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사상

 


淸談思想
1. 개요
2. 발생
3. 변질
3.1. 악화
4. 결과
4.1. 지속된 이유
5. 평가


1. 개요


청언(淸言), 현언(玄言)이라고도 한다. 청담(淸談)은 세속의 명리(名利)를 떠난, 맑고 깨끗한 담화(談話)라는 의미다. 이 사상은 , 서진, 동진 시대에 크게 성행했고 남조, 시대까지도 그 영향이 계속되었으며, 시대에도 명맥을 유지했다.
위진남북조시대에 유행한 사상으로 주로 당대 지식인 사회에서 현학과 함께 나타난 철학적 담론의 풍조로 노장사상을 기초로 세속적 가치를 초월한 형이상학적인 사유와 정신적 자유를 중시했다. 사상의 기초는 도가의 무위사상을 뿌리로 하고 불가의 염세사상 등을 취하여 만들어졌다.
다만 한나라 건국 초 무위이치 사상과는 다르다. 도가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은 동일하나, 무위이치는 전란으로 피폐해진 상황에서 진나라가 아방궁과 진시황릉 건축 등의 대규모 토목공사와 가혹한 법 중심의 통치로 나라를 말아먹은 실책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꼭 필요하지 않다면 큰 일을 벌이기보다 어지러워진 질서를 바로잡고 잘 관리해 나라를 잘 돌아가게 하자는 사상이다.
겉보기에는 그럴 듯한 사상이지만 실제로는 그 부작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후대에는 이를 두고 '''"청담이 나라를 그르쳤다"(淸談誤國)'''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위진남북조시대 내내 한족 왕조의 귀족 지배층들에게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다. 청담의 본질이 왜곡되고 비틀어지는 바람에 이른바 형식주의적이라고 까이던 후한시대의 유교사상을 능가할만한 사회적 폐해와 허례허식이 판을 쳤기 때문이다.

2. 발생


후한 말기 이후 오랫동안 정치적 혼란이 거듭되면서 국가의 통치이념이었던 유가 사상을 대신해 노장사상의 영향력이 커졌다. 그리고 당대의 유가사상은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형식적인 것에 치우치는 성향을 두드러지게 보여주었으므로 정작 유가사상에서 목표로 하는 충성, 효도, 예절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부작용을 보이게 된다. 예를 들자면 부모가 돌아가시면 삼년상을 치르는 것이 효도를 다하는 것임을 주장한 유가의 예가 너무 강조된 나머지 실제로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묘소 앞에서 삼년상을 치르다가 병들어서 일찍 죽어버리는 바람에 남겨진 어머니를 모시지 못하여 불효를 하게되는 사례가 생긴다던지, 아버지 묘소 앞에서 삼년상을 하다가 쓰러지자 어머니가 아들을 구하려고 이불을 덮어주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버지에게 불효한 사람이라고 평가가 급전직하하는 것과 같은 사례가 발생했다. 반대로 이를 엄격히 지켜 엄청난 정치적 자산을 획득한 이도 있다. 바로 삼국지에 등장하는 원소로 원래는 얼자에 불과했던 원소가 그렇게 높은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 다른 사람은 3년상도 하기 힘든데도 6년상[1]을 완벽히 해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후한 말기에는 청의(淸議)라는 사상이 존재했다. 이 사상은 주로 청류파에서 유행했는데, 당시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을 천하의 기둥이라 여기고 고결한 선비로 자처하면서 같은 부류끼리 모여 조정의 정사를 논하고 인물을 품평했다. 그리고 이들은 지방에 주로 거점을 두어 현지의 민심을 향론(鄕論)이라는 것으로 취합해서 조정에 전달하며, 동시에 민심을 다독이는 일을 했다. 이런 사상은 향거리선제에서 인재 추천과 품평을 중시하면서 계속 발전하였다.
하지만 중앙정권은 당고의 금같은 사건을 일으켜 조정에 끼치는 청류파의 영향을 막았다. 그러자 청류파들은 중앙정부와의 정면충돌을 자제하고 각자의 거점인 지방에서 세력을 늘리고 민심을 자기편으로 돌리는 데 주력하였으며, 이 중에서 청류파의 중심인물인 곽태처럼 평론을 적당히 하고 과다한 비난을 하지 않아 당시의 중앙집권세력인 환관들의 미움을 사지 않아서 정치활동을 금지당하지 않는 경우도 존재했다. 그래서 곽태에 대해서는 후세에 쓴 역사서의 기록 중에는 "청담의 주위를 맴돌면서 세상 일에서 점차 멀어져갔다" 라는 비난이 더해졌다. 이 때문에 그를 청담사상의 창시자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곽태의 경우에는 개인적인 피난행위에 가까우므로 실제적인 창시자라고 여겨지기는 어렵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청담사상을 창시했다고 볼 수 있는 사람은 위나라의 하안왕필(王弼)이다. 이들은 노장사상을 기초로 논어주역 등 유가의 경서를 새롭게 해석하며 무와 유, 명교(名教)와 자연 등 형이상학적인 주제들에 관한 철학적인 논의를 이끌었다. 특히 하안은 오석산을 개량 및 보급, 권장해서 현실을 잊고 명상에 빠지는 방법까지 창안하였다.
진이 천하를 일통하고 한이 이어받은 이후, 제자백가가 난립했음에도 사실 중국이라는 고대의 초거대 국가를 지탱해 줄 만한 단일 사상은 없다고 봐야 한다. 인도로부터 불교가 들어오고 여러 도사들이 난립했던 당시 사회에서도 볼 수 있듯이 유가의 사상이 민중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애환을 달래기에는 힘에 부치는 면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도교와 도사와 같은 종교에 민중들이 기대었듯이, 식자층에게도 유가가 설명하는 바는 부족했다.[2]
유가는 어지러운 천하 속에서 먹느냐 먹히느냐의 냉혹한 아귀다툼을 지속하던 시기의 대안으로 제시되었던 사상이었지만, 천하가 안정세에 접어들었고, 또 생산량이 늘어 전반적으로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발달하고 나자 괴력난신과 같은 신비적 요소를 비롯해 삶의 본질이나 본질적 지혜나 천하의 기본 세계관과 같은 어찌 보면 배부른 고민과 의문이지만 결국 호기심을 지닌 인간이기에 가질 수 밖에 없는 의문은 해결해주지 못했다.[3]
당대의 유가는 고대의 신화적 주술적 세계관을 가진 도교를 비롯한 많은 사상들과 결합한 형태로 이러한 물음들에 답하려 했지만 미진한 구석 투성이였다. 비록 초창기 주요 연구자들인 하안이 사마의가 일으킨 고평릉 사변에서 참살당하고, 왕필이 젊은 나이에 병사했으나, 이른바 3현이라고 불리는 도덕경, 장자, 주역 연구와 해설을 중심으로 하는 현학(玄學)의 학풍이 크게 성행하였다. 하후현, 왕연, 완적, 혜강, 상수, 곽상, 배위 등을 중심으로 형이상학적 주제를 둘러싼 고도의 철학적인 논변이 전개되었다. 이를 통해 노장사상에 기초해 세속적 가치를 초월한 정신적 자유를 강조하고, 명분과 형식에만 집착하는 유학을 비판하며, 3현을 기초로 한 철학적이고 예술적인 논의를 중시하는 풍조가 나타났으며 이를 청담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실제적으로도 청담사상의 기초가 완성되었다고 본다.
여기에 더해 후한 말기의 혼란 및 위나라가 진나라로 교체되는 등 잦은 정치적 격변이 발생하면서 지식인과 귀족 사회에서는 정치에 실망하여 은둔하거나 신변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세속의 일이나 민생에 관한 논의를 피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래서 산림에 은거하여 청정무위의 담론을 나누었다는 산도, 왕융, 유영, 완적, 완함, 혜강, 상수죽림칠현이 등장했다.
죽림칠현은 청담의 풍조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이들은 유가에서 강조하는 명교를 초월해 무위자연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세속적인 명예나 이익, 예의를 초월하여 활달한 행동을 일삼았으며 현대의 시각에서도 정도를 벗어난 행동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보이는 행동은 겉보기에는 자유분방하지만 속으로는 오히려 유가사상을 깊이 믿고 있었다. 완적이 정작 자신의 아들은 음주 행렬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거나 혜강이 가계(家誡)라는 책을 써서 자신의 아들에게 올바른 사람이 되기 위한 예절과 주의사항을 훈계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여기까지는 청담사상은 시대의 한계는 있었으나 나름대로 훌륭하게 발전하고 있었다.
  • 청의사상을 이어받아 백성들을 위로하고 스스로도 청렴, 결백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유지했다. 특히 재산을 모으거나 권력을 탐하는 것을 비루하다고 생각하게 함으로써 사치와 탐욕에 빠지는 것을 경계했다.
  • 불의한 중앙정권에 대한 저항사상을 이어갔다. 저항의 방식으론 적극적 저항에서 소극적 저항, 그리고 세상에 미련을 끊어버리고 자연에 심취해 살면서 출사를 거부하는 식으로 표현했다. 역성혁명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 사상이 광범위하게 유행을 타면 인간 머리수를 기반으로 하는 생산, 경제 기반이 마비가 되어버리므로 당연히 위정자들은 이 가능성을 경계했다. 일종의 현대 투표거부운동 같은 의미.
  • 허례허식에 사로잡힌 당대의 유가사상에서 벗어나서 다양한 탐구를 함으로서 생각의 다양성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유가사상을 버린 것도 아니라서 유가사상이 진정으로 추구했던 것을 허례허식을 버리면서 추구하기도 했다.[4]

3. 변질


그러나 이런 식으로 소극적으로 저항하는 것을 당대의 권력가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서 사마소종회의 건의를 받아들여서 죽림칠현 중 '''혜강을 불효죄로 사형에 처했다'''. 이 사건은 당대의 지식인에게 큰 충격을 주었기 때문에 청담사상에서 저항이라는 의미는 이 시점을 계기로 해서 사라진다.
여기에 더해서 현학은 기본적으로는 유가사상에 속하지만 사실상 유가사상이 아닌 속성을 많이 가졌으므로 연구와 사색에 높은 수준이 필요했다. 그래서 높은 성취를 이룬 하안이나 왕필 같은 사람들은 호학과 중용과 멋부림을 동시에 조화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기본적으로 현학이라는 학문 자체의 특성이 현실과 분리되어 공상을 하기에 좋다는 위험성은 제거하지 못 했다.
하안, 왕필, 하후현 같은 당대의 일류 지식인들이 처형당하거나 일찍 세상을 떠나버리자, 현학의 선을 넘어버린 청담사상은 저자의 도사 나부랭이들이 읊어대는 혹세무민이나 황당무계한 주술적 무당질을 받아들이거나 결합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청담사상은 죽림칠현을 비롯한 당대 지식인들이 추구했기 떄문에 권력자나 지식인층에서 일종의 최첨단 유행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 결과 현학만 남은 청담은 아래와 같은 방식으로 변질되었다.
  • 청담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을 제한했다. 권력층이거나, 유명한 지식인이거나, 적어도 재산이라도 많아야 한다. 물론 신분은 귀족이나 적어도 호족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래서 생각이 뛰어나더라도 미천한 신분의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은 애초부터 청담에 참가가 불가능하다. 이렇게 된 이유는 청담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특별한 사람들이며 미천한 사람과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 청담을 나눌 장소도 중요했다. 경치가 좋고 자연을 직접 느끼면서도 지체 높으신 분들이 불편함이 없는 곳을 택해야 했으므로 아무 곳에서나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후술하지만 이 문제는 다른 문제점을 크게 불러온다.
  • 청담을 나눌 때 담객들은 반드시 먼지떨이 모양의 불자(拂子)[5]를 손에 들어야 한다. 해당 불자는 사불상이라는 동물의 꼬리에 손잡이를 단 것이고 손잡이의 재질을 옥 등의 귀한 자재를 써야 한다. 그리고 청담을 나눌 때 불자를 살살 흔들면 마치 신선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대화를 나눌 때 별 필요 없는 호화사치품이 있어야 하며, 쓸데없는 분위기 연출을 중요시하니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 청담의 내용은 주로 기존의 경전을 다루었다. 그리고 경전에 적힌 내용을 논할 때 전통적인 논법에서 벗어난 기상천외한 말을 할수록 추앙받았다. 이 과정에서 정밀한 추론이나 논지 전개 따위는 필요가 없었고 단지 사람들이 감탄하기만 하면 끝이었다. 심지어 왕연은 노자를 해설할 때 제멋대로 이론을 수정하고 적혀있는 기록을 제멋대로 삭제하는 행위까지 전개한다.
  • 청담을 끝낼 때 어떤 결론을 내릴 필요가 없었다. 그냥 여기서 이 말하고 저기서 저 말해도 수습만 가능하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즉 공부를 가장한 사치스러운 학자 놀이에 불과했다.
  • 얼토당토도 하지 않은 조건까지 붙은 결과, 학술이나 문예 관련 모임이라기보다는 고대 관심충 귀족들의 놀이모임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여기서 다루는 내용도 현대의 키보드 배틀과 자웅을 겨룰 만한 개똥철학, 허무주의, 중2병, 과시욕, 신비주의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청담사상은 크게 변질되었으며 말 그대로 국가를 망치는 사상으로 전락한다. 그래서 이때부터의 청담사상을 '''공담(空談)'''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그 뜻은 말 그대로 청담을 위한 청담사상, 즉, 말만 그럴싸한 헛소리며 무의미한 행동이라는 것이다. 거기다가 기득권의 입장로선 청담은 실질적으론 단순한 유희에 불과하지만 겉보기에는 선현의 뜻을 이어받은 기품높은 현자로서 사회의 존경까지 받을 수 있었다.

3.1. 악화


이런 것이 귀족사회 전체의 유행이 되어 구품관인법과 결합한 결과는 끔찍했다.
  • 관료들이 실무를 외면한다.
가장 큰 문제점으로 국가의 봉급을 받는 사람들이 청담사상에 빠져 실무가 뭔지도 모르고, 가급적이면 실무가 없는 청직으로만 몰렸다. 이렇게 된 이유는 청담사상의 현실은 덧없다는 이야기가 왜곡된 것이다. 하안이 일찍이 요순조차도 죽을 힘을 빼고서야 세상 사람들 조금 좋아지게 했던 것에 불과한데 속인인 우리가 세상을 위할 때 더 무엇을 할 필요도 없고 할 수도 없으니 힘써 무엇을 바꾸려 하지 말고 돌아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놔두면 된다고 말하고 저술한 바가 있다. 하지만 하안이 말했던 것은 고수가 되어 뭐가 정상이고 자연스러운지 알고 있는 상태에서 헛심 빼지 말고 그렇게 돌아가도록 놔두라는 거지, 그냥 놀라는 얘기가 아니었다.[6] 따라서 국가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기본이며, 탁직이라고 불리는 실무가 많은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과중한 부담을 주는 데다 실무를 맡은 몇 안 되는 사람이 권력에 집착하거나 부패하면 답이 없어지는 상황에 몰리게 된다. 즉, 앞서 서술되었던 것처럼 하안, 왕필, 하후현이야 유능하기에 멋도 부리면서 실무도 가능했지만 얼치기가 따라하면 그냥 죽도 밥도 못 된다.
  • 열심히 일하는 것을 비천하게 여겼다.
역시 만만치 않게 큰 문제점이다. 청담을 즐기는 사람들이 그냥 놀기만 했다면 다행인데 옆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매우 비천하게 생각했으며, 동류에 끼워주지 않았다. 한 마디로 말해 자기네들은 고상한 귀족이니 천박하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범접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구품관인법에 따라 인재의 추천권을 가진 게 이들이라 그 문제가 더 컸다. 더욱이 탁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성실히 일해도 고위직이 될 수 없다. 그러니 부패와 탐욕의 길로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7]
  • 온갖 귀족주의의 온상이 되었다.
문벌귀족의 성격을 구품관인법과 함께 수립하고 문벌귀족들이 끼리끼리 모여 당파를 결성해 타인을 배척하면서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 증상을 심화시켰다. 이는 앞서 설명한 청담을 나누려면 격이 맞아야 한다는 괴상한 법칙을 심화(?)시킨 결과였다.
  • 호화사치풍조가 뒷구멍으로 만연했다.
얼핏 보기에는 청담사상이 청빈과 함께 자연을 벗 삼는 것을 강조하므로 호화사치와는 연관이 없을 듯하나, 바로 이 이론을 뒤틀어서 해악을 끼친 것이다. 예를 들어 자연과 벗 삼을 만한 곳에서 청담을 논하기 위해 경치 좋은 곳을 점거해 주변 마을 사람들을 모조리 내쫒고 사유지로 삼거나, 아예 자기 집 앞마당에서 청담을 논하기 위해 집 주변의 땅을 강제로 뺏은 후 기암괴석을 뽑아다 마당에 박고 정자를 건설하며 연못을 파고 거기서 청담을 논한 것이다. 그래놓고 자신은 물욕이 없다고 선언하는 파렴치함을 보였다.
  • 모순적인 행위를 일삼는다.
겉으로는 청빈하게 보이기 위해 돈이나 재물이라는 것이 꿈에라도 보인다면 몸을 깨끗이 하는 등 소란을 일으키며, 관직에 뜻이 없음을 알리기 위해 몇 차례나 온 조정의 사신을 돌려보내는 등의 일을 한다. 그러나 속으로는 돈과 재물은 비천한 하인이나 노비를 시켜 받아챙기고, 더 높은 관직에 화려하게 오르기 위해 자신의 맘에 드는 관직이 올 때까지 거절하는 수작을 부리는 것이다.
누군가가 자신을 비판하면 견강부회, 증거자료 위조, 권위에의 호소 등 토론이 엉뚱한 곳으로 가는 모든 행위를 별 부끄럼 없이 수행했으며, 이것도 안 통할 것 같으면 동문서답을 하거나 죽림칠현 같은 옛 성현을 본받아 그렇게 한다는 면피까지 꺼냈다. 한 마디로 말해 누가 질책하면 입만 살아서 나불거렸다는 것이다.
  • 현실을 망각하고 실속 없이 허례허식이 늘어났다.
앞서 언급한 사불상의 꼬리로 만든 불자는 애교로 볼 정도로 평소 사는 곳을 신선 같이 꾸미는 데 열중했다. 이것도 모자라 기본적인 경서에 대한 교양도 없는 상태에서 패션만 최첨단을 걸었다. 물론 현실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몰랐다.
이렇게 청담 사상이 현실적으로 거의 효과가 없는데 꾸준히 이어지자 고위층과 학자들은 하나같이 실무를 외면하며 꼼수만 부리기 시작했고, 탁직에 종사하며 실무에 투입되던 이들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행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반복하며 사회 전체를 퇴락시켰다. 하지만 이런 귀족의 타락 및 사회적 악영향과는 별개로 청담사상에선 학문으로서 보자면 가장 끔찍한 일이 일어났는데....

  • 중원의 학문 전반이 정체되었다.
현실주의자들은 청담에 따른 허례허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사리사욕과 말초적 쾌락에 만족했고, 정말 학문에 큰 뜻을 품은 학자들조차 허무맹랑한 공리공담과 망상을 진정한 학문이라 착각하며 신선놀음에 집중하고 말았다. 때문에 위진남북조 시대엔 별 의미없는 복잡한 사교 및 취미 활동이 학문의 정수라고 추앙받는 꼴이 되었다. 현실과 격리된 공상에 푹 빠진 공담이 된 청담이 지속된 결과 아예 정상적인 학문이라는 개념 자체가 붕괴되어 버린 셈이었고 청담이 주류가 된 당대 중원은 근 4세기 넘게 인문학적 발전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4. 결과


우선 서진의 붕괴에 청담사상이 큰 역할을 했다. 당장 당대 청담사상의 일인자인 왕연은 태위라는 고위직에 있으면서 정사를 소홀히 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동해왕 사마월의 시신을 분봉지에 묻어야겠다는 핑계를 대고 낙양에서 도망치다가 석륵에게 잡혀서 포로가 되었다가 최후를 맞았다.[8] 게다가 혼자 최후를 맞은 게 아니라 10만에 이르는 사람들과 같이 최후를 맞았는데, 이들은 서진의 친왕들을 포함한 낙양 수비병력의 주력이었다. 덕분에 서진의 황제인 회제 사마치는 병력부족상태에 시달리다가 낙양이 함락되면서 체포당한 후 나중에 끔살당한다. 이것이 바로 영가의 난이다.
하지만 청담사상은 죽지 않고 동진의 왕도에게 이어진다. 초기에는 긴급상황이라 미약했지만 곧 정세가 안정되자마자 동진의 수도인 건강에서는 청담사상이 꽃을 피웠다. 이런 증상은 양나라가 후경이 일으킨 난으로 사실상 박살나는 시기까지 이어지며, 남조의 각 국가들도 개판 5분 전이 되었다. 이는 양나라에서 관직을 지내다 북제로 간 안지추라는 사람이 안씨 가훈이라는 책에서 아래와 같이 언급할 정도로 심각했다.
양나라 전성기에는 사족 자제들은 모두 널찍한 옷을 입고 높은 모자를 썼다. 그리고 굽 높은 신발을 신고 옷에는 향을 뿌렸으며 얼굴은 깨끗하게 면도를 한 후에 분과 연지를 발랐다. 집을 나설 때는 차양이 긴 수레를 탔으며 집에서는 비단방석에 앉았고 양옆에는 골동품을 진열해놓은 다음 공리공론을 끝없이 늘어놓았다. '''겉보기에는 신선과 같으나 실제로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시험을 보게 되면 대신 시험볼 사람을 찾아 시험을 치르게 하고, 조정의 연회가 있으면 미리 사람을 시켜 좋은 시구를 짓게 한 후 그걸 외우기만 해서 현장에서는 앵무새처럼 그대로 말하기만 했다. 그리고 관직에 나가서는 실무가 없는 청관만 하려 했다.
밭을 갈고 풀을 뽑는 것을 본 적이 없어 언제 씨를 뿌리고 언제 수확을 하는지도 몰랐다. 피부는 연약하고 뼈는 약해 잘 걷지도 못 하고 몸이 약한 데다 기운도 없어서 추위와 더위를 잘 견디지 못 했다.[9]
심지어 후경의 난으로 국가가 개발살난 상태에서도 청담은 끊어지지 않았다. 양나라 형주의 강릉 지역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한 원제(元帝) 소역은 554년에 서위의 군대가 맹공격하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용광전에서 백관들에게 노자를 강의했다. 이 강의에는 무장들도 갑옷을 입고 강의에 참석해야 했으며 양양까지 적군이 당도했다는 긴급한 소식을 들었을 때에만 며칠 동안 잠시 강의를 중단했다가 사태가 잠잠해지는 것 같자 다시 강의를 시작했다.
덕분에 국가는 망했으며 소역은 11월에 강릉이 포위되고 외성 서문이 열려서 서위군이 들어오자 절망하며 "만 권의 책을 읽고 오늘 이렇게 일생을 마치는구나. 죽을 바에 책들이 무슨 소용인가? 문무의 도가 오늘 밤에 끝장나는구나."라면서 내성 안 동죽각전에 비치된 고금도서 14만 권을 모두 불살라 없애고 내성으로 퇴각했다. 그리고 12월에 내성까지 함락된 후 포로로 잡혀 최후를 맞는다.
이렇게 나라를 몇번이나 정체시키고 멸망으로 향하는 것을 방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청담사상은 끈질기게 남아 시대에도 명맥을 유지했으며. 결국 청담이고 뭐고 관심없이 말년까지 부국강병에만 힘을 쓴 수문제수나라가 진을 멸망시킨 후에나 일단락된다.

4.1. 지속된 이유


청담사상은 초기의 사회비판적 요소를 상실하고 공담으로 변질되자, 당연히 당대에도 많은 비판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청담사상은 별 다른 견재구 없이 거진 3세기 이상 귀족 및 학자층의 꾸준히 유행했었다. 이는 위-진-남북조 시대를 지나면서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사회불안정과 부패가 만연했으며, 이런 비판을 잠재우기 위한 방법으로 청담이 꽤나 유용했기 때문이었다.[10]
한 왕조 붕괴 이후 중원의 지식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현실 정치에 참여하려 했고, 이는 삼국시대로 대표되는 거대한 혁명 및 내전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청담사상의 현학적 요소는 이러한 사회 비판적인 지식인들을 시선을 돌리게 만들어 자기만의 학문에 끝없이 파고 들게 만드는 효과를 가저왔으며, 결과적으로 남조 왕조들의 정권 안정에 큰 도움이 되었다. 유교&불교&도교적 요소가 모두 결합되어 당대 귀족들 입장에선 학문적 만족감을 가지기에 매우 적절한 요소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공담으로 변질된 청담사상은 귀족 지배층들에게 심각한 악영향을 끼첬고, 한발 더 나아가 그 전까지 재평가 받고 있던 유교&도교&불교 사상 전반이 모조리 비판받게 되어버리게 되었다. 그 결과 그 전까지 중원 학자들 입장에선 절대악 취급받던 '''법가'''를 재평가 하게 만들었고, 사실상 진나라의 재림인 수나라가 등장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5. 평가


청담은 형이상학적인 주제에 대한 철학적 사유의 확대를 가져와 중국 철학의 이론적 수준을 발달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동진 후기에는 불교 사상의 영향도 수렴하여 노장사상과 불교와 유교가 융합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였고, 이는 남송시대에 성리학이 출현하는 데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노장사상에 기초해서 탈속한 기풍을 강조하는 간결하고 정순한 예술적 풍조를 일으키는 데도 기여하였다. 나아가 명교(名敎)를 벗어난 각 개체 스스로의 전개와 발전을 강조함으로써 개인주의적인 자아의 자각과 개체 의식의 확대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세속적 가치를 벗어나 형이상적 주제에 관한 현리만을 논의하는 청담은 본질부터가 공론에 치우쳐 민생을 돌보지 않게 만드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결국 진짜배기 철학자들 사이를 벗어나 귀족 사회 전체에서 청담이 유행하게 되면서 삶에 대한 쾌락적이며 방관적인 태도가 만연했으며, 세속적 가치를 부정하는 허무와 은둔의 개인주의적인 경향을 낳기도 하였다.
결국 청담은 공담으로 변질되었으며, 그 결과는 말 그대로 청담이 나라를 그르쳤다로 종합할 정도로 국가와 사회에 해악이 가득했다. 따라서 종합적으로 본다면 초기 이론적 사유면에서의 약간의 향상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는 허망한 사상이었다.
[1] 아버지와 정실인 원술의 어머니의 상[2] 그래서 송대 이후 등장한 신유학은 이전의 유학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3] 당초 유가를 창시한 공자부터가 괴력난신을 배격했으니 유가가 괴력난신에 대해 말할 리 없다. 유가에서 괴력난신의 배제를 중요시 여기는 이유가 바로 공자가 롤 모델로 삼았던 주공 단이 바로 은나라의 점복이라든가 인신공양같은 것들을 타파하기 위해 원시 유교를 정립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삼경(시경, 서경, 역경)이 대부분 주나라 때 지어진 것들인데 사람들을 교화해서 괴력난신을 멀리하는 것에 중점을 두는 내용일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공자 역시 춘추전국시대에서 큰 문제였던 예의 실종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하던 사람이었다. 당시에는 사회질서가 무너진 상황이라 하극상이 난무하고 서로가 서로를 호시탐탐 노리던 시절이라 차라리 서열을 정해 그 틀 안에서 행동하도록 하는 것이 훨씬 건전한 상황이었다. 공자는 이 예가 실종된 상황을 괴력난신과 비슷하게 보고 주공 단을 롤모델로 삼아 원래의 건전했던 시절(이른바 요순시대)로 되돌리려고 했던 것이다.[4] 죽림칠현 중 한 명을 아버지로 둔 혜소는 서진의 2대 황제 사마충을 지키다가 죽었다. 즉 충(忠)을 실현한 셈.[5] 진삼국무쌍 7에서 사마의가 이것을 무기로 쓰는데, 사마의가 서진의 시조임을 감안하면 참으로 적절하다.[6] 당연한 것이 놀고 자빠진 자들은 고위 관료가 되고 열심히 일하는 이들은 승진이 막히고 실무가 외면받으며 일하는걸 비천하게 여기며 온갖 사치가 만연한 것이 정상적인 상황일 리 없잖은가?[7] 다만 탁직 중에서도 탁요직이라 하여 청요직처럼 제대로 못하면 경력에 얼룩이 생기지만 제대로 하면 출세에 좋은 자리들도 있었는데 문벌귀족 중에서 권력욕이 많다든가 한 경우에는 일부러 청요직을 마다하고 탁요직에 가는 이들도 있었다.[8] 덤으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유연에게 황제가 될 것을 권하기도 했다.[9] 이는 당시에 유행하던 마약의 일종인 오석산의 영향이 크다. 오석산은 주로 황화수은 결정인 주사와 함께 가루로 섭취하는데, 수은의 부작용으로 피부가 창백해지고 신경이 박살나 다리를 절게 되며, 오석삭 속 비소의 영향으로 여러모로 사람을 폐인으로 만들기에는 최적화되어있었다. 문제는 이 극약을 먹으면서 담론하는게 청담사상의 로망이었다는 것.[10] 그런데 사실 이런 사회불안정과 부패는 지도층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자세한건 구품관인법 참조 허나 이렇게 놓고 보면 더욱 끔찍한 것이 지도층의 문제로 사회불안정과 부패가 발생하고 그러자 지도층이 청담사상에 빠져들고 그럼 또 지도층이 문제가 생기고 사회불안정과 부패가 가속화된다. 그럼 또 지도층은 더욱 청담사상에 빠지는 순환의 고리에 빠지고 벗어날 수 없는 구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