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 통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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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昌慶宮 通明殿
창경궁의 침전이다.
사실 창경궁은 대비들과 왕실 가족들의 거주 공간 확보를 목적으로 지어서, 왕실 구성원들은 다른 궁궐에 있을 때와 다르게 비교적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건물을 사용하였다. 그래서 창경궁 내전 건물의 경우, 전각의 주인을 뚜렷하게 구분하기 모호하며 통명전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만 여러 기록을 볼 때, 주로 왕비와 대비 등 왕실 내 최고위급 여성들의 공간으로 많이 사용한 듯 하다.
창경궁의 내전 전각들 중 위상이 가장 으뜸이었다. 《궁궐지(宮闕志)》에서 ‘통명전은 창경궁의 내정전(通明殿卽昌慶宮內正殿)’으로 표기한 것과, 영조가 통명전을 ‘내전의 법전(法殿)’이라 남긴 글, 그리고 《통명전 중건 상량문》에 ‘동쪽에 창경궁이 조성된 이후 내전은 통명전보다 높은 전각이 없다’라고 적혀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해준다.
2. 이름
이름은 창건 당시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이던 서거정(徐居正)이 지었다. ‘통달(通)하여 밝다(明)’는 뜻으로, '크게 밝은(明) 전각에 앉아서 백성들의 삶을 통달(通)하여 국가를 잘 다스리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조선 인조 대의 문신 정백창(鄭百昌, 1588 ~ 1635)은 《통명전 상량문》에서 ‘크게 밝은 집(大明宮)’으로 풀이했고 ‘옥황상제의 궁전’이란 뜻도 있기 때문에 숙종은 《통명전(通明殿)》 시에서 신선의 집으로 풀이했다.
현판은 건물 외부와 대청 한가운데에 2개가 걸려있으며 모두 순조가 직접 썼다.
3. 역사
1484년(성종 15년) 창경궁 창건 때 처음 지어졌고,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16년(광해군 8년)에 중건하였다. 그러나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으로 소실되면서 1633년(인조 11년)에 복구되었는데 이 때 인경궁의 청와전(靑瓦殿)을 옮겨지었다. 1790년(정조 14년)에 다시 화재를 입어 1834년(순조 34년)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4. 구조
- 정면 7칸, 측면 4칸, 총 28칸에 1층[1] 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평면은 ‘一’자 형태로 되어있다. 연회같은 행사를 할 수 있게 월대를 굉장히 큰 규모로 만들었으며 월대 위엔 박석을 깔고, 정면에는 5단의 계단을 3개[2] , 그리고 동, 서에 각각 3단의 계단을 2개씩 배치하였다. 이 월대 위에 다시 장대석으로 기단을 쌓은 다음 그 위에 강회다짐을 하고 이어 주춧돌을 놓고 사각형의 기둥을 세워 건물의 뼈대를 만들었다. 쇠서[3] 2개를 둔 이익공 공포에 겹처마 양식으로 지었으며 기둥 사이에는 장화반을 놓아 단아하면서도 화려한 궁궐 침전 건물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 지붕의 각 마루는 양성을 하고 취두, 용두, 잡상으로 장식했으며 잡상의 수는 3개이다. 대한제국 시기 촬영한 사진을 보면 측면에 가퇴가 설치되어있었으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창호는 다른 궁궐의 침전과는 다르게 ‘정(井)’자형으로 되어 있다. 다만 온돌방 쪽 툇간으로 드는 두 짝씩의 창호는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띠살을 쓰고 있다.
- 내부는, 가운데 정면 3칸, 측면 2칸을 대청으로 놓고 칸을 나누지 않고 한 공간으로 뚫어 넓게 쓸 수 있게 하였다. 대청의 천장은 전체적으로 우물 반자[4] 로 막은 뒤 청판에 모란을 그려넣고 단청을 아름답게 칠하여 화려함을 부각하였다. 대청을 중심으로 동, 서 양 옆의 정면 1칸, 측면 2칸을 온돌방을 두었으며 앞, 뒷면의 협칸은 툇마루로, 측면의 협칸은 온돌 쪽방으로 구성하였고 방의 천장은 종이천장으로. 툇마루의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마감하였다. 일제강점기에 통명전을 창경원 박물관 진열실로 쓰면서 온돌을 뜯어내고 방, 마루 구분 없이 공간을 다 터서 크게 훼손되었으나 1980년대 이후 실내를 복원하여 현재에 이른다.
- 시각적으로 다른 건물과 비교했을 때 눈에 띄는 차이점이 있는데 바로 지붕에 용마루가 없는 것이다. 이 것을 일컬어 ‘무량각(無樑閣)’이라고 하는데, 통명전 뿐 아니라 다른 궁궐의 왕과 왕비의 정식 침전은 다 이렇게 되어있다. 이유로 여러 가지 가설이 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왕비의 침전의 경우 새로운 용이 만들어지기에 한 건물에 두 용이 있어선 안 되어서 만들지 않았다는 이야기이고, 또 다른 설은 당시 동아시아 최선진국이었던 중국의 건축 양식을 모방했으나 조선에 익숙하지 않은 양식을 모든 건물에 적용하긴 어려웠기 때문에[5] 가장 존귀한 왕과 왕비의 집에만 선진 건축 기술을 적용했다는 설이다. 사실 용마루와 용과 관련 된 전통 기록은 하나도 없으며, 당장 중국만 가도 자금성의 황제와 황후 침전엔 용마루가 있고, 일반 서민 가옥들에 용마루가 없는 집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후자의 설이 좀 더 설득력이 있다.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중국 문물에 대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떨어진 대한제국기에 지은 경운궁의 침전 함녕전은 용마루가 있다.[6]
- 《한경지략》[7] 에 “통명전에는 원래 푸른 기와를 덮었는데, 정조 때 화재로 탔다. 전하는 말로는 고려 때 건물이었다고 한다.”라고 되어있다. 물론 고려 때 지은 것은 사실이 아니지만 청기와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는데, 청기와를 많이 쓴 인경궁의 건물을 헐어 지은 것이며 무엇보다 옮긴 전각의 이름이 청와전(靑瓦殿), 즉 뜻 자체가 ‘청기와 집’이기 때문이다.
- 1633년(인조 11년) 재건 당시 통명전 뿐 아니라 주변 건물도 인경궁에서 헐어다 지은 듯 하다. 《창경궁수리소의궤》에 의하면 통명전의 서책방은 인경궁 함인당(涵仁堂)의 대청 앞 툇간과 헌잠당(獻箴堂)의 온돌을 옮겨서 조성했으며 동행각 역시 인경궁 함인당의 서온돌과 진연청(盡筵廳)의 북월랑을 옮겨 지었다고 한다.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5. 지당(池塘)
통명전 서쪽에 화강암으로 조성한 사각형의 작은 연못이 있다. 연못 물의 발원지는 통명전 서북쪽에 있는 샘물로, 이 물이 돌로 만든 직선으로 된 물길을 따라 흐르다 연못으로 떨어진다. 이 때 그냥 떨어지게 하지 않고 입수구를 봉황 부리 모양을 한 석조물로 만들어 물이 곡선을 그으면서 마치 폭포처럼 떨어지게 하여 한껏 운치를 더했다. 연못 가장자리에 하엽동자와 꽃봉오리를 세심하게 조각한 난간기둥을 세우고 기둥 사이사이에 돌 난간을 둘렀다. 연못의 약간 남쪽으로 치우쳐서 돌 다리를 만들어 가로지를 수 있게 했으며 연못 북쪽 한 가운데엔 괴석을 2개 놓고, 남쪽엔 앙련대석(仰蓮臺石)을 새긴 돌 기둥 하나를 놓았다.
동전을 던져 이 기둥 위에 놓이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는지 많은 관광객들이 여기서 동전을 던지는 경우가 많다. 물론 연못으로 떨어진 게 대다수(...). 하지만 계속 던지면 이 기둥이 손상될 우려가 있어 현재는 동전 던지지 말라는 표지판(...)이 붙었다. 의식있는 위키러들은 그러지 말자.
창경궁 창건 당시 통명전과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처음 짓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실록에 존재가 확인되기 때문. 여기서 골때리는 일화 하나가 있다. 성종이 연못에 구리 수통을 설치했다가 사치라는 신하들의 반발에 돌로 바꿨는데, 정작 설치 비용은 석재 수통이 더 비쌌다.(...)#
현재 돌 다리 서쪽으로 길을 따라가면 높은 계단이 나온다. 이 계단을 올라가면 창덕궁으로 가는 함양문이 나온다.
6. 열천(洌泉)
통명전 뒤뜰에 있는 샘이다. 이름은 열천(洌泉)으로, 1757년(영조 33년) 5월에 영조가 직접 지었으며#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이가) 굉장히 시리도록 차가운 샘’이라는 의미이다. 원래 비나 다른 이물질이 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올렸으나 현존하지 않는다. 현재 이 샘물은 마실 수 없다.
7. 여담
- 늦봄에서 초가을 사이에 통명전 대청을 개방하여 누구든 들어갈 수 있다. 온돌방은 들어갈 수 없지만 문짝은 열어둬서 대청에서도 충분히 들여다 볼 수 있다. 특히 여름엔 굉장히 시원해 창경궁을 방문한 관람객들이 쉬어가는 곳으로 인기가 있다. 단, 안에서 음식을 먹거나 큰 소리로 떠드는 비매너적인 행동은 삼가자.
- 2010년대 들어 통명전에서 전통음악을 비롯한 여러 공연을 꽤 하고 있다.# 조선시대 때에도 잔치가 많이 열렸었으니 어찌보면 과거에 이어 현재까지 제 기능을 하고 있다 봐도 좋을 듯. 공연 외에도 궁궐 강좌 등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을 이 곳에서 진행하고 있다.#
8. 영상 매체에서의 활용
궁궐 촬영이 비교적 쉬웠던 2000년대 이전 조선을 배경으로 한 사극에서 많이 나왔지만 대부분 지나가는 배경에 불과했는데 제대로 나올 땐 실제와 비슷하게 왕비나 대비가 머무는 곳으로 고증이 잘 지켜진 편이었다. 희한하게 배경이 개경 궁궐일 때에도 나왔는데 용의 눈물에서 수창궁의 일부로 나온 적이 있었고 태조 왕건에서는 철원 황궁의 일부로 나왔다.(...) 그리고 명성황후에서는 아관파천 이후의 경운궁 함녕전으로 나왔다.
- 1998년 MBC 《대왕의 길》에서 낙선당 화재사건 당시 영조(박근형 분)에게 갈굼당한 사도세자(임호 분)가 우물에 뛰어드는 장면을 바로 통명전 열천에서 촬영하였다. 자세한 것은 창경궁 낙선당#s-3.1 참조.
[1] 보통 한옥의 경우 단층(單層)이라 표현한다.[2] 그 중 왕이 다니는 가운데 계단의 길이가 더 길다.[3] 소 혀 모양의 부재.[4] 서까래가 안보이게 천장을 가리고 평평하게 만드는 구조물.[5] 실제로 전통 가옥을 용마루 없이 지으면, 서까래를 고정하기 어려워 굉장히 힘들다고 한다.[6] 사실 함녕전은 경복궁의 침전 중 하나였던 만화당(萬和堂) 을 옮겨 지은 것이다. 그래도 명색이 황제의 침전인데 용마루를 그대로 냅둔 것을 봐서는 무량각에 그렇게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은 게 맞는 것 같다.[7] 조선 후기 정조 시기에 한성의 역사를 간략하게 서술한 책. 저자는 수헌거사로 되어있는데 실학자 유득공의 아들 본예로 추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