. 즉, 어찌되든 일본 정부의 배상은 끝났다는 입장. 한국의 반론도 있는데, 자세한 것은 조약 문서 참고.[4] 사과행위라기 보다는 과거에 우리가 이러이러했던 점에 대해서 유감표명을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며 해당 담화의 의의를 폄하하는 의견이 있으나 담화문에서는 분명히 '''사죄'''의 뜻을 밝히고 있다.[5] 이 동상 사진을 두고 실물크기 미소녀 피규어라면서 양덕 계열 북미권 스레드 게시판으로 퍼나른 종자들이 있었는데 그 반응은… 뜻밖에도 재밌어 하는 사람은 처음에나 좀 있었고 동상의 내막을 알고 나자 일본군의 만행을 성토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퍼나른 종자는 일본 애니를 좋아하는 양덕들이니까 위안부 문제도 옹호해줄 것이라 생각한 듯. [6] 허락한다해도 문제. 주한 일본대사관 앞이야 넓어서 대사관 부지를 안 건드리고 집회도 하고 동상도 세우지만, 주일 한국 대사관 앞은 협소하기 그지 없다. 대사관 부지를 안 건드리고 다케시마의 비 같은 걸 세우려면 보행자 도로에 지어야 하는데 당장 통행이 불편하다고 민원이 빗발칠 것이다.[7] 이때 윤미향은 파리 수요집회에 딸까지 동행시켜 공짜 파리 관광까지 정의연 기부금으로 시켜줬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8] 이전에도 치매나 기타 질환으로 건강이 좋지 않은 할머니들을 집회에 참석시켜 비판과 의심을 받았다.[9] 정의연의 해당 발언은 할머니들의 기억과 경험에 기반한 명분으로 일본을 규탄하는 단체이면서 이들을 치매 노인 취급 한다는 것은 본인들의 그간의 대의명분과 존재의 이유들을 스스로 파괴해버리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