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도 점령 사건

 

1. 개요
2. 배경
2.2. 고종의 인아거청
2.3. 영국의 거문도 점령
3. 영향
4. 후일담
5. 거문도의 사정

뜻밖의 일에 대응 방비하기 위하여 본국의 수사관(水師官)에게 대조선국 남쪽의 작은 섬인 영어로 해밀턴(port Hamilton)[1]

이라고 하는 섬을 얼마동안 차지하고 대조선국 정부에 비밀리에 이러한 내용을 통지하라.


1. 개요


1885년, 러시아 제국의 남하정책을 막기위해 영국조선거문도를 불법 점거한 사건.

2. 배경



2.1. 영국러시아 제국의 '그레이트 게임'


프랑스 제2제국미국이 각각 병인양요신미양요로 조선의 문을 두드렸던 것과 달리, 인도 제국 경영과 청나라에서의 상업적 이익에 더 관심이 많았던 영국조선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렇지만 1876년 조선이 개항하고 1882년 미국과 조선이 수교하자 뒤를 이어 서양열강 중 두 번째인 영국이 1883년에 수교하여 어느 정도 관심은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거문도 점령은 영국이 느닷없이 약소국 조선을 침탈했다는 것이 아니라, 19세기의 강대국 러시아 제국과 '거대한 게임'을 벌이면서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려는 목적에서 일어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영국이 보기에 거문도 점령은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나 크림 전쟁, 영일동맹과 본질적으로는 전혀 다르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당사자의 동의 없이 행했다는 점에서 도의적으로 올바른 일은 결코 아니지만.
1853년 이래 1907년까지 무려 50년 동안 영국은 러시아 제국의 남하에 맞서 냉전에 버금가는, 전 지구적 규모의 대치 상태를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발칸 반도로의 남하가 좌절된 러시아 제국(1878)은 중앙아시아동아시아에서의 남하에 관심을 가졌고, 이는 영국으로서는 묵과하긴 어려운 일이었다.
2차례의 아프가니스탄 전쟁러시아 제국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한 방파제를 확보하려는 영국의 목적으로 수행되었다.

2.2. 고종의 인아거청


1884년 7월 7일에 러시아 제국과 조선이 직접 수교를 하고(조러 수호 조약), 동년 12월 4일 갑신정변을 청군이 진압하였다. 이에 청의 내정 간섭이 증가하자 조선 조정이 러시아와 힘을 합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소문의 진상은 알 수 없으나 어느 정도의 근거는 있었다. 당시 고종은 인아거청(), 즉 러시아를 끌어들여 청의 영향력을 줄이려 하였다.[2]
고종은 김용원(金鏞元)·권동수(權東壽) 등을 비밀리에 블라디보스토크에 파견해 러시아 관리와 약정을 맺었다. 그 내용은 김옥균(金玉均)이 러시아 영토에 가면 압송해줄 것, 일본의 보상금 요구를 파기시켜줄 것, 조속히 조약을 비준하고 육로 통상을 체결할 것, 러시아 군함이 한국 연해를 보호해줄 것 등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러시아 정부는 보호 약속보다는 통상 조약 추인과 육로 통상, 안전에 관한 토론 용의 등에 대해서만 회답했다.
한편 해가 바뀌어 1885년, 갑신정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에 파견된 서상우(徐相雨)·묄렌도르프는 비밀리에 주일 러시아 공사 다비도프와 만나 러시아 훈련 교관의 초빙과 영흥만 조차에 관해 협의했다. 묄렌도르프는 귀국하여 비밀 교섭의 경위를 고종에게 보고하여 윤허받았고 이에 정부간 정식 협약을 체결하기 위해 주일 러시아 공사관의 스페이에르가 입국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외아문독판 김윤식(金允植)은 청의 총판상무(總辦常務) 진수당(陳樹棠)과 일본 대리 공사 곤도 신스케(近藤眞鋤)에게 밀약 사실을 알리는 한편, 스페이에르에게 현재 미국 교관의 초빙 교섭을 진행하고 있기에 러시아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음을 통고했다. 1885년 7월 묄렌도르프는 이런 행보가 들통나자 청의 압력에 의해 물러나게 되었다.
이렇게 조선과 러시아의 연대 가능성이 높아지자, 이를 확인한 영국은 좌시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런 러시아의 행보는 영국에게 조선을 통해 극동 - 태평양으로 진출하려는 행보로 여겨졌다.[3] 깜짝 놀란 영국이 러시아 해군의 동태를 감시하고 유사시 러시아 함대의 남하를 막기 위한 일종의 중간 보급 기지 및 해안포 진지로서, 자기들이 명명하기로는 포트 해밀턴(Port Hamilton, 해밀턴 항), 바로 거문도를 골라 점령했다. 이 때가 1885년 음력 3월, 양력으로는 4월 27일, 조러 수호 조약 체결로부터 1년이 안 되는 시점이었다.

2.3. 영국의 거문도 점령


비록 점령군인 영국 해군이 매우 관대하고 신사적으로 행동했지만, 어쨌든 조선 영토에 대한 명백한 불법 점령이었던건 사실이다.
조선은 관련 당사국 -러시아, 청, 일본, 조선- 중에서 가장 뒤늦게 사태를 파악했다. 이는 전신선이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청에서 정보가 건너오느라 직통으로도 6일 차이가 있었다. 양력 4월 28일 조선으로 전문이 갔지만, 조선이 전문을 받아본 때는 주 조선 영국 대사관의 '''직원''' 스콧이 전달한 양력 5월 16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기준으로는 당연한 일이었다. 참고로 파쇼다 사건 당시 프랑스군은 직접 본국의 의사를 물어볼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무려 그들과 대치 중인 영국군에게 부탁해서 개전 여부를 영국이 이집트에 가설한 해저 전신망으로 런던에 연락한 뒤 런던에서 파리에 해당 메시지를 전달하고 회신을 받아서 다시 프랑스군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본국의 명령을 받았다. 물론 프랑스 본국으로서는 횡단 정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4]
조선은 뒤늦게 항의를 했지만 영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실 '거문도'라는 엄연한 명칭을 두고(혹은 의식조차 하지 않고) 그들 스스로가 붙인 해밀턴(Hamilton), 즉 합미돈(哈米𥫱)이라는 명칭을 들이밀었으니 조선으로서는 상황 판단이 더 늦어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제일 먼저 소식을 접한 것은 청나라였다. 영국은 청나라의 도움을 받으려고 청의 조선 종주권을 지지한다는 유화적 제스쳐에 나섰으나, 청의 이홍장 역시 조선에게 '한번 조차시켜 주면 끝이 없다.'며 영국의 조차를 막으려 나섰다.

귀국의 제주도 동북쪽으로 100여 리 떨어진 곳에 거마도(巨磨島)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거문도입니다. 바다 가운데 외로이 솟아 있으며 서양 이름으로는 해밀톤(哈米敦)섬이라고 부릅니다.[5]

요즘 영국러시아아프가니스탄(阿富汗) 경계 문제를 가지고 분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러시아가 군함을 블라디보스토크(海蔘葳)에 집결시키므로 영국인들은 그들이 남하하여 홍콩을 침략할까 봐 거마도에 군사와 군함을 주둔시키고 그들이 오는 길을 막고 있습니다. 이 섬은 조선의 영토에 속한 것으로서 영국 사신이 귀국과 토의하여 수군(水軍)을 주둔시킬 장소로 빌린 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잠시 빌려서 군함을 정박하였다가 예정된 날짜에 나간다면 혹시 참작해서 융통해줄 수도 있겠지만 만일 오랫동안 빌리고 돌아가지 않으면서 사거나 조차지(租借地)로 만들려고 한다면 단연코 경솔히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구라파(歐羅巴) 사람들이 남양(南洋)을 잠식할 때에도 처음에는 다 비싼 값으로 땅을 빌렸다가 뒤에 그만 빼앗아서 자기의 소유로 만들었습니다. 거마도는 듣건대 황폐한 섬이라 하니, 귀국에서 혹시 그다지 아깝지 않은 땅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홍콩 지구 같은 것도 영국인들이 차지하기 전에는 남방 종족 몇 집이 거기에 초가집을 짓고 산 데 불과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점차 경영하여 중요한 진영(鎭營)이 되었고 남양의 관문이 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 섬은 동해의 요충지로서 중국 위해(威海)의 지부(之罘), 일본의 대마도(對馬島), 귀국의 부산(釜山)과 다 거리가 매우 가깝습니다. 영국인들이 러시아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라고 변명하지만 어찌 그들의 생각이 따로 있지 않을 줄을 알겠습니까?

이토 히로부미는 이전에 나와의 담화에서 영국이 만약 오랫동안 거마도를 차지한다면 일본에 더욱 불리하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귀국이 영국에 빌려준다면 반드시 일본인들의 추궁을 받을 것이며, 러시아도 곧 징벌하기 위한 군사를 출동시키지는 않더라도 역시 부근의 다른 섬을 꼭 차지하려고 할 것이니 귀국이 무슨 말로 반대하겠습니까? 이것은 도적을 안내하여 문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으로 이웃 나라에 대하여 다시 죄를 짓게 되며 더욱이 큰 실책으로 됩니다. 그뿐 아니라 세계 정세로 보아서도 큰 관계가 있으니, 바라건대, 전하는 일정한 주견을 견지하여 그들의 많은 선물과 달콤한 말에 넘어가지 말기 바랍니다. 이제 정 제독(丁提督)에게 군함을 주어서 이 섬에 보내어 정형(情形)을 조사하게 하는 동시에 귀 정부와 함께 진지하게 토의하게 하니, 잘 생각해서 처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한편 흥양(興陽)에 파견되어 갔던 엄세영(嚴世永)과 묄렌도르프(목인덕穆麟德) 역시 영국의 수군 제독에게 편지를 보냈다.

우리 나라 대군주(大君主)께서는 아세아(亞細亞) 동부 해상에 주둔하고 있는 귀국의 병선이 우연히 우리 나라 거문도(巨文島)에 이르렀다는 소식과 아울러 귀 제독이 해도(해당 섬, 該島)에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 대군주께서는 중국의 제독 군문(軍門) 정여창(丁汝昌)이 2척의 군함을 가지고 바다를 순찰하다가 마산포(馬山浦)에 이르렀다는 것을 아시고, 우리 나라 대군주께서는 군문 정여창에게 우리 나라에 특파한 관원들을 데리고 섬에 가서 정형(情形)을 조사하여 보라고 특별히 청하였습니다.

우리들은 해도에 당도하여 즉시 귀국의 병함(兵艦) 6척과 상선 2척이 해도 안에 정박하고 있는 것을 보았으며, 동시에 해도의 높은 산꼭대기에 귀국의 깃발이 세워진 것을 보았습니다. 본관들이 곧 귀국의 비어선(飛魚船)에 가서 그 까닭을 물으니, 그 선주(船主)가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귀 제독의 명령을 받은 것이라고 하면서 귀 제독이 현재 일본 장기도(長崎島)에 머물러 있다고 하였습니다. 본관들은 다시 군문 정여창과 가부를 토의하고 장기도에 가기로 하였는데 다행히 임금의 윤허를 받아 이달 5일 아침에 장기도에 도착하였고, 본관들은 그 즉시로 귀 제독을 면회하였습니다. 면담한 여러 가지 건은 다 주상의 명령을 받은 것이므로 귀 제독의 대답을 청합니다. 이미 우의(友誼)를 맺은 나라인데 벗이 된 나라의 땅을 점령하고 있는 것은 누구의 명령에서 나왔으며, 또한 무엇 때문입니까?

본관들은 귀 제독이 즉시 처리하여 조약 관계가 있는 각 나라들로 하여금 해도가 본국의 땅이라는 것을 모두 알도록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편지를 살펴보고 회답해 주기 바랍니다.

5월 조선의 사신이 거문도에 도착했을 때, 영국 해군은 외교 교섭과는 별도로 거문도 기항(임차) 대가 연간 5천 파운드를 지급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조선 측으로부터 명분 상 조선의 영유권을 인정하면서 거문도 기항을 정식으로 인정받으려는 것이었지만, 조선은 일단 영토 점령(임차)자체가 부당한 일이므로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했다.
일본은 이에 대해 조선의 항의에 동의하였으며, 독일은 영국의 자유당 정부와의 관계가 안 좋았지만 당시 영사였던 젬브쉬는 본국 훈령과 함께 개인적인 동정시선을 보냈다. 미국은 조선을 이해하는 동시에 러시아와의 예방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였다.
극동에서 영 - 러의 긴장이 고조되자 부담을 느낀 것은 청이었다. 청의 북양 대신 이홍장은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려는 영국을 내심 지지했지만, 청의 영향력이 약화될 수 있는 상황에서 노골적으로 영국의 편을 드는 것도 무리한 일이었다. 그래서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 서서, 러시아의 남하는 없을 것이며 러시아와 조선의 밀약도 헛소문이라고 확인시켜줘서 영국을 안심시키려 했다. 영국은 조선 측이 보낸 속국 인정 전문을 받아들여, 청을 통해 러시아에게 조선을 점령하지 않을 것과 조선의 현상 유지를 요구했다.
한편 청은 러시아에게 영국의 지지를 받는 것처럼 위장하며 두만강 하류, 즉 연해주 끄트머리의 영유권을 회복하려고 들었고[6], 그 덤으로 자그만치 '''청한 종속 관계'''를 러시아에게 인정받으려고 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이렇게 청이 두 열강 사이에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시간을 끄는 사이 거문도 점령은 1886년 가을까지 지속되었다. 조선은 그해 7월에 러시아에게 다시 보호를 요청했으며, 위안스카이는 고종을 폐위하려는 건의까지 올린 상황이었다. 청은 국제 외교 무대에서 조선이 속국이므로 외교권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였고, 이에 회답하는 나라는 없었지만 거꾸로 이를 반대하는 나라도 없었다(...)
영국이 조선을 식민지화하여 동북아의 균형이 깨질 것을 우려한 서구 열강들은 앞을 다투어 거문도로 군함을 파견했는데 이 때문에 거문도는 흡사 세계 각국의 군함 전시장처럼 변했다고 한다.
결국 1886년 12월에야 협상이 이루어졌다. 러시아는 조선을 보호국화 하지 않는데 동의했으나, 청과 영국 역시 조선에 간섭하지 않기로 확인했다.
2년의 점령 끝에, 영국은 러시아가 남하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어느 정도 얻고, 동시에 거문도가 생각보다 요새화하기 어려워서 이를 시행하려면 꽤나 많은 비용이 든다는 것을 파악했다. 그랬기에 청의 중재를 담보로 합의 3개월, 점령 22개월만인 1887년 2월 5일 거문도를 말그대로 '''도로 뱉어내고 철수했다'''. 또한 점령 시작 때처럼, 조선 정부는 영국 해군의 철수 소식을 가장 늦게 접했다.

3. 영향


이 사건의 결과로 조선이 세계 열강의 주요한 관심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으며, 이에 조선에서는 열강의 대립으로 인한 불똥을 피하기 위해 '''영세 중립국론'''이 1885년 조선 주재 독일부 영사 부들러(H. Budler)에 의한 것과 개화파 계열의 소장 관료인 유길준에 의한 것의 두 가지가 서로 관계없이 구상되었으나 주변 열강들의 이해 관계 때문에 호응은 받지 못했다.[7] 또한 이 사건으로 러시아는 영국의 거문도 점령에 반발하며 제주도를 점령하여 영국의 해군 보급로를 해상에서 끊을려고 하였으며 이때문에 제주성 위협사건이 일어났다. 또한 이러한 상황에서 제주도와 울릉도, 제주도의 부속도서 가 러시아의 불법적 점령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었다.

4. 후일담


청의 우세는 일본이 서서히 교역을 기반으로 세력을 넓히면서 약화되었고, 결국 1894년 갑오농민전쟁과 뒤이은 청일전쟁으로 청의 영향력은 완전히 사라졌다.
한편 영국은 거문도가 별로 쓸모없다고 판단해 물러나기는 했지만 러시아의 남하에 대해 여전히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한 행동으로 보여주었으며, 이는 러시아에 부담이 되었다. 한편 러시아는 거문도 점령으로 말미암아 태평양 함대가 대양으로 나아가기 위한 길목이 차단되어 극동에서 러시아 해군의 움직임이 제한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에 러시아는 육군을 극동에 보내 세력을 확장하기로 마음 먹었고, 이에 따라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완공을 서두르고, 1896년 만주에서 동청 철도 부설권을 따냈으며, 1895년 삼국간섭으로 일본이 확보한 랴오둥 반도를 토해내도록 한 뒤 1898년 자기가 집어삼켰다. 이 사이 을미사변이 일어났으나 아관파천으로 러시아는 고종의 영향력을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절영도를 조차한 것이 이때.
러시아 제국은 또한 1900년 의화단 운동을 진압한 뒤 만주에서 철수하지 않고 점령을 지속하여 만주를 식민지로 만들고 더 나아가 대한제국의 용암포를 점령, 조차, 개항함으로써 한국 역시 영향권 하의 완충국이나 보호국으로 만들 의향을 보였다(1903년의 용암포 사건).[8]
러시아의 이런 움직임은 러시아의 남하와 팽창을 경계하던 영국과, 신흥국으로 부상한 일본에게 커다란 걱정거리가 되었고, 결국 1902년 양국은 동맹을 맺기에 이른다(영일동맹). 그리고 2년 뒤인 1904년 러일전쟁의 결과 러시아의 극동에서의 남하는 완전히 좌절되었으며, 러시아는 현실을 인정하여 영국, 미국과 협상을 맺고 '그레이트 게임'을 끝내게 된다. 그리고 조선은 을사조약으로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한다.

5. 거문도의 사정


사실 거문도 사람들은 오히려 영국 해군을 환영했다. 영국 해군은 진지 보수나 포대 설치 작업시 부족한 인원을 보충하기 위해 거문도 주민들을 '''고용'''하여 작업에 동원했다. 하지만 본토의 탐관오리들과는 달리 백성을 마구잡이로 착취하지 않고 언제나 정당한 비용과 보상을 치른데다가 식량 배급과 의료 혜택까지 무료로 베풀었기 때문이었다.[9] 당시 영국군은 주민들에게 보상을 해주기 위해 조선인들에겐 쓸모가 없는 파운드 스털링 대신 곡식, 통조림이나 등의 물건으로 보상했다.[10] 당시 조선은 관의 착취 등으로 민초들의 생활이 피폐해진 상태였는데, 일은 일대로 죽어나게 시키면서 백성들 등처먹는 탐관오리들의 행태와는 달리 갑툭튀한 덩치 큰 유럽인들은 일을 시키면 반드시 대가를 주니 오히려 주민들이 영국 해군을 물심양면 도와줬다고 한다. 그래서 2년 후 철군할 당시 주민들이 매우 아쉬워했다고.[11]
당시의 일화가 재미있는데, 영국 해군은 엄밀히 말해 침략군으로서 들어왔지만 마찰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대민 물의를 최소화하려는 지휘관의 명령으로 주민들 거주 구역엔 얼씬거리지도 않았다고 한다. 특히 여자들과의 충돌이 있을까 봐 빨래터 근처를 지날 때는 각별히 주의를 가해 여자들 쪽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우물가에서 물 한 모금을 떠마실 때에도 반드시 동전 한 닢을 두고 갔다는 회고도 있다. 주둔군과 주민이 함께 찍은 드문 사진 영국 해군 사진 자세한 기사는 여기에. 시대상을 보면 현재도 모범이 되는 영국 해군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야사에 따르면, 거문도에 살던 젊은 여자 무당에게 반한 한 수병이 몰래 수영을 해서 만나다가 바다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니면 쓰러져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카더라. 물론 실제로 그런 사건은 없었다는 것이 연구 결과이나 이런 야사가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영국군과 거문도의 백성들이 친밀했다는 이야기의 반영이라는 평가가 많다. 10여 년 전 방영했던 거문도 점령 관련 다큐멘터리에서는 거문도 주민이 전혀 다른 에피소드를 들려줬는데 당시 영국 수병이 무당 혹은 과부를 밤에 몰래 몇 번 찾아갔다가 발각되었고 조선의 남녀 유별 전통을 잘 아는 지휘관이 장병들과 거문도 주민이 보는 앞에서 강도 높은 처벌을 했는데 수병을 뱃머리에 세워두고 걷어차서 수병을 바다에 빠뜨리면 수병이 헤엄쳐서 배에 오르고 배에 오르면 다시 뱃머리에 세운뒤 걷어차서 바다에 빠뜨리는 걸 몇 번이나 반복해서 거의 반죽음 상태에 이르러서야 처벌을 그쳤다고 한다. 아마 이 에피소드가 바다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로 와전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강도 높은 처벌이 본보기가 되어 특별히 알려진 대민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같은 다큐멘터리에서 또 다른 일화가 나왔다. 당시 영국군이 장병들의 식량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소를 상당수 구입해서 거문도 산간에 방목했는데, 특별히 지키는 사람을 두지 않았다. 이를 보고 동네에 살던 점잖아 보이는 노인 한 명이 매일 한 마리씩 훔쳐갔다고 한다. 영국군은 소가 한 마리씩 사라지는 일이 발생하자 몰래 숨어서 훔쳐가는 사람의 사진을 찍은 뒤, 소가 사라진 다음날 노인을 붙잡고 훔쳐간 소를 돌려달라고 했다. 노인은 딱 잡아떼었지만 영국군이 노인이 소를 몰고가는 사진을 증거로 내밀자 결국 훔쳐갔음을 시인하고 소를 돌려줬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거문도 사람들은 사진이란 것을 몰랐는데 실물과 똑같은 모습이 종이 안에 있음을 보고 다들 놀라며 신기하게 여겼다 한다. [12]
물론 이 이야기 또한 풍문으로 보이는데 당시 사진촬영은 무척이나 귀하고 어려운 것으로 촬영을 하기 위해선 피사체가 '''최소 30분''' 가량을 부동자세로 가만히 있어야 하는데다가 준비 하는데 시간과 비용도 많이드는 관계로 기념일이나 중요인물을 촬영할때나 사진을 찍었지 무슨 현대의 몰카 촬영 마냥 사용했다는 이야기는 당연히 거짓이다.
한번은 빅토리아 여왕의 생일날에 축포를 쏘기로 했는데, 주민들에게 함포 소리에 놀라지 말라고 미리 당부를 해뒀었다. 주민들은 대포 터지는 것을 구경하러 나갔는데 문제는 이때 들이 포 소리에 놀라 다 산으로 도망갔고, 영국 해군에서는 외교 문제를 고려하여 해병대원들을 풀어 개 수색에 나섰다.[13] 그 밖에도 조선에서 최초로 테니스를 했다고 알려졌고[14], 통조림을 먹었다거나 하는 일화도 있다.[15]
하지만 영국 해군을 경계하기 위해 들어왔던 다른 나라의 군대들은 대체로 주민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특히 러시아 해군은 군기가 문란하여 행패를 자주 부려 주민들과 자주 충돌했다. 특히 러시아 군사들이 죄다 에 쩔어 사는 알코올 중독자다 보니 현지 주민과 마찰이 심각했다. 프랑스 해군은 가는 곳마다 측량을 하겠답시고 지붕 위로 뛰어다녀서 주민들의 원성을 샀다. 네덜란드 해군은 "주민들의 곱게 테를 두른 모자가 인상적이었으며, 가는 곳마다 깃발을 많이 휘날렸다~고 회고했다.# [16]
1960년대에 그때까지 살아있던 거문도의 90대, 100대 노인들에게서 영국군의 지배가 어땠는지를 묻는 설문 조사가 있었다. 노인들은 영국 해군들에게 배운 영어와 요들송을 그때까지 기억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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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도에 머물 당시 질병이나 사고로 죽은 수병들의 묘가 아직 3기[17]가 남아있는데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방한 당시 거문도를 방문하여 묘소를 참배하고 가려고 했지만, 엘리자베스 2세의 일정이 바뀌어 오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종종 주한 영국 대사도 참배하곤 한다. 사실관계만 보면 불법 점령군을 추모하는 묘한 상황이지만, 한국에서도 이 사건이 여러 가지 사정으로 별로 주목받지 않고 있기 때문에(2년간 단기간 점거, 영국군의 신사적인 행동과 현지 주민과의 우호적 공존, 사건 자체에 대한 낮은 인식 등) 이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이는 딱히 없다. 당시 주민들은 상술했다시피 오히려 조선 조정의 지배하에 놓여 있을 때보다 훨씬 나은 대접을 받았다(...)
또한, 2005년부터 주한영국대사관 명의로 거문도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한다. 관련 기사
[1] 원본에는 합미돈(哈米𥫱)[2] 미국, 영국과 조선의 수교는 청의 알선(조선책략)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일본과 러시아를 견제하고 싶은 청의 바람이 반영된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청의 영향력이 너무 강해지자 조선이 다른 국가와 연대하려 하니 당연히 미국과 영국으로서는 신경을 곤두세웠다.[3] 정작 러시아는 일관되게 조선의 요구에 시큰둥했었고, 부동항보다는 만주의 패권에 더 관심이 있었다. 물론 떡을 준다는 데 싫다는 측이야 없으니 받아들인 거지만.[4] 다만 영국 입장에서도 현지 프랑스군이 상부의 생각과 달리 엉뚱한 짓을 해서 일이 커지면 좋을게 없기 때문에 불확실성 제거를 위해 대치 중이라도 돕는게 나았다[5] 합미돈(哈米𥫱)이 아니라 합미돈(哈米敦)라고 썼다.[6] 이때 훈춘에 8만 대군으로 무력 시위를 했으나 러시아는 씹었다(...)[7] 독일 영사 부들러의 중립화론은 유길준보다 1년 전인 1884년 갑신정변 직후 제시되었다.[8] 이는 고종황제 역시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 영, 일의 반대로 조차를 개항으로 변경했다.[9] 보수는 물론이며 끼니까지 챙겨주고 아픈사람은 군의관이 치료까지 해주었다.[10] 나중에는 당시 조선에서 통용되던 화폐를 따로 조달하기까지 했다.[11] 영국 해군 주둔 당시에는 조선 조정이 세금을 못 걷어갔지만, 영국 해군들이 떠나고 난 다음부터는 2년 동안 못 낸 양까지 전부 세금으로 바치게 해서 힘들었다고 전해진다.[12] 신기한 정도를 넘어 당시에는 너무 비슷한 그림 때문에 혼이 빠져나간다느니, 현상액이 사람 죽여서 만들었다느니 하는 괴담이 있었다. 단발령 때문에 겨우 사진이 대중화되었고, 그 전까지는 기피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13] 화약 무기가 전래되자 을 타고 다니던 기병들도 채찍 소리로 적응시키거나 말의 귀를 멀게 하는 등, 당시 화약 무기의 큰 소리는 동물들을 전쟁터에 들이기 어렵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전쟁터의 동물들도 이정도이니, 그런 것을 모르고 살았을 섬의 개들이야 당연히 놀랐을 것이다.[14] 1885년에 설립되었다고도 한다. 당시 테니스장이 건설된 위치로 추정되는 고도의 산 비탈에 헤밀턴 테니스장이 건설 되었다.[15] 물론 조선 최초의 통조림 시식(?)자는 신미양요 때나 그 이전일 가능성이 높다.[16] 네덜란드는 다른 열강들과 달리 무력에 의한 지배보다 장사를 통한 이득을 얻는데 더 치중하다보니 다른 나라와의 갈등이 적은 편이었다. 쇄국정책이 기본이었던 에도 막부와도 거래를 틀었을 정도였다.[17] 영국의 경우 해외 출정이나 주둔 중 전사한 군인은 그 땅에 묻는 전통이 있다. 반면 한국은 예나 지금이나 고국에 묻힘을 당연히 여긴다. 이러한 장례 전통의 차이 때문에 당시 주민들이 '고향 땅에 묻어야지, 왜 시신을 그냥 두고 가냐.'고 일종의 문화충격을 경험했다고 전한다. 참고로 함상에서 전사 혹은 사망하였을 경우에는 수장한다. 시신을 본토까지 가져온 넬슨 제독은 오히려 예외적인 경우. 이는 어디까지나 영국이 그렇다는 것으로 서양의 전통은 아니며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은 외국에서 발생한 전사자의 시신을 어떻게든 본국으로 수습하려 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