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옥대

 

1. 개요
2. 역사
3. 같이보기



1. 개요


신라 상대 진평왕 즉위년에 옥황상제가 내려보낸 선녀에게서 받은 신성한 옥대(허리띠).
하늘의 신들이 쓰던 허리띠를 왕위 즉위년에 하늘에서 하사한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2. 역사


삼국유사에 따르면 579년 진평왕이 즉위할 때 선녀가 옥대를 가지고 내려와 왕에게 바친 뒤 사라졌다고 한다. 형태는 금을 새겨서 옥을 박아 만든 네모난 판형 62마디를 연결한 허리띠로, 각 마디에는 하늘에서 정한 계시가 기록되었다고 한다.
천사옥대는 길이가 10위(圍)였다고 하는데, 보통 사람은 감히 찰 수 없을 만큼 허리띠치고는 길이가 매우 길다. 진평왕의 체구가 매우 컸다는 기록도 있음을 생각하면 앞뒤가 맞는다. 물론 고대에는 군주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군주의 체구를 과장한 사례가 많으므로 이 옥대도 그 과장한 표현에서 유래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전왕인 진지왕이 문제가 있어 재위 4년(579)에 폐위되었기 때문인지 진평왕 대에는 신성한 왕권을 공고히 다잡을 필요가 있어 이런 신물을 부각한 듯하다. 진평왕은 이 옥대를 중요행사 때 반드시 착용해 왕권의 권위를 확고히 세우고자 했던 것 같다.
다만 진평왕 이후 언젠가부터는 신라 왕이 직접 착용하지는 않고 비공개된 채로 창고에 보관했다. 수백 년이 지나 10세기 초 후삼국시대 경명왕 대에 신라 사신 김율고려 왕건에게 갔다. 그에게 왕건이 신라삼보에 대해 물었는데, 김율은 다른 둘은 잘 알았지만 천사옥대의 행방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후 서라벌의 창고를 뒤져서 다시 찾아냈다고 한다.
창고에서 천사옥대를 찾아내는 데에도 전하는 일화가 있다. 고려사에는 당시 '''황룡사에 살던 나이 아흔이 된 노승에게 물어서''' 천사옥대가 신라의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보관된 창고를 찾아서 꺼내려고 하자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일어서 제사를 지내고서야 안개가 걷혀서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선 신라의 국체를 지키려는 세력이 고려에게 저항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는 주장도 있다.[1] 신라가 나라를 고려에 바친 후 937년에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이 왕건에게 바쳤다. 위와 같이 예전부터 왕건이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었던 듯.
왕건이 보물에 관심을 가진 것은 유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비판받을 만한 일이다. 그래서 12세기 고려 중기의 학자 김부식삼국사기에 사론을 달아 왕건의 쉴드를 쳤지만 왕건을 까도 상관없는 조선시대에는 왕건이 천사옥대를 탐낸 부분을 가차없이 비판했다. 아무튼 천사옥대는 이후 고려의 창고(內庫)에 두었다고 하니, 중국의 전국옥새처럼 고대 한국에서 일종의 천명을 상징하는 물건이었던 듯하다. 야사에 의하면 조선 시대까지도 보관되었다고 한다.
천사옥대의 실제 모양은 행방이 묘연한 지금은 알 수 없다. 뉴스기사 등에서 천사옥대를 설명할 때 참고 이미지로 지금까지 남아있는 다른 신라 허리띠인 천마총 금제 허리띠, 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 금관총 금제 허리띠를 첨부하는 경우가 많다.#
북한에 왕건의 후손이라는 왕명찬이라는 사람이 왕건이 직접 쓰던 옥새, 옥대, 족보 등을 북한 당국에 기증했다고 하는데,[2] 어쩌면 이 천사옥대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3. 같이보기



[1] 다만 수장고에 어떤 유물들이 있는지 리스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헤메는 일은 현대에도 자주 있다.# 정말로 있는데도 못 찾는 경우도 드물지 않은 모양이다.[2] 그의 조상이 왕조가 망하면서 이 보물들을 챙겨서 산골로 들고가 성을 바꾸고 살면서 대대로 내려온 유물이라고 한다. 북한에서는 진품으로 본다. 대가 없이 기증한 데다, 기증자가 맡기면서 김일성 주석에게 전해달라고 말한 점 등 정황을 보면 가품일 리는 없을것이다. 감히 지도자에게 가품을 줬다가는 가문이 박살나는 동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