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채문

 

'''현종의 호위장교
지채문
'''
'''직위'''
'''무관직'''
중랑장(中郞將)
'''상장군(上將軍)'''[1]
'''문관직'''
우상시(右常侍)[2]
'''우복야(右僕射) / 좌복야(左僕射)'''[3]
'''본관'''
봉산 지씨(鳳山 智氏) / 봉주 지씨(鳳州 智氏)
'''이름'''
채문(蔡文)
'''생몰연도'''
? ~ 1026
1. 개요
2. 거란의 2차 침입 때의 활약
2.1. 거란의 침공을 맞아 싸우다
2.2. 왕의 호위무사
3. 평가
4. 후손에 대하여
5. 대중 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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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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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왕조 현종 원문대왕 대의 문관이자 무관. 봉산 지씨라는 것만 알려져 있을 뿐 어린 시절 생애는 알 수가 없다. 그가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거란의 2차 침공 당시부터다.

2. 거란의 2차 침입 때의 활약



2.1. 거란의 침공을 맞아 싸우다


고려 현종시기에 중랑장[4]으로 임명되어 직무에 임하던 중에 거란의 제2차 침공을 맞게 되었다. 지채문은 이때 군대를 통솔해 동북면[5]의 진수에 나섰다. 이후 강조가 이끄는 고려군이 통주 전투에서 대참패를 당해 서경이 위험해지자 현종의 명으로 서경을 지원하러 출전했다.
이 당시 서경의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다름 아닌 서경 내부에서는 거란에 대한 항복론이 우세했던 것이다.[6] 그래서 거란군의 사절과 통주 전투에서 거란군에 항복한 노의 등의 배반자들의 설득에 따라 거란에 항복하기로 결정되어 있었다. 당연히 고려를 버리고 거란에 투항하기로 결정이 났기 때문에 서경에서는 고려의 지원군에 문을 열어주지 않았는데, 서경 내부의 내통자의 도움을 받아 서경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지채문이 서경에 들어가기만 했다고 해서 서경성의 분위기가 크게 바뀌는 일은 없었는데, 서경 유수 원종석은 지채문과 최창 등의 설득을 거부하고 항복을 고수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지채문은 거란의 사절들이 거란 군진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매복하고 있다가 그들을 암살해버렸다. 한마디로 항복할 길을 막아버린 것. 물론 서경성 내의 불안이 완전히 가시진 않았지만, 후에 지채문이 탁사정의 군대와 합치니 평양성은 약간이나마 안정을 되찾았고, 고려군은 다시 임전 태세를 갖추게 되었다.
그 무렵 고려 조정은 시간을 끌기 위하여 항복 사절을 보냈는데[7] 거란 성종은 이를 믿고 서경에 점거병력을 보냈다. 물론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지채문과 탁사정이 내보낸 정예 기병들이었고, 그들은 몰살당했다. 이 승리로 인해서 고려군은 사기가 약간 올랐고, 지채문이 성을 나가 주둔함으로서 야전을 준비하게 된다.
이후에 거란군이 공격해 왔는데, 지채문은 탁사정과 군사를 합쳐 이들과 싸워 3,000여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지만... 그 다음날에 거란군을 추격하다 역습당해 패주한다.

2.2. 왕의 호위무사


지채문은 개경으로 복귀했고, 서경에서의 전황이 불리하다는 소식을 전했다. 없는 병력을 긁어모아 보낸 병력마저 상황이 그러했기에 고려 조정은 패닉에 빠졌다. 당장 조정엔 항복론이 대두되고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다.
물론 귀주 대첩의 주역인 당시 예부시랑이었던 강감찬이 몽진을 강력하게 주장하고[8] 현종이 이를 수락함으로서 몽진을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때 지채문은 선뜻 왕 앞에 나아가 왕의 호위를 자청했는데, 현종은 크게 감동하여 '''전날 이원, 최창이 도망해 와서 수행하겠다고 자청하더니 지금은 다시 얼굴조차 볼 수 없으니 신하 된 도리에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이제 그대는 전선에서 수고했는데 또 나를 호위하겠다 하니 내가 그 뜻을 가살히 여기노라'''고 했을 정도였다.
어쩃든 드디어 왕이 몽진을 떠났는데 금군 50명과 왕후와 후궁, 그리고 채충순 등으로 왕의 몽진 일행으로는 매우 단촐했다. 그런데 적성현[9][10]에 있는 단조역에 도착했을때 '''군졸 견영이 단조역에 있던 인원들을 모아 활을 겨누며 현종 일행을 위협하는 위기가 닥쳤다.''' 다행히 지채문이 '''말을 타고 활을 쏘아''' 그들을 물리쳤다.
간신히 변란을 무마하고 현종 일행은 창화현[11]에 도착했다, 그런데 창화현 아전[12]이 현종에게 '''왕은 저의 이름을 아십니까?'''라며 거만을 떨며 지극히 무례한 행동을 범했다. 현종이 그의 말을 무시하자 화를 내며 "하공진이 온다"며 소란을 피우고 다녔고, 이 때문에 현종 일행의 대다수가 도망쳐 버리고 만다.[13] 물론 이 정도로 끝났으면 괜찮았겠지만, 결국 일은 터졌다. 다름아닌 '''이날 밤에 정체를 모르는 적들의 습격을 받은 것이다.'''
정말 왕의 목숨이 위험한 지경이었다. 그 당시에는 왕을 호위하던 궁인들 및 관원들도 '''모두''' 도망가 숨고 두 왕후와 승지들, 그리고 지채문만이 현종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지채문은 침착하게 임기응변을 발휘, 적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는 슬쩍 두 왕후를 북문으로 나가게 하고는 그 다음에 자신이 직접 왕을 호위하여 탈출했다.
이후 지채문은 창화현에서의 일이 하공진의 수작이 아닐 것이라 생각하고, 창화현으로 정찰을 가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현종에게 요청했는데, 많은 신하들이 난리 통에 자신을 버리고 도망가는 것을 본 현종이 지채문을 쉽게 보내 줄 리가 없었다. 그러자 지채문은 ''' "제가 임금를 저버리고 말과 행동이 다르다면 하늘이 반드시 벌을 내릴 것입니다."'''라는 간지폭풍 말을 남기며 왕을 안심시키고 허락을 맡는다.
하공진의 결백을 확인한 지채문은 하공진의 병력과 함께 창화현에서 잃어버린 말과 안장을 찾아 왕을 모시고, 전쟁이 끝나자[14] 현종이 남쪽으로 몽진하는 것을 수행했다. 이때 현종을 따르고 있던 류종과 김응인이 "두 왕후를 각각 그의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경위하는 장병들은 동쪽 방면으로 출동시켜 긴장된 사태에 대비해야 합니다."라는 말을 하는데, 이 말은 전쟁으로 흉흉해진 민간의 한복판에 임신한 국모들을 내버리자는 말이었다. 즉 한마디로 '''개소리''',[15] 지채문은 울면서 '''지금 임금과 신하들이 모두 자기 도리를 잃고 환난을 당하여 이처럼 파천하게 되었으니 이 때가 바로 인과 의로써 행동하여 인심을 수습할 때인데 왕후를 버리고 혼자만 살 길을 구하자는 생각을 차마 할 수 있단 말씀입니까?'''라고 간절히 간하여 현종이 이에 찬동하고 류종의 의견을 묵살한다.[16]
이어 현종 일행이 사산현에 이르렀는데, 현종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기 위하여 지채문이 논에 내려앉은 기러기떼에 말을 달려 기러기뗴를 놀라 날아가게 한 뒤, 그중 한 놈을 '''마상에서 자신의 몸을 제친 상태에서''' 활을 쏘아 맞추어 떨어뜨린 후, 말에서 내려 활로 쏘아 잡은 기러기를 왕에게 바치면서 ''' "이렇게 활 잘 쏘는 신하를 두셨으니 도적이 있은들 무슨 걱정이 있으리까?"'''라고 말하니 현종은 크게 웃었다고 한다.
이후에 임금을 호위하는 병사들이 모두 불만을 품자 이들을 포상하여 달래줄 것을 건의해 관철시켜 장병들의 마음을 달랬다.
그런데 문제는 '''환란이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현종이 전주에 도착하니 전주 절도사 조용겸이 왕을 끼고 천하를 호령할 생각이었는지 군사들을 이끌고 왕이 머무는 전각앞으로 전진했는데, 지채문이 전각의 문을 닫고 굳게 지키면서 왕을 호위했다. 물론 지채문이 조용겸의 수하 중 하나를 질책해 현종을 만나 뵙고 조용겸을 따르지 않게끔 했다. 결국 지채문의 기지가 다시 현종을 구한 것. 이때 전주가 후백제의 땅으로써 태조가 미워했다는 이유를 들어 나주로 몽진하게끔 이끈다. 또한 나주에서도 거란의 사절을 거란군이 쳐들어 온 것으로 오해한 야경꾼이 잘못된 증언을 해서 현종은 극도의 불안감에 휩싸여 바로 (거란군을 피해) 달아나려 했는데 지채문이 현종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직접 정찰을 나가 이들이 거란의 군대가 아니라 사신임을 확인했다.
이후 1026년(고려 현종 17년)에 세상을 떠났다.

3. 평가


'''2차 여요전쟁 이후까지 현종을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에서 여러번 구했던 구국영웅이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거의 혼자서 현종을 지켜냈다. 모두가 달아나버린 상황에서도 굳게 현종을 호위하고, 또 활로써 현종을 안심시켜 드리는 모습을 보아 활만 잘 쏜 것이 아니라 왕에 대한 충성심도 뛰어났던 강심장이었던 듯하다.
이후 현종이 환도하여 교지를 내렸는데, '''"내가 적의 침략을 피하여 허둥지둥 먼 곳으로 피난할 때 따라오던 신하들이 모두 도망갔으나 오직 지채문만은 풍상을 무릅쓰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면서 말 모는 수고도 서슴지 않고 끝내 송죽같은 절개를 세웠으니 그 특출한 공훈을 생각할 때 내가 어찌 그 특이한 은전을 아끼리오?"''' 라고 했다. 현종이 지채문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잘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강감찬과 더불어 환란 때 왕의 측근으로써 고려를 구한 인물이지만 안타깝게도 대회전에서 대승을 거둔 강감찬이랑 달리 화려한 전공이 없어선지 인지도는 영 좋지 않다.[17]

4. 후손에 대하여


지채문은 위대한 인물이었으나 그의 후손은 그렇지 못했다. 증손은 지녹연(智祿延)인데 그는 오만방자하였다지만 재능은 뛰어났다고 전해지고, 지녹연의 아들인 지지용이 고려 인종때 근왕 반란을 일으켜 이자겸 일당을 없애려다가 실패한후 사지가 끊겨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 그의 더 먼 후손은 의종 때 송나라가 고려를 공격할 때 내응하겠다는 반란을 도모하다가 들켜 모조리 사살되었고, 지채문의 가문은 몰락하고 만다.

5. 대중 매체


드라마 천추태후에서 당시 만 23세였던 배우 전승빈[18]이 연기하였다.
지채문이 죽은 지 5년 후에 비슷한 시기에 다같이 죽은 고려 현종, 강감찬, 천추태후, 요 성종에 비하여 일찍 죽은 인물이어서 너무 젊은 배우가 아닌가 싶긴 하지만 어차피 생년이 불명이고 2차 거란전쟁 당시 역임했던 직급이 정5품 중랑장[19]으로 상대적으로 낮은지라 젊은 신인 꽃미남 배우를 활용하지 않았나 싶다. 드라마에서는 활과 칼 등의 다양한 무기를 잘 다루는 무예가 출중한 꽃미남 인간흉기로 나오며, 거의 혼자서 현종을 지키는 모습을 인상적으로 진중하면서도 다이나믹하게 잘 그려내었다.

[1] 정 3품 직위. 무관직 중 최고위 직위.[2] 중서문하성 소속 직위로 서열 6위.[3] 좌복야, 우복야는 동급의 직위로 상서성의 장관이다.[4] 오늘날로 치면 대령급 장수.[5] 아마도 개경과 서경 사이의 동계 지역일 가능성이 크다. 만약 북계였다면 서경이 포위당했을 당시에 지채문이 신속하게 구원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6] 아마 이것은 고려군이 겪은 통주 전투의 대패의 영향이라 생각된다. 주력군이 궤멸당한 상황에서 서경이 생각할 수 있는 목숨을 보전하는 방법은 항복밖에 길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던 것이다.[7] 물론 고려사에는 항복 서신을 보내는 이유가 그럴듯하게 제시되어 있지만 고려가 서경에 없는 군사를 모아 파견한 것을 보면 분명 항전의 의지가 있었다고 보아야 옳다.[8] 사실상 항전하자는 것이나 다름없다.[9]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10] 전왕 목종이 시해당한 곳이기도 하다.[11] 지금의 경기도 양주시 회천읍.[12] 고려시대의 아전은 해당 지역을 지배하는 호족이다. 조선시대의 힘없는 아전과는 다르다.[13] 하공진을 두려워한 이유는 하공진이 변방에서 저지른 일 때문에 유배를 떠난 적이 있었다. 즉, 자신을 귀양 보낸 왕에 대한 원한이 없으리라고 장담하긴 힘든 상황이었던 것.[14] 1011년 1월에 거란군이 개경을 불태우고 회군함으로써 일단은 종결되었지만 퇴각하는 거란군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친 양규의 전투까지 합하면 2월까지이다.[15] 이것의 문제는 왕 호위, 왕비 호위 따로 해야 한다는 건데 자칫 잘못해서 왕비쪽이 잡히기라도 하면 현종은 난처해진다. 당장 이 일이 있기 훨씬 이전의 고구려고국원왕 시기에 전연모용황이 쳐들어왔을 때도 왕의 어머니와 왕비가 잡히는 일이 발생했고, 이때보다는 이후지만 병자호란 시기에는 청나라에 의해서 민회빈 강씨, 효종을 비롯한 왕실 일가들이 잡혔다. 결국 두 사례 모두 이로 인해서 항전의지가 꺾여 침공한 측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으며 잡힌 이들은 오랫동안 인질생활을 해야 했다. 즉 왕비가 잡히면 단순히 왕비가 잡히는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빌미로 거란이 고려의 항전의지를 꺾게 만들려고 할 수가 있다. 그러면 전쟁은 고려의 패배로 끝나는 거고.[16] 물론 이후에 현종이 현덕왕후가 임신중이라는 이유로 고향에 보낼 것을 상의하자 지채문은 반대하다가 사세부득을 깨닫고 동의한다.[17] 정작 강감찬은 2차 여요전쟁에서 몽진을 주장한 것 외에 존재감이 전혀 없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존재하는데 다른 신하들처럼 왕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것 또 다른 하나는 명령으로 다른 곳에 파견나갔다는 것이다.[18] 같은 드라마에 천향비로 출연한 공대아름이 홍인영의 남편이었다.[19] 그런데 그 중랑장도 대령급 장수여서 그다지 젊은 직위는 아니었다. 다만 같은 중랑장인 하공진보다는 아래로 나오니 짬대령이 아니라 신참대령이지만 어차피 그게 그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