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성 위협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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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항하는 러시아 해군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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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산지항의 모습. 현재는 멸실되었다. 위 사진속의 포구지역이 러시아군에 의하여 일시적인 점령하에 들어갔었다.[1]
1. 개요
2. 배경
3. 사건당시 진행상황[2]
4. 여담

관련 기사


1. 개요


1885년 10월, 러시아 제국 함대가 조선령 제주도에 상륙해 섬의 일부분을 일시 점거 했으나 이내 1개월 만에 철수한 사건이다.

2. 배경


..조선 정부가 거문도 문제에 이렇듯 엄중하게 대처하였던 이유는 무엇일까. 외아문 독판 김윤식의 의견에 따르면, 거문도 문제는 단순히 현재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조선의 국권을 떨어뜨려서 미래에 다른 열강이 조선의 영토를 침해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유럽일대의 신문들 에서는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하면 러시아는 반드시 제주도를 점령할 것이라는 기사가 지속해서 보도되고 있었다.'''....

우리역사넷 - 거문도사건

이 내용을 통해서 러시아는 제주도 점령을 이미 거문도 사건 이전부터 고려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1885년 대영제국이 조선령 거문도를 점령하는 거문도 점령 사건이 일어나자 러시아 제국은 대영제국에 경고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대영제국거문도에서 영국해군을 철수하지 않으면서, 러시아 제국이 조선령 제주도를 비롯 제주도 인근의 섬들과 울릉도,진도, 추자도, 거금도, 장도 등의 남해안 지역의 섬들을 '''점령하려 한''' 사건이다. 또한 이미 러시아는 1885년 영국과의 갈등이 지속되면서 제주도 점령을 고려하고 있었고 이를 본격적으로 시도하였던 일이었기에 러시아 제국 입장에서는 어느정도 신속한 '''점령시도'''였다. 그러나 이후 보급문제와 영러관계가 좋아질 가능성이 보이지 않고 조선정부와의 관계또한 악화되어 가며 결국 제주도울릉도, 남해안 일대의 섬들의 점령을 포기하고 철수하였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얼지않는 항구인 부동항을 원했는데 이에 적합한 지역이 연해주, 만주, 조선, 일본, 중국이었다. 이에 러시아 제국은 자신들의 부동항 진출을 막던 대영제국을 어떻게든 거문도에서 철수시켜야 했고 이에따라 블라디보스토크에 정박중이던 러시아 제국의 함대들을 울릉도, 진도, 제주도, 차귀도에 보냈다.[3]
그리하여 1885년 10월 18일 오전 9시 39분 경 러시아 함대는 쓰시마 섬을 거쳐 제주도 월정리 인근 해안에 등장했다.당시 제주목사 심원택묄렌도르프가 제주도에 와서 러시아 함대에 대하여 통역, 해결해 주기를 바랬으나 당시 묄렌도르프는 제주도에 직접 올수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결국 제주목사가 직접 나서서 이 사건을 해결했다.
이 사건으로 러시아 제국대영제국그레이트 게임이 심해졌고 조선정부는 러시아 제국의 이러한 횡보에 아라사대사관에 항의하였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 정부의 공식 사과는 없었다. 다만 일본과의 관계를 보아서, 이후 러일전쟁이 일어나는 원인 중 하나로 보이고 있다. 실제로 러시아 제국은 이 사건 이후로 1904년에는 용암포를 점령하여 대한제국을 본격적으로 압박하기 시작하였으며, 이것을 계기로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3. 사건당시 진행상황[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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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제주도 점령을 일제히 보도한 당시 일본제국의 언론사의 기사
  • 1885.10.18
오전9시30분 경 제주 월정리 해안에 출몰. 이에따라 재주목과 정의현에서는 각 연대와 봉수대에서 봉화와 연기를 올렸다.
오전9시52분 경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주둔 제2함대에서 통역관 헨른 리스콥차이스키가 제주목 관아에 상륙을 원한다고 밝혔으나 제주목사정의현령은 이를 묵인하고 제주도 일대에서 식량을 어느정도 줄테니 돌아가라고 하였다. 하지만 러시아 함대에서는 상륙을 할수 없으니 함선의 정박을 요구하였다. 그러면서 포문을 제주도로 향하게 하였다.
오전10시5분 경 제주목에서는 제주도 동북부 환해장성에 군대를 배치하는 한편 각 진과 조선정부와 외세의 군사적 친입을 파발로 알렸다.
오전10시40분 경 각 진에서는 군대가 모여 환해장성에 배치되었다. 헨른 리스콥차이스키는 이에 대하여 반발하고 군대를 철수할것을 요구하였으나 묵인되었다. 대부분 지역에 환해장성을 수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오후1시8분 경 러시아 함대에서 제주도의 정박중이던 어선2척의 어부들과 대화를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오후6시20분 경 러시아 함대의 정박허가 가 승인되었다. 이에 러시아 함대 선박2척이 제주항에 정박하였다.
  • 1885.10.19
오전4시에 러시아 장교와 만남을 가졌다. 하지만 이른 시간대라 다시 각 진영으로 돌아갔다.
오전 8시에 러시아 장교와 관덕정에서 회담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목적과 경위를 알아보려고 노력하였다.
오전 8시46분 경에 러시아 함대의 군인들이 제주민가를 순찰하였다. 그러자 정의현에서 군대를 성 내로 들여보냈다.
오후 12시경 제주목사 심원택의 지위하에 장대였던 운주당, 공신루에서 군인들의 정비가 있었다.
오후 4시37분 경 러시아 장교와 2차적인 회담을 가졌다. 하지만 별다른 소득은 얻지 못하였다.
오후 5시50분 경 비가와서 바다의 파도가 높아지자 러시아 함대의 배1척이 좌초되었다. 이후 제주도민들과 러시아군이 수리를 하였다.
  • 1885.10.20
제주도에 정박중이던 판옥선 4척과 방패선1척이 애월항 인근에 정박하였다. 한편 러시아 함대는 조선정부의 반응이 없자 제주읍성을 향해서 대포를 설치하기도 하였으나 이후 철거하였다.
  • 1885.10.21
조선 조정으로부터 문제에 대한 답이오지 않자 제주도 내의 1군데의 목과 2군데의 현에 미리 대비를 하라고 알렸다. 그러나 당시 고종은 러시아 제국에 항의하는 문서를 내지 못하였다.
  • 1885.10.22
1886년10월22일 오전4시에 항구에 정박중이던 러시아 함대와 제주도 어민들과의 충돌이 있었으나 큰 사태로 번지지는 않았다.
  • 1885.10.23
1886년10월23일 오전9시56분 경 제주도의 환해장성의 성곽을 보수하였다.
오후 7시22분 경에 다시 봉화를 올리고 파발을 띄웠다. 하지만 조선정부로 부터의 답장이 오지않은 상황이었기에 전투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았다. 대정현에서 환해장성 보수를 하려고 하였으나 무산되었다.
오후 9시34분 경에 제주읍성의 장대 운주당과 관덕정에서 수자기를 올렸다.
  • 1885.10.24
1886년10월14일 오후1시30분에서 2시까지 러시아 함대의 군인들이 '민가 열다섯 호'를 악탈을 하였다. 이에 제주목에서 항의하였다. 그러자 제2함대 통역관 헨른 리스콥차이스키는 러시아 함대의 실수를 인정하며 어느정도 인정하는 입장을 보였다.
  • 1885.10.25
기록말소, 현재 전해지는 기록 없음.
  • 1885.10.26
기록말소, 현재 전해지는 기록 없음.
  • 1885.10.27
러시아 제국황실에서 조선정부에 답장을 보내왔다. 다만 현재 이 서류는 창덕궁에서 방화당시 소실되어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 1885. 10.28~11월 3일
러시아 제국제주도를 통해서 대영제국을 견제하려 시도하자 대영제국은 러시아 제국에 항의하며 러시아는 제주도와 조선에서 간섭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그러자 러시아 제국은 이를 강력히 부인하며 러시아 제국은 조선령 남해안 일대의 섬들과 제주도 그리고 그 부속도서를 점령할 의도가 없고, 대영제국이야 말로 거문도에서 군대를 철수하지 않았으니 오히려 러시아 제국 함대가 제주도를 점령해도 무방하다는 문서를 전달하였다.[5]

4. 여담


영국이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거문도 사건을 일으키자 러시아가 이에 대항하여 저지른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국사 교과서에도 영국의 거문도 사건은 서술되어 있으나, 러시아의 제주성 위협사건은 언급조차 되어 있지 않다.
[1] 위 사진속 상단 조금 아래부분에 길게 이어진 검은 담처럼 보이는것이 제주읍성으로, 사건당시 성벽이 러시아 함대의 사정거리에 들어왔을 정도로 제주목관아와 제주읍이 가까웠다.[2] 출처: '조선왕조실록으로 보는 제주도'(잡지),'1800년대 동아시아 정세 그리고 세계'(신문),'어느 러시아제국 외교관의 눈으로 바라본 동아시아' 회고록.(도서) 현재 이 도서는 러시아에서만 팔고있으며 번역을 해야한다. [3] 이중 울릉도, 제주도에서는 상륙까지 한다. 하지만 진도와 차귀도는 상륙하지 못했다. 이유를 듣자니 진도는 주민들의 항의와 저항이 거세서 상륙하지 못했고, 차귀도는 파도가 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4] 출처: '조선왕조실록으로 보는 제주도'(잡지),'1800년대 동아시아 정세 그리고 세계'(신문),'어느 러시아제국 외교관의 눈으로 바라본 동아시아' 회고록.(도서) 현재 이 도서는 러시아에서만 팔고있으며 번역을 해야한다. [5] 러시아와 영국의 그레이트 게임속 세계(1996년 지방잡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