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삼보

 

1. 개요
2. 목록
2.1. 천사옥대(天賜玉帶)
2.2. 황룡사 9층탑(皇龍寺九層塔)
2.3. 황룡사 장륙삼존불상(皇龍寺丈六三尊佛像)
3. 같이보기

新羅三寶

1. 개요


신라 왕실의 권위와 신성함을 상징하는 하늘에서 내려준 3가지 국보이자 전설의 도구. 삼국유사에는 한때 고구려 왕이 신라를 치려고 했지만 이 신라삼보가 있어 침범할 수 없음을 깨닫고 모략을 중지했다고도 적혀 있다. 중국 주나라의 전설의 도구 구정(九鼎)에 빗대기도 했다. 신라삼보는 적어도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건국된 뒤에도 한동안은 존재했지만 여요전쟁, 여몽전쟁 등을 거치면서 오늘날까지 전해지지 못하고 소실됐다. 셋 중 천사옥대는 왕건이 창고에 보관한 게 마지막 기록이고, 목탑은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소실됐고 장육존상은 동경잡기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시대인 17세기까지는 남아있었지만 이후에 사라졌다.
고대 국가의 신성한 세 가지 보물이라는 점에서 일본 천황가의 3대 보물인 미쿠사노카무다카라(삼종신기)와도 비슷한 맥락이 있다.
삼기팔괴(三奇八怪)라는 것도 있는데 이건 신라삼보보다는 훨씬 나중에 만들어진 것 같다.[1] 경주시가 삼보삼기팔괴를 관광 마케팅에 쓰고 있다.

2. 목록


신라시대의 전설의 도구로는 금척이나 만파식적도 있지만 삼보에는 포함되지 않는데 이 신라삼보는 삼국통일 이전에 성립됐고 금척은 훨씬 이전 시대, 만파식적은 그 이후에 등장한 물건이기 때문인 듯. 만파식적 또한 삼보에 버금가는 보물 대우를 받았던 것은 맞다.

2.1. 천사옥대(天賜玉帶)


신라 상대 진평왕이 즉위년에 옥황상제가 내려보낸 선녀에게서 받은 신성한 옥대(허리띠)다. 자세한 것은 천사옥대 문서 참조.

2.2. 황룡사 9층탑(皇龍寺九層塔)


경주 황룡사에 있었던 높이 81m의 거대 목탑. 몇 번 훼손과 복원을 거치다가 여몽전쟁 때 불타 사라졌다. 자세한 것은 황룡사 문서 참조.

2.3. 황룡사 장륙삼존불상(皇龍寺丈六三尊佛像)


경주 황룡사에 모셔지던 거대한 불상들이다. 삼존불상의 높이는 장륙삼존불상이란 이름대로 1장 6척, 약 4~5m로 추정된다.
장륙삼존불상은 진흥왕 때인 574년 만들어졌다. 기록에 따르면 인도아육왕[2]이 철 5만 7천 근과 금 3만 분으로 석가의 삼존불상을 만들다가 실패하자 혼자 힘으로는 안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금과 철, 그리고 삼존불상의 모형을 배에 실어 보냈다. 이 배가 바다를 떠돌아 다니다가 신라 땅에 닿게 되었으며, 신라 사람들이 이걸 가지고 삼존불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삼존불상 중 장육존상은 금 10,198분·철 35,007근이, 두 협시보살상은 철 12,000근·금 10,136분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꽤 세세한 기록이 있고 이후 기록에서도 큰 불상이 계속 등장하기 때문에 이 때 신라에서 저 정도 양의 금속으로 큰 불상들을 만든 것은 사실인 것 같지만, 그걸 인도에서 보내왔다는 것은 믿기 힘들다. 결정적으로 아소카왕은 기원전 시대의 인물로 두 사건의 시간차는 '''대충 잡아도 800년 이상'''(…). 아마도 불교적인 정통성을 위한 픽션이었을 것이다. 이 불상들은 황룡사가 없어진 조선시대까지 남았다고 하나 구한말엽에는 이미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1976년 황룡사지 발굴 때 장육존상 머리의 나발이 4개 달린 파편으로 보이는 것이 발견되었다. 나발은 쉽게 말해 불상의 머리카락 부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3] 장육존상이 크고 아름다운 불상이었던만큼 나발도 비례해서 상당히 큰데, 이것이 진짜 장육존상의 나발이 맞다면 신라삼보 중 유일하게 일부분이라도 현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발 파편은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황룡사역사문화관에 출토 나발로 추정복원한 장육존상의 머리가 전시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황룡사 장륙삼존불상 불두 파편 항목을 참조.

3. 같이보기



[1] 일제강점기 신문기사에는 나온다.[2] 마우리아 왕조아소카 왕을 말한다.[3] 불상의 머리카락을 자세히 보면 한 가닥씩 묘사한 게 아니라 소라 모양으로 꼬여있는 게 수백 개 달려있는 모양인데 그걸 나발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