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변
1. 개요
일본의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1918년 (다이쇼 7년)에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과 도쿄 니치니치 신문[1] 에 5월 1일부터 22일까지 연재된 신문소설이다. 총 20화가 연재되었으며,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본인의 짧은 인생 중 가장 윤택했던 시기에 써낸 작품이다. 작가의 소설들 중 톱니바퀴와 함께 가장 긴 소설이다.
일본의 고전인 '우지슈이모노가타리(宇治拾遺物語)'와 '고금저문집(古今著聞集)'의 11권 등에서 소재를 취했다고 추정되며,[2] 작가의 예술이념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소설로 평가받는다.
'지옥변'은 '지옥변상도'[3] 의 줄임말이다.
2. 등장인물
'''1. 요시히데(良秀)'''[4] : 이 작품의 주인공 중 한 명. 화가(絵師)로서 그 지역에선 자타공인 최고의 실력을 지니고 있으나, 인간성이 좋지 못하고 생긴 것마저 고약하게 생긴 노인네.[5] 작중에서 얘기하기를 50세 고개를 넘어가는 노인이라고 한다.[6] 조롱하는 사람들은 요시히데의 행동거지를 원숭이에 빗대어 사루히데(猿秀)라고 부르기도 했다.
'''2. 호리카와 영주(堀川の大殿)''': 통칭 영주님(大殿様)[7] . 이름이 호리카와가 아니라 '호리카와'라는 지방의 영주 되시겠다. 작품 속 최고권력자이며, 묘사에 따르면 성자도 이런 성자가 따로 없을 지경이다. [8] 이 작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사건의, 어떻게 보면 시발점인 사람이다.
'''3. 요시히데의 딸(娘)''': 문자 그대로 요시히데의 딸이다. 이름은 소설이 끝날 때까지 나오지 않는다. 번역가에 따라서는 '여식'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위에 서술한 대로 성질 고약하고 사람들이 모두 피하는 요시히데가 유일하게 사랑을 쏟고 다정하게 대하는 인물. 작중에서 이쁘다는 묘사는 찾기 힘들지만, '깜찍하다.'는 묘사와 함께 '아비하고는 닮지 않았다.'는 결정타성 핵직구로 미모를 암시했다. 호리카와 영주의 시녀로 선택되어 들어갔고, 작중 요시히데와 호리카와 영주가 대립구도를 세우는 결정적 원인이 된다.
'''4. 원숭이(猿)''': 문자 그대로 원숭이. 소설 초반 부분에 등장해 '사루히데'라는 별명이 붙은 요시히데와 대비된다. 괴롭힘당하는 이 원숭이를 보고 요시히데의 딸이 아버지를 투영하여 결국 거두어 돌본다. 그러나 작중 서술을 잘 살펴보면 오히려 요시히데의 딸이 이 원숭이에게 보살핌받음을 알 수 있다. 작품의 클라이막스에서 중요역할을 하는 등장생물.
'''5. 서술자''': 이 작품을 서술하는 사람. 수십 년간 호리카와 영주를 모신 관리로 나온다. 작품의 서술상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3. 줄거리
헤이안 시대. 호리카와의 요시히데라는 화가는 엄청난 실력을 자랑하지만 그에 반해 용모와 성격, 품행이 좋지 않아[9] 흉흉한 소문[10] 까지 돌 정도로 사람들에게 미움받고 있다. 그런 요시히데에게는 외동딸이 한 명 있었는데 아버지와는 달리 성품이 곧고 용모가 아름다워 당시 권세를 누리던 호리카와 영주의 눈에 들며 궁녀(小女房)[11] 로 들어간다. 요시히데는 그 고약한 성품과는 반대로 이 딸에게만큼은 상당한 애정을 주었기에 딸을 영주에게 보내는 것이 불만이었으므로 영주와 사이가 조금씩 나빠진다.[12] 그러던 어느 날, 영주는 요시히데에게 지옥변상도 병풍을 그리라고 명령한다. 눈으로 본 것밖에 그리지 못하는 요시히데는 악몽을 통해 지옥의 모습을 보고, 악몽으로는 부족한 부분의 모습을 묘사하기 위해 제자들을 이용한다. [13]
그렇게 지옥변 병풍의 8할을 그려낼 즈음, 요시히데는 그답지 않게 눈물이 많아지고 슬퍼하는 기색을 보인다. 비슷한 시기에 그의 딸도 점점 침울해하고 눈물이 많아지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던 중, 어느 한 괴한[14] 에 의해 요시히데의 딸이 겁탈을 당할 뻔 한 사건이 있었고, 딸이 기르던 원숭이가 데리고 온 서술자가 목격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요시히데는 도저히 그려지지 않는 한 부분의 재현을 부탁하고자 영주를 찾아간다. 그 부분이란 불타오르는 수레가마 안에서 검은 머리를 흩날리며 타죽는 여인이었다. 영주는 잠시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우더니 이를 허락한다.[15]
2-3일 후, 도성 밖 산장에서 요시히데는 영주와 같이 수레마차를 보게 되나, 그 안에서 쇠사슬에 묶여있는 여인은 바로 요시히데의 딸이었다. 당황하거나 탄식할 새도 없이 수레에 불이 오르고, 요시히데의 딸은 고통스럽게 타 들어간다. 요시히데가 벌떡 일어나있던 그 때, 호리카와의 성에 묶고 온 원숭이가 수레에 뛰어들어 딸과 같이 불타 죽는다.[16] 요시히데는 그 즈음부터 화차이자 불기둥 자체가 되어버린 수레를 보며 이루 말 할 수 없는, 황홀한 법열(法悦)의 광채를 얼굴 만면에 띄며, 사랑하는 딸이 불타고 있는 수레를 행복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영주는 그런 요시히데의 모습을 보며, 창백해지며 짐승처럼 헐떡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지옥변 병풍은 완성되었고, 요시히데의 행적을 비난하던 스님은 그림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절찬을 하고, 영주는 쓴웃음을 짓는다. 그렇게 적어도 도성 내에서 요시히데를 비난하는 목소리는 없어졌으나, 요시히데는 며칠 후 목을 매 자살한다. 그의 묘는 수십 년 후 잊혀진다.
4. 평가
이 작품은 출간되었을 당시에도 호불호가 극명히 갈리는 소설이었다. 작가 특유의 합리적 예술지상주의가 전면에 드러나는 작품으로 일컬어지며, 그의 활동 중기의 대표작으로 내세워지는 소설이지만, 다이쇼시대 당시에는 도덕상의 문제[17] 등으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기도 했다.[18]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 예술지상주의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자, 이 작품을 단순한 도덕상의 문제가 아닌 '예술 vs 권력'으로 보는 것으로 바뀌고 있다. 작가는 모든 것의 가치의 위에 예술을 두었기 때문에, '권력'이 인간적인 부분은 억압할 수 있어도 '예술'은 이길 수 없다 라는 사실을 작품으로서 나타냈다고 해석하는게 요즘의 추세다. 거기에 마지막에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요시히데를 두고 '요시히데도 권력자에 의한 피해자며 권력자에 대해 무언의 항의를 하고있다.' vs '피해자는 딸 한명 뿐이며, 영주의 '권력'이 자신의 '예술'을 이기려 하는 걸 알고, 그 와중에 딸이 희생될 걸 알면서도 '예술'을 내세웠고, '예술가'인 자신이 죽음으로서 그 '예술'을 영원화시켰다.' 로 의견이 나뉘고 있다.
서술자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한 작품이다. 작가는 그의 이상을 그야말로 날것 그대로 내놓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술자가 제 3자인 '3인칭 관찰자 시점'을 채택했는데, 심지어 이 서술자는 영주의 밑에서 일하는 관리이기까지 하다. 한마디로 서술에 객관성을 바라기 어렵다는 말이다. 서술자는 자신이 모시고 있는 영주에게 맹목적인 경외심을 가지고 있고, 그에 반해 요시히데에게는 맹목적인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는 작가가 의도한 것이라는게 드러났다. 실제로 일본의 소설가인 코지마 마사지로라는 사람이 이 소설을 비판하자 작가는 그 비판에 대한 대답으로 편지를 보내게 되는데, 여기에 작가가 '햇볕 설명(日向の説明)'과 '그늘 설명(陰の説明)'[19] 이라는 말을 하며 서술자의 역할을 직접 밝혔다. 우선 '햇볕 설명'이라는 말로 대변되는, 영주의 관리로서 영주를 찬양하고 경외하는 듯한 서술을 하면서, 그 서술로서 실제 이 작품의 숨은 부분을 독자가 추측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그늘 설명')[20] 이러한 역할을 하는 서술자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작가 자신은 작품에서 완전히 방관자의 위치에 서게 된다. 이는 작가의 사상이나 이념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을 숨기게 되는, 그러나 추측할 수 있게 하는 효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여러모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문학적 천재성이 드러나는 대목.
주인공 요시히데가 결국 자살하는 데에 있어서, 결국 이 작품은 작가 자신의 이상적인 삶의 모습을 요시히데를 통해서 보여주지 않았나 하는 평가가 많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이지만, 결국 이 작품의 작가도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인물이다. 그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하는 사람으로서 요시히데의 삶의 방식이 어찌보면 가장 이상적인 삶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세계에 있는 작가는 차마 그렇게 살지 못했고, 자신이 창조해낸 주인공과 비슷한 방식의 죽음을 택했다는 것이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 푸른 문학 시리즈에서도 사카이 마사토의 소개 멘트를 통해 "'''예술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인 지옥변은 어쩌면 작가 아쿠타가와 본인의 미래를 암시한 것인지도 모릅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소설가인 김동인의 소설 광염소나타, 광화사와 비교하는 연구도 상당히 많이 진행되었다. 예술지상주의, 그것을 강조하기 위한 도덕의 위반[21] 등등 나름 공통점이 많다. 이는 동시대에 활동했던 작가임과 동시에, 김동인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가 연구를 통해 많이 발견이 되면서 아귀가 맞아 떨어지게 된다.
김래성의 소설 '악마파'도 '지옥변'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았다. 이 소설은 1965년 라디오 드라마로 방송되었으며, 1985년 MBC 베스트셀러극장으로 드라마가 되었다. (원작소설 배경은 일제시대이지만, 드라마는 현대로 바뀌었다.)
극중 화자인 김군 김용건에게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동생 루리 황신혜가 있는 데, 그의 두 친구 노단 조경환과 백추 유인촌은 루리를 놓고 경쟁한다. 노단은 건장한 체격에 강압적인 부잣집 아들인 반면, 백추는 가난한 절름발이이다. 성격, 외모, 가정환경이 상반된 두 사람이지만, 둘 다 악마적 화풍을 추구하는 악마파 화가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으며, 또한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상대방에게 열등감을 품고 있다. (백추는 노단의 건강한 육체를, 노단은 백추의 재능을....)
결국 루리는 노단과 결혼하지만, 신혼여행으로 금강산에 갔다가 사라지고 만다. 아내를 잃은 노단은 비통에 빠져 점점 수척해지다가 금강산에서 음독자살을 한다. 그의 시신 옆에는 '빈사의 마리아'라는 그림이 놓여있었는 데,거기에는 벼랑 끝 나뭇가지에 매달린 루리의 모습이 있었다. 그림을 본 김군은 노단이 아내의 살려달라는 절규를 외면한 채 그림을 그렸다는 결론을 내리고, 노단의 유작 전시회에 이 그림을 전시한다.
얼마 후 김군에게 그림 한 장이 배달된다. '부시도(腐屍圖)'라는 그림 속에서 썩어가는 여자 시체는 루리였다! 동봉된 백추의 편지에는 사건의 전말이 담겨 있었다. 백추는 그림을 그리러 금강산에 갔다가 루리와 조우해서 그녀의 손목을 잡지만, 루리는 손목을 뿌리치다 벼랑에 떨어져서 그에게 도움을 청한다. 하지만, 그 장면을 보고 창작욕이 발동한 백추는 캔버스를 세우고 그 모습을 그림에 담는다. 결국 루리는 떨어져 죽지만, 백추는 그 시신을 보고, 또 다른 그림의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루리의 시신을 서울에 사는 자기 집(토굴)에 몰래 옮긴다. '빈사의 마리아'를 완성하기 위해 사건현장을 다시 찾아간 백추는 음독자살한 노단의 시신을 발견하자, 자신이 막 완성한 '빈사의 마리아'를 놔둔다.
다시 서울로 돌아간 백추는 자신이 감춰둔 루리의 시신을 보며 '부시도'를 완성한 뒤 김군에게 보내며, 자신의 마지막 걸작을 세상에 꼭 발표해 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5. 여담
일본의 근대 문학작품이 으레 그렇듯, 이 작품도 드라마와 영화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먼저 만들어진 작품은 가부키작품이다.(1953년 11월 18일 집필, 동년 12월 5일 공연.) 드라마가 1962년 6월 2일에 NHK교육TV에서 무용극의 형태로 방영했다. 마지막으로 영화는 1969년 9월 20일에 개봉했다. 주인공 요시히데 역할은 일본 유명 배우인 나카다이 타츠야가 연기했다.[22] 참고로, 가부키와 드라마의 각본 집필은 그 유명한 미시마 유키오가 담당했다.
슈에이샤가 주관한 푸른 문학 시리즈의 12화의 원작이다.[23] 성우는 요시히데에 사카이 마사토, 영주에 나미카와 다이스케, 요시히데의 딸[24] 에 엔도 아야가 캐스팅되었다. 참고로 주인공 성우 이외의 단역들 연기가 절륜하다.... 그리고 원작을 각색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기본 골자를 제외하고 거의 리부트에 가깝게 만들어 놓았게 때문에 원작을 먼저 접하고 이 12화를 본다면 상당한 괴리감을 느낄 수도 있다.[25]
지옥변의 등장인물인 호리카와 영주는 그 아들과 함께 <사종문(邪宗門)[26] >이라는 아쿠타가와 자신이 쓴 장편소설에서 다시 한 번 등장한다. 작중 지옥변의 스토리가 스쳐지나듯 언급이 되는 등 후속편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애초에 이 소설은 미완성으로 끝났다. 내용은 수도에 나타난 괴이한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이게 고명한 고승들을 상대로 술법 싸움을 걸고 그들을 차례 차례 쓰러뜨리며 자신들의 가르침을 따르게 하고 부처를 우상이라고 지칭하면서 "우리 하나 뿐인 신을 믿어야"라고 하는 판이 아무리 봐도...
[1] 후에 각각 마이니치 신문의 오사카 지부와 도쿄 지부가 된다.[2] 우지슈이모노가타리에 실린 원전 이야기는 화가의 집이 불타서 그야말로 몸뚱어리 빼고는 다 날아간 판이건만, 집과 재산이 홀랑 타버리는 걸 보면서도 슬퍼하기는커녕 "'''지금까지 초열지옥을 어떻게 그릴까 고민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며 기뻐 웃는 화가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줄거리다.[3] 지옥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지옥에 떨어진 죄인들이 보기만 해도 끔찍하고 고통스러워 보이는 형벌을 받는 모습을 그려, 생전에 선하게 살도록 유도하는 교훈을 주려는 목적이었으며, 우리나라나 일본의 옛 귀족 혹은 양반들은 유명한 화가들에게 이 그림을 그리게 해 자신들의 집에 모셔놓았다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 지옥변상도의 대표적인 작품은 해인사 사간장경에 수록된 <시왕경>의 변상이라고 한다.[4] 우지슈이모노가타리에서는 음독으로 '료슈'로 읽고 있다. 한자는 동일.[5] 소설 속 묘사로는 '그저 키가 작고 뼈에 거죽만 붙은 앙상하고 성질 고약하게 생긴 노인'이라고 나온다.[6] 이 소설이 쓰여지는 당시인 다이쇼 시대라고 해도 50세는 노인 취급받는다. 하물며 이 소설의 배경은 그보다 훨씬 전인 헤이안 시대 무렵이다. 50세면 장수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7] 작품의 번역가에 따라 각자 다양한 단어를 사용하지만 대체적으로 '영주'로 쓴다.[8] 물론 '''서술 상'''의 묘사에 불과하다.[9] 인색, 무뚝뚝, 철면피, 나태, 탐욕, 그리고 건방짐 등[10] 신령이 내려 끔찍한 예언을 하는 무녀 앞에서 갑자기 먹과 붓을 꺼내고 그 무서운 얼굴을 아무렇지도 않게 그리고 있었다는 둥, 그가 그린 그림은 항상 기괴하고 으스스하다는 둥, 그의 그림에 그려진 마님들이 3년이 채 지나기 전에 혼이 빠져나가는 병에 걸려 죽었다는 둥 정말 여러 소문이 있다.[11] こにょうぼう. 어린 궁녀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12] 요시히데는 계속해서 딸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반면 영주는 그 청을 늘 거절하며 점차 요시히데에게 반감을 품는다. 영주가 요시히데의 딸을 탐한다는 증거.[13] 제자를 쇠사슬로 묶어 몸부림치게 한다든지, 괴조에게 쫓기게 한다든지 하여, 그 모습을 미친듯이 그림으로 옮겨낸다.[14] 호리카와 영주. 서술자의 묘사로 추정이 가능하다.[15] 이 장면에서 영주에 대한 묘사가 재밌다. "입가에는 허연 거품이 고여있었고, 눈썹 언저리에는 씰룩씰룩 번개가 치고 있어, 마치 요시히데의 광기가 옮은 것 같다." 서술로 나오는 영주의 모습이 뭔가 이상함을 느낄 수 있는 장면.[16] 요시히데의 인간적인 부분의 완전 소멸을 뜻한다고 평가된다.[17] 딸이 불타죽는 것을 내버려두고 예술에 집착한 요시히데 등.[18] 다이쇼 후기에 등장하는 프롤레타리아의 영향으로, 실제 이 작품을 비판했던 지식인은 거의 좌파계열 문학을 하던 사람들이다.[19] 일본어에서의 그늘(陰)은 숨은, 혹은 어두운 같은 의미를 잘 가진다.[20] 영주를 찬미하다가도 무언가 불합리한 서술을 하여 영주의 본모습(폭정을 하는 독재자)을 추측하게 하는 것이다.[21] 딸의 화형을 지켜보며 그림을 완성해내는 지옥변의 요시히데, 방화와 시체모욕, 훗날 살인까지 저지르며 음악을 만들어내는 광염소나타의 백성수, 진정한 아름다움을 가진 눈을 찾으려다 자신의 유일한 이해자를 살해해버리는 광화사의 솔거.[22] 1932년생으로 원작 작가가 자살하지 않았다면 동시대를 살아갔을 인물이다. 2018년 기준 만 85세이지만 아직까지 현역 연기자로서 활동하고 있다.[23] 참고로 11화도 같은 작가의 소설인 '거미줄'이다.[24] 여기서는 '미즈키'라는 이름을 얻었다.[25] 전편인 11화 '거미줄'에서 스토리가 바로 이어지게 만들었기 때문인 것 같다. 원작에서는 다소 거리를 두고 묘사해 독자들에게 여러 가지 입체적인 해석을 할 수 있게 했던 것에 비한다면 주인공인 요시히데 부녀를 거의 저항예술가에 가깝게 설정해 놓았다고나 할까...[26] 참고로 시인 키타하라 하쿠슈의 작품 중에도 동명의 시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