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조(고려)

 

'''對 의군천병 임시군단 행영도통사
강조'''
'''역임 직위'''
중추사(中樞使)[1] - 우상시(右常侍)[2]
서북면 도순검사(西北面 都巡檢使)[3]
중대사(中臺使)[4]
이부상서(吏部尙書) - 참지정사(參知政事)[5]
'''주군'''
목종
현종
'''본관'''
신천 강씨(?)
'''이름'''
강조(康兆)
'''생몰년도'''
964(?) ~ 1010
1. 개요
2. 본관
4.1. 왜 직접 출전했는가?
5. 장렬한 최후
6. 평가
6.1. 인물 비교
7. 대중 매체에서
7.1. 드라마 천추태후
8. 같이보기


1. 개요


고려 초기 문관이자 권신. 김훈-최질의 난,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무신정변을 거쳐 위화도 회군까지 이어지는 고려 왕실 쿠데타 수난사의 시초격 인물.
위기에 처한 목종이 자신을 보좌할 인물로 택했을 정도로 신뢰를 받았으나 정변을 일으켜 그를 시해하고 현종을 옹립한 권신이다. 거란이 고려를 침범하자 직접 상대하러 출정했고 초반에는 선전했으나 한순간의 실수로 패배했다. 권신이었던 까닭에 요성종의 회유를 받았으나 완강히 거부하다 사망했다. 이렇듯 국왕 시해와 충성스러운 최후란 대비되는 면모로 인해 지금도 세간의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다.
그가 역임한 직위는 모두 문관직[6]이지만 오랜 기간 북방에 나가있었다는 것과 본인이 군대 지휘에 거리낌이 없었고 주변의 반대도 없었다는 점은 강조가 일반적인 문신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며 오히려 무신에 더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 사람이다.

2. 본관


'반역자'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가문의 내력이나 성장 과정에 대해서는 《고려사》 열전을 비롯해서 어느 곳에도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따라서 정확한 출신지도 알 수 없으나 일단 신천 강씨 집안 사람일 가능성이 유력하다.
그렇다면 황해도 신천이 출신지일 가능성이 높고 이른바 패서 호족 계열의 인물이었을 것이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강태주(康泰周)의 아들이고 이부상서를 역임했다고 한다. 신천 강씨 족보에는 시조 강충(康忠)부터 그 14세손인 중시조 강지연(康之淵)까지 독자(하나의 아들)로만 이어지는데 강충의 7세손(강지연의 6세조)로 형부상서를 지낸 강태주라는 인물이 있고 이부상서를 역임한 강억(康億)이라는 인물이 강태주의 아들(강지연의 5세조)로기록되어 있다. 강조는 정변 이후 이부상서가 되었으며 조(兆)는 억(億)의 만 배이다. 따라서 강조의 후손들이 강조가 반역자로 분류돼서 족보에서 이름을 지우고는 싶은데 그게 자신들의 직계 조상이라 차마 지우지 못하고 남들이 모르게 이름만 비슷하게 바꾼 것 아닐까 하는 의견도 있다.

3. 강조의 정변



강조는 서북면 도순검사로서 북방 군대를 순찰하고 있었다. 어머니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자신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품자 목종은 강조를 내려오게해 자신을 호위하게 한다. 하지만 강조는 도리어 목종을 폐위시키고 대량원군을 옹립한다.
1009년 2월 3일 강조는 본격적으로 움직인다. 합천에서 갓 도착한 17세의 대량원군을 즉위시킨 뒤 목종을 폐위하고 양국공(讓國公)[7]으로 끌어내린 뒤 고향 충주로 가고자하던 그를 부하인 김광보와 안패를 보내 현 경기도 파주시인 적성에서 시해한다. 이후 천추태후를 황주로 유배시키고 친족을 섬으로 유배, 김치양과 그의 6살 아들, 목종에게 빌붙어 전횡을 일삼던 유행간 등을 처형하여 천추태후-김치양 세력과 자신에게 걸림돌이 될만한 이들을 완전히 숙청한다.
강조는 이어서 2월에 중대사(中臺使)[8], 3월에 이부상서(吏部尙書)[9] 및 참지정사(參知政事)[10]로 승진해 요직을 차지한다.
강조가 목종을 폐위한 이유에 대해서는 2가지 설이 있는데 강조가 목종이 시해되었다는 거짓 정보를 듣고 개경 근교까지 휘하 군을 이끌고 진군하였는데 목종이 멀쩡히 살아있다고 하자 이미 여기까지 군대를 끌고 와버렸는데 반역으로 몰릴까 두려워 폐위시켰다는 설과 강조가 평소에 우유부단하고 추문이 많은 목종에게 불만을 품고 새로운 왕을 옹립하기 위해 폐위했다는 설이 있다.

4. 거란의 침입


'''고려의 행영 군단'''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
'''참지정사(參知政事) 강조'''
'''행영도통부사(行營都統副使)'''
'''중대부사(中臺副使) 이현운'''
'''병부시랑(兵部侍郞) 장연우'''
'''판관(判官)'''
'''기거사인(起居舍人) 곽원'''
'''시어사(侍御史) 윤징고'''
'''시어사(侍御史) 도관'''
'''원외랑(員外郞) 노전'''
'''수제관(修製官)'''
'''우습유(右拾遺) 승이인'''
'''서경장서기(西京掌書記) 최충'''
'''통군사(統軍事)'''
'''형부상서(刑部尙書) 최사위'''
'''휘하 장병'''
'''300,000 명'''
그런데 문제는 북적(北狄) 거란이 호시탐탐 고려를 노리고 있었다는 것. 요성종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거란과 잘 지내던 목종을 함부로 시해한 반역자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명분으로 의군천병(義軍天兵)[11]이란 이름을 붙인 40만 대군을 직접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다.
물론 요성종이 진짜로 목종을 시해한 죄를 묻기 위해 침공한 것은 아니다. 주요 이유는 당시 거란이 맞수였던 송나라와 일종의 휴전 협정인 전연의 맹을 맺고 한숨 돌린 틈을 타 자신들의 후방을 든든히 하려는 목적이 컸다. 중원을 차지하려면 일단은 송나라와 친하게 지내던 후방의 가시같은 고려를 먼저 잠재워야 했고 마침 고려가 내부적으로 혼란스러워지자 곧바로 쳐들어온 것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된 강조는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12] 직위를 받아 군권을 위임받고 직접 출진한다. 사료에서는 조정의 명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본문에 언급했듯이 강조가 이미 실권을 장악했고 그 과정도 자발적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군권의 위임 과정도 조정의 결재는 요식 행위이고 강조 본인이 처음부터 계획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여튼 거란의 침공에 대해 고려는 30만 대군[13][14]을 소집하였다.
거란군이 국경 지역인 흥화진에서 양규가 지휘하던 고려군에게 고전을 면치 못하자 요성종은 약간의 별동대를 귀주 방면으로 보내고 본대는 빠르게 강조가 주둔한 통주로 진군하여 이틀 만에 도착하게 된다. 야전으로 승부를 보기로 한 강조는 전체 부대를 셋으로 나누어 한 부대는 전면, 또 한 부대는 배후 요새와 전면에 나선 부대 사이의 후퇴로를 지키기 위해 성 근처, 나머지 한 부대는 주변 고지에 주둔시켜 굳건히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하천을 기병 기동을 방해하는 천연 참호로 이용하여 측면 강습을 막고 전면에는 검차(劍車)를 배치하여 첫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에 대한 기록을 보면,

兆引兵 出通州城南. 分軍爲三 隔水而陣.

一營于州西據, 三水之會, 兆居其中

一營于近州之山,

一附城而營.

兆以劒車排陣 契丹兵入, 則劒車合攻之, 無不摧靡. 契丹兵屢却, 兆遂有輕敵之心, 與人彈棋.

조가 군대를 이끌고 통주성 남쪽으로 나아갔다. 군사를 셋으로 나눠 물과 거리를 두고 진을 쳤다.

하나는 통주 서쪽에 쳤는데 세 강물이 만나는 곳으로 조는 이 곳에 머물렀다.

하나는 통주 근처의 산에 쳤으며,

하나는 성에 붙여서 진영을 만들었다.

조는 검차로 진을 세워 거란병이 들어오면 검차로 합공하니 (거란병이) 꺾거나 쓰러뜨릴 수가 없었다. 거란병이 번번히 퇴각하자 점차 적을 가볍게 여겨 사람과 탄기나 했다.

『高麗史』 卷127 「列傳」 40 ‘叛逆’ 1


지속적으로 거란군을 밀어내는데 성공하자 강조는 긴장이 풀렸는지 점차 방심하기 시작했다. 거란군은 대군이 한번에 들어가지 못하니 전략을 바꿔 소수 부대로 빠르게 치고 나오기로 한다.
그리하여 선봉 야율분노, 야율적로를 파견해 삼수 쪽 진영을 치고 빠지는 식의 속도전으로 나온다. 허나 강조는 처음 삼수 쪽 진영, 즉 자신이 있는 진영이 뚫렸다는 보고를 받고 믿지 않았다. 아니면 소수만 잠시 들어온 것으로 여겼다.

"如口中之食 少則不可宜. 使多入."

"마치 입안의 음식처럼 적으면 만족스럽지 않다. 더 들어오게 해라."

이 때 강조의 부대를 격파하는데 선봉에 선 부대가 '우피실군'인데[15] 거란군의 최고 정예인 이들의 기동력이 강조의 예상보다 훨씬 뛰어나서 미처 고려군이 협공하기도 전에 지휘부가 붕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적이 이미 안까지 깊숙히 들어왔다는 보고를 또 받자 그제서야 일어나 사태를 깨닫는다. 다른 두 진영이 협공하기 전에 자기 진영이 무너지자 졌음을 깨닫고 무릎을 꿇고 일어나지 못했다. 고려사는 이때 강조가 목종의 귀신을 본듯 계속 죽을 죄라며 허공에다 사과했다고 한다.
한편 강조의 방심이 한몫하기는 했지만 일부 평가에서는 전술적 부분보다는 병사들의 숙련도가 강조의 지시에 대해 그만큼 빠르게 반응하지 못한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혹은 제 아무리 많은 병력이 있어도 한군데 뭉쳐 기동력이 제한되어버리면 그냥 앞줄의 병사 때문에 안쪽의 병사들은 우왕좌왕 해버려 뭉치가 되어버리기 십상인데 이런 점을 이용해 강조는 거란군은 기동력을 우선시하는 군이라 이를 제한시켜버리면 승리할 수 있을거라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일반적으로 크게 나쁘지는 않은 판단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거란이 그것을 무시할 정도의 엄청난 기동력을 보여줬다는 것. 실제 거란이 기동력을 살려 소수 정예군만으로 휘젓는다면 정예 기피실군이 많은 손상을 입기는 하겠지만 엄청난 기동력을 회복하니 전 같은 몰아죽이기 전략은 안 통했을 것이다. 결국 거란은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전략을 썼고 강조는 이 점을 놓친 것이다.
이상 전투의 자세한 흐름은 통주 전투 문서 참조.

4.1. 왜 직접 출전했는가?


강조는 고려의 실권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개경에 머무르지 않고 최고 사령관으로써 직접 출전했다. 거란군에게 포로로 잡혔을 때의 행적을 보면 고려의 장수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출전했다는 해석도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강조가 책임감이 부족했다고 해도 출전이 불가피했다. 강조는 막 정권을 장악한 상태여서 권력 기반이 불안정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거란이 자신의 집권을 명분으로 침공했는데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반대 세력에게는 '강조 저놈 때문에 거란이 쳐들어 왔는데도 자신은 겁나서 출전도 하지 않고 있다'라는 비판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게다가 30만이라는 대규모 병력을 지휘해야 하는 상황인데 강조에게는 자신을 대신해서 병력 지휘를 맡겨서 출전할 정도로 신뢰할 수 있는 인사가 전혀 없었다. 신뢰 이전에 그런 능력과[16] 위치를 가진 인사부터가 없었다. 결국 본인이 출전해야 했던 것.

5. 장렬한 최후


[image]
고려 강조를 묶어가는 거란 우피실군을 그린 상상화.

"契丹兵已至, 縛兆裹以氈載之而去."

"거란군이 들어와 강조를 결박한 후 담요로 싸서 운반해 갔다."

『高麗史』 卷127 「列傳」 40 ‘叛逆’ 1

고려사》에서는 이때 강조가 목종의 혼령을 보고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며 무릎 꿇고 빌었다고 전한다. 이후의 장렬한 죽음과 연관해 볼 때 뒤늦게나마 자신의 행위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깨닫고 목종을 떠올리며 후회한 것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후세인들이야 고려가 거짓말처럼 승리할 것을 알고 있지만 당시 강조 입장에서 거란의 침공은 고려라는 나라의 사활을 자기 손으로 뒤집은 것이나 마찬가지로 여겨질 만하니 심리적으로 압박감과 죄의식을 느껴도 이상하지 않다. 최후는 당시 강조와 함께 포로가 된 오랫동안 자신의 부하로 활약한 이현운이라는 자와 대비되는 장렬한 죽음으로 기록되었다.

契丹主, 解兆縛, 問曰:"汝爲我臣乎?"

對曰 :"我是高麗人, 何更爲汝臣乎!"

再問, 對如初。

又剮而問, 對亦如初。

問鉉雲, 對曰:"兩眼已瞻新日月 一心何憶舊山川?"

兆怒, 蹴鉉雲曰:"汝是高麗人 何有此言!"

契丹遂誅兆。

거란주가 조의 포박을 풀고 물었다: "넌 내 신하가 될 것이냐?"

(강조가) 답하니: "'''난 고려 사람이다, 왜 너(汝)의 신하가 되겠는가?"'''[17]

다시 묻자 처음과 같이 답했다.

다시 살을 베어가며 묻자 답은 여전히 처음과 같았다.

현운에게 물으니 답하길: "두 눈이 이미 새 일월을 담았는데 어찌 옛 산천을 기억하겠습니까?"

조가 분노해 현운을 차며 말했다: "너는 고려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거란은 결국 조를 주살했다.'''

『高麗史』 卷127 「列傳」40 ‘叛逆’1


6. 평가


기록이 많이 남지는 않았지만 여러모로 복잡한 면모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일단 강조는 쿠데타를 일으켜 왕을 시해했지만 자신이 왕이 되려는 역심은 보이지 않았다.

兆坐乾德殿御榻下, 軍士呼萬歲. 兆驚起跪曰, “嗣君未至, 是何聲耶?”

조가 건덕전(乾德殿)[18]

어탑(御榻) 아래에 앉으니 군사들이 만세를 외쳤다. 조는 놀라 일어나 꿇어앉으며, “다음 임금이 오시지도 않았는데 이 무슨 소리인가?”라고 말했다.

『高麗史』 卷127 「列傳」 40 ‘叛逆’ 1

이후에 역성혁명을 일으키는 자들도 선위받기에는 시기상조이거나 명분을 더 확보하기 위해서 일단 '나는 절대로 새 군주가 될 생각이 없으며 단지 새로운 분을 군주로 모시려 할 뿐이다.'라는 주장을 하는 사례가 흔했지만 이후 강조의 행적을 보았을 때 권력욕 자체는 있어도 역심은 없었을 가능성 역시 무시할 수는 없다. 애초에 무리해서 왕이 되는 것보다 얼굴마담 하나 세워놓고 본인이 권신으로 권력을 휘두르는게 나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강조가 실권을 잡고 뭘 해보기도 전에 외적과 싸우다 잡혀 죽어버려 지금에 와서는 모든게 가설의 영역이기는 하다.
외치 부분에서는 당시 고려의 일개 무장도 아닌 최고 권세가가 직접 최전선에 나가 목숨걸고 싸운 점은 분명 평가받을 만하다. 물론 상기되어 있듯 일단 명분론적으로는 거란의 침공 자체가 자신의 난 때문에 벌어졌기 때문에 강조가 출전 안하는 것이 어찌보면 더 이상하기는 하다. 또한 자신이 군사 정변으로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군권을 맡겼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으니 강조 자신이 직접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그래도 포로로 잡힌 뒤 요성종의 회유를 받아들여 살 수 있었음에도 살을 찢는 극형을 받으면서도 끝내 스스로를 "나는 고려 사람"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다 죽은걸 보면 강조는 고려 왕가의 충신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고려인이란 정체성은 확실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19]
내치 부분에서 강조는 집권 이후 자기가 선전한 대로 나라를 혼란스럽게 한 천추태후김치양을 완전히 축출했다. 문제는 자신에게 명을 내린 목종까지 죽이고 현종을 옹립해 권신이 되었다는 것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얼마 안가 거란의 침입으로 강조 세력이 소멸하면서 이후 정적이 줄어든 현종은 정치하기가 편해진다. 물론 이건 어찌 보면 매우 단편적인 시각인 게 당장 강조의 고려군이 대패하면서 현종은 왕권 강화고 나발이고 나라가 망하게 생겨 수도 개경을 버리고 남쪽으로 피난부터 가야 했고 피난 와중에도 사실상 반란군이나 다름없던 지방 호족들에게 온갖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나마 현종이 고려사에 남을만한 명군이라 이후 전란을 수습하고 고려의 전성기를 열어 젖힌건 불행 중 다행. 덕분에 강조도 의도한 건 아닐텐데 얼굴마담 현종이 알고보니 역대급 성군이라 재평가받는 측면이 있다.

6.1. 인물 비교


고려사 최초의 쿠데타 성공자이던 강조의 죽음은 이후 후대 쿠데타 세력에게 교훈(?)을 줬는지 후대의 최씨 무신 정권은 몽골의 침략에 본인들이 직접 싸우지 않고 도망쳐 수비만 하면서 몸보신한다. 당연히 그 와중에 국토는 짓밟히고 죽어나간건 백성들.
강조의 행보 비교는 600년 뒤 이괄의 난을 일으킨 이괄과도 비교해볼 수 있다. 북방을 담당한 장수였으며 반란을 일으켜 왕을 세웠다는 점까지는 비슷하다. 다만 인조반정 이후 다른 공신들에 밀려 권력 중심에서 밀려나야 했고 이괄의 난 때는 초기 승승장구에 자만했는지 전략을 잘못 짜서 실패하고 부하들의 배신으로 목이 날아가고 만다.
임진왜란 당시 신립과도 묘하게 행적이 겹치는 부분이 있다. 북방에서 경력을 쌓았지만 일대 회전에서 패배하여 죽음을 맞았고 패배로 왕이 피난까지 갈 정도로 나라가 위기에 빠졌다는 점이 비슷하다. 강조는 현종을 옹립한 권신이고 신립은 선조사돈이라[20] 당시 왕과 밀접한 관계인 인물이라는 점도 겹친다.
다만 강조는 이괄과 비교해 자신이 거사를 안하면 왕위가 김치양의 아들에게 넘어가 왕씨 왕조가 끊길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정변의 명분이 있었다. 애초에 목종의 명으로 개경 진격을 준비한 것이기도 하다. 반면 인조반정이나 이괄의 난의 이유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신립과 비교했을 때 강조는 기록상으로는 통주 전투를 뺀 특별한 전적이 보이지 않지만 신립은 임진왜란 이전 니탕개의 난에서 활약한 조선 수위급 용장이었다. 그렇지만 본인들의 마지막 전투인 통주 전투와 탄금대 전투를 비교하면 강조는 초반에는 선전했는데 신립은[21] 일본명나라 모두 비웃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졸전했다.[22] 그래도 최후는 둘 다 패전의 책임을 지고 비참히 사망했으니 비슷할지도 모른다.

7. 대중 매체에서


웅진 출판사에서 펴낸 역사 만화 - "한국의 역사"에서는 거란왕의 항복 제의를 거부하고, 항복해 부하가 되겠다는 이현운의 얼굴을 '''"이런, 쓸개빠진 놈!"'''이라고 욕하면서 걷어차 버린 뒤, '''"내가 임금을 죽인 게 네놈들에게 나라를 바치려고 그런 줄 알았느냐?"'''라고 일갈하는 장면이 들어가기도 했으며, 어느 강감찬 위인전에선 요 성종에게 고개를 쳐들고 "난 비록 왕을 배신했어도 나라를 배신하진 않는다. 네놈에게 머리숙여 굴하지 않을테니 정 굴하게 할려면 내 목을 벤 다음에 목을 가지고 머리를 숙이거라." 라고 일갈하는 대사를 넣기도 했다. 1990년대 어느 출판사 버전에서는 요 성종을 비웃으며 고문을 받음에도 크게 일갈하며 웃으며 숨을 거뒀다는 창작을 넣기도 했다. 다만 마냥 조작이라고 보기엔 실제 역사와도 큰 맥락이 일치하긴 한다.
2019년 방영한 JTBC 창사특집 다큐멘터리 평화전쟁 1019에서는 1부에서 배우 문종영이 맡아 짧게 등장했다. 여기서는 출정 전 현종을 썩소지으며 쳐다보는 등 권신으로서의 모습이 부각되었다. 죽음도 통주 전투에서 첫 승리에 방심했다가 결국 패해 죽었다는 것만 수급이 걸린 모습과 함께 보여주고 나름 장렬했던 최후는 생략당했다. 사실 1부는 양규가 사실상 주연이기도 하고...

7.1. 드라마 천추태후


[image]
<천추태후>에서는 야인시대마루오까 경부, 불멸의 이순신최악의 졸장 등으로 유명한 배우 최재성이 배역을 맡았다. 여기서는 전형적인 우직한 맹장으로 등장한다. 작중 등장 인물들 중에서 '''무력이 혼자 궤를 달리한다.'''[23] 어느 정도냐면 혼자서 어지간한 무장 2명 ~ 3명은 상큼한 표정으로 거뜬히 제압하며[24][25], 거란 최고 맹장이란 야율분노까지 제압할 수 있을 정도. 무력으로 치면 양규와 함께 '''투톱'''이다.[26][27][28]
최재성이 전에 연기한 <불멸의 이순신> 속의 원균 캐릭터와 겹쳐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뜬금없이 천추태후를 짝사랑하는 설정이 붙었다. 은근히 순정남으로, 천추태후와 가까워지는 김치양을 싫어했다.
나중에 그를 짝사랑하던 천향비와 결혼한다. 천향비가 김치양의 정체를 추적하다가 살해당하자 안그래도 미워했던 김치양을 더욱 미워하게 되었다. 북방으로 떠난 후에 김치양의 반란이 일어나자 즉시 황궁으로 돌아와 김치양 일당을 쳐부수는데, 강조의 정변 부분은 왜곡이 좀 많이 곁들여져 있다. 예를 들면 정변 이후에 대량원군이 새 황제로 즉위하기 전 "태후 마마가 섭정해야 한다"면서 고집을 피웠다.
역사 기록에서는 거란 성종에게 잡혀갈 때 모포말이를 당하는 굴욕을 당하고 모진 고문 끝에 죽었다고 하지만, 여기서는 마지막에 성종을 암살하려다가 진삼국무쌍을 한 판 찍고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거란군과 100 vs 1 대결을 벌이는데, 이 100명이 일반병이 아니라 가려뽑은 정예병이다. 거기다 이 당시 강조는 고문을 받아서 컨디션도 완전 바닥인 상태. 그런데도 '''이 100명을 상대로 승리했다.''' 하지만, 그 이후 난입한 거란의 장수 5명의 합공을 받아 죽게된다. 특이한 점이라면, 사극에 등장하는 주연인데 이 아니라 을 썼다는 것.[29] 그런데 천추태후의 고증 상태를 보면 고증 때문은 아닐 듯(…).
그런데 마지막 강조의 회상 장면에 '''천향비와의 결혼 생활'''이 없어서 '강조는 결국 천향비는 안중에도 없었던 거냐'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8. 같이보기


[1] 중추원의 장관. 목종 대 부서명이 중추원이었을 때의 직명이다.[2] 중서문하성 7급 직위.[3] 이 직위는 후에 양규가 이어 받는다.[4] 목종을 시해하고 다음 왕 현종에게서 받은 직위. 중대사 = 중추사이지만 강조가 중추원을 자기 입맛대로 마개조 했음으로 그 입지는 천지차이다.[5] 목종을 시해하고 다음 왕 현종에게서 받은 직위.[6] '서북면 도순검사' 직은 '외직(外職)'으로 역시 문관이 역임하는 직위다. '행영도통사' 직은 임시 군단의 총지휘를 맡은 임시 직위로 비상설직이다. 이런 임시 군단의 총지휘관도 역시 문관이 맡았다.[7] 나라를 양보해준 공작.[8] 고려 중대성의 장관. 중대성은 중추원의 바뀐 부서명이다. 강조가 직접 바꾼 것으로 중추원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부서명부터 직렬까지 모조리 변경했다.[9] 고려 상서성 이부의 장관. 이부는 인사를 담당한 부서.[10] 고려 중서문하성 소속의 3번째로 높은 관직. 강조는 이부상서로 조정의 인사권을 쥐고 최고 정부 기관의 요직을 차지해 사실상 모든 정권을 잡았다.[11] 뜻은 의로운 군대이자 하늘의 병사. 명분이 억지스러운 군대가 보통 이런 겉만 번지르르한 이름을 쓴다. 묘청이 주도한 반란군 이름도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 하늘이 보낸 (인종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군대이다. 하지만 세간의 평가는 정반대.[12] 임시로 편성된 대 거란 군단의 최고 사령관급 직위이다.[13] 고려는 10만 단위 대군을 자주 동원해서 보는 이들을 상당히 놀라게 만든다. 참고로 정유재란 때 전선에 투입된 조선 육군은 3만, 명나라군은 11만이었다. 사실 봉건제 국가가 중앙 집권 국가보다 군사력이 더 강한 것이 보기 어려운 일은 아니다. 모든 병권을 중앙에서 꽉 쥐고 있던 조선과 달리 고려는 지방 호족들이 데리고 있던 사병들을 긁어모으면 수가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당연하지만 평상시에는 조선의 체제가 훨씬 효율적이다.[14] 그러나 고려인구가 400만 남짓이었던걸 감안하면 30만이라는 병력은 인구의 10퍼센트에 육박하는 수치이기에 적잖은 과장이 섞였다고 봐야할 것이다.[15] 거란 황제의 친위 부대로 편제상 병력은 총 6만이다. 이 부대는 훗날 귀주 대첩 때 강감찬에게 패하여 거의 전멸했다.[16] 싸움으로 치면 양규김숙흥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이들은 계급이 높지 않았다.[17] 고려사 원문엔 강조가 거란 성종을 여(汝)라고 부르고 있다. 너 여 자는 친구 같은 허물없는 사이에만 쓰이는 이인칭이다.[18] 태조가 지은 본궐의 정전. 이후 현종 대에 제 2정전으로 밀려난다.[19] 다만 여기서 강조가 만약 항복했다면 그것도 웃기기는 하다. 자기 때문에 전쟁이 터졌는데 자기만 산다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20] 신립은 선조와 인빈 김씨의 아들 신성군의 장인이다. 특히 신성군은 선조가 내심 후계자 후보로 염두에 두었을 정도로 상당히 총애한 아들이다.[21] 조총이라는 신무기에 대한 빈약한 지식이 한몫하기는 했지만.[22] 실제 징비록 등의 기록에 따르면 일본군은 부하들이 다들 지키자고 했으나 신립이 우격다짐으로 지키지 않은 곳을 통과했을 때 복병이 있나 싶어서 몇 번이나 확인했다고 하며 명나라군 역시 올 때 이런 곳을 안 지키고 뭐 했냐는 식으로 반응했다고 한다.[23] 사실은 양규김숙흥과 동생으로 나오는 강신이 그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24] 탁사정최사위 등 2명이 정면으로 칼을 휘둘렀는데, 창으로 받아내서 그 2명을 냅따 벽까지 쭉 밀어버렸다(...). 그 두명도 그렇게 허접은 아니다.[25] 마지막 최후는 100 vs 1 진삼국무쌍이다.[26] 양규는 다소 미묘한데, 막판에 급 전개로 야율분노보다 더 강하다는 야율적노양규한테 원킬로 당해버린 것. 앞서 야율적노가 (기습이기는 했어도)강조를 2번이나 제압한 범상치 않은 포스를 보여줬기에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이기도 하다. [27] 사실 양규가 미묘하기 보다는 야율적노가 미묘한 것이다.[28] 야율적로가 미묘하긴 한데 제대로 한판 붙으면 강조에게 안될 것으로 예상된다.[29] 사극 대왕의 꿈에 나오는 무사들은 계백과 김유신을 비롯해서 대개 창을 쓰기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