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천

 



'''강석천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 펼치기 · 접기 ]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99'''

'''한국시리즈 우승 코치'''
'''2015'''
'''2016'''
'''2019'''





''''''빙그레 / 한화 이글스''' 등번호 17번'''
강만식
(1988)

'''강석천
(1989~2003)
'''

차명주
(2004~2006)
''''''한화 이글스''' 등번호 84번'''


'''강석천
(2004)
'''

송진우
(2011~2014)
''''''한화 이글스''' 등번호 87번'''


'''강석천
(2005~2014)
'''

니시모토
(2015)
''''''두산 베어스''' 등번호 86번'''
송일수
(2013~2014)

'''강석천
(2015~)
'''

현역


<colbgcolor=#131230> '''두산 베어스 No.86'''
<colcolor=#ffffff> '''강석천
姜錫千 / Seok-Chun Kang'''
'''생년월일'''
1967년 12월 7일
'''국적'''
[image] 대한민국
'''출신지'''
[image] 충청북도 청주시[1]
'''학력'''
신탄진초 - 한밭중 - [image] 대전고 - [image] 인하대
'''포지션'''
'''3루수''', 외야수[2], 지명타자[3], [4],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9년 드래프트 1차 3순위 (빙그레)
'''소속팀'''
[image] [image] '''빙그레·한화 이글스 (1989~2003)'''
'''지도자'''
[image] 한화 이글스 2군 수비코치 (2005)
[image] [image] 한화 이글스 1군 수비코치 (2006~2008)
[image] 한화 이글스 1군 타격코치 (2009)
[image] 한화 이글스 2군 타격코치 (2010~2011)
[image] 한화 이글스 1군 타격코치 (2011~2012)
[image] 한화 이글스 2군 타격코치 (2012~2013)
[image] 한화 이글스 1군 수비코치 (2013~2014)
[image] 두산 베어스 1군 수비코치 (2015~2017)
[image] 두산 베어스 1군 타격코치 (2017)
[image] 두산 베어스 2군 감독 (2018~2019.7.19.)
[image] 두산 베어스 1군 수석코치 (2019.7.19.~ )
'''수상'''
한국시리즈 우승 (1999)
1. 소개
2. 현역 시절
2.1. 연도별 성적
3. 지도자 시절
3.1. 한화 이글스
3.1.1. 2014년 이전
3.1.2. 2014년
3.2. 두산 베어스
4. 사건사고/논란
4.1. 음주운전 뺑소니 사건
5. 여담

[clearfix]

1. 소개


'''"못치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하는 것이다. 못치면 경기 끝나고 숙소까지 뛰어간다는 생각으로 악을 갖고 야구를 해야 한다"'''

1990년대 초반 한대화, 1990년대 중반 홍현우, 1990년대 후반 김한수에 가려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본적은 없지만, 묵묵히 이글스의 3루를 지키며 프랜차이즈 스타로 남은 선수. 바로 강석천이다.

팀 동료들이 경쟁하듯 빛을 내뿜던 시절에는 그 빛에 묻혀있어야 했지만, 하나 둘 불이 꺼진 암흑기에도 홀로 남아 고군분투하며 팀을 치욕에서 구하고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선수였다. 강석천은 신인지명된 1989년부터 1990년대 초반 사이 한국시리즈의 단골손님이었던 최강팀 빙그레 이글스의 주축선수였지만, 다이너마이트 타선이라고 불렸던 장종훈, 이정훈, 이강돈 등에 묻혀있는 선수였다.
그러나 이정훈과 이강돈도 떠나버리고, 장종훈의 방망이도 서서히 식어가며 침체기로 빠져들던 1990년대 후반에 강석천은 자신의 전성기를 맞이했고, 1999년 팀의 유일한 우승을 이끌어낸 주역이 되기도 한 선수였다.

2. 현역 시절


[image]
데뷔 첫 해 강석천은 70경기에 출장해 .289를 기록했고, 이듬해에는 확실한 주전 3루수로서의 입지를 굳히며 역시 2할8푼 대의 방망이 솜씨를 과시했다. 그러나 타격왕(89년 고원부, 91~92년 이정훈), 타점왕(89년 유승안, 90~92 장종훈), 최다안타왕(87년 이정훈, 89~90년 이강돈, 91년 장종훈), 홈런왕(90~92년 장종훈)이 있었기에 2할8푼정도의 기록은 눈에 띄지 못했다. 빙그레 이글스 전성기의 다이너마이트 타선에서 6번 7번을 맡아 상대팀에 쉬어갈 틈을 주지 않은 선수.
1990년 태평양전에서 싸이클링 히트를 치고, 1992년까지 매년 두자릿 수 언저리의 홈런, 도루 모두 해낼 수 있는 호타준족 내야수였으나,[5] 1993년 시즌 후반에 부상을 입고 장타력이 사라져버렸다. 부상 이후 95년부터 외야수로 전향하였고 99년에 다시 3루수로 복귀했다. 장타력이 줄었지만 두자릿수 도루가 가능한 빠른 발과 2할 9푼~3할 정도의 타격을 보여주며 한화 3루수 자리를 지켜왔고, 더불어 이영우가 등장하기 전까지 리드오프 역할도 했었다.
커리어 하이는 1997년 시즌. 중견수와 지명타자로 123경기에 출장해, 타율 0.322, 7홈런, 17도루를 기록하며 생애 첫 3할 타율을 기록했고, OPS도 0.809, wRC+는 126.6을 기록했다.
한화의 유일한 우승 시즌이던 1999년에는 팀의 주장을 맡았고, 두번째 3할 타율을 기록하고 20도루를 하는 등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여러모로 '''소리없는 강자'''라는 이미지가 어울리는 선수.
포지션이 3루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방 쳐줄 수 있는 장타 능력이 부족한 대신 컨택이 준수하고 발이 빨라 주루 능력이 괜찮은 선수였다. 또한 1999년에는 16개의 사구를 맞으며 나갔을 정도로 공필성 못지않게 근성 있는 플레이를 선보이기도 했다. 다만 수비는 안그래도 내야가 약했던 한화에서도 돌글러브 소리를 들을 정도로 수비 능력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2001년까지 한화의 주전 3루수 자리를 지켜오다가, 2001년부터 노쇠화가 겹침과 동시에 신인임에도 상당한 임팩트를 보이던 김태균 등에게 밀려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기 시작했고, 2002년 시즌 플레잉코치로 활약했다. 유승안 감독의 리빌딩 계획에 따라 결국 2003년 시즌 중 은퇴를 선언하며 15년 간의 선수생활을 마무리했다. 은퇴식은 2003년 9월 20일 대전 KIA전에서 열렸다.
안습한 연봉으로 주목받은 적이 있는데, 1996년도에 연봉이 고작 2900만원이었다. 당시 야구선수들 연봉은 지금의 그것에 비해 많이 적긴 했지만, 1996년에도 2900만원의 연봉은 주전에 어울리지 않았던 액수.[6] 다행히 1997년부터에는 그럭저럭 주전에 어울리는 연봉을 받았다.

2.1.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9
빙그레
70
135
.289
39
11
0
5
24
23
1
12
.481
.347
1990
113
356
.281
100
'''24'''
(2위)
1
12
49
67
16
51
.455
.367
1991
126
465
.275
128
21
4
11
57
72
17
49
.409
.342
1992
109
393
.257
101
21
5
12
54
57
9
31
.427
.310
1993
76
269
.249
67
16
1
9
38
33
12
21
.416
.299
1994
한화
46
150
.227
34
8
0
3
13
24
5
21
.340
.322
1995
81
257
.245
63
10
3
4
16
33
12
17
.354
.290
1996
113
357
.286
102
15
2
4
49
44
18
36
.373
.349
1997
123
447
.322
(7위)
144
(6위)
19
4
(9위)
7
34
66
17
44
.430
.379
1998
125
471
.276
130
23
'''5'''
(5위)
6
42
58
20
28
.384
.316
1999
130
433
.303
131
22
2
5
42
65
24
49
.397
.370
2000
123
433
.286
124
24
2
7
49
57
15
44
.400
.349
2001
120
407
.260
106
18
1
2
45
44
19
33
.324
.315
2002
94
242
.289
70
11
1
6
28
27
7
22
.417
.347
2003
8
18
.167
3
2
0
0
3
0
0
1
.278
.211
<color=#373a3c> '''KBO 통산'''
(15시즌)
1457
4833
.278
1342
245
31
93
543
670
192
459
.399
.338

3. 지도자 시절



3.1. 한화 이글스



3.1.1. 2014년 이전


[image]
은퇴 이후 1, 2군을 오가며 수비, 주루코치를 했었고, 2011년 1, 2군 코치 인사이동으로 타격코치로 이동했다.
코칭스태프 보직 변경 전 27경기에서 팀 타율 2할2푼1리, 경기당 평균 3.0점밖에 못했지만, 보직 변경 후 17경기에서 팀 타율 2할4푼7리, 경기당 평균 4.2득점으로 눈에 띄게 공격력이 향상됐다. 타율 상승의 원인은 바로 짧은 스윙을 강조했다고 한다. 1군에 올라오니 선수들이 죄다 홈런 스윙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후 타격폼을 수정하여서 소총수는 소총타격으로 전부 고쳐주었다.
이에 강석천 코치는 "성적이 좋지 않으면 스타도 없는 것이다. 팀이 이겨야 스타가 만들어지는 것 아닌가. 상황에 맞는 스윙을 하도록 주문하고 있다. 개인주의로는 절대 안 된다. 각자 해서는 예전 빙그레 시절처럼 좋은 타선은 만들기 어렵다. 하나의 팀으로 생각해야 한다. 각자 역할을 잊지 않고 에버리지에 중점을 둬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3.1.2. 2014년


보직은 수비코치로 송진우 2군 투수코치, 정민철 1군 투수코치와 함께 한화 이글스의 하위권에 큰 일조를 하는 중이다. 수비에서 어이없는 외야 실책이 벌어지면 상당수가 강석천 코치의 수비 시프트로 인한 결과. 그에 따라 2014시즌, 좌익수 최진행과 중견수 피에가 매우 힘들게 수비를 하고 있다. 원래 위치에 있었다면 잡을 수 있는 평범한 외야플라이를 2루타, 3루타로 만들어버린다며 한화 이글스 팬들은 강석천 코치의 퇴진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중.
6월 29일 포항야구장 삼성 라이온즈펠릭스 피에와 수비문제로 말다툼이 있었는데 그가 내뱉은 욕설이 입모양으로 다 나와서 논란이 일었다. #
결국 2014 시즌 후 김성근 감독이 새로 부임한 후 10월 27일 코치에서 물러났다.

3.2. 두산 베어스


그 후에 조경택과 함께 두산 베어스 쪽에서 모습을 보여 두산 베어스로 간 것이라는 카더라 통신이 유포되었고, 결국 11월 30일 '곰들의 모임'의 신임 코치 환영식을 통해 수비코치로 취업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군에서 전형도와 같이 수비코치를 맡게 된다.
그리고 역시나(...) 한화때와 다름 없는 무능함을 보여주며 권명철과 무한 까임을 맡고있다.[7] 1루 주루코치를 겸임했으나, 강동우를 콜업하면서 수비만 맡는다. 이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들어갔고, 팀이 우승을 함에 따라 99년 이후 16년만에 우승 반지를 획득했다.
OSEN 조인식 기자에 따르면 2016년 전지훈련 때 나는 행복합니다를 불렀다고 한다(...).
2016년 들어서 이미지가 가히 기적적으로 바뀌었다. 두산이 리그 최고 수준의 성적과 함께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놀라운 수비력을 보여주면서 강석천의 수비 코칭이 팀에 도움이 되고 있다는 인식이 팬들 사이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덕아웃에서 화면에 잡히기만 하면 늘 선수들과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고 있으며, 특히 어린 호수비한 선수들이 덕아웃에 들어오면
[image]
이런 식으로 예뻐 죽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8]
또한 수비이닝이 끝나고 들어올 때도 야수들과 열심히 소통하는 모습이 보이고 있는데, 특히 주전 키스톤 콤비 오재원, 김재호와는 토의를 하는 수준이라고 한다. KBS N Sports의 송진우 해설위원에 따르면,[9] 두산 선수들이 강석천을 굉장히 잘 따른다고 한다. 이에 돡갤을 비롯한 야구 커뮤니티에서도 강석천을 매우 좋아하고 있으며, '''도대체 이런 분을 왜 칰무원이라고...'''라는 반응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17년 스프링캠프 때 짬뽕밥을 시켜놓고 전형도 코치가 시킨 짬뽕을 먹어버려 한소리 들었다.
2017년 12월 2일 이강철 2군 감독이 수석코치로 임명된 후 공석이 된 2군 감독으로 내정되었다.
2019년 7월 6일 이천 베어스 파크 KIA 타이거즈전 경기 도중 판정에 항의하며 심판에게 폭언 등의 언행을 한 KBO 리그규정 벌칙내규 3항과 7항에 의거해 제재금 50만원을 부과했다. #
2019년 7월 19일 1군 수석코치로 보직 변경이 되었다. # 이에 대해 김태형 감독은 야수들을 위해 바꾸었다고 한다. 26일 콜업된 강동우 코치와 함께 야수들의 타격감 반등에 도움을 주겠다고 한다. 2군 감독은 박철우 코치가 맡는다.

사실은 8월 반등 시점부터는 이 분이 진짜 타격코치였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이 분과 김태형 감독의 공이 컸기 때문이다.

4. 사건사고/논란



4.1. 음주운전 뺑소니 사건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1996년 초 음주운전 뺑소니 사고라는 흑역사를 저지른 바 있다. 1996년 1월 6일, 한화 이글스 소속으로 뛰던 시절, 대전광역시 갈마동 경성큰마을아파트 앞에서 술을 마신 상태로 자신의 쏘나타 승용차를 몰고 가던 도중 중앙선을 침범에 마주오던 택시를 들이받은 뒤 도주했고, 마침 사고현장을 발견한 다른 택시기사가 강석천의 차를 뒤쫓아 붙잡혔고 이후 경찰에 입건되었다. 조사 결과 혈중 알코올 농도는 무려 0.06%로 면허정지에 해당하는 사항이었다. #

5. 여담


  • 법 없이도 살 사람들이 많은 한화에서 이정훈 2군 감독과 함께 보기 드문 근성파 선수.
  • 날렵한 이미지와는 달리 3루 수비에서는 구멍이나 다름없었다. 95~98시즌에 황대연(96년 시즌 중 LG로 트레이드), 이민호, 홍원기에 밀려 외야수 수비를 잠시 하게 된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황대연은 1996년 시즌 중 LG로 트레이드, 이민호가 버거씨병으로 리타이어하고, 홍원기는 두산 베어스로 트레이드되면서 3루수로 복귀한 1999년에 유일무이한 한국시리즈 우승의 일원이 되면서 이는 추억보정으로 어느정도 묻혔다(...). 그 다음 시즌 2000년까지 주전 3루수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나, 2001년에 어떤 별명 많은 야구선수[10]크보의 대표 꽃미남,[11] 3루수 용병들의 등장으로 입지가 좁아져 은퇴하였다.
  • 공필성과 많은 공통점이 있다. 호적상 1967년생, 3루수, 선수시절에 돌글러브 수비와 근성으로 유명했던 점, 코치시절의 무능함과 생명력까지. 다만 타격코치나 주루코치로는 어느 정도 역할에 충실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적성에 맞지 않는 수비코치 보직을 맡아 본의 아니게 비난받는다는 소수의견도 있다. 사실 위에서 말한 대로, 현역 시절 수비에서는 구멍이나 다름 없었던 선수를 왜 수비 코치를 시키는지. 이후 2016년부터 공필성이 두산 베어스 2군의 감독으로 부임하며 같은 팀 코칭스태프로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 게다가 둘 다 두산에서 이미지가 바뀌고 있다.
    • 감독들에서의 평과 달리, 함께 선수들과 잘지내는듯 하다. 2019년 시즌 중반, 두산 타자들의 타격이 침체 되자 강석천 2군 감독을 1군 수석으로 콜업하였다. 타자들을 잘알고 타자들의 심리 상담에 강점이 있어서 콜업했다고 한다.# 그만큼 선수들과 허물없이 지내는듯. 그리고 두산에서 둘이 가장 친하다.
  • 일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모 연예인과 성 빼고 이름이 같아서, 매느님, 원조 강게이로 불린다(...). 현역 시절엔 강가딘으로 불리우기도 했다.
[1] 정확히는 현재 청주시와 통합된 청원군 출신. 구 청원군 출신에 신탄진초등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봤을 때, 현도면이 출신일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 현도면은 신탄진 다리너머 바로 인접해있다.[2] 주로 중견수로 나왔으며 생각보다 외야수로 활동한 시기가 꽤 된다. 95년부터 98까지[3] 02시즌 김태균에 3루수 자리를 넘기고 주전 지명타자로 출장했다. 이외에도 외야수를 맡던 97시즌에도 3분의 1 이상을 지명타자로 출전했으며, 다른 시즌에도 이따금씩 지명타자로 나왔다.[4] 2001년 후반 김태균에게 3루수 자리를 넘긴 후 이광환 감독은 선발에 방진호라는 선수를 기용한 뒤 공격권이 들어가면 강석천과 교대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이따금 선발 2루수로 출전하긴 했지만 극히 일부였다.[5] 92년에는 도루가, 93년에는 홈런이 하나씩 부족했다.[6] 최고의 짠돌이 구단이 있어서 묻힌 감이 없지 않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화는 비용 지출에 대해 상당히 인색한 구단 중 하나였다.[7] 한화에서 말이 많던 강석천 시프트를 그대로 보여줬다.[8] 당시 조수행 선수가 했던 호수비 링크[9] 2016년 4월 24일 경기 중계[10] 그 다음 시즌인 2002년부터 1루로 전향.[11] 2005년 3루수를 전담하기까지 유격수3루수를 번갈아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