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우라 카즈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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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일본의 '''현역''' 축구선수. 1990년대 초반~후반에 일본의 대표적인 스트라이커로 이름을 날렸고, '''57세'''인 현재도 아직 현역으로 요코하마 FC에서 뛰고 있다. 2018년 1월 11일 11시 11분에 재계약했는데 그의 등번호 11번과 연계한 것. 과거 일본축구를 대표하는 상징이었던 선수로, 미우라가 대표팀에서 멀어진 2000년대 이후에는 그만한 영향력을 가진 선수가 나오지 않았다.
J리그 최고령 출전선수 기록을 가지고 있고, 현재 역대 최고령 현역이므로 시합에 출장할 때마다 기록이 갱신된다. 참고로 비슷한 시기에 데뷔했고 울산 현대 사령탑을 맡은 '''홍명보보다 2살 많으며,''' 대한민국 네임드 스트라이커이자 감독이었던 '''황선홍보다 1살이 많다.'''[2] 심지어 현재 '''일본 국대 감독인 모리야스 하지메 감독이 그보다 1살 어리다.''' 관련 기사 또한 그가 축구 유학을 갔던 브라질에서 '''프로에 데뷔한 해인 1986년에 태어난 혼다 케이스케가 현재 국가대표팀을 은퇴하고 선수 생활의 황혼기를 보내고 있을 정도'''이다. 잉글랜드의 폴 개스코인, 프랑스의 다비 지놀라, 콜롬비아의 안드레스 에스코바르[3] 등이 그와 동갑이다.
일본에서는 그 외에 미우라와 동갑인 나카야마 마사시(J3리그 아술 클라로 누마즈)가 프로선수 생활을 이어가고 있지만 한번 은퇴한 것을 번복한 데다 리그에 엔트리 등록이 되지 않아 형식에 불과하다.
2. 클럽 경력
1982년에 브라질로 축구 유학, 일본의 브라질 유학 1세대이다. 브라질 프로 팀에서 4년간 뛰다가 J리그 출범을 앞두고 1990년 일본에 돌아와 오늘날 도쿄 베르디의 전신인 요미우리 축구 클럽에 들어갔다. 요미우리는 프로화와 함께 명칭을 베르디 가와사키로 바꾸었고, 미우라는 핵심 스트라이커로 활약하며 초기 J리그 붐을 이끌었다. 1994년에는 세리에 A팀인 제노아 CFC에 임대 이적하여 세리에 A 최초의 아시아 선수가 되었지만 별다른 활약은 하지 못했다. 최종 성적은 리그 21경기 출장(선발 10경기) 1골 1도움. 당시 데뷔전이었던 AC 밀란 전에서 밀란의 수비수 프랑코 바레시와 충돌하여 코뼈가 골절되는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한달 동안 경기에 나오지 못했고 10월에는 자국에서 열린 아시안 게임 일본 축구 대표팀에 선발되어 대회 기간 소속팀에서 이탈해야 했다.
시즌 종료 후 다시 베르디 가와사키로 복귀했다. 1996년에는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다. 1998년말에는 소속팀 베르디 가와사키가 구조조정을 단행하면서[4] 미우라는 다시금 유럽을 노려 크로아티아의 크로아티아 자그레브(1998)에 진출하기는 했지만, 별다른 활약은 하지 못했다. 그리고 교토 퍼플 상가와 비셀 고베를 거쳐 2005년부터는 요코하마 FC에서 뛰고 있다. 비셀 고베 초반까지는 연간 두자리수 득점을 기록했지만 이후에는 풀타임 기용은 하지 못하고 있고, 스타팅과 벤치를 오가며 연간 10~20경기씩 출전하였다.
2005년 후반기에는 호주 A리그의 시드니 FC에 단기임대되었으며, 이 해 일본에서 열린 FIFA 클럽 월드 챔피언십에 참가해 처음으로 FIFA 주최 대회에 발을 내딛었다.
2016년 홈경기에서 최고령 득점을 갱신하고,# 그 뒤로도 계속 갱신하고 있다.#
2017년엔 만 50세 14일의 나이로 또 최고령 득점을 갱신했다. 이 득점으로 잉글랜드의 전설적인 축구선수 스탠리 매튜스 경의 만 50세 5일 득점 기록을 뛰어넘었다.# 그리고 2018년에도 현역으로 뛸 예정이며, 소속팀 요코하마 FC의 J1리그 승격을 목표로 삼았다고 밝혔다.
2019년에도 재계약을 맺으면서 여전히 현역 선수로 뛰게 되었다.#
참고로 17년도 이후로는 완전히 잉여 전력에 불과하다. 20년도 시즌은 팀내 체력 테스트도 시원찮을 정도로 몸상태가 떨어진 상태고, 지는 경기에 버리는 카드 혹은 다 이긴 경기에 짬처리로 나오는게 전부. 정상적인 팀이라면 이미 방출되고도 남을 선수인 상황이다.
2020년 9월 23일. J1리그 최고령 선발 출전 기록을 세웠다.# 종전 기록은 2012년 나카야마 마사시가 기록한 45세 2개월 1일이다.
2020년 12월 19일. 2020시즌 일본 J리그1 34라운드에서 요코하마 F.마리노스와의 경기에서 후반 추가시간에 투입되어 약 5분간 경기장을 누비며 53세 9개월 23일로 일본 최고령 출전 기록을 갱신했다.#
2021년에도 뛴다고 밝혔다(.....) 야후 재팬 내 댓글을 다룬 기사를 보면 일본인들마저 미우라의 현역 연장에 대해서는 반응이 좋지 않다.[5][6]
3. 국가대표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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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이 공한증을 벗어나 거의 대등해진 1990년대부터는 일본 국가대표팀의 스트라이커였기 때문에 대한민국에도 잘 알려져 있다. 1993년 10월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1994 FIFA 월드컵 미국 최종 예선전에서 후반 15분에 터진 미우라의 결승골로 일본은 9년 만에 한국을 꺾었다. 당시 중국보다 더한 공한증에 시달리던 일본은 이 경기 승리로 징크스를 확실히 깼다. (9년간 A매치는 2무 7패)
그래서 일본은 최초로 월드컵 본선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었고, 한국은 거의 탈락을 예상하고 있었으나… 한국이 북한전을 기대 이상으로 잘 뛰어 3점차 이상으로 이긴데다 일본이 종료 30초 전 이라크를 상대로 골을 먹고 비기는 바람에 일본은 최종 예선 3위로 탈락하고, 아시아에 배정된 티켓 2장은 한국과 사우디가 나눠가졌다. 이 때 미우라 카즈요시는 '''"축구의 신이 있다면 따지고 싶었다. 그런 캡틴 츠바사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 날의 일이 미국 월드컵 기간 내내 나를 눈물짓게 만들었다."'''라고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비극이 일어나고 1년 후, 미우라는 대한민국과 다시 한 번 만난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축구 8강전에서 선제 골을 넣으며 대한민국 앞에서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했으나, 일본은 난타전 끝에 동점 골을 기록한 유상철 및 2골을 넣은 황선홍의 대한민국에 3:2로 패해 8강에서 탈락했다. 당시 일본은 미우라와 이하라 마사미가 골을 넣었다.[7]
당시 전성기였던 미우라에게는 도하의 비극이 천추의 한이 되는데, 그 이후 '''월드컵에는 단 한 번도 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지역예선에서도 활약하면서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의 '''사상 첫 본선행'''을 이끌었으나, 오카다 다케시 감독이 본선 엔트리에서 미우라를 제외시켰다.
미우라는 예선 초반에 팀의 주공격수이자 주축으로 큰 역할을 했다. 특히 우즈베키스탄 전에선 혼자서 4골을 기록하며 상대 골문을 아주 탈탈 털었지만, 세번째 경기인 한국전, 흔히 도쿄대첩으로 일컬어지는 경기 당시 한국의 최영일이 담당마크한 이후 폼이 확 죽어버렸다. 이와 관련해서 최영일과 그에 대한 여러가지 썰들이 한국 올드축구팬 사이에서는 잔잔히 화제가 됐었다.[8] 이 때문에 미우라는 득점이 싹 막히며 일본 대표팀 부진의 원흉으로 낙인찍혔고 심지어 경기 후 청문회 상황까지 몰리기도 했다. 어쨌든 일본 축구의 상징과도 같았던 그의 본선 엔트리 탈락을 두고 일본 내에서는 너무했다는 얘기가 많았고, 한국에서도 미우라가 본선 엔트리에 빠진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의견도 많았다. 심지어 "일본은 영웅을 가질 자격이 없다"라는 논설이 올라오기도 했었다.
월드컵 본선에서 미우라를 대신하여 일본 대표팀의 주전 공격수로 나선 건 나카야마 마사시와 조 쇼지였는데, 나카야마는 예선 마지막 경기인 자메이카전에서 골을 넣으며 일본 대표팀 월드컵 첫 골의 주인공이 되었지만, 조 쇼지의 경우 대회 내내 부진한 모습을 보이는 바람에 역시 미우라를 데려갔어야 했다는 반응이 많았다.
다만 이 때의 선수 구성을 보면 조 쇼지는 당시 대표급 선수 중 유일하다시피 한 포스트 플레이어였고, 나카야마는 활동량이 많은 하드워커 스타일로 어떤 상대든 기본은 하는 데다 1998년 J리그 전반기에 4경기 연속 해트트릭이라는 사상 초유의 기록을 세우며 절정의 폼을 찍고 있었다. 미우라는 2010년대 식으로 표현한다면 크랙 성향의 공격수이지만 이 때는 최전방에 서서 아시아 수준에서도 한계를 드러냈다고 볼 수 있었으며, 실질적으로 제3의 스트라이커 자리를 로페스 바그너와 다툰 셈이다. 로페스는 미우라가 침묵한 최종예선 중후반을 이끌고 간 스트라이커이며, 결과적으로 로페스 또한 본선에서 출장기회는 적었지만 나카야마의 면피성 골을 어시스트하는 공헌을 했다.
오카다 감독과의 불화설도 있었다. 가장 큰 정황은 이란과의 최종예선 플레이오프에서 오카다 감독의 지시를 어기고 프리킥을 미우라가 멋대로 차서 날려버린 것으로, 오카다는 감정적인 대응임을 본인도 인정했지만 질책성으로 미우라를 조기 교체하였으며 이후 중용하지 않았다.
미우라는 현재도 '불러주기만 하면 반드시 참가한다'는 의지를 내비치며 선수생활을 이어가고 있지만, 나이가 50을 훌쩍 넘긴지라 꿈이었던 월드컵 본선 출전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2002년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에는 필립 트루시에 감독이 선수가 아닌 코칭스태프로 합류를 타진했지만 본인이 거절했다. 대신 2012년에 열린 풋살 월드컵에 일본 대표로 출전하면서 간접적으로나마 소원 성취(…).
1993년 당시 한국의 월드컵 본선 진출을 좌절시킬 뻔한 골의 주인공이었기에 한국 팬들 사이에서의 이미지는 그리 좋지 않았으나, 세월이 많이 지난 데다가 결과적으로 일본은 예선에서 탈락하고 한국은 본선에 진출했기에 그러한 감정도 많이 희석되어 지금은 한일전을 장식했던 추억의 축구선수들 중 한 명 정도로 기억되고 있다. 오히려 50을 훌쩍 넘은 나이에 아직도 현역으로 뛰냐며 놀라는 사람들이 더 많을 정도.
4. 최고령 기록 허울 논란
미우라는 일본 특유의 영웅 만들기와 기록에 대한 집착의 대표적인 사례로 젊은 선수들과 전혀 경쟁이 되지 않는 만 53세의 중년이 이벤트 형식 비슷하게 한 번씩 경기에 나서는 것 이상으로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물론 50이 넘은 나이에도 선수 생활을 이어갈만큼 미우라의 철저한 자기관리는 본받아야 하며, 고령의 나이에도 여전히 프로 팀에 속해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최고령 기록을 자세히 파보면 시즌 중에 풀타임을 소화한 경기는 전무하고 출장경기 수 늘리기 외에는 공격이나 수비에 대해서는 별 거 없다보니 전형적인 일본식 영웅 만들기와 기록 집착의 결과라는 비판 역시 존재한다.
물론 앞선 언급과 마찬가지로 이는 '''황혼기를 넘겨서까지 현역으로서의 집념을 불태우는 선수 미우라를 폄하하려는 게 아니라 일본의 별다른 의미 없는 기록 만들기'''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다. 당장 국내 사례를 찾아보면 만 41세의 나이로 은퇴한 이동국은 2009년부터 2018년까지 10년 동안 두 자리수 득점을 이어갔었으며, 김병지는 만 44세까지 K리그에서 현역으로 활발하게 뛰며 706경기 출장이라는 기록을 썼다. 그는 은퇴하기 전 시즌까지도 K리그1의 주전 골키퍼로 뛰었으며 은퇴의 직접적 원인도 셋째 아들의 학교 폭력 가해 무고였다. 만 53세의 나이에도 현역으로 뛰는 미우라가 대단해 보이면서도 너무 과하게 기록에 집착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을 가질만할 일이다. 심지어 그의 부친인 나야 노부오조차 이제는 그만 하는 것이 어떠냐고 말할 정도다.‘52세 현역’ 미우라, 시즌 초부터 ‘은퇴 권고’ 받았다만 52세 현역 선수? 허울 뿐인 일본의 미우라 ‘기록 만들기’
사실, 이전부터 헛소리였다. 미우라의 이런 기록은 기네스북 인정은 커녕,멀기만 한데 바로 이라크 출신 유태인으로 이스라엘 축구선수인 이샥 하이크가 2019년 3월 5일에 '''만 73살 나이'''로 리가 베트 사우스A(이스라엘 4부리그) 이로니 오르예후다 소속으로 4부 리그 경기에서 골키퍼로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기에서 5실점을 당하면서 1-5 참패를 당해야 했지만 90분 풀타임을 뛰었다. 그리고 이는 당시 기네스북에서 세계 최고령 프로 축구선수로 인정했다.
그나마 52살 최고령 프로선수 골이라도 자랑할만했지만 이조차도 2020년 이집트 3부리그 `식스스 오브 옥토버`(6th of October) 소속으로 3월 10일 3부리그 경기에 나와 무려 '''만 75살인 축구선수인 에즈 엘딘 바흐데르가 공식전에서 득점을 기록'''하면서 .미우라의 최고령 골 기록도 깨지고, 최고령 축구선수 출전기록도 새로 갱신했다. 그가 넣은 골로 경기도 1-1로 비겼다.
게다가, 미우라 측이니 일본에서 내세우는 아시아 최고령도 전혀 개무시당하는데, 위에 나오듯이 나이 50이 넘자 출전시간도 시즌에 모두 합쳐 90분조차 못 채우고 있긴 때문이다. 현존 최고령 선수이던 바흐데르나 이전 최고령 선수인 하이크는 90분 경기를 다 채워서 기네스북 인정 조건을 채워 인정받았다. 이러지 않으면 나이 90 넘는 선수를 계약해서 한 5분만 뛰고 세계 최고령 선수가 출전해 공식 경기를 가졌다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우라는 나이 50넘으면서 이 조건조차 못 채우고 있는 상황이다.
더 예로 들자면 2014년 한국 3부리그 고양 시민축구단에서 당시 52세로 당시 미우라보다 5살 많은 골키퍼 최인영이 경기에 나와 20분 정도 뛰었던 적도 있고 아시아건 해외건, 하위리그에서 이런 일은 여럿 나온다. 선수가 부상이나 여러 일로 빠져서 코치진인 4,50대가 몇십분이라도 경기를 뛰는 경우처럼. 이처럼 이 나이로 최고령이라고 할 경기는 여럿 있었다. 그럼에도 당시 한국 언론도 축구계도 이걸 아시아 최고령이니 뭐니 일본처럼 쇼를 하지도 않았다!
4.1. 숨겨진 뒷사정
그러나 미우라의 도전정신을 넘어 요코하마 FC가 온갖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미우라와 계약연장을 하는 데에는 사실 복잡한 뒷사정이 있다. 요코하마 FC는 말 그대로 역사의 정통성과 근본이라는거 말고는 아무것도 가진게 없는 구단이다. 본디 요코하마에는 우리가 흔히 아는 요코하마 F. 마리노스의 전신이었던 요코하마 마리노스와 요코하마 플뤼겔스 두 팀이 있었다. 헌데 플뤼겔스의 모기업이었던 ana와 사토 공업이 경영난에 빠지면서 플뤼겔스도 자연스레 해체 수순을 밟는 듯 했으나, 해체는 하지 않고 마리노스로 합병으로 사라지게 된다. 요코하마 F.마리노스의 F가 바로 플뤼겔스의 F이다.
물론 플뤼겔스의 팬들이 이를 용납할리가 없었고, 그러한 팬들이 모여서 새로이 만든 시민구단이 바로 요코하마 FC 인 것. 하지만 시민구단이 그렇듯 재정도 입에 풀칠할 수준밖에 안되고 스폰서 모집도 힘들며 관중수도 J리그서 최하위권이다. 인터넷서 요코하마 FC를 검색하면 80% 이상 '''요코하마 F. 마리노스''' 관련 글이 뜬다. 그나마 요코하마한테 있는 것이 플뤼겔스를 이었다는 역사의 정통성과 2005년부터 뛰면서 승격도 경험시켜준 미우라 카즈요시 정도 밖에 없다.
이러한 현실적이고 잔혹한 이유 때문에 요코하마 FC는 미우라 카즈요시라는 선수의 존재감과 이름값만으로도 스폰서의 자금을 끌어모으는 것이고, 또한 미우라가 출전하는 것 만으로도 언론에서 엄청난 홍보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미우라 역시 경기 말고도 광고 촬영, 언론 인터뷰, 방송 출연, 구단 행사나 강연에 참여하며 요코하마 FC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있다. 미우라가 있는거 자체로도 구단은 홍보효과와 재정에 엄청난 도움이 되며 후배선수들의 자리를 빼앗는다는 비난이 아니라 오히려 미우라가 후배선수들의 일자리를 유지시켜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9] 결국 요코하마 FC - 미우라 서로가 서로에게 얻는 것이 너무 많으니 주위의 비난은 무시하면서 게속 현역 연장을 하는 것. 사실상 로스터를 차지하는 앰버서더 정도라고 이해하면 된다.
실력으로 증명하는 '''프로 축구계의 선수'''로서는 비판을 받아도 전혀 할말이 없을만큼 철저한 경제적인 목적 때문이지만, 결국 냉정한 현실은 '''돈이 없으면 프로 정신이고 뭐고 구단이 파탄날수도 있다는 거다.''' 구단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것.
또한 미우라 개인에게도 카즈요시가 이제와서 자신을 계속 받아들여주는 요코하마 FC를 떠나 타 팀으로 이적할 리도 없고, 현실적으로 미우라의 이적을 받아줄 팀도 찾기 힘든 것이 있다. 일본 축구에서 가지는 위상이 워낙 막강하다보니 타 팀에서 엠버서더로 모셔갈 가능성이야 있겠지만, 주전 자원들로도 인기를 유지하는 다른 팀들이 굳이 로스터를 잡아먹으면서까지 미우라를 기용해줄 이유도 없다.
종합해보면 미우라 본인과 구단의 속사정이 맞아떨어지는 상황이다. 그래서인지 2021년에도 재계약을 발표하고 현역 연장을 더 한다. 3년간 득점을 못해봤으니 자신이 많이 부족했다며 21년은 1골을 목표로 삼았다.
5. 여담
- 유니폼의 이름은 클럽, 국대를 막론하고 KAZU라고 표시한다. 자신의 이름을 딴 골 세리모니 카즈댄스도 있는데 이건 브라질의 삼바댄스를 따라한 듯 하다.
- 브라질에서 10년 가까이 지낸 덕에 브라질의 공용어인 포르투갈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브라질 영주권도 가지고 있는데, 영주권이 박탈되는 것을 막기 위해 2년에 한 번씩 브라질을 방문한다고 한다. 이 방법은 x년 이상 국내에 없으면 영주권 박탈로 규정된 국가에서만 유효하다. 왜냐하면 입국하는 순간 유효기간이 늘어나기 때문.
- 90년대 중반 SBS에서 방영하였던 애니메이션 태풍의 그라운드(원제: 골 필드 헌터)는 그를 모델로 한 작품인데 팀은 시미즈 S펄스 소속으로 나온다. 저작권 개념이 엄격했던 일본이지만 J리그 출범 초창기라 홍보 차원에서 특별히 실제 팀 이름을 쓰는 것을 허가했다고 한다. 그 밖에 주요 인물들도 J리그 선수들을 모델로 만들었었다. 또한 미우라 카즈요시-야스토시(형) 형제가 아예 실명으로 등장하는 KAZU & YASU 영웅탄생(カズ アンド ヤス ヒーロー誕生)이라는 극장 애니메이션 (1995년) 도 있었다. 어머니인 미우라 요시코 여사가 원작을 맡았다.
- 90년대 한일전이 한창 흥하던 시절 그와 대결 구도를 이루던 선수가 최영일(現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최영일이 만사 제쳐두고 미우라를 마크하는 장면은 당시 한일전의 재미 중 하나였다. 미우라는 마치 그림자와 같았다고 회고했다. 훗날 최영일은 꾸준히 자기관리를 하며 현역으로 뛰는 미우라에게 찬사를 보냈고, 미우라 역시 악착같이 자신을 마크하는 최영일이 자신에게는 기량 향상을 위해 노력하게 해주는 자극제 같은 존재였다며 코멘트하기도 했다.
- 1998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에서 아랍에미리트와 무승부를 거두자 그 중에 한 서포터가 의자를 던지는데 그것이 그의 아내와 아이 부근에 떨어지자 참다못해 폭발한 그는 의자를 던진 서포터를 향해서 '쳐나와 새끼야'를 외쳤다
- 그가 교토 퍼플 상가에 있을 때 박지성이 입단, 짧은 시간이지만 같은 팀 동료로 뛴 적도 있었다. 박지성이 자서전 등에서 술회하길 처음엔 한국에서도 유명한 일본인 스트라이커고, 일본 내에서 축구 영웅으로 불리는 존재이기에 다가가기 쉽지 않을 거라는 편견이 있었는데[11] 친절하고 프로다운 태도 때문에 그런 편견은 금방 씻을 수 있었고, 덩달아 존경하는 선수 중 한 명으로 꼽기도 했다. 박지성이 교토를 떠나 유럽으로 진출한 후에도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고 하며, 미우라는 2011년 6월에 벌어진 박지성 자선 축구 경기에 참가하기도 했다.
반대로 미우라 본인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고 하는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입단 후 거물급 선수가 된 박지성이 휴식차 한국에 들렀다는 소식을 들은 미우라가 전화해서 만나러 가도 되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는데 오히려 박지성이 반가워하며 그 다음날 선물을 싸들고 직접 일본으로 건너온 것을 보고 매우 감동했다고 한다. 이전까지 미운 일본 대표팀의 대표격이었던 미우라가 인식이 확 바뀐 데는 박지성의 영향이 크다.
- 명탐정 코난 극장판인 11번째 스트라이커에서는 미우라를 포함한 J리그의 몇몇 선수들이 캐릭터로 나오는데, 실제 선수들과 함께 자신들의 캐릭터의 성우를 맡았다.[스포일러] 참고로 두 아들이 모두 명탐정 코난의 팬이라고 밝히며 그것이 자신이 극장판 게스트 성우로 출연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밝혔다. 한편 국내판에서 미우라의 목소리는 김승준이 맡았다. 물론 실존인물의 이름 그대로 나오지는 않고 '안홍익'이라는 가공의 축구선수로 로컬라이징되어 나왔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1967년생 동갑이다. 또 이후에는 루팡 3세 VS 명탐정 코난 THE MOVIE에서 '킹'이라는 킬러 역할을 맡아 특별 출연하기도 했다.
- 친형인 미우라 야스토시는 2018년까지 가고시마 유나이티드 FC의 감독을 맡았다. 다만 지천명의 나이에도 여전히 현역으로 뛰는 동생에게 가려져서 그렇지 그도 불혹을 앞둔 나이까지 오랫동안 현역을 유지했던 자기관리가 뛰어난 선수였다. 한때 야스토시가 감독을 맡고 있던 도쿄 베르디로 동생 카즈요시의 이적설이 나돌 때, 형제가 한 팀에서 각각 감독-선수로 뛰는 전무후무한 모습을 볼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 가족 또한 축구 집안으로 생부인 나야 노부오와 삼촌 나야 요시오가 모두 유소년 축구 지도자였다. 외삼촌 미우라 데쓰지 또한 시즈오카에서 대학 축구팀 감독을 역임한 축구인이다. 부인은 TV 탤런트 출신인 시타라 리사코로, 1997년 도쿄 대첩 때 MBC 중계진이 장인과 장모가 맞바람을 피운다는 만담[12] 을 벌이던 시기에 첫 아들을 보았다.
- 2015년 4월 중순 일본프로야구의 레전드인 장훈이 자신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에서 미우라를 저격했는데, J2리그는 야구로 말하면 2군이니까 화제성이 없다며 나이 먹었으면 은퇴하고 지도자나 하라는 발언으로 논란이 되었다. 이는 장훈이 2부 리그의 개념을 곡해하여 나온 발언인데, 축구에서 2부 리그 클럽은 1부와 똑같은 정규 성인 클럽으로 그 자체가 1군과 리저브(2군), 유스팀을 갖추고 있어서 '야구로 말하면 2군'은 축구에서도 2군이지 2부가 아니다. 이 때문에 2부 리그는 승강제 하에서 주기적으로 1부에 맞먹는 화제를 끌게 마련이며, 심지어 일본에서는 우라와 레드 다이아몬즈가 2부로 강등당했을 때 1부 어느 팀보다도 많은 관중 동원을 이끈 적이 있었다.
장훈의 발언으로 인해 일본 축구계는 격분했다. 이 발언은 축구를 넘어, 일본 프로스포츠의 살아있는 전설 그 자체를 말도 안되는 논리로 비난한 것이며, 일본프로축구의 수준을 폄하한 것이기 때문. 나아가 일본 프로스포츠계 전체를 통틀어서도 "아무리 일본에서 존경받는 야구원로라지만 이건 너무한 것 아니냐" "당장 발언 취소하라'는 격한 반응이 일고 있다. 평소 J리그를 달가워하지 않는 국내 축구팬들도 장훈이 도대체 누군데 망언을 하냐(...) 라며 미우라를 옹호했다. 사실 국내 축구팬들은 예전부터 일본인 선수라고 해도 "나이가 많은데도 현역으로 뛰는 것이 멋지다!"라면서 미우라에게 호감을 갖고 존경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정작 미우라 본인은 장훈 같은 사람이 자신을 알아준다는 것 자체가 영광이다, 더 열심히 하란 소리로 알겠다.라며 센스있게 받아쳤다. 참고로 미우라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오랜 팬이라고 한다. 나중에 장훈은 이런 미우라의 반응을 보고 감탄했다고 하며, 부상 없이 건강히 뛰길 바란다는 덕담을 남겼다. 참고로 장훈은 커리어 연속 3할기록이 끊긴 이후의 이치로에게도 역시 전성기같은 모습이 더 이상 아니니 은퇴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말한 적이 있는데, 뛰어난 운동선수가 노쇠화한 모습을 보이기 전에 은퇴한다는 것이 애초부터 본인의 지론이기 때문에 저런 발언이 나왔다는 분석이 있다. 실제 일본 야구계에서는 구도 기미야스나 야마모토 마사와 같이 40줄을 한참 넘어 1군을 넘나드는 선수들이 흔히 나오는데, 반대급부로 몇년씩 2군에 머무르면서 본인은 본인대로, 구단은 구단대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버티는 노장들이 드물잖게 있다.
- 한국의 축구 만화 슈팅에서 일본 축구 대표팀의 신세대 에이스 스트라이커로 등장하는 '타케무라 마사요시'(武村正義)의 모티브로 추정된다. 슈팅이 연재되었던 시기를 생각해보면 그렇게 추정할 수 있다.
- 프로 축구의 최고령 득점자였었고 J리그의 최고령 출전자다. 참고로, 전 세계를 통틀어 프로 축구 리그에서 활약한 최고령 출전자는 73세에 출전한 이스라엘 4부리그의 이삭 하이크 선수다.# 다만 이 선수는 골키퍼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75세의 선수가 득점을 하면서 미우라의 기록은 날아갔다.
- 2011년에는 신문 연재 칼럼을 묶은 에세이집 '그만두지 않겠다'(やめないよ)를 출간한 바 있다. 그리고 그 뒤로 10년이 다 되도록 그만두지 않고 있다(...)
6. 둘러보기
[1] 풋살 클럽. 잠시 풋살선수로 뛸 때 소속됐었다.[2] 홍명보와 황선홍이 2002년 월드컵이 끝난 직후 국대에서 은퇴했었던 점을 본다면 미우라 카즈요시가 얼마나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3] 1994 FIFA 월드컵 미국에서 자책골을 넣은 것 때문에 살해당한 그 선수이다.[4] 이전 모기업이던 요미우리 신문이 손을 떼었다. 베르디 가와사키는 이 때 리그에서 가장 연봉을 많이 뿌리던 팀으로, 미우라의 연봉은 지금 J리그에 가져와도 일본인 중에서는 최고급에 해당하는 2억엔 이상이었다. 당시 세계 축구 전체를 다 뒤져도 최고 연봉이 일본 엔화로 3~4억엔 수준이었으며, 그것도 미우라가 실질적으로 챙기는 지급액은 6억엔에 가까웠다고 한다. 그러나 팀 전력은 이미 하위권으로 처져 흥행성도 없었으며, 그 결과로 베르디는 연간 30억엔에 가까운 적자를 안고 있었다. 결과 파이어세일 후 1999년의 팀 전체 연봉이 미우라 한명분보다 적었다고.[5] 국내 축구 컨텐츠 유튜브에서도 이 반응들을 소개했는데, 서형욱의 뽈리TV 영상에서 읽어준 댓글 중에서 "경기 뛰다가 심장마비 오면 누가 책임질꺼야?" 라는 댓글이 가장 압권이다. 후술한 특이한 사정이 있다 하더라도, 3시즌 간 0골에 다 이긴 경기나 지는 경기에 투입되는 노장 현역 선수를 누가 좋게 볼까? 그나마 정신적 지주라는 역할이 있다곤 하지만...[6] 여담으로 한국에서는 차라리 플레잉 코치를 하라는 의견도 간혹 나오지만, J리그는 선수의 지도자 겸업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선수로 엔트리 등록을 하지 않으면 경기장에 들어오지도 못한다. 애초에 현역 은퇴 생각이 없는 미우라가 지도자 자격증을 따지도 않았지만.[7] 이하라는 종료 직전 황선홍에게 PK를 내주었다.[8] 최영일은 위 언급된 1993년 월드컵 예선과 1994년 아시안 게임에서 모두 미우라를 마크한 바 있다. 이미 그 전에 친선경기까지 해서 세 번 맞붙어 세 골을 내준 상대인 만큼 제대로 파악하고 나온 것.[9] 우스갯소리지만 결코 우습다고 볼 수 없는 말이 있는데 "요코하마 FC에 재정난이 오면 그 시작은 미우라의 은퇴부터."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10] 영상 1:09를 보면 미우라를 수비하는 이기형이 거의 부동자세로 미우라의 페인팅을 지켜보는 것을 볼 수 있다.[11] 원래는 실제로 그랬다고 한다. 이탈리아와 크로아티아에서 고생을 한 뒤로 많이 둥글어진 것이라고.[스포일러] 그리고 작중에서 코난에게 자신의 손목 보호대를 선물로 주면서 자신이 예전에도 어떤 소년에게 자신의 손목 보호대를 선물로 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소년의 정체는...[12] 송재익 캐스터의 말로는 도쿄에 가서 중계를 준비하던 중에 스포츠 신문에서 기사를 봤다고 했다. 요컨대 그냥 본인이 지어낸 소리는 아니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