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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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祥容
1950년 1월 5일 ~
1. 개요
2. 선거 이력


1. 개요


대한민국정치인이다.
1950년 전라남도 함평군에서 태어났다. 광주제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남대학교 법과대학에 재학하다 중퇴하였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에 외무위원장으로 참여'''하였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에도 전남민주청년운동협의회 회장,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사회운동 공동의장 등을 지냈다. 5공 청문회 진상규명 당시 전두환이 발포명령을 부인하자 격하게 분노하면서 '''"사람 죽여놓고 자위권 발동이 뭐야!"'''라면서 항의하기도 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평화민주당 후보로 광주광역시 서구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민주정의당 이영일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국회 광주특별위원회 간사로 활동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서울특별시 서초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인 신한국당 김덕룡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당시 그가 국회의원 3선이 보장된 광주시 서구를 떠나 서초구에서 출마한 이유는 수도권에서 김대중과 국민회의 바람을 일으키기 위한 고육책이었다고 알려져있다. 호남 중진 정치인이 강남에 도전장을 던지는 시초라고 볼 수 있으나 결과는 아쉽게도(...)[1]
김대중 정부 초기인 1998년부터 2001년까지 한국문화진흥 사장을 지냈다. 김대중 정권 시절 낙하산 인사로 공기업인 뉴서울골프장 사장에 재직했다.

"낙선하고 나니까 현역시절에는 못 보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더라. 국민의 눈높이에 내 눈을 맞추는 방법을 터득했다"

2003년 11월 새천년민주당 복당 당시 인터뷰 중 #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정국에서는 당시 정몽준 후보의 ''국민통합을 위한 신당 창당 추진위'(국민통합21 창준위)에서 대외협력위원장, 창당 후 조직위원장을 맡았다. 하지만 정몽준 후보의 막판 지지철회로 국민통합21이 와해된 이후인 2003년 11월, 김민석, 이치호 전 의원 등과 함께 새천년민주당에 복당하였다.[2] 17대 총선에서 광주 서구로 재기를 계획했으나 노무현 대통령 탄핵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출마 조차 하지 못했다.[3]
2005년부터 2011년까지 호주 호라이즌 골프장 사장을 지냈다. 골프장은 이후 부도가 났다.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의 문화국가위원장을 맡았다.
2017년 6월 지방선거 당시 전남 함평 출신 동향에 전남대 출신 동문인 민주당 이용섭의 선거대책 위원장이었다. 이용섭이 광주광역시장에 당선된 이후 보은인사로 광주환경공단 이사장 후보가 되었으나 광주광역시 의회 인사청문회에서 심각하고 총체적인 자질 논란으로 자진사퇴하였다.
호주에 있는 아들은 만 18세가 되자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하고 병역을 이행하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정상용씨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학업을 위한 선택이라고 주장했다. [4] 아들의 병역 문제에 대해서는 어려운 가정 형편[5] 때문이었다고 말했는데 호주에서 대출 과정에서 상당한 담보물이 제공된 데 대하여서는 적절한 답변을 하지 못했다.
광주광역시 공기업의 수장이 되려는 사람이 지난 20여년간 주소를 서울로 하고 있었던데 대하여서는 둘째 딸과 셋째 딸 가족에 대하여 518 유공자 의료보험 혜택을 주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과거 미국 라스베가스 카지노에서 거액을 탕진했고 그 돈을 갚지 않아 미국 입국이 안된다는 소문이 있다. [6]
이에 대하여 이용섭 광주시장이 과거 공천과정에서 민주당 공천에 어려움을 겪은 이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 시장 후보로 공천 받기 위해 온갖 민주당 실세들에게 신세를 진 후 필연적으로 발생한 오기인사, 보은인사, 측근인사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고 있다.
이후 이용섭 시장은 정상용을 남도학숙 원장에 임명했다 [7]
현재는 광주광역시에서 문화국가포럼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2.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광주 서 갑)
'''평화민주당'''
'''71,349 (86.63%)'''
'''당선 (1위)'''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광주 서 갑)
'''민주당'''
'''66,982 (79.74%)'''
'''당선 (1위)'''
[8]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서초 을)
새정치국민회의
21,112 (23.27%)
낙선 (3위)


[1] 15대 총선이 1여 다야 구도로 진행되면서 야권 표가 국민회의와 민주당으로 분산된 탓이 가장 컸고 동시에 여권 후보였던 김덕룡도 같은 호남 출신이었다. 이 시기 지역구 의석 조정에 따라 광주 서구 지역구는 15~17대에 정동채 의원의 지역구가 되었다.[2] 당시 새천년민주당의 당규상 탈당 후 만 1년을 채우면 당무위원회 심의 없이 자유 복당이 가능했다.[3] 여담으로 사실 광주광역시 서구 지역구는 15~16대에서 잠시 단일지역구였는데, 17대 때 분구 후에 그 유명한 새누리당이정현 후보와 민주노동당-통합진보당오병윤 후보 매치가 성사된다.[4] 518 유공자 자녀는 학비가 감면된다[5] 본인 입으로 난민 수준이었다고 말함[6] 본인은 예당음향 변두섭 사장에게 5000달러를 용돈(!) 으로 받아 1300달러를 잃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7] 이 정도면 오기 인사가 아니라 약점이라도 잡힌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8] 1995.8.11 탈당, 9.11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합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