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한국시리즈
'''자, 헛스윙! 경기 끝났습니다! 경기 끝났습니다! 두산 베어스, 2001 한국시리즈 우승! 19번째 한국시리즈의 챔피언이 됩니다!!'''
'''19년만에 만난 두 팀, 챔피언결정전에서 4승... 네~ 4승 2패죠. 4승 2패로 두산이 삼성을 물리치고 한국시리즈 챔피언 자리, 세 번째 챔피언 자리에 오릅니다.'''
- SBS 김정일 캐스터의 당시 우승콜
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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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리그 1위인 삼성 라이온즈와 정규리그 3위인 두산 베어스간에 진행되었다. 당시 두산의 정규 시즌 성적은 65승 5무 63패로 5할을 겨우 넘겨 5할 1푼에도 도달하지 못했는데(0.508), 이는 '''포스트시즌에 탈락한 06년도의 두산보다도 더 낮은 승률'''이었다. 그 원인으로, 우재주로 대표되는 강력한 타선에 비해 투수진은 참담할 정도였는데 팀 내 최다승 투수의 승수가 '''9승(이혜천, 진필중)'''이었다.[1] 또한 규정이닝을 채운 투수가 선발과 계투를 오갔던 이혜천 달랑 1명이었다.[2] 심지어 정규 시즌 3위였던 두산은 1위 삼성과의 승차보다 오히려 당시 최하위였던 롯데[3] 와의 승차가 더 적었다. 정규시즌 1위 삼성이 -13.5, 정규시즌 2위 현대가 -6.5인데 정규시즌 4위 한화가 4.5경기 차고 정규시즌 7위 SK, 8위 롯데가 6.5경기 차.
투타의 전력으로 보자면 타자는 백중세였지만 투수력에서 삼성의 전력이 압도적이었다. 타격은 두산이 언제나처럼 최상위권의 활약을 해준 타이론 우즈와 김동주는 물론이요 그해에 각성한 심재학이 심정수의 공백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수준이 아닌, 지금도 안구에 회자되는 펠릭스 호세에 이어 전체 WAR 2위로 활약하여[4] 커리어하이를 찍었고, 정수근이 99년에 이어 3할타자로 복귀하였으며, 하위 타선의 안경현, 홍원기, 홍성흔 등도 만만치 않은 인물들이었다. 삼성도 김기태가 노쇠화 및 김응용 감독과의 불화로 해당 시즌에 단 한개의 홈런도 쳐내지 못했으며 부진하였으나 그 자리를 마해영, 매니 마르티네스 쌍마가 훌륭하게 메워주웠고, 박한이가 신인왕 후보에 오를정도로 타선에 활력소 역할을 해줬다. 이승엽이 타율은 낮았지만 그해 OPS 3위였으니 나름 본인 몫은 했으며, 오히려 WAR 순위는 첫 홈런왕에 최다안타를 차지했던 1997시즌보다 높았다. 오히려 낮은 타율 때문에 저평가를 당한 한해였다. 이를 전체적으로 따져 보면 팀 득점과 팀 OPS같은 경우 두산:삼성은 739:732, .807 : .780으로 비슷하거나 두산이 미세하게 우위에 있다고 볼 수 있었다.(잠실구장을 쓰면 OPS는 장타율이 줄어 손해를 보기 때문)
그러나 투수진을 보면 두산은 선발투수는 커녕 불펜투수조차 10승 투수가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유일한 한국시리즈 우승을 일궜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그 해에 8개 구단가운데 10승 투수가 단 1명도 없었던 유일한 구단이다.[5] 당초 베어스의 에이스였던 박명환은 전년도 처럼 부상으로 들쭉날쭉하게 등판했으며 나머지 투수들도 모조리 부상 내지는 없느니만 못한 수준이었다. 용병투수 둘 또한 트로이 닐[6] 의 대체용병이었던 배넷은 한국 생활의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는지 부진을 면치 못하였으며 한국시리즈에서는 출전조차 하지 않았다. SK에서 온 빅터 콜은 배넷보다는 나았지만 그냥 없는 것보다는 약간 나은 수준 정도였다. 스윙맨으로 노예생활을 했던 이혜천과 철벽 마무리였던 진필중 그리고 방어율은 그닥 좋지 않지만 좌완 계투로서 그럭저럭 막았던 차명주 등 불펜에 의존할 수 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반면 삼성은 임창용, 배영수, 김진웅, 발비노 갈베스 무려 4명의 10승투수를 배출했으며, 중간투수에는 김현욱, 전병호 등이 포진해 있었고, 시즌 초반 훌륭한 마무리투수 역할을 맡았던 벤 리베라가 부상으로 퇴출당하자 김진웅이 시즌 후반 마무리 전업을 했는데 나름 훌륭하게 막으면서 투수진은 구멍이 없는 듯 보였다.[7]
게다가 두산은 한화 이글스[8] 와의 준플레이오프, 현대 유니콘스와의 플레이오프를 거치면서 선수들의 체력이 소진되었으며, 주전 선수 다수가 부상당한 터라 다들 이번만큼은 삼성이 이겨서 '''달구벌의 저주'''[9] 를 깰 거라고 믿고 있었다. 이를 위해 삼성으로서는 원수나 다름없는 해태의 김응용 감독까지 모셔왔고,[10] 객관적인 전력도 더 우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 엔트리
2.1. 삼성 라이온즈
2.2. 두산 베어스
3. 경기
- 당시 심판진 아시는 분은 작성바람.
3.1. 1차전
▲승: 배영수
▲패: 이경필
▲세이브: 김진웅
▲홈런: 타이론 우즈(4회 1점), 이승엽(5회 1점)
▲심판: 주심 김호인/1루 오석환/2루 /3루 나광남/좌선 임채섭/우선 허운
한국시리즈 개막전 시구는 이만섭 당시 국회의장이 맡았다.
삼성은 발비노 갈베스를, 두산은 빅터 콜을 선발로 기용했다. 갈베스는 가정사로 고국으로 떠났다가 몇 번이나 복귀를 미루면서 미운털이 박혔지만, 임창용의 컨디션 난조와 정규시즌에 해준 공이 있어 1차전 선발로 낙점받았다. 그러나 두산전에서 1승 2패 평균자책점 3.32로 그리 좋은 성적을 기록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빅터 콜보다는 나았는데, 빅터 콜은 정규시즌 기록이 6승 9패 평균자책점 5.04로, 시즌 10승 4패 평균자책점 2.47을 기록한 갈베스와 비교하면 처참한 수준이었다. 그래도 콜이 현대와의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6⅔이닝 9피안타 2실점으로 그나마 호투했기에 1차전 선발로 낙점받았다.
초반은 1회 2점, 2회 1점을 낸 삼성이 리드해 갔다. 그러나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를 물리치며 올라온 팀답게 두산도 호락호락 당하진 않았다. 4회초 타이론 우즈의 솔로홈런을 시작으로 5회초 정수근의 2타점 3루타 등, 5회에만 3점을 내면서 4대3으로 역전한 것. 그러나 이은 5회말 이승엽이 솔로홈런을 치면서 다시 균형을 잡았다.
이후로 종반까지 4대4 균형이 이어지다가 8회말 삼성이 균형을 무너뜨렸다. 선두타자 김한수의 2루타를 시작으로 정경배의 희생번트와 진갑용의 삼진으로 2사 3루 상황에서 김태균이 적시타를 친 것. 이어 박한이가 안타, 김종훈이 2루타를 치면서 2점을 더 추가하면서 승부를 결정지었다.
이 1차전 승리는 나름대로 삼성에겐 값진 승리였는데, 창단 19년만에 한국시리즈 1차전을 이겼다. 그동안 한국시리즈 출전만 따져도 7번째만의 1차전 승리.
양팀 감독 모두 1차전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이었는지, 1차전부터 양팀 합쳐 10명의 투수가 기용되었다[11] .
이전까지 18번 한국시리즈 중 무승부로 끝났던 1982년을 제외하고 17번 중 1차전 승리팀이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게 15번인 만큼, 삼성 팬들의 기대치는 상승했다.
3.2. 2차전
▲승: 이혜천
▲패: 김현욱
▲홈런: 이승엽(6회 1점), 장원진(8회 3점), 김동수(9회 1점)
▲심판: 주심 허운/1루 나광남/2루 오석환/3루 임채섭/좌선 조종규/우선
중계방송사는 SBS TV.[타사중계2]
우천으로 하루 연기되었다. 삼성은 임창용을, 두산은 구자운을 선발로 기용했다. 임창용의 경우 원래 1차전 선발이 유력했지만, 시즌 후반 컨디션이 떨어지면서 2차전 선발로 밀렸다. 그러나 정규시즌 두산을 상대로 2승 1세이브 평균자책점 0.55로 상당히 강한 모습을 보였다. 구자운의 경우 현대와의 플레이오프 4차전에서 7이닝 3피안타 1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되는 등, 포스트시즌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고 있었다.
정규시즌 성적을 봐도 1차전과 마찬가지로 삼성의 승리가 점쳐졌으나 그 예상은 빗나갔다. 컨디션 난조를 보인 임창용의 속구 구속이 140km/h도 안 나오면서, 그야말로 두산 타자들에게 배팅볼을 던져주다 5회도 못 채우고 강판되었다.
2회초 김동주의 안타를 시작으로 안경현과 전상렬의 안타로 2점을 먼저 냈다. 4회말 삼성도 이승엽과 매니 마르티네스가 1점을 합작하면서 따라붙었다. 5회초 1사 1,2루가 되면서 임창용 대신 배영수가 구원등판하지만 김동주가 2타점 2루타를 치면서 3점차로 달아났다. 구자운의 호투로 삼성 타선은 침묵하다가, 6회말 이승엽의 솔로홈런을 시작으로 김동수의 2타점 적시타로 금새 동점으로 따라붙었다.[12]
그러나 삼성 마운드는 불붙은 두산 타선을 감당하지 못했다. 7회초 미들맨 김현욱이 등판했지만, 장원진과 우즈의 연속안타 후 김동주에게 다시 2타점 적시타를 맞으며 6대4로 역전을 허용했다. 이에 삼성은 마무리인 김진웅을 조기투입하는 강수까지 썼지만 8회초 장원진이 3점 홈런을 치면서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 9회말 김동수가 솔로홈런을 쳤지만 그래도 4점차. 승부를 뒤집기에는 너무 늦었고, 점수차도 많았다.
여담으로 5회말 두산 장원진은 삼성 박한이의 파울타구를 잡은 후, 홈관중이 던진 캔맥주에 오른쪽 팔을 맞았다.
3.3. 3차전
▲승: 이혜천
▲패: 배영수
▲세이브: 진필중
▲홈런: 타이론 우즈(3회 1점), 마해영(4회 1점)
▲심판: 주심 허운/1루 임채섭/2루 나광남/3루 조종규/좌선 김호인/우선 오석환
두산은 박명환을, 삼성은 배영수를 선발로 기용했다. 박명환은 정규시즌 8승에 그쳤지만 팀내 선발진 중 최다승인데다[13] 구위도 괜찮은 편이었다. 배영수는 정규시즌 13승으로, 성적은 박명환보다 우위였지만 이제 겨우 프로 2년차의 영건이었다.
경기 초반부터 두산에 행운이 따랐다. 0대1로 뒤진 2회말 두산 공격, 심재학이 볼넷으로 출루하고 김동주의 빗맞은 타구가 좌익수 앞에 떨어지며 무사 1,2루의 기회를 잡았다. 안경현은 희생번트를 대려했지만 2번이나 실패했다. 그러나 이게 전화위복이 되었으니, 불리한 카운트에서 동점 적시타를 친 것. 이어 홍성흔의 역전타와 이도형의 희생플라이로 두산은 경기를 쉽게 풀어갈 수 있었다.
이어 우즈와 마해영이 각각 솔로홈런으로 1점을 더해 4대2로 두산이 앞선 6회말, 홍원기의 볼넷에 이어 정수근의 2루타로 두산 타선에 불이 붙었다. 장원진의 유격수 땅볼로 1점을, 우즈가 고의사구로 출루한 후 심재학과 김동주의 연속안타로 2점을 더했다. 이어 안경현이 3루 땅볼을 쳤는데, 삼성 3루수 김한수가 1루로 던진 공이 2루 주자 심재학의 헬멧을 맞고 튕겨져 나가면서 또 2점 득점. 이어 홍성흔의 2타점 2루타까지 터지면서 두산은 6회에만 7점을 올렸다(포스트시즌 한 이닝 최다득점 기록. 이 기록은 '''바로 다음날 깨진다.''' '''그것도 두번'''). 점수는 11대2.
그러나 삼성도 지난 경기처럼 무기력하게 보고 있지만은 않았다. 7회초 2사 후 김태균의 2루타를 시작으로 볼넷 1개를 포함해 7연타석 안타를 기록하면서 7회에만 6득점으로 따라잡았다. 두산은 7회초에만 5명의 투수를 바꾸고[14] 마무리 진필중까지 등판하면서 겨우 불을 껐다. 어쨌든 두산이 승리하면서 보다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다.
사실 이 경기는 대첩으로 들어가도 할말없지만 바로 다음경기가 너무 역대급이라 묻혔다. 2001년 한국시리즈/4차전 참고.
3.4. 4차전
▲승: 차명주
▲패: 김진웅
▲홈런: 타이론 우즈(1회 2점), 김동주(3회 4점), 안경현(3회 1점)
▲심판: 주심 오석환/1루 조종규/2루 임채섭/3루 김호인/좌선 허운/우선 나광남
▲시구: 전인화
중계방송사는 SBS TV.[타사중계4]
2001년 한국시리즈/4차전 문서 참고.
3.5. 5차전
▲승: 임창용(6이닝 7피안타 3실점)
▲패: 구자운
▲홈런: 이승엽(5회 1점)
▲심판: 주심 나광남/1루 김호인/2루 조종규/3루 허운/좌선 /우선 임채섭
양팀 모두 2차전 선발이었던 임창용(삼성)과 구자운(두산)을 그대로 선발로 기용했다. 한편 바뀐 규정에 따라 5차전부터 잠실에서 중립경기로 열렸다.
3회초 1사 2,3루 상황에서 타이론 우즈의 희생플라이로 두산이 먼저 점수를 올렸지만, 곧바로 3회말 1사 1,2루 상황에서 마해영가 동점타를 치고, 이어 매니 마르티네스의 안타로 만루를 만들고 김한수가 2루타를 날렸다. 이 때 두산의 실책으로 1루주자 마르티네스까지 득점하면서 삼성이 4대1로 역전했다.
5회초 심재학의 안타로 두산이 1점 따라갔지만, 다시 5회말 선두타자 이승엽의 솔로홈런으로 3점차로 점수를 벌렸다. 6회초 최훈재와 김호의 연속 2루타로 1점 따라잡지만 다시 6회말 이승엽의 안타로 1점 달아난데 이어 7회에도 1점을 더하면서 4점차로 더욱 점수차를 벌렸다.
8회초 두산이 최훈재, 김호, 정수근의 연속안타로 1점 따라붙었지만 8회말 삼성은 타자 일순하면서 5안타 3볼넷 등으로 대거 7득점을 하면서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
2차전의 부진을 딛고, 6이닝 3실점을 기록한 삼성 선발 임창용은 이 해 한국시리즈에서 유일한 선발승을 기록한 투수가 되었다.
3.6. 6차전
▲승: 진필중
▲패: 임창용
▲홈런: 타이론 우즈(5회 2점)
▲심판: 주심 임채섭/1루 허운/2루 김호인/3루 /좌선 오석환/우선 조종규
▲시구: 유연희, 김인재[15]
두산은 3차전 선발투수였던 박명환을, 삼성은 노장진을 선발로 기용했다.
삼성은 1회초 2사 만루 상황에서 투수 박명환의 폭투와 김한수의 내야안타로 2점을 내면서 초반부터 순조롭게 출발했다. 그러나 두산이 3회말 1사 1루 상황에서 장원진의 안타 타구를 외야수 박한이가 뒤로 빠뜨리면서 1점을 득점하고, 5회말 타이론 우즈가 김진웅을 상대로 장외 2점홈런[16] 을 치면서 경기를 뒤집었다.
7회초 삼성은 대타 강동우의 2루타와 카를로스 바에르가가 몸에 맞는 공으로 출루하고, 김종훈의 2타점 역전 안타와 이승엽의 1타점 적시타로 다시 재역전했다. 그러나 두산도 7회말 심재학이 볼넷, 김동주의 2루타로 출루한데 이어 홍성흔의 내야 땅볼로 1점 따라잡았다. 그리고 삼성은 전날 선발투수였던 임창용을 투입하는 강수를 두지만, 피로에 지친 임창용이 폭투를 범하며 동점을 만들어줬다.
이에 기세를 탄 두산은 8회말 정수근, 장원진의 연속 안타 이후 심재학의 좌익수 희생플라이로 다시 역전!
9회초 마무리 투수 진필중이 삼성의 마지막 타자 마해영을 삼진으로 잡아내면서 시리즈가 종료된다. 두산의 통산 3번째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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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의 순간.
4. 우승 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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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 세 번만에 처음으로 제작한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17]
5. 중립구장 경기 논란
'''잠실 중립구장 경기 규정'''이 다시 문제가 되었다. 이미 1993년부터 플레이오프 진출팀이 서울 연고팀일 경우 이 시리즈 같은 문제점을 완화하기 위해 순위에 상관 없이 1~2, 5~7차전을 잠실에서 치르도록 했고[18] 1998시즌부터 서울팀이 한국시리즈에 진출 시 1, 2, 6, 7차전은 정규시즌 1위 팀 홈구장, 3, 4, 5차전은 플레이오프 승리 팀 홈구장에서 치르는 걸로 보완이 되었지만,[19] 단일리그제로 돌아오면서 크보에서 까먹었는지 아니면 그대로 증발해버렸는지 1,2차전을 대구에서 그리고 '''3차전부터 7차전까지''' 쭉 잠실에서 경기를 치르게 하는 병크를 저지른 것. 다만 김응용 감독이 당시의 불 붙은 두산 타선을 보고 넓은 잠실구장에서 하는 게 유리하다고 주장해서 이 같이 중립경기를 치르게 했다는 설도 있다.[20] 또한 당시에 두산이 준플레이오프에서 부터 올라오는 엄청난 체력소모와 더불어서 당시 삼성의 전력이 강했기 때문에 설마 삼성이 지겠냐는 언론의 분위기였고 이는 시리즈 시작전만 해도 엄청난 문제로 번져지진 않았지만 결국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는 1998년의 규정을 따라 중립경기 규정이 완화되어[21] , LG가 한국시리즈에 올라오자 중립경기를 치르지 않았다.
그러나 중립구장 제도가 불합리한 제도임은 분명하지만, 일부 강성 팬들이 주장하는 것마냥 '''중립구장 제도 때문에 진 거다'''라고 주장하기에는 지나친 비약이다. 애초에 이건 준플레이오프부터 올라와서 전력/체력 열세를 딛고 우승을 이뤄낸 두산 선수단을 폄하하는 것이다. 또한, 과거에 더한 중립구장 규정들을 뚫고 해태 타이거즈는 잘만 우승했으며, 그전 최근 우승인 1997년 한국시리즈 역시 5경기가 잠실로 배정되었음에도 우승했다.
그런데 중립구장 경기 규정이 만악의 근원이라는 주장은 틀렸지만, 그 반박으로 중립구장 경기 규정이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주장까지도 나오는데 이것 역시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두산은 중립구장 경기 규정의 덕을 크게 본 것이 맞다. 바로 위 문단에서 해태 타이거즈가 중립구장 규정들을 뚫고 잘만 우승했다고 돼있는데, 해태 타이거즈가 한국 시리즈에서 주로 맞붙었던 팀들은 80년대~90년대에도 명문팀이었던 삼성 라이온즈와 신흥강자 빙그레 이글스였다. 해태든 삼성이든 빙그레든 똑같이 지방팀인데 중립구장 규정이 특정 팀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리가 없다. 그나마 서울 연고팀과 붙어서 해태가 우승을 차지한 한국시리즈는 각각 MBC(LG의 전신)와 LG를 상대로 한 1983년 한국시리즈와 1997년 한국시리즈 뿐인데 1983년 한국시리즈 때에는 아웅산 테러 때문에 방송국팀 MBC가 훈련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중립구장 경기규정이고 뭐고 MBC가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1997년 한국시리즈가 잠실 경기가 5경기였다고 했지만 시리즈가 5차전에서 끝나서 실제로 열린 잠실 경기는 3경기에 불과했다. 무등 2경기, 잠실 3경기 시리즈였으니 해태가 정규시즌 1위를 하고도 손해를 봤다고 하기엔 애매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어차피 중립구장 경기규정이 없었어도 5차전까지는 무등 2경기, 잠실 3경기였을테니.[22]
또한 삼성은 시리즈 4차전까지 졸전을 거듭하면서 시리즈를 1승 3패로 밀렸으며, 이 시점까지는 중립경기 규정과 아무 상관이 없었다고 적혀 있었으나 5차전 이후의 흐름이 문제인 것이다. 전 버전에서는 5차전만이 유일하게 삼성이 입은 직접적인 피해라고 적혀있었는데 이는 사실관계가 상당히 어긋난 주장으로, 중립구장 경기 규정이 없었으면 5차전 삼성 승리 이후 6차전, 7차전을 삼성 홈구장에서 치를 수 있었기에 삼성이 충분히 유리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중립구장 경기 규정이 없었어도 두산이 문제없이 우승했을 거라는 두산 팬덤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두산이 5차전에서 시리즈를 끝냈어야 했다. 5차전 시점까지는 중립구장 경기 규정이 있든 없든 삼성 홈경기 2회, 두산 홈경기 3회였을 것이므로. 다만 이 5차전은 두산 홈 경기가 아니라 중립경기였으며 삼성이 정규시즌을 우승해 두산이 원정 자격이고 삼성이 홈팀 자격을 가지고 말 공격을 했다는 것도 생각해 봐야 하지만, 결론적으로 2001년 한국시리즈는 삼성의 홈경기를 치뤘어야 했던 6차전까지 끌려가서 두산 홈경기로 치르게 되었고, 그 6차전마저도 두산이 1점차로 겨우 이겼으니 만약 삼성 홈구장에서 6차전이 열렸더라면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가정은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삼성 입장에서 불운했던 부분은 2차전이 우천취소로 하루 밀리며 두산의 지친 투수진이 하루를 벌었다는 점과 발비노 갈베스라는 X맨이 존재했다는 점도 들 수 있지만 이는 중립구장 경기 규정과 상관이 없으니 이 문단에서 길게 이야기할 거리는 아니다.
하지만 최근에도 2020년 한국시리즈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때문에 개막이 연기되면서 한국시리즈 때 너무 추위가 심해져 어쩔 수 없이 유일한 돔구장인 고척에서 한국시리즈 전 경기를 치렀는데 이때 정규시즌 우승 팀은 NC 다이노스였고, 플레이오프 승리 팀은 두산 베어스였는데, 고척돔이 서울에 있고 NC의 연고지는 삼성의 연고지인 대구보다 서울에서 더 먼 창원시이기 때문에 NC가 말 공격을 더 많이 한 것을 빼면 '''중립경기지만 사실상 모든 경기를 두산의 홈 경기로 치르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고도 할 수 있다.'''
어쩔 수 없던 일이긴 하지만 사실상 1,2차전이라도 대구에서 치럿던 2001년보다도 더 정규시즌 우승 팀에 불리한 조건이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23] 그런데도 NC는 실책으로 2,3차전에서 패배했긴 했지만, 이후 두산에 4년 전 당한 한국시리즈 스윕패를 완벽히 설욕하는 '''25이닝 연속 무득점'''이라는 KS는 물론 PS 역대 최다 무득점 기록을 경신하는 불명예를 안겨 주며 통합 우승에 성공했다.[24] 과거 해태는 지방 팀들과 대결이 많았고, 그나마 서울 팀들과 대결도 5차전에서 일찍 우승했다고 하더라도 최근의 NC는 우승팀인데도 체력에서 이득을 본 것을 제외하면 모든 경기를 서울에서 치러 2001년의 삼성보다 더 불리했는데도 우승에 성공했다.
그런데 2020년 한국시리즈의 NC가 2001년의 삼성보다 불리했는지도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2020 한국시리즈는 코로나 때문에 1,2차전은 고척돔 수용인원의 50%, 3~5차전은 수용인원의 30%, 6차전은 수용인원의 10%만 받아들인 채로 경기를 했는데, NC가 두산에 비해 팬 수가 적은 것은 둘째치더라도 팬들이 하루이틀을 통으로 비운 뒤 창원에서 올라와야 하고, 교통비도 많이 든다는 것이 큰 부담인 반면 두산 팬들은 그냥 퇴근 후 자가용이나 전철,시내버스를 타고 관람을 오면 되므로 당연히 직관을 더 많이 갈려고 할 것이어서 순식간에 모든 표가 매진되는 특성 상 예매싸움에서 훨씬 많은 표를 살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정도 인원은 구단측에서 조직적으로 팬들의 원정을 준비해서 두산에 비해 팬들의 직관이 훨씬 힘들어서 밀리더라도 비슷하게는 채운 채로 응원전을 펼칠 수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25] 만약 평소처럼 관중수에 제한이 없었더라면 아무래도 서울팀인 두산이 관중 동원 측면에서 유리했겠지만 코로나로 인해 두산이나 NC나 응원단 수는 비슷비슷해서 두산이 서울팀이라고 엄청나게 유리한 부분은 없었다.[단] 그리고 NC가 연고지가 창원이라지만 1위팀 입장에서 창원에서 충분히 훈련을 하면서 휴식을 취하다가 서울로 올라오면 그만이기에 딱히 원정 피로라고 할 것도 없었다.[26]
더구나 고척 스카이돔이 서울에 있는 구장이라지만, 두산의 홈구장인 잠실구장과는 여러모로 다르기에 두산의 홈 경기라고 부를 만한 조건이 되는지는 의문부호가 붙을 수 밖에 없다. 두산이 2020년 한국시리즈에서 홈 경기 이점을 누렸다는 말이 성립하려면 관중 동원에서 NC와 차이가 나거나[단] 두산이 평소에 홈 경기장으로 사용하던 잠실야구장에서 경기를 치렀어야 했는데 2020년 한국시리즈는 그 어떤 것에도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2020년 한국시리즈는 두산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NC가 불리한 조건을 이겨내고 우승한 게 아니라, 원래부터 두산이 팬들의 관람이 쉽고 자택에서 쉴 수 있는 것 등에서 조금은 유리했지만 거의 반반싸움이었는데 두산이 2018년의 자기들을 뛰어넘는 역대급 졸전을 펼치면서 NC에게 일방적으로 당한 시리즈에 가깝다.
반면 2001년 한국시리즈는 관중수 제한이 없었기에 서울, 그것도 두산의 홈구장에서 중립경기를 치른다면 당연히 두산의 팬이 많이 들어올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27] 더구나 두산이 평소 시즌의 절반 이상을 이용하는 잠실구장이니 익숙함 측면에서도 확실히 앞섰을 것이다. 게다가 발비노 갈베스는 단순히 한국시리즈에서 부진한 선수1이 아니라 2001 시즌 후반부터 삼성의 분위기를 망친 주범이었으니 마이너스 요소가 하나뿐이 아니었다. 결국 2001년의 삼성이 자체적으로 잘했든 못했든 간에 역대 한국시리즈 참가팀들 중 2015년의 삼성과 더불어 가장 불리한 조건에서 싸운 것은 맞으며, 그런 와중에도 6차전 1점차 승부까지 시리즈를 끌고갔다. 2015년이야 불법도박한 선수들을 뺀 것이니 삼성이 도의적으로 옳은 선택을 한 거니 그렇다 치더라도 2001년의 중립구장 경기규정에 대해서는 아쉬움 섞인 뒷말이 두고두고 나올 수 밖에 없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예측된다.
물론 그런 악재에 시달리던 삼성이더라도 강팀은 강팀이고 한국시리즈도 나름대로 치열하게 흘러갔으니 2001년의 두산이 잘한 것은 분명하다. 허나 분명히 두산에게 유리한 점이 존재했으며 삼성의 한국시리즈 패배가 삼성이 못해서라고 단정짓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기존의 2001년 삼성에게 씌워져있던 '1위할 정도로 강한 팀이고 별다른 마이너스 요소도 없는데 자만해서 아래순위 팀에게 한국시리즈 참패를 당한 팀'이라는 이미지는 사실 2018년 두산에 가까우며, 실제로 역대 한국시리즈에서 (선수 부상같은 야구 내적인 요소 말고, 팀 분위기를 흔들 만한 사건이라든가 불합리한 제도 같은 야구 외적인 요소에서) 별다른 페널티 없이 싸웠지만 업셋을 당한 팀은 2018년 두산 외에는 딱히 없다고 봐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결론을 내리자면 '''이 때의 중립구장 경기 제도 때문에 삼성이 한국시리즈에서 큰 손해를 본 것은 맞지만, 두산에게 업셋을 당한 이유가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니란 것'''이다.
6. 여담
6차전 9회 초 2사 1, 2루에서 두산 마무리 진필중이 삼성 마해영을 상대로 우승을 확정짓는 삼진을 잡아내는 장면. SBS에서 6차전 중계방송을 했으며 박노준 해설위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두산은 1992년 롯데에 이어 역대 2번째로 준플레이오프부터 시작해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팀이 되었다. 그러나 삼성 팬들에게는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삼성은 이걸로 '''7번째 준우승'''이었다.
두산 우승이 결정나는 순간 이때 삼성의 이선희 투수코치가 이런 말을 했었다. "'''어떻게 두산에게 집니까? 두산에 누가 있다고?!!'''" 그 정도로 두산의 투수진이 삼성에 비해 현격하게 떨어졌다는 것을 방증한다.
준플레이오프 통과팀이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3번의 경우밖에 없는 시리즈. 다른 하나는 롯데가 우승한 1992년 한국시리즈고, 또 하나는 2015년 한국시리즈의 두산이다.[28] 이 둘은 동시에 시즌 승률 3위가 우승을 차지한 시리즈이기도 하다.
또한 우승팀 '''두산의 페넌트레이스 승률은 .508로, 역대 한국시리즈 우승팀 가운데 가장 낮았다.'''[29] 그리고 역대 시리즈 중 부실한 투수진[30] 에 비해 '''타격 하나로 우승을 차지한 유일한 시리즈다.'''[31] 이 때 두산의 득실은 52득점 51실점이었으며, 한국시리즈 최다득점 1위와 최다실점 2위(1위야 당연히 상대였던 삼성 라이온즈) 기록이다.[32]
이 한국시리즈는 2014년까지 하위(정규리그 2~4위) 팀이 업셋에 성공한 마지막 시리즈였다. 2002년 이후로는 정규리그 1위 팀이 한국시리즈에서 줄곧 우승을 차지하면서 2위 이하 팀들의 하극상은 일어나지 않았으나 2015년 한국시리즈에서 14년 만에 마지막 업셋의 주인공이었던 두산 베어스가 당시 업셋의 피해자였던 정규 시즌 1위팀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또 다시 업셋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2018년 한국시리즈에서는 두 차례 업셋의 주인공이었던 두산 베어스가 SK 와이번스에게 업셋을 당하는 피해자가 되었다.
여담으로 두산은 OB 베어스 시절부터 1997년 5위-1998년 4위-1999년 3위-2000년 2위로 매년 한계단씩 상승해서 위의 동영상에서도 나오듯 두산 관계자가 2001년에는 우승 하는 거 아니냐고 했는데 결국 진짜로 우승의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2000년 한국시리즈에에서 3연패뒤 3연승으로 시리즈를 끝까지 끌고가고, 그 다음해 업셋의 연속으로 기어이 정점에 오른 두산의 활약상에 이 시기부터 언론들이 '''미라클 두산'''이란 별명을 많이 쓰게 된다.[33]
양 팀은 4년 후인 2005년에 한국시리즈 리턴 매치를 갖게 된다. 그리고 삼성은 4년 전의 아픔을 스윕으로 되갚았다.
두산 베어스는 해태 타이거즈가 1987년에 3회 우승을 이룬 이후 두 번째로 3회 우승을 달성한 팀이 되었다. 네 번째 우승 역시 정규 3위에서 1위팀인 삼성을 업셋했는데 2001년과 비슷한 점이 많다.
2017년까지는 최다 승차 뒤집기(13.5게임차)로 남아있었지만, 2018년 이걸 뛰어넘는 뒤집기를 자신들이 당하게 된다.
배영수의 은퇴로 이 시리즈를 경험했던 선수들은 전원 은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때의 희생양이었던 배영수는 이제는 이 시리즈의 승리팀 소속으로 또 하나의 우승반지 획득에 성공하였다. 기존 삼성 라이온즈 소속으로 7번의 우승을 했을 때와 달랐던 점은 이번 두산 베어스 소속으로 우승할 때는 마지막 아웃카운트 2개를 잡고 한국시리즈 최고령 세이브 기록을 세우며 시리즈를 마무리짓는 헹가레 투수가 되었다는 점이다.
6.1. 그놈의 4차전
4차전 3회말 두산 1이닝 최다득점 장면.
뭐니뭐니해도 시리즈 전체를 결정한 경기는 4차전. 이날 경기에서 삼성은 2회초에 8득점으로 한국시리즈 1이닝 최다득점기록을 세웠지만, '''30분만에 두산이 12득점으로 그 기록을 갈아치워 버렸다.''' 결국 4차전 결과는 18:11로 두산의 승리로 마무리가 되었고, 한국시리즈의 승부추도 두산 쪽으로 확연히 기울게 된다. 5차전을 삼성이 간신히 잡긴 했지만, 이미 내준 분위기를 되돌리기는 역부족이었다. 어쨌든 시리즈가 끝나고 삼성이 우승한다고 장담했던 야구 전문가들은 변명하기에 바빴다(...).
이런 전설적인 패배의 원인 중 하나는 가뜩이나 한성깔 하는 성격이었던 외국인 에이스 발비노 갈베스다. 그는 정규시즌 말 잠적사건으로 팀의 불안요소로 떠올랐고, 4차전에서 핵폭발을 해버렸다. 갈베스가 일으킨 대화재를 끄기 위해 삼성은 김진웅을 내보냈지만, 젊은 에이스가 될 것이라 믿고 있던 김진웅은 잦은 등판으로 지쳐있었고, 새가슴이었다. 내보내는 투수마다 두들겨 맞는 꼴을 본 삼성팬들은 절망에 빠졌으며, 우즈가 친 투수앞 땅볼을 놓치는 박동희를 보고는 멘붕했다.[34] '''삼성은 저주받았다'''는 삼성팬들의 울부짖음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7. 관련 문서
8. 둘러보기
[1]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유일하게 10승 투수가 단 한 명도 없이 우승한 사례'''다. 이를 반영하듯, 프로야구매니저에서 2001 두산의 투수진은 전부 코스트가 3코스트~6코스트로만 구성되어 있다.[2] 그해 이혜천은 9승 6패 3세이브 6홀드(홀드 부문 7위), 출장경기 수 10위(53), 방어율 6위(3.62), 탈삼진 10위(107) 등 전천후로 굴려지며 두산의 우승을 견인하였다. 특히 한국시리즈에서는 전 경기 출장의 위업을 달성하며 혼자 2승을 거두었다. [3] 다만 이 시즌에는 4위싸움이 박터져서 4위와 8위와의 게임 차가 단 2게임밖에 나지 않았다는 걸 고려해야 한다. 그 해 롯데는 '''역대 최고승률 꼴찌'''(.457, 59승 70패 4무)였다.[4] 당시 투수들 중에 2점대에 15승을 찍은 투수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타고투저[5] 그래서 당시 삼성의 투수코치였던 이선희가 '''"어떻게 두산한테 집니까? 두산에 (투수가) 누가 있다고…"'''라는 말을 한 것. 지금도 야구는 투수놀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하물며 당시에야…[6] 파머를 퇴출이 확정되고, 이태원에서 파머, 닐, 닐의 아내가 술을 마시다가 식당에서 시비가 붙는 바람에 닐도 같이 퇴출되었다.[7] 하지만, 쓸만한 좌완투수로는 전병호 밖에 없었고 이 같은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하여 2001년 시즌이 끝난 뒤 SK와의 6-2 트레이드를 통해 오상민을 데려왔으며 다음 해 시즌 중에는 나르시소 엘비라를 영입하여 좌완선발 갈증의 한을 풀었다[8] 해당 시즌 4위 한화의 승률은 0.473에 불과했으며, 두산은 2승으로 가볍게 스윕승을 거두면서 1999년 승률 1위를 하고도 한국시리즈를 못간 한을 풀었다. 한화는 신인왕 김태균의 홈런을 앞세워 1차전 4:1로 앞서갔지만, 5회 우즈한테 쓰리런을 맞고 결국 패했고, 2차전은 1회 '''8실점'''을 해버리며 그대로 패했다.[9] 삼성은 한국시리즈에 올라가면 힘도 제대로 못 써보고 졌기에 이런 소리를 들었다. 이 저주는 이듬해인 2002년에 이르러 깨졌다.[10] 프로야구 개막 이후로 삼성을 한국시리즈에서 '''가장 많이 물먹인 감독'''이 김응용 감독이다. 그 정도로 당시 삼성이 얼마나 우승을 갈망했는지를 보여준다.[11] 삼성은 갈베스-전병호-김현욱-배영수-김진웅, 두산은 콜-최용호-이혜천-이경필-차명주.[타사중계2] KBS 제2라디오 전우벽-이광권[12] 당시 KBS 라디오 중계진 멘트 中 0S-2B(현행 2B-0S)에서 무리하게 승부볼 필요 없다고 얘기했었는데, 무리하게 승부 보다가 적시타를 얻어맞고 말았다.[13] 박명환은 이 해 선발로 딱 5번 나왔다.[14] 원래 이혜천이 등판해있던걸, 이경필로, 그런데 이경필이 불을 지르자 차명주로, 그리고 차명주도 불을 지르자 조계현을 올렸는데, 3 실점을 하자 최용호를, 최용호마저 불을 지르자 진필중을 중무리 투수로 썼다.[타사중계4] KBS 제2라디오 전우벽-이용철[타사중계6] KBS제2라디오 전우벽-이용철[15] 프로야구 원년 개막일 출생자.[16] 잠실구장 역대 2번째, 포스트시즌 최초 장외홈런[17] 1982년 우승 반지는 2011년에 뒤늦게 제작했고, 인줄 알았는데 야구선수 출신 연예인이 공개했다.[18] 이 사례가 적용된게 1997년 한국시리즈다. 당시 LG 트윈스가 플레이오프에서 올라와서 1,2차전을 해태의 홈구장인 무등 야구장이 아닌 잠실 야구장에서 치렀다.[19] 이 규정에 의해 서울팀이 없었던 1999년 한국시리즈는 잠실 중립경기가 열렸지만, 서울팀이 포함되었던 1998년과 2000년은 정규시즌 1위팀 기준 2(홈)-3(원정)-2(홈) 방식으로 열렸다.[20] 그도 그럴게 당시 두산은 투수력이 좋아서 잠실의 이점을 얻는 팀이 아닌 오직 타격 하나만으로 승부를 보는 팀이기 때문에 한국에서 가장 큰 잠실에서 경기를 치른다는것은 두산에게 홈 원정을 떠나서 이점이라 하기 어려운건 사실이다.[21] 잠실구장을 쓰는 팀이 진출할 경우 1·2, 6·7차전을 정규시즌 우승팀의 홈구장에서, 3~5차전을 플레이오프 승리팀의 홈 구장에서 하는것으로 변경하였다. 이후 이 규정은 두 팀이 모두 30000명 이상의 수용규모를 가질때도 적용되었으며, 좌석 고급화에 따라 2010년에 25000명, 2015년에 20000명 이상의 수용규모를 가질 경우로 완화되었으며 2016년부터 중립경기는 폐지된다.[22] 더구나 당시 LG는 플레이오프를 최종전까지 치르고 올라온 상태에서 1,2차전을 잠실, 3,4차전을 무등, 5차전을 다시 잠실에서 치뤘기에 한국시리즈에서만 서울-광주-서울로 이동하면서 체력소모가 대단했다. 물론 준플레이오프부터 올라온 두산 역시 체력소모가 컸겠으나 4차전 이후 다시 광주에서 서울로 올라와야 했던 97년 LG와 4차전 이후 그냥 하루 휴식을 가지며(...) 5,6차전을 치룬 01년 두산이 절대 같은 조건은 아니다.[23] 팬들 역시 당연히 두산의 팬들이 경기장에 오기 쉬워 경기장 분위기까지 압살당할 뻔 했으나, NC 팬들도 이전 경험을 바탕으로 경기장 분위기가 경기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기에 퇴근 후 직관을 하러 오는 두산 팬들과 달리 '''하루이틀을 통으로 비운 후 창원에서 올라와 고척돔에 결집'''해 실제 분위기는 반반 싸움이었다. 이 점은 다행이었던 것.[24] 심지어 이 25이닝 동안 거의 삼자범퇴만 당하거나 득점 기회가 별로 없었던 것이 아니라, '''무사 2,3루, 무사 3루, 1사 1,2루''' 등의 득점 기회가 수없이 있었음에도 적시타는 물론이고 '''희생번트나 플라이조차 한 번도 나오지 않으며''' 무려 25이닝 동안 무득점을 했기에 두산 구단과 팬 입장에서는 더욱 뼈아팟다.[25] 물론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구단에서 조직적으로 준비한 것에 따라 NC 팬들이 관중 수 제한으로 더욱 치열해진 예매싸움을 거쳐 원정을 많이 와줬기 때문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2014년처럼 NC 팬들은 고척에서 전멸했을 것이다.[단] A B 이것은 NC 팬들이 이전 경험을 바탕으로 경기장 분위기가 얼마나 중요한 지 알기에 퇴근 후 관람을 오는 두산 팬들과 다르게 하루이틀을 통으로 비우고 많은 교통비를 부담하면서까지 창원에서 올라와 고척돔에 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관중 수 제한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관중 수 제한 때문에 더욱 치열해진 예매싸움에서 밀려 2014년 당시 잠실에서처럼 NC 팬들은 고척에서 전멸했을 것이다.[26] 단 두산 선수들은 자택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반면 NC 선수들은 서울 호텔에서 지내야 했던 부분은 있다.[27] 다만 2020년은 전 경기를 고척에서 치른 것과 달리 이때는 1,2차전이라도 대구에서 치르긴 했다. 만약 중립구장 경기를 하지 않았다면 삼성은 6차전 1경기를 홈구장에서 추가로 했을 것인 반면, NC는 1,2,5(제도 개정으로 정규시즌 우승팀 홈 경기로 전환),6차전 4경기나 홈구장에서 하지 못했다.[28] 두산이 이 3번 중 2번을 기록했고, 상대도 공교롭게도 둘다 삼성 라이온즈였다![29] 이듬해 두산은 승률 .504로 5위를 해서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는데, 무승부가 2001년보다 적어서 승수는 2001년의 65승보다 1승 많은 66승을 기록했다.[30] 역대 한국시리즈 우승팀 라인업 중 투수 라인이 제일 최약으로 손꼽힌다. 당장 선발진에 '''10승 투수'''가 없다는 것이 반증.[31] 역대 한국시리즈는 항상 경험이 풍부하고 투수력이 안정된 팀이 우승을 차지해왔다. 즉, 이 시리즈가 유별났을 뿐. 위에 이선희 코치가 경기 후 저런 한탄섞인 코멘트를 했던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이유다. 단적으로 3승을 먼저 올린 2013년의 두산 베어스와 MVP 후보만 4명을 보유했던 2014년의 넥센 히어로즈, 강력한 중심타선을 보유한 2016년의 NC 다이노스가 왜 우승 문턱에서 좌절했는지 , 부실한 투수진과 빵빵한 타격의 팀컬러를 갖고 있던 1997~1999년 삼성 라이온즈와 제리 로이스터가 감독으로 있던 2000년 후반의 롯데 자이언츠가 왜 우승 근처도 못갔는지를 생각하면 금방 답이 나온다. '''괜히 이 때의 두산 베어스를 미라클 두산이라고 하겠는가.''' 야구는 투수놀음이란 격언이 전혀 맞지 않은 유일한 시리즈.[32] 득실차가 같았으면 양팀이 KS 최다득점/최다실점 공동 1위를 할 뻔했다.[33] 시초는 1995년 OB 베어스의 기적같은 페넌트레이스 우승 이후 '미라클 OB' 였다.[34] 한국시리즈에서 백투백 홈런을 허용한게 원인이었는지, 해당 선수는, 2002년 시즌 중 방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