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병규

 


'''대한민국 제14대 재무부 장관
천병규
千炳圭 | Chun Byung-kyu
'''
<colbgcolor=#003764><colcolor=#ffffff> '''출생'''
1918년 7월 1일
경상북도 안동군 (現 경상북도 안동시)
'''사망'''
1993년 7월 19일 (향년 75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본관'''
영양 천씨
'''호'''
동백(東栢)
'''재임기간'''
제7대 재무부 차관
1956년 6월 8일 ~ 1958년 9월 3일
제14대 재무부 장관
1961년 7월 22일 ~ 1962년 6월 16일
1. 개요
2. 일생
3.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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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금융인, 관료, 정치인. 제4공화국 시절 검찰총장법무부 장관을 지낸 오탁근은 그의 처남이다.#

2. 일생


1918년 경상북도 안동군에서 태어났다. 안동공립보통학교(현 안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5년제 대구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등학교)를 수료하였다. 이후 일본 오사카상과대학 예과 및 본과 과정을 졸업하였다.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2년 한국은행의 전신 조선은행에 입사하였다. 8.15 광복이승만 정권 때 한국은행에서 초대 도쿄지점장, 오사카 지점장, 부총재, 은행감독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6년부터 1959년까지 재무부(현 기획재정부) 차관을 역임하였다.
5.16 군사정변 후인 1961년부터 1962년까지 재무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민주공화당 4대 의혹 사건 중 증권파동에 연루된 혐의로 1963년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 서울신문 이사를 거쳐 1964년 한국정경연구소 설립 당시 초대 이사가 되어 1965년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파월 장병을 위문하기도 했다. 재무부장관 고문, 아시아개발은행 상임이사 등 경제인으로 활동하였다.
1966년 재무부장관 고문으로 추대되어 이듬해 아시아개발은행 상임이사가 되어 여려 경제회의마다 한국대표단 고문으로 나섰고, 1972년 10월 유신 선포 후 1974년 주 태국 / 라오스 대사, 1976년 주 스위스 대사를 각각 지냈다.
1979년 제3기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에 임명되어 회기 동안 유정회 경과분과위원장과 한일의원연맹 도쿄회의 부위원장, 과학진흥대책위원장 등도 지냈으나, 1980년 신군부 정권 수립 후 1차 정치활동 피규제자로 묶이는 굴욕도 겪었다.
1981년 동방철관 회장, 1987년 백상재단 초대 이사장 등을 지내며 1991년에 자신이 소장한 금융서적 1,283권을 경상북도도립안동도서관에 기증했다.
1993년 7월 19일 오전 8시 10분, 서울대병원에서 숙환으로 숨을 거뒀다.
유족으로는 부인과 1남 4녀가 있다.

3. 저서


  • 천마, 초원에 놀다: 동백 천병규 고희 자전 - 동백천병규고희자전간행위원회.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