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프 배그웰
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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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스턴 애스트로스의 프랜차이즈 스타'''. 휴스턴의 어지간한 공격 기록은 그와 그의 절친이자 역시 휴스턴의 전설적 스타 크레익 비지오가 나눠 가지고 있다. 한 마디로 '''휴스턴 역사상 최고의 장타자'''로 평가된다.
통산성적은 15시즌 동안 타율 .297, 출루율 .408, 장타율 .540, OPS .948, 순장타율 .244, BB/K 0.9, wRC+ 149, 449홈런 2314안타, 1529타점, 1517득점을 기록했다.
2. 선수 시절
원 포지션은 3루수였다. 1989년 보스턴 레드삭스에 지명되었고, 선수 자신도 꿈이 보스턴의 주전 3루수로 뛰는 것이었다. 고향이 보스턴이고, 어린 시절 팬웨이파크에서 보스턴 선수들이 뛰는 것을 보면서 꿈을 키운 선수였기 때문. 하지만 그의 소망은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1990년 PO 진출이 유력했던 보스턴은 휴스턴에서 불펜 투수 래리 앤더슨을 영입하기 위해 배그웰을 내준 것. 정작 앤더슨은 딱 한 달 뛰고 보스턴을 떠났고, 보스턴은 그렇게 팀의 전설이 될 수 있던 타자를 내줬다.
물론 보스턴 입장에서도 3루 자리에는 웨이드 보그스라는 명예의 전당 3루수가 버티고 있었고, 1루 자리도 모 본이라는 유망주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모 본을 지명타자로 보내면 될 문제였기 때문에 이 선택은 보스턴 역대 최악의 선택 중 하나로 꼽힌다. 무엇보다 슬러거들의 포지션인 1루수치고는 체구가 다소 작았다는 점도 보스턴이 이런 선택을 하는데 한 몫했다.[2]
어쨌든 휴스턴에 와서 1루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데, 주전 1루수를 트레이드시키면서까지 자리를 마련해준 팀의기대에 배그웰은 완벽하게 부응했다. 1991년 신인왕을 시작으로 1994년에는 파업으로 인해 겨우 '''110경기만''' 치렀음에도 0.368 '''39홈런 116타점''' wRC+205를 기록하며 배리 본즈와 마크 맥과이어를 제외하면 2020년 현재까지 마지막으로 단일시즌 wRC+ 200을 넘겼다. 이 때 성적으로 인해 1994년 만장일치로 리그 MVP를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고, 그 후로도 쭉 팀의 주전 1루수이자 간판 타자로서 맹활약했다. 여담으로 1994년 AL MVP 프랭크 토마스와 생년월일이 같으며 토마스 역시 1994년 wRC+ 205를 기록했다.
거구들이 자리잡는 1루수로서는 비교적 작은 체구이나 30-30을 두 차례나 기록했을 정도로 발이 빠른 편이었고[3] , 수비력도 준수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커리어 초반은 타자들의 무덤이었던 '''애스트로돔'''에서 거둔 성적이었던 것. 이 시기 배그웰, 비지오, 데릭 벨이 활약한 이른바 '''킬러 B'''(1기)는 휴스턴의 새로운 상징이 되었고, 그 결과 휴스턴은 다소 타자들에게 유리한 새 구장 미닛메이드 파크를 개장하기에 이른다. 그 뒤로도 절친한 친구인 비지오와 랜스 버크만, 카를로스 벨트란등과 함께 휴스턴의 강타선을 이끌면서(킬러B 2기) 휴스턴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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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처럼, 전성기 시절엔 방망이 흔들기로 유명한 게리 셰필드만큼이나 특이한 타격자세로 유명했다. 위 기마자세 타격폼은 송지만이 장타를 뻥뻥 날려대던 시절에 쓰기도 했었다.
배그웰 특유의 기마자세 타격폼은 낮은 스탠스에서 순간적인 힘을 극대화시켜 공에 임팩트를 가하는 메커니즘으로, 그의 다소 작은 체구(182cm 90kg)에도 불구하고 많은 홈런을 터뜨리는 원동력이었다. 30홈런 이상을 기록한 시즌이 9번, 그 중에 40홈런을 넘긴 시즌이 3번일 만큼 장타력도 출중했지만 2000년대는 약쟁이 슬러거들이 미쳐날뛰던 시절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임팩트가 부족했다는 것이 중평. 게다가 이런 특이하면서도 다이나믹한 타격폼은 그다지 좋지 못한 결과를 낳게 된다.[4] 전형적인 슬로우 스타터였는데 특이한 타격폼에 적응하느라 다른 거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게 몸이 풀리는 경향을 보였다. 더욱 큰 문제는 나이가 먹으면서 이 타격폼이 몸에 무리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보통 거포들이 무릎 부상을 달고 사는데 비해 배그웰은 특이하게도 어깨 부상이 잦았다. 결국 이 어깨 부상때문에 상대적으로 이른 은퇴를 하게 되었고 뛰어난 장타력에도 불구하고 통산 홈런은 449개에 그치게 되었다.
특히 은퇴 과정이 아쉬웠는데, 2005년 팀 역사상 첫 월드시리즈에 몇 차례 대타로 나선 후, 팀은 부상자명단에 그를 일방적으로 넣었다. 이는 배그웰의 고액 연봉에 대한 보험 처리를 받아 한 약쟁이의 연봉을 대려는 목적이었다고. 결국 이런 처사에 화가 난 배그웰은 마침 부상도 있고 해서 결국 그대로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식도 없이 그냥 조용히 은퇴한 것이었는데, 팀의 홈런 및 타점 부분 1위를 기록한 선수에 대한 예우치고는 너무 어이없는 처사였다. 이런 처사가 안타까웠던 크레익 비지오는 자신의 3000안타 달성 순간 축하해주러 온 배그웰의 손을 들어줘서 마지막 환호를 받게 해 줬다. 뒤에 휴스턴에서도 배그웰의 등번호 5번을 영구결번시켰다.
3. 지도자 시절
2010년엔 휴스턴의 타격코치로 활동하기도 했다.
4. HoF 입성 여부와 약물 복용 논란
약물 의혹이 있긴 한데 약을 빨고 신이 된 천재처럼 위증 논란까지 불거진 케이스도 아니고, 라파엘 팔메이로처럼 아니라고 의회 증언한 후, 바로 약물 검사에서 걸린 것도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로저 클레멘스의 약물 공급책이 그에게도 약물을 공급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는 것.[5] 일단 도핑 테스트에서 단 한번도 걸린 적이 없고, 의회 보고서 미첼 리포트에도 이름이 없다는 점에서 의심은 가지만 약쟁이로 치부하기도 그런 상황이라고 봐야 할 듯 하다. 그의 선수생명을 끝냈던 고질적인 어께부상도 약물과 무관하지 않다는 얘기가 있다. 일단 공식적인 것은 안드로스테디온을 복용한건 본인이 시인했고[6] 스테로이드를 복용한건 부정했다. 이건 마이크 피아자와 같은 상황.
그런데 이 약물 의혹 때문에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은근 손해를 봤다. 의혹이 있기 때문에 혹시나 들어가서 사실로 밝혀지면 난리가 날까봐 안뽑았다는 기자도 있을 정도니.
2년차인 2012년 투표에서 56%, 2013년 59.6%를 찍었지만, 그후 2014년에 54.3%, 2015년에는 55.7%를 기록하며 60% 벽을 넘기지 못한 채 5년째 제자리 걸음 상태다. 아무리 2010년대 초반 후보군이 쟁쟁한 스타들로 가득찼어도 예상 외로 부진한 배그웰의 득표율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사실 누적기록이 조금 아쉬워서 그렇지 통산 기록을 놓고 보면 배그웰은 이미 '''MLB 역사에 남을 거물 1루수'''다. 특히 세이버 스탯으로 배그웰을 능가하는 1루수는 루 게릭, 지미 폭스, 스탠 뮤지얼[7] , 푸홀스 단 4명 뿐이다.# 게릭, 폭스, 뮤지얼이 할아버지 세대, 혹은 그 이전 세대임을 감안한다면 '''현대 야구에서 전문 1루수 투톱은 푸홀스와 배그웰'''이라는 얘기. 이런 선수가 약물 논란에 발목이 잡혀 첫 투표를 통한 HoF 입성은 커녕 단기간에 입성하는게 불투명해진 것이다.
2016년 투표에서는 10% 넘게 득표율이 상승하긴 했지만 결국 71%에 그쳐 입성에 또 실패했다. 그나마 70%의 벽을 뚫는데 성공하며 동료였던 비지오를 호프집에서 만날 날이 머지 않았다는 게 위안거리. 2017년에 첫번째 후보자격을 얻는 선수들 중 헌액 유력 후보가 이반 로드리게스, 블라디미르 게레로 정도라 2017년이 호프집에 들어갈 절호의 기회가 됐다. 한편으로 약물과 아예 무관한 제프 켄트는 언론과의 사이가 예전부터 틀어져 입성 자체가 불확실한 걸 고려하면 훨씬 나은 편이다.
결국 2017년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86.17%의 득표율로 헌액이 결정됐다. 모자는 당연히 휴스턴의 모자를 쓰고 입성했다.
이에 호세 칸세코는 배그웰은 되는데 맥과이어는 왜 안 되냐며 역겹다는 트윗을 했다.
5.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
- JAWS - First Base (6th)
6. 관련 문서
[1] 프랭크 토머스과 같은 날에 태어났다.[2] 체구가 작았단 것도 어디까지나 야구선수 기준이고, 프로필상 183cm, 88kg이므로 일반인 기준으론 매우 건장한 체격이다.[3] 쌕쌕이 스타일이라기 보다는 주루 플레이 센스가 뛰어나다고 볼 수 있다.[4] 물론 이는 장기적인 관점이고 타격폼이 원동력이 되어 신체기능이 좋고 회복이 빠른 젊은 나이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고 장타를 생산하는데 순작용을 했을 수는 있다. 사실 배그웰 정도의 커리어를 쌓는 것 자체가 쉬운게 아니고 이 타격폼으로 인한 부상이 잦아져도 회복을 기다려준 거 자체는 해당 타격폼으로 쌓아올린 누적이 있어서 가능했을 것이다.[5] 이 외에도 약물 복용을 시인한 후 2004년 사망한 켄 캐미니티(Ken Caminiti)와 휴스턴에서 같이 뛰었다는 정황이 있긴 하다. 다시 말하지만 증거가 아니라 '''정황'''이다.[6] 안드로스테네디온은 2004년에야 금지 약물로 분류되었다.# 참고로 당시 메이저리그는 안드로를 금지약물로 취급하지 않았는데,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서는 스테로이드 계열 금지약물로 지정하고 있었다(NFL, NCAA도 금지약물로 분류).#[7] 뮤지얼은 1루수뿐만 아니라 좌익수로도 출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