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도
[image]
[image]
확대하면 이렇다.
1. 개요
남해상에 있는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소속의 섬.[1] 정확히는 서도, 동도, 고도의 3개 섬을 말하며, 더 정확하게 고도만을 거문도라고 한다. 그 중 면소재지인 고도(거문리)와 서도(서도리, 덕촌리)는 삼호교라 불리는 교량으로 연결되었으며, 서도와 동도(동도리)도 2015년 9월 준공된 거문대교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
한반도 본토에서 거문도로 연결되는 배편은 여수항, 나로도항, 녹동항에서 탑승할 수 있으며 2020년 2월 현재 날마다 2항로 3편 가량이 운행된다. 여수↔거문 항로는 사람만 태우는 초쾌속선으로 오션호프해운에서 매일 2회 운항한다(중간에 나로도를 경유한다). 녹동↔거문 항로는 우체국 택배 윙바디 화물차도 실어나를 수 있는 차도선(카페리)으로 평화해운에서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하루에 1회 운행한다(월요일 정기휴항).
하지만 남해의 먼 바다에 위치한 섬 특성 상 '''결항크리'''가 상당히 잦기 때문에[2] 자세한 내용은 해양교통안전공단 여수지사에서 운영하는 회원제 네이버 밴드 채팅방에 미리 가입해놓고 매일 꼭두새벽마다 업데이트되는 그 날의 운항 여부 정보를 참고하는 것이 좋다.
여수↔거문 항로는 나로도·손죽도·초도 등등 이곳저곳에 잠시 섰다가 가는 편이지만, 그래도 쾌속선인지라 평균 2시간 20분 정도밖에 소요되지 않고,[3] 녹동↔거문 항로는 더 오래 걸려서 그날의 중간기항지 개수에 따라 3시간 또는 4시간 15분(...)이 소요된다. [4] 1박 2일의 촬영지(아래에 등장하는 거문도 등대)로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국사 시간에 졸지 않았다면, 조선 후기 격변기를 배우면서 한번 정도는 이름을 들어봤을 섬이다.
특산물로 해풍쑥과 삼치, 그리고 은갈치가 있으며, 연례행사로 특산물로 축제를 연다. 불꽃놀이도 하지만 섬 특성상 안개가 자주 껴서 잘 보이지는 않는다.
2. 역사
19세기 말, 러시아 제국의 남하에 위기감을 느낀 빅토리아 시대의 대영제국 해군이 이 섬을 2년(1885년 4월 15일~1887년 2월 27일)간 불법으로 점거한 거문도 점령 사건의 무대. 이 사건으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도 한반도의 부속도서로서 제주도, 울릉도와 함께 거론되었다. 하지만 독도가 빠져서 두고두고 문제가 되었다. 당시 영국인들이 거문도를 불렀던 이름은 '''포트 해밀턴(Port Hamilton)'''. 이 이름에서 따와서인지 오래 전에는 섬 사람들이 이 섬을 스스로를 '보도 해밀도'라고 부르던 적도 있다. 삐끗했으면 홍콩처럼 조차지 팔자가 될 뻔했지만, 홍콩과는 달리 정주여건이 열악한 편이라 가능성이 높지 않았을 것이다.
영국이 점거할 만큼 해상의 요충지이다 보니 등대도 비교적 빨리 1905년에 설치된 섬. 영국이 철수한 뒤로는 이를 눈여겨 본 일본이 어업 기지로 활용했다. 그러나 면적이 작아서 해군 요지로 활용되진 않았다. 위치상으로만 의미가 있었다는 이야기이고, 영국 해군도 중간 기항지 및 해안포 기지로만 활용했다.
'''현지 여자(무당)를 짝사랑하다 죽은 영국 수병'''이 있어서 젊은 여자가 빠져 죽으면 영국인 귀신이 잡아간 것이라는 괴담도 전해진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야사이고 증명은 불가능. 이와 관련해서 드라마도 제작하려 했지만, 무산되었다.
영국 해군에 남아 있는 기록에는, 당시 한 일본인이 여성 5명을 데려와 거문도 서도에서 유곽(성매매 업소)을 운영했다고 한다. 1886년 6월 18일 저녁, 2척의 보트에 영국 병사 12명이 나눠 타고 이 유곽에 놀러 가다 배가 전복되는 사고가 났다. 고도와 서도 사이는 약 500m 거리다. 11명은 구사일생으로 헤엄쳐 나왔지만, 해병대원 피터 와드(Peter Ward) 일병은 익사했다고 한다. 수영이 미숙했던 데다 주머니에 유흥비로 쓸 은화를 잔뜩 갖고 있었기 때문인 듯 하다고 영국 해군 기록에 적혀 있다. 영국군은 시신을 찾아준 조선인에게 사례하고, 다음날로 유곽을 폐쇄했다. 와드 일병은 영국군 묘지에 묻혀 다른 6명과 함께 묘비에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런 실제로 있었던 사고를 바탕으로 현지 주민들에게 미화된듯하다. 물론 군인 대부분은 젊은 청년이기 때문에, 과거나 지금이나 주둔지 주변의 여자와 썸이 있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거문도 주둔 영국군 규모는 200명 내지 300명에서, 최대 700~800명까지 주둔했다고 한다. 거문도 주둔 군함도 5내지 6척에서 최대 10척까지 주둔하였다고 한다.
점령 도중 사고와 질병으로 인해 9명의 수병이 사망했다. 이 중 6명의 시신은 본국으로 운구되었고 3명은 거문도에 매장되었는데, 이들의 묘지가 지금도 거문도에 남아 있다. 이는 영국인들은 사람이 태어난 곳 뿐만이 아니라 죽은 곳 또한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죽은 이의 육신을 굳이 고향에 매장하려기보단 죽은 곳에 매장하려는 문화가 있기 때문이다.[5]
영국군 시신이 이 섬에 계속 남았지만, 주둔 당시 영국 해군이 민폐도 끼치지 않고 호감을 쌓았기 때문에 섬사람들이 무덤 관리를 비교적 잘 해줬다. 이는 영국군이 점령할 당시 주민들을 동원할 때 임금을 주고 땅을 사용할 때에도 사용료를 지급하는 등 신사적인 방식으로 처리한 탓도 크다. 결국 주한영국대사관은 2005년부터 거문도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기 시작하여 2015년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관련기사 20세기 들어서 죽은 수병의 후손인지 친척인지가 찾아와서 이장하나 했는데, 꽃 한 송이 달랑 놓고 가서 섬사람들이 그 야박함을 탓하기도 했다고. 현재는 2기만 남아 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방한 당시 여기까지 가서 참배를 하려 하였으나 한반도 본토에서도 너무 먼 위치와 바쁜 일정상의 이유로 무산되기도 했다.[6]
비문에는 “1886년 3월 알바트로스(Albatross) 함의 수병 2명이 우연한 폭발 사고로 죽다. 윌리엄 J. 머레이(William J. Murray)와 17세 소년 찰스 데일(Charles Dale)"로 새겨져 있다. 십자가에는 "1903년 10월 3일 알비온 함 승무원 알렉스 우드(Alex Wood) 잠들다"라고 새겨져 있다.
그리고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크림전쟁당시인 1853년에 푸차틴 제독이 이끄는 러시아 제국 해군이 주민들과 다과회를 가졌다.[7][8] 남긴 19세기 영국 해군의 최대 잠재적국이자 국제정세상 라이벌이 러시아였던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다만, 당시 거문도 주민들은 러시아 해군을 싫어했다. 주민들과 친하게 지낸 영국군과 달리 러시아 해군은 행패를 자주 부렸다. 그 외에 프랑스의 경우 측량을 빌미로 지붕 위를 마구 뛰어다녀서 마찬가지로 인상이 안 좋았다.
3. 관광
[image]
상당히 가는 데 오래 걸리고 인프라도 부실하지만, 한번 가면 확실히 기억 속에 남을 만한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섬이 그리 크지 않기 때문에 자전거를 빌려서 섬을 일주할 수도 있다. 이 때 가게에서 쑥을 넣은 얼음물을 팔기도 하는데, 생각보다 맛이 좋으니 두어개 정도 사 가자.
섬 양 끝에는 공원으로 조성된 등대들이 있어 관광객들에게 쏠쏠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 밖에도 고도에서 고속정을 타고 1시간 정도를 달려가 백도를 보고 올 수도 있다. 문서 첫머리에도 써 있듯이 거문도와 육지를 잇는 배는 결항이 잦기 때문에 '''반드시 숙박처를 물색해서 예약을 미리 해 놓고 섬에 입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2019년 12월 기준으로만 해도 1인 숙박객의 1박 체크인을 매우 친절하게 받아주는 업소가 분명 있었으니 1인 여행자라고 푸대접 받을까봐 너무 겁먹지 말고 일단 숙박업소에 전화부터 돌려 보자. 숙박 문제 해결은 비연륙 도서지역 여행의 기본 중의 기본이며 이는 여수시청에서 발행한 관광지도에도 써있는 바이다!
주요 관광 포인트를 꼽자면 아래의 셋을 예로 들 수 있겠다.
3.1. 거문도 등대
[image]
서도 남쪽의 수월산에 있는 대한민국에서 오래된 등대중 하나로, 1905년에 세워졌다. 지금은 그 옛 등대가 노후화되어 옆에 새로운 등대를 세웠다. 새로운 등대는 등대 겸 전망대로 개방되어 위에 올라가서 드넓은 바다를 볼 수 있는데, 날씨가 좋은 날에는 백도도 작게나마 볼 수 있다. 등대 옆에는 정자가 하나 있으며, 뒤편에는 해양수산부의 관리청사가 있다.
[image]
가는 길이 약간 특이한데, 도중에 포장된 길이 아닌 자연 암반에 데크만 살짝 걸쳐놓은 곳이 있다. '목넘어'라고 불리며 이 때문에 날씨가 좋지 않은 날이면 거문도 등대에 접근하기가 쉽지가 않다. 특히 바람이 심하게 불면 파도가 높이 친다.
[image]
'''이렇게.'''
1박 2일에서 저 길을 따라 '''총합 8.3t 어치의 방송장비'''를 날라서 화제가 된 바 있다.
3.2. 녹산 등대
[image]
서도 북쪽의 녹산에 있는 무인 등대. 거대한 거문도 등대와는 달리 크기가 상당히 작고, 주변에 고사목들이 있어 직접 보면 상당히 분위기가 특이하다.
[image]
아래편에 있는 신지끼[9] 동상과 함께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3.3. 백도
[image]
[image]
백도 - 상백도.
[image]
[image]
[image]
백도 - 하백도.
거문도에서 동쪽으로 대략 28km 정도 떨어진 무인 군도. 총 39여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으며, 크게 상백도와 하백도로 나뉜다. 그 중 상백도에는 1938년에 일제가 세운 무인 등대가 있다. 거문도에서 고속정을 타고 가서 보고 올 수 있으며, 옛날만 하더라도 상백도에 상륙해 무인 등대가 있는 곳까지 올라갔다 올 수 있었으나, 문화재(명승)로 지정되어 있으며, 환경 문제 등 복합적인 이유로 현재는 주변을 둘러보고 오는 것만 허용된다.
이름인 백도(白島)의 유래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 섬이 하얘서(白) 백도이다
- 섬이 99개라서 백(百)에서 일(一)을 빼 백(白)도이다
보고 오면 상당히 기억에 남는 곳이지만, 가는 길에 날씨가 좀 안 좋다 싶으면 파도가 격하게 쳐서 난데없이 해상 롤러코스터를 타게 될 수도 있으니 혹시라도 위키러 중 백도를 보러 가는 사람이 있다면 이 점은 유의하길 바란다.
4. 여담
- 1981년부터 인근의 무인도인 백도와 함께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 대한민국의 지리적 표시제를 적용받는 농산물로는 거문도 쑥이 있다.
- 1박 2일에서 2009년 10월 경 거문도 등대를 방문했었는데, 산을 넘어가야 하는 길의 특성상 차가 들어가지 못해 제작진들과 멤버들은 총 8.3t에 이르는 촬영 장비를 직접 들고 가면서 거문도 등대까지 1km 가량을 이동해야 했다. 특히 이수근은 등대 고도 복불복과 기상미션에서 모두 패하면서 스태프들과 두 번 모두 촬영 장비를 메고 이동해야 했다.
- 기상특보가 2015년 12월 28일부터 여수시 내륙 지역과는 별도로 운영이 된다. #
- 영국군 주둔 시절, 이들이 한번씩 주기적으로 일도 안 하고 노는 걸 보고 주민들이 왜 노냐고 물어봤더니 "일요일이라서(Sunday)"라고 대답했고, 이에 거문도 주민들도 노래하고 노는 문화를 '산다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10] 수병들이 자주 쓸 법한 코크니 억양으로는 실제로 '산다이'처럼 들린다. 단, 순우리말이라는 일부 주장도 있다.
- 통일교가 거문도에도 호텔을 세웠다고 한다. 해양천정궁이라 불린다.
- 2019년 3월 10일, 다큐멘터리 3일 570회에서 거문도를 다뤘다.주 소재는 쑥과 미역이었다.
- 천연기념물 215호 흑비둘기가 있다.
- 면적이 다소 적지만, 그래도 한 면의 소재지에 있는 만큼, 소규모이지만 중학교 1곳과 초등학교 1곳, 초등학교 분교 1곳이 있다.[11]
[1] 행정구역으로 여수시 소속이지만 정작 여수시청보다는 고흥군청이 더 가까우며 심지어 여수시청보다 제주시청(!)이 더 가깝다.[2] 특히 여수↔거문. 세월호 참사의 나비효과로 "그 해운사"가 운항하던 거문도 뱃길이 끊기면서 결항사태가 더 심해졌다. 전국 섬 주민협의회에 따르면 2018년 한 해에만 날씨로 인한 여객선 결항일이 마라도 93일, 울릉도 91일, 거문도 89일, 연평도 70일, 백령도 68일에 달한다고 한다!(출처 투데이신문)[3] 다만 여수←거문 항로 금요일 4항차, 즉 매주 금요일 거문도에서 여수로 나오는 오후 배의 경우 중간기항지를 다 제끼고 나로도 한 군데만 경유하기 때문에 소요시간이 1시간 40분까지 줄기도 한다.[4] 여수로 가는 배는 초쾌속선이고 녹동으로 가는 배는 차도선이기 때문에 배의 체급이 달라서 어쩔 수가 없다... 대신 녹동↔거문 항로는 배가 커서 결항이 상대적으로 덜한 편.[5] 다른 사례로 6.25 전쟁에서 참전한 유엔군 중 미군 전사자는 거의 고향으로 운구되어 한국에 거의 남아있지 않은 반면 영국과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영연방권 전사자는 거의 부산광역시의 UN기념공원에 묻혀 있다.[6] 일정상의 이유가 표면적이지만 아무리 영국군이 거문도 주민들에게 잘 해줬고, 주민들도 우호적이었다지만 불법 점거였다는 건 사실인지라 이에 대한 문제로 복잡해지니 어쩔 수 없이 방문을 생략했다고 보는 시선도 있다.[7] 출처: 굽시니스트-본격 한중일 세계사 만화, 세계 속 한국 근대사.[8] 이때 러시아의 대문호 이반 곤차로프가 푸차틴 제독의 비서 자격으로 동행하었고 거문도를 비롯 동해안을 관찰하였고 이외의 해역과 여러나라를 관찰한 일지와 편지를 엮어 전함 팔라다라는 수기를 남겼다.[9] 대한민국 설화 속의 인어로, 자세한 사항은 해당 항목으로.[10] 그 이전 조선시대에는 딱히 요일과 같은 개념은 없었고, 대신 달과 절기 중심으로 달력이 구성되었다. 민간에서는 딱히 휴일로 지정된 것이 없었지만 공무원들의 경우 대개 매월 1일, 8일, 15일, 23일과 절기 때 쉬었다고 한다. 다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고 각 부서마다 비번과 휴일이 정해져 있었다고 한다.[11] 원래는 초등학교 분교 2곳이 더 있지만, 아시다시피 학생수가 적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