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장
1. 품행 行狀
몸가짐과 품행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2. 문학 장르 行狀
1의 행장에서 의미를 가져왔다.
중국에서는 한나라 시기에 처음 언급이 나오지만 당시 글들은 현재는 전하지 않고, 언급도 없어졌다가 남북조시대에 다시 부활한 장르이다. 한국에서는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김유신의 현손인 김장청이 김유신 행록(行錄) 10권을 써서 전한다[1] 는 기록이 있는 것을 봐서는 유사한 형태의 글이 많이 있었던 것 같지만 역시 전하지 않고, 조선시대 속동문선부터 시작해서 정식으로 행장과 관련된 언급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죽은 사람의 행적과 성품에 대하여 기록하는 형태로, 대부분 죽은 사람의 친익척이나 제자 등의 지인이 기록하였다. 원래는 죽은 사람의 행적과 사상을 기록해서 후대의 사관들에게 도움을 주려는 의도로 창작된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과 사상에 대해서 짧게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런 형태로 쓰여진 대표적인 예를 보고 싶으면 조선왕조실록에서 가끔 등장하는 졸기를 보면 된다. 이게 그나마 유사하다.
'''문제는 이게 죽은 사람의 지인이 역사가들 보라고 쓰는 글이니, 과연 어떤 내용이 될 것인가'''라는 것. 남송시대 주자의 제자인 황간이 스승 주희의 행장을 40여장에 달하는 방대한 장문으로 쓰면서, '''"우리 스승님의 행적이나 사상은 앞으로 크게 본보기가 될 것이기 때문에, 자세히 쓸 수밖에 없다능"'''이라는 드립을 친 게 시작이었다.
당연히 성리학자를 자처하던 조선시대 유생들은 자기 스승, 자기 조상에 대한 행장을 쓰면서 경쟁하듯이 양을 늘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김에 '''없는 내용도 슬쩍 슬쩍 추가'''하기 시작했다. 이 행장이라는 글 자체가 역사서를 쓸 때 참고할 사료라는 명목으로 시작된 글이기 때문에, 행장을 폼나게 창작해두면 역사서에도 창작된 내용이 들어갈 수 있다는 심보를 먹은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숙종 때에 사육신을 복권하면서 '''소설인 육신전'''마저 참고했던 것을 고려하면, 마냥 꿈만도 아니었다. 이게 국가에서 인정받으면, 제자나 후손은 대박이 터지는 것이다.
이렇게 행장은 100장을 넘기는가 하면, 김유신의 행록처럼 권단위로 쓰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버릇은 직계조상뿐 아니라 자기 조상이나 학맥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해서 온갖 행장들이 다 등장했다. 그래서 행장에 따르면, 우리나라 모든 과거 인물들은 '''문인들은 유교적 성인이자 예술적 문장가이고, 무인들은 여기에 신출귀몰한 전략가이고 전쟁에 참여한 사람은 모조리 군신'''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허목 같은 이는
라는 비판을 하기도 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소설을 써 버릇한 사람들은 꾸준히 소설을 썼고, 후대의 인물들이 가끔 여기에 낚여서 파닥거리고는 한다. 그리고 가끔 이 행장의 내용이 민담이나 야사라고 하면서 은근슬쩍 역사의 진실인 것처럼 언급되기도 하는데, 후손들이 은근히 들이미는 경우가 많다.“행장이란 그 행적을 쓰는 것이다. 나이란 주공(周公) · 공자(孔子)라 하여도 나는 주공 · 공자가 아니며, 나를 정자(程子) · 주자라 하여도 나는 정자 · 주자가 아니다. 살았을 때 주공 · 공자가 아니었는데 죽어 지하에서 주공 · 공자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역사를 거스르는 행장의 예는 굉장히 많은데, 대표적인 예가 조선 태조와 태종 때의 인물 김덕생이다.
태조시기 정안군 이방원은 이화와 함께 사냥을 나갔다가 표범을 만나게 된다. 이 때 낭장 송거신이 표범을 자기 쪽으로 유도하고, 김덕생은 그 표범을 쏘아죽인다. 이에 대한 고마움으로 이방원은 둘에게 말을 선물했고, 태조도 말을 선물한다. 조선왕조 실록 태조4년기사 이후 김덕생은 빨리 죽었다. 하지만 송거신의 추천으로 좌명공신에도 오르고[2] , 동지중추원사에 추대되고, 딸만 있지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사위도 관직에 오르고세종 18년 기사, 그 조카의 아들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노비와 땅을 하사한다.세종 24년 기사 이런 공훈 기사는 단종과 성종 대에도 나온다. 왕(이 될 사람)을 구해서 대박을 친 전형적 사례이다.
문제는 행장이다. 숙종 때 김덕생의 후손인 김중태가 전 호조참판 송징은을 찾아가서 받은 행장 내용은 전혀 다르다.
그리고 이 행장을 근거로, 정조 때가 되면 조정에서 논쟁이 벌어진다. "김덕생이 억울하다"는 식의 이야기였고, 주요 내용은 행장이었다. 위 링크 기사에서는 이를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보기 어려워서"라고 평가하고 있지만[3] , 실질적으로는 행장을 자신의 가문을 위해서 이용하려고 했던 이들이 전 호조참판과 같이 정계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인물과 손을 잡을 경우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리고 이 행장의 내용은 19세기 이유원이 쓴 민담집 <임하필기>에도 거의 그대로 등장한다. 흔히 야사집이라고 전해지는 민담집의 내용이 알고보면 진짜로 민간에서 전해지는 민간의 여론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단적인 증거이다.
3. 行狀
교도소에서 복역수를 평가할 때 매기는 성적이기도 하다.
4. 行狀
여행증명서로 조선시대에 왜관 등을 거치는 일본인들이 보유했다.
5. 行裝
여행갈 때 싸는 짐을 말한다.
6. 行長
은행의 수장[4] . 일반 기업의 사장과 같다. 지점장은 부장 대우이다.
여담으로 일본어 독음은 유키나가인데,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라는 역사적 유명 인물이 있다.
6.1. 小西行長
고니시 유키나가를 당시 조선에서는 '행장'으로 불렀다. 조선왕조실록 및 당시 여러 사료에서는 小西行長이나 平行長, 아니면 그냥 行長이나 豊臣行長등으로 기록되어있다.
[1] 庾信玄孫新羅執事郞長淸 作'''行錄'''十卷 行於世 [2] 좌명공신은 2차 왕자의 난을 정벌한 이들을 올린 공신작호이다. 송거신과 김덕생은 왕자의 난과는 전혀 상관없이, 표범 쏴 죽였던 일로 이 공신에 추가된다. 처음에는 송거신만 올랐는데, 뒤에 송거신이 "김덕생이 일찍 죽어서 못 올랐다"고 세종대왕에게 언급해서 김덕생도 같이 오른다. 이렇게 된 것은, 송거신의 사촌누이와 김덕생이 결혼한 인척관계이기 때문이다.[3] 글을 쓴 사람이 초록불로 더 유명한 이문영이다.[4] 세계은행 등은 총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