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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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靑磁 母子猿形 硯滴.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은 고려시대인 12세기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상형(象形) 고려청자 연적#s-2으로, 원숭이 어미와 새끼의 모양을 하고 있다.
연적은 서예를 할 때 쓰는 물을 담아두는 그릇으로 벼루와는 다른 용도다. 벼루는 먹물을 담기 위한 용도이지만 연적은 먹물을 만들기 위한 물을 담아두는 용도다.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은 일제시대에 일본으로 유출된 이후 간송 전형필이 거액을 주고 사와서 가까스로 지켜낸 유물이라, 안타깝지만 본 연적의 출처나 제작시기와 같은 정보는 현재로썬 정확히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은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제작 수준이 뛰어나며 외형도 재치있게 표현된 세련된 작품으로, 현재 여러 점 전해지는 고려의 고려청자 연적 가운데서 가장 훌륭한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은 1992년에 국보 제270호로 지정되었으며, 본래 간송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었다가, DDP의 수장고에 설치된 간송유물관리실로 옮겨져 소장되어 있다.
2. 내용
2.1. 전형필의 손에 들어가기 까지[2]
앞서 개요의 설명에서 간송 전형필이 본 연적을 거액을 주고 구매하여 지켜냈다고 했는데, 그 자세한 내막은 다음과 같다.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은 본래 개스비 컬렉션의 일부였는데, 개스비 컬렉션이란 영국 귀족 출신의 변호사 존 개스비(John Gadsby)가 일제시대 도쿄에 거주하면서 수집한 고려청자 수집품들을 일컫는다. 존 개스비는 일본 제국으로 25살때 이주해와서 변호사 일을 했다고 전하는데, 그는 귀족 출신이니만큼 예술품을 보는 안목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는 도쿄에서 골동품 수집을 시작했고 처음에는 일본의 유물들을 사모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에 주목하여 여러 경로를 통해 최상급 고려청자들을 하나 둘 사모으기 시작했다.
헌데, 도쿄의 골동품 시장에 풀려있던 고려청자나 일본인 수집가들로부터 구입한 고려청자들은 사실 죄다 도굴로 불법적으로 유출된 것들이었다. 이 개스비 컬렉션의 유물들만 해도, 개스비 이전 소장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도굴로 유출된 유물들일 것이라는 정황이 확연히 드러난다. 본 유물인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의 이전 소유주는 주 대한제국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였고, 현재 국보 제65호로 지정되어 있는 청자 기린형뚜껑 향로의 이전 주인은 경성 고등법원 검사 아유카이 후사노신이었다. 역시 국보 제66호인 청자 상감연지원앙문 정병의 이전 소유주는 조선총독부 재판소 고등법원장인 요코다 고로였다. 어쨌든 개스비 자신의 뛰어난 안목을 토대로 열심히 수집한 명품 유물들이니만큼 그의 고려청자 컬렉션은 유명세를 얻기 시작했다.
하지만 193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일본 제국은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의 광기에 휩싸여 정신을 못차리며 점차 미쳐돌아가게 되고, 1936년 일본 육군 장병들이 일으킨 군부 쿠데타 시도인 2.26 사건이 일어난 것을 보고 개스비는 사태가 심상치 않으며 곧 전쟁이 터질 것을 직감하고 일본을 떠날 결심을 하게 된다. 개스비는 일본을 떠나면서 수집해온 소장품을 다 처분하고 돌아가기로 마음 먹고는 1937년에 본인 소유의 유물들을 시장에 내놓기로 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예의 고려청자 컬렉션이 포함되어 있었다. 전형필은 개스비의 고려청자 컬렉션에 이미 깊은 관심을 기울이며 주목하고 있었기에, 개스비가 고려청자들을 다 처분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자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로 개스비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는 당시 돈으로 40만원이라는 엄청난 거액을 주고 개스비로부터 본 유물을 포함한 고려청자 20점을 인수한다.[3]
아마 전형필의 노력이 없었다면, 귀중한 고려청자 명품들은 다시 일본인들의 손에 넘어가 뿔뿔이 흩어졌을 것이다. 또한 일본으로 넘어간 우리나라 문화재들의 현황을 고려해보면, 지금에 와서는 그 소재조차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4]
전형필이 구입한 20점의 고려청자들 가운데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총 9점으로, 그 목록은 아래와 같다.
- 국보 제65호 청자 기린형뚜껑 향로
- 국보 제66호 청자 상감연지원앙문 정병
- 국보 제74호 청자 오리모양 연적
- 국보 제270호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
- 보물 제238호 백자 박산형뚜껑 향로
- 보물 제286호 청자 상감포도동자문 매병
- 보물 제349호 청자 상감국화모란당초문 모자합
- 보물 제1954호 청자 음각환문 병
- 보물 제1955호 청자 양각도철문 정형 향로
2.2. 상세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은 높이 9.8cm, 지름 6cm의 연적으로, 제작 시기는 아마도 고려청자 제작 기술이 절정을 이루었던 12세기 무렵일 것으로 추정한다. 본 연적은 일반적으로 고려청자하면 떠오를 특유의 비색과 은은하고 맑은 광택을 전체적으로 잘 보존하고 있으며, 형상화한 어미 원숭이와 새끼 원숭이의 형체가 뚜렷하고 사실적이며 정교하다.
본 연적의 사용법은 어미 원숭이 정수리 부분에 뚫려 있는 구멍(주입구)으로 물을 넣어 뱃속에 물을 담아두며, 물을 따를 때는 새끼 원숭이 머리에 작게 뚫린 배출구로 물을 따르는 방식이다. 이 구멍들을 막기 위한 마개는 따로 없는데, 원래 없던 것인지 사라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연적의 외형은 그야말로 원숭이 모자 그 자체인데, 새끼를 가슴팍에 안고 있는 어미 원숭이를 형상화 하고 있다. 어미 원숭이는 쭈그려 앉아 두 팔로 새끼를 품고 있고, 새끼는 어미에 안겨서 양 손으로 어미를 밀면서 보채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순간적인 장면을 해학적으로 잘 포착함과 동시에 자애롭게 새끼를 품는 어미의 모습에서 모자간의 사랑이 드러난다고 평가 받는다.[5] 원숭이들의 얼굴은 눈, 코, 입, 귀를 모두 잘 만들어놨고 어미의 눈, 코, 입과 새끼의 눈에는 짙은 철사(鐵砂) 안료를 찍어서 명확히 해놔 더욱 실감나게 조형됐다.[6] 또한 몸체는 간략하지만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두 원숭이의 손과 발에 음각으로 골을 파놔서 손가락과 발가락이 도드라지게 드러난다. 특히 어미의 경우, 아랫배에 있는 배꼽과 쭈그려 앉느라 발목에 살이 접혀 주름이 잡힌 모습까지도 사실적으로 잘 포착해놨다. 또한 전체적으로 원숭이의 형상이 아주 사실적인데, 본래 한반도에는 원숭이가 서식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12세기 고려에 실제로 해외에서 수입된 원숭이가 있었으며 이를 본따 본 연적을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7][8]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에 대해 더 전해지는 자료는 없어 추정이지만, 1146년에 제작된 청자과형화병과 청자합과 유약 색이 동일하여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이며,[9] 또한 청자의 조형 수준이 높은 것으로 미루어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의 제작 시기는 고려청자 제작이 전성기를 이루었던 12세기 중반일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고려시대에 본 연적을 연적의 용도로 실제로 사용했는지 아니면 장식과 감상 용도의 사치품이었을지 알 수 없지만, 높은 제작 수준과 디자인 상의 세련됨을 보아서 최소한 고려 귀족 계층의 소유물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뿐만 아니라 12세기 중반경에 오리, 복숭아, 거북, 동자 등의 소형의 상형 연적이 상당히 만들어졌는데,[10] 원숭이형은 그 예가 드물고 그 중에서도 모자로 된 형태는 본 연적이 유일하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은 작품이다.[11]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은 보존상태가 대단히 좋고, 그 높은 미적인 수준과 절정에 오른 고려의 청자 제작 수준을 보여주는 공예품으로서의 가치를 높게 인정 받아, 1992년 4월 20일 국보 제270호로 지정되었다.
3. 기타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은 1998년 11월 20일에 발행된 170원권 '한국의 미시리즈(여덟번째묶음)' 기념우표와 2021년 2월 26일에 발행된 380원권 '다시 찾은 소중한 문화유산' 기념우표의 도안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4. 바깥고리
- 간송미술문화재단 : 청자모자원숭이형연적
- 한국어 위키백과 :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
- KBS 천상의 컬렉션 : 개스비 컬렉션
- 두산백과 :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
5. 국보 제270호
고려시대 만들어진 원숭이 모양의 청자 연적으로,크기는 높이 9.8㎝, 몸통 지름 6.0㎝이다.
어미 원숭이 머리 위에는 지름 1.0㎝ 정도의 물을 넣는 구멍이, 새끼의 머리 위에는 지름 0.3㎝인 물을 벼루에 따라내는 구멍이 각각 뚫려 있어 연적임을 알 수 있다.
두 원숭이의 손가락과 발가락은 그 사이사이를 파내어 도드라지게 표현하였고, 어미 원숭이의 눈, 코와 새끼 원숭이의 눈은 검은 색 안료로 점을 찍어 나타냈다. 어미 원숭이의 엉거주춤한 자세, 보채는 새끼의 모습을 통해 원숭이 모자의 사랑을 재미있게 묘사하였다. 유약은 잘 녹아 투명하고 잔잔한 기포가 전면에 있어 은은하고, 표면의 색깔은 아름다운 비취색이다.
1146년에 제작된 청자과형화병, 청자합과 유약 색이 동일하여 12세기 전반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청자 연적 중 원숭이 모양의 연적은 드물며 더욱이 모자(母子) 모양으로서는 유일한 예이다.
[1] 본 단락은 전적으로 KBS 천상의 컬렉션 가운데 '개스비 컬렉션'의 내용을 주 텍스트로 삼아 작성되었다. 출처 : KBS 천상의 컬렉션 : 개스비 컬렉션[2] 본 단락은 전적으로 KBS 천상의 컬렉션 가운데 '개스비 컬렉션'의 내용을 주 텍스트로 삼아 작성되었다. 출처 : KBS 천상의 컬렉션 : 개스비 컬렉션[3] 일제강점기 시기 돈으로 40만원은 기와집을 400채나 살 수 있는 어마어마한 금액으로, 현재 대한민국의 원화로 환산하면 무려 약 1,200억원에 달한다고 한다.[4] 일본은 약탈문화재에 대한 공개를 극히 꺼리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공립 박물관이 소장한 약탈문화재에 대한 대외 공개도 꺼리는 판인데, 개인이 소장한 약탈문화재라면 더더욱 비밀스럽게 감추려 든다. 이로 인해 일본에 넘어가 있는 우리 문화재들에 대한 실정과 실태 파악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5] 출처 : 간송미술문화재단 - 청자모자원숭이형연적, 두산백과 -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6]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7] 출처 : 간송미술문화재단 - 청자모자원숭이형연적, 두산백과 -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8] 원숭이와 마찬가지로 한반도에 서식하지 않은 동물인 사자를 형상화한 청자의 경우 실제 사자와는 형태가 상당히 다르게 불교적으로 도식화된 형상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원숭이가 고려시대에 수입됐고 이를 본따 본 연적을 만들었으리라는 추측에 힘이 실린다.[9] 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 -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 (靑磁 母子猿形 硯滴)[10]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11] 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 -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 (靑磁 母子猿形 硯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