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일전쟁

 


1. 임진왜란의 다른 명칭
2. 백지원의 저서


1. 임진왜란의 다른 명칭


임진왜란을 가리키는 다른 명칭. 임진왜란은 ‘임진년에 왜놈들이 일으킨 난리’라는 의미가 담겨있는데 이 용어로는 조선, 일본의 전면전이었던 의미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고, 삼포왜란 같이 왜란 이름을 붙인 상대적으로 작았던 사건들과, 본격적인 전쟁이었던 임진왜란을 구분할 필요도 있기 때문에 조일전쟁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다. 또는 임진왜란은 '임진년에 일어난 왜란'이라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일본이 임진년에 한 번(임진왜란), 정유년에 한 번(정유재란) 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에 둘을 합해서 조일전쟁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혹자는 이 전쟁에 명나라도 참전했기 때문에 조일전쟁이라 불러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꼭 참전한 국가 모두를 전쟁명에 넣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 중 하나인 독소전쟁은 독일, 소련 이외의 나라들도 상당수 참여한 전쟁이지만 직접적인 전쟁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두 나라를 따서 독소전쟁이라 부른다.
2천년대 들어서 임진왜란을 조일전쟁이라 부르는 역사책이나 소설의 빈도가 늘어났다. 2004년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나레이션은 극중 내내 임진왜란을 조일전쟁이라 불렀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훨씬 오래전부터 널리 쓰이고있어 인지도는 매우 낮은 편이며 알만한 사람들도 밑의 책 때문에 기피하는 경우까지 있다.

2. 백지원의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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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교포 백지원이 2009년 쓴 '''사이비 역사 서적 2호'''.
책 자체가 2차서적들(인문/교양 심지어 소설책)만 읽고 쓴 오류와 왜곡 덩어리이다. 이때문에 역덕 네티즌들에게 까였다.
대표적인 예로 1쇄 인쇄본에서 이미 2005년 반환된 북관대첩비가 아직도 일본에 있는 줄 알고 "정치인들은 이런거나 돌려받지 않고 뭐하냐?"라고 썼다가, 2쇄에서는 고쳤다. 참고로 북관대첩비 반환은 2005년 당시, 국내의 각 언론사와 TV 뉴스에서 심도있게 다루었던 내용으로, 북관대첩을 지휘한 정문부 장군이 묻힌 의정부시 소재 장군 묘역에서 비석을 가져다 성대하게 제사까지 지내고 원래 위치인 함경도로 옮겨졌다. 북관대첩비를 최초로(1978년) 발견된후 반환운동이 일어난다. 인터넷에서 검색만 해도 알 수 있는 이런 사실도 몰랐다는 건 백지원 본인이 기초적인 사료 조사도 제대로 안 했다는 의혹이 들게 한다.
이 책의 전작인 왕을 참하라를 보면 이미 실상이 드러난 원균명장설을 그대로 믿고 원균을 추켜세우고, 반면 이순신이 제대로 이긴 전투는 명량대첩 밖에 없다며 깐다. 그리고 후속작인 조일전쟁은 아무래도 이순신이 주인공이다 보니, 분량을 좀 더 많이 할애해서 까고, 원균은 좀 더 많이 할애해서 추켜세워 준다.
'일각에서는 이순신의 승전기록이 23전 또는 24전 전승이라고 하는데 나는 아무리 찾아봐도 16전 13승 3패 밖에 없더라'라는 말이 수 차례에 걸쳐서 나온다. 하지만 뭐가 승이고 패인지 정확히 나오지 않는다. 3패 중 직접 패배라고 말한 건 웅포 해전이고, 나머지 두 번은 장문포 해전순천 예교성 전투를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장문포 해전과 순천 예교성 전투는 이순신의 지휘권 밖에서 문제가 있었던 전투이고, 웅포 해전은 사료를 잘못 인용해놓고 패전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자세한 애용은 해당 항목 참조. 또한 대부분이 다수의 병력으로 겨우 왜선 2척 또는 6척 정도 격파했을 뿐인데 그것도 전투로 칠 수 있는가 하는 문장이 나오면서 제대로된 전투는 겨우 3번뿐이 없다고 한다.
그에 비해 '원균은 이순신 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나라를 위해 싸운 용장'이라고 한다. 이에 대한 근거의 원균이 직접 쓴 장계와 원균의 증손자가 송시열의 제자들에게 부탁해서 증조할아버지를 칭송하기 위해서 쓴 행장(...) 행장은 해당 문서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엄격한 사료비판을 가하기 전에는 인용할 수 없는 사료이다.
이순신의 패전사료라고 갖다댄 것은 웃기게도 '''원균의 졸전 기록을 짜깁기'''한 것이었으며 사료조작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수준. 문제는 이거에 넘어가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 왜 책에 이런 황당한 내용이 나오는가 하면, 참고한 책 중에서 고정욱의 소설 원균과 김탁환의 '''불멸'''이 들어가 있었기 때문. 자신이 불리할 때는 소설은 믿을 수 없다면서, 자신의 책 내용을 뒷바침하는 사료로 소설인 원균과 불멸은 그대로 믿는 센스는 정말이지 황당할 뿐이다. 엄연한 소설인 '바다의 가야금'도 그대로 믿고 이를 정설이라고 우기는 패기도 보여준다. 참고로 백지원은 조선왕조실록도 안 믿는다. 실록은 쓰는 사관의 입맛대로 조작이 가능하다면서.[1]
전반적으로 이순신은 훌륭한 인물인데 그의 승전 기록이 잘못되어 과대 평가되었다던지, 원균은 졸장이지만 나름 잘 싸웠다는 평이 계속해서 나온다. 이때문에 이순신/원균 까인지 빠인지 헷갈리기는 한다. 그러나 잘못된 자료를 바탕으로 각론은 "이순신 패전 몇번 함 + 이순신 승전 기록도 알고 보면 적은 1~2척 뿐 + 그나마 이순신이 이긴건 순전히 장비빨임" 이라고 쓰다가 총론에서 "그래도 이순신은 훌륭한 인물이다." 하고 결론 내어 버린다. 이때문에 자신의 글에 대한 비판을 막고자 하는 일종의 쉴드로 마지막 결론으로 이순신을 칭찬하는 구절을 삽입한게 아닌가 의심간다.
또한 정기룡을 무지 띄우면서 정기룡의 개인적 기록인 행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 그것도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것들만...[2] 이것 때문에 역덕들에게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화룡점정으로 정기룡이 선무1등 공신이라며 "선무1등공신은 이순신, 원균, 권율 등 3명이 아니라 정기룡 까지 4명이니라. 요건 몰랐지?"라고 기술한다. 정기룡은 1등공신, 2등공신, 3등공신까지 다 합쳐서 18명 밖에 없는 선무공신이 아니라 무려 9060명이나 수여한 선무원종공신이다.
김시민 장군도 '忠武公' 시호를 받았다면서 "충무공은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니라. 요건 몰랐지?"하고 기술한 부분도 있다. 조금이라도 역사에 관심이 있으면 알겠지만 충무공이라고 시호를 받은 사람은 10여명 가량이나 되며 파고 들면 파고 들수록 계속 쏟아져 나온다. 임진왜란만 한정한다면 이순신, 김시민, 김응하, 정충신, 이수일등이다. 더 있을지도 모른다.
"난(亂)은 그저 단순한 난리라는 뜻이니, 임진왜란이라고 부르지 말아야 한다. 게다가 '왜'라는 말 자체가, 일본을 오랑캐라고 깔보는 민족주의적인 시선이 깔려 있어서 나쁘다."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난'이라는 단어에는 단순한 난리만이 아닌, 전쟁이라는 뜻도 담겨져 있다. 게다가 침략의 당사국인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을 가리켜 아직도 분로쿠(文祿)의 역, 게이초(慶長)의 역이라고 하거나 그냥 조선출병 정도로 부르지[3], 조일전쟁이나 일조전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중국에서도 이를 만력(萬曆)의 역(役)이라 부르지, 조일전쟁이나 일조전쟁이라 부르지 않는다. 참고로 난과 마찬가지로 역(役)도 전쟁이라는 의미로 분로쿠 전쟁, 만력 전쟁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선조를 굉장히 '돌대가리', '멍청이'라고 기술 하였지만, 한림대학교 오수창 교수(한때 국내 유일의 조선정치사 학자였다.)는 선조가 매우 노회한 군주라고 표현하였다. 선조는 적어도 권력에 대해서는 매우 천재적이여서 나라가 망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서도 절대권력을 누렸는데, 여기에 저자가 선조를 보고 '싸가지라고는 눈꼽 만큼만도 없는'이라며 반복적으로 비판하는데 이 문장은 약 20년 전에 방영한 일일 시트콤 LA 아리랑에서 이정섭이 쓰던 유행어이다.
아마도 작가가 미국에 살다 보니 접한 한국 방송이 이것 밖에 없어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유행어가 문장 앞뒤 구조를 생각할 때 낄때 안낄때 안가리고 계속 나오는데 전반적으로 책 자체가 하나의 역사서이기 보다는 한 논객이 강연장에서 청중들 웃기게 해줄려고 말하는 구어체에 더 가깝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전작인 왕을 참하라도 비문과 욕설이 난무했는데, 청중들에게 강연할 때 어떤 식으로 했을지 대충 짐작이 간다. 물론 조일전쟁 역시 욕설 투성이이다.
대마도의 경우, '일본보다 조선에 가까운데도 조선 조정은 방치하여 일본이 먹어버렸다.' 라고 한다. 하지만 저자 자신도 같은 책에 소오가문이 여몽연합군에 맞서 싸운 공으로 13세기부터 대마도의 영주로 막부의 인정을 받았다, 왜구의 근거지다, 농사 짓기 척박하다, 등의 얘기를 하고 있다. 즉, 저자의 전형적인 서론과 결론이 다르게 나온 대목이다. 이미 조선 건국 전부터 대마도는 일본 영토, 아니면 최소한 일본의 정치적 영향력을 받는 지역이었고, 거기에는 무장세력이 주둔하고 있는 것이지 빈땅이라 나중에 일본이 먹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가장 황당한 사실은 임진왜란과는 상관이 없는 미야모토 무사시에 관련된 이야기가 책의 맨 뒷부분에 실려있다는 점. 백지원의 말로는 미야모토 무사시가 16세 되던 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그가 소년 시절을 임란과 함께 보냈기 때문이라는데, 미야모토 무사시의 출생연도는 일본에서도 확실히 알 수 없다고 한다. 게다가 임진왜란에 참전한 것도 아니다.
아마 백지원 본인이 미야모토 무사시의 열혈빠거나, 아니면 취미로 검도를 하다가 그냥 넣고 싶었던 걸까? 책의 서문 마지막 문장에 "미야모토 무사시라고 들어봤을련가?"라는 문장을 실어 놓았다. 마치 그의 일생을 보면 임진왜란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인물을 자신만 알고있는 것 처럼 써 놓았다. 물론 일본의 국민적 영웅일 뿐 임진왜란과는 전혀 상관 없는 사람이다.
미야모토 무사시는 국내에서는 꽤 알려진 유명한 일본 검객이지만, 미국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많을 터이니 백지원이 그에대한 이야기를 우연히 듣고 깜짝 놀라 자신만이 알아 낸 것으로 오해 했을 수도 있다. 현실적으로는 또 소설책을 자기 마음대로 변조했을 가능성이 유력하다. 미야모토 무사시의 나이에 대한 가장 유력한 자료는 무사시 본인이 썼다고 알려진 오륜서인데, 여기서 기록된 무사시의 출생년도는 1584년이다. 문제는? 임진왜란 시작이 1592년, 정유재란 종결이 1598년이다. 작가가 미야모토 무사시가 임진왜란을 맞이했다는 16세 때는 이미 전쟁 끝난 뒤라는 이야기다.
16세에 전쟁 이야기가 없는 것은 아닌데, 이 전쟁은 임진왜란이 아니라 세키가하라 전투이다. 물론 미야모토 무사시가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가했다는 식의 책이 일본에서도 많지만, 이를 가장 대중적으로 다룬 책은? 작가가 해당인물의 창작 삼국지를 정사처럼 다뤘던 요시카와 에이지가 쓴 '미야모토 무사시'이다.
한 블로거는 '아마 일부 네티즌들이 무지하게 반발하였던 모양이다. 배운 것이 그렇게만 배웠고 그것밖에 모르니 어쩔수 없는 게 아닌가! 교육의 무서움이란 바로 이런 것처럼 잘못된 사실이라도 그렇게 믿을 수 밖에 없는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점이다.'라는 문장 구조자체가 아리송한 서평을 남겼다. 그런데 이 문구는 정확히 책에서 나오는 문장을 타이핑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마... 모양이다." 대신 "반발 하였다."라고만 고치면 정확히 책에 나온 문장이다. 출판사의 알바로 추정되는 블로그.
[1] 백지원은 조일전쟁 본문에서 우리가 봐왔던 삼국지는 소설 삼국지연의니까 믿을 수 없다면서, 뒷부분에서 삼국지의 2차장작물인 요시카와 에이지 삼국지의 시작 부분인 유비가 어머니에게 차를 사다 주는 장면을 그대로 넣었다. 백지원의 일관적인 성향은 1차 사료를 믿지 않고 자신이 취사 선택한 2차 사료만 믿는다.[2] 정기룡이 훌륭한 장수인 것은 사실이지만, 능력과는 별개로 이렇다할 실적이 없다. 가장 대표적이면서 히트친 월탄 박종화의 '임진왜란'은 정기룡이 거의 주인공 급으로 나오는데, 이 책 자체가 철저하게 야사를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이후 인터넷에서 과대평가 되는 정기룡 장군에 대한 논리는 상당 부분 월탄 박종화의 책에서 나오는 내용이다.[3]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일어난 해의 일본 연호가 분로쿠와 게이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