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형필
'''간송의 수집품을 거론하지 않고는 제대로 된 한국 미술사를 거론할 수 없다.'''[1]
1. 개요
한국의 교육자이자 문화재 수집가. 본관은 정선(旌善), 호는 간송(澗松).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으로 유출되는 서화, 도자기, 불상, 석조물, 서적 등을 수집해서 이 땅에 남긴 인물.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97-1에 위치한 간송미술관은 전형필이 1938년 설립한 한국 최초의 개인 박물관이다.
2. 생애
1906년 서울 종로에서 정3품 전계훈의 손자이자 참서관을 지낸 전명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작은아버지의 양자가 된다. 그러나 99칸 한 집[2] 에서 양부모와 양조부모까지 사는 관계로 양육은 그대로 친부모가 맡았다. 이 배경으로 훗날 양가의 모든 재산을 상속받아 하늘이 내린 백만장자가 되는데 전형필이 막대한 양의 국보급 문화재를 수집할 수 있었던 것은 24살 때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았기 때문이었다.[3] 어의동 공립 보통학교와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나라잃은 백성을 도와주는 변호사가 되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지만 평생의 스승 위창 오세창[4] 을 만나며 민족의 혼과 얼을 지켜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전형필은 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오세창이 건넨 '근역화휘'와 '근역서화징'으로 문화재를 감식하는 눈을 기른다. 겸재 정선의 '인곡유거'를 시작으로 본격 우리 문화 유산을 수집하는데 헌신한다. 전형필은 1900년대 초부터 일본인들의 손에 흘러 들어가거나 훼손될 위기에 처한 우리의 문화재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재산을 쏟아 붓기 시작한다. 고서화 수집의 전진 기지로 한남서림을 인수하고 이후 고려 청자, 조선 백자, 돌로 만든 탑과 부도, 금동여래입상 등 보기 좋은 예술품을 지켜낸 것이 아닌 예술적 가치를 넘어선 그 안에 담긴 우리 민족혼을 지켜낸 것이다. 고려 청자의 대표작인 청자상감포류수금문정병(국보 제66호),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국보 제68호),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국보 제270호) 등은 모두 전형필이 일본으로 팔려갈 뻔한 것을 거액을 주고 사들여 지켜낸 작품들이다.'''"우리 조선은 꼭 독립되네. 동서고금에 문화 수준이 높은 나라가 낮은 나라에 영원히 합병된 역사는 없고, 그것이 바로 '문화의 힘'이지. 그렇기 때문에 일제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리의 문화 유적을 자기네 나라로 가져가려고 하는 것일세."'''
1938년 서울 한복판에 문을 연 우리 나라 최초의 사립 미술관이며 한국의 국보를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 중 하나인 간송미술관이 세워진 것은 전형필에 의해서다. 설립 당시 오세창이 ‘빛나는 보배를 모아 두는 집’이라는 뜻에서 ‘보화각’이라고 이름붙였다.
1940년대 일제는 조선어 사용 금지와 1942년 조선어 학회 탄압 사건 등 민족 말살 정책을 가속화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43년 6월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전형필은 판매자가 천원이라고 했지만 귀한 물건은 제 값을 치러야 한다며 당시 집 10채 값인 만원을 주고 천원[5] 은 수고비로 주며 사들였고 한국전쟁 때는 몸에서 떼지 않은 채 지켜[6]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귀한 것을 귀하게 보는 눈으로 먼 미래까지 보며 내 나라를 지켜낼 방법을 알았던 전형필이기에 기와집 400채 값으로 영국인 존 개츠비에게 고려 청자와 조선 청화백자 20점을 사고[7][8] 이미 일본으로 넘어간 우리 문화재 특히 혜원 신윤복의 그림 '혜원 전신첩'을 찾아온다. 1945년 광복이 되어서도 '고적 보존 위원'으로 피촉되어 전국에 흩어져 있는 문화재를 정리해 보존하는 일에 참여하느라 박물관 개관은 뒤로 미룬다.
6.25 전쟁 때 북한군들이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 등 국보급 문화재를 포장할 것을 명령해 도난당할 위기에 맞았으나 문화재들을 일부러 늦게 포장했다고 했다. 당시 북한군은 서울 점령 후 유물들을 평양으로 가져가기 위해서 포장하라고 협박했는데 북한군의 선전으로 인해 경계가 다소 약해진 것과 문화재에 대한 지식이 적은 점들을 고려해서 문화재 포장을 지연시켰다고 한다. 당시 전형필은 모처에서 은신하면서 지냈고 전형필이 소장한 문화재들의 가치를 익히 알고 있었던 최순우 등의 도움을 받았다. 이미 포장한 유물들도 이런저런 이유들을 갖다 붙이면서 다시 꺼냈다 포장하기를 반복하고 문화재를 나무 궤짝에 담아야 한다며 궤짝이 제작되기까지 시간을 끌었다고 하며 북한군에게 위스키를 주면서 경계심을 풀게 했다고 한다. 마지막에는 이를 들키고 말았으나 3일만에 서울이 탈환되면서 북한군들은 결국 문화재를 챙기지 못한채 평양으로 떠났다고 한다.
1953년 휴전 후 남은 소장품들을 정리하며 미술학자들과 함께 보다 규모있는 박물관을 구상하였고 아버지의 유언으로 현재 서울의 보성중학교와 보성고등학교를 인수하는 등 교육 사업도 하였지만[9] 1959년 엄청난 재정 사고가 발생해 그 빚을 갚기 위해 가족들까지도 극심한 쪼들림에 시달려야 했다. 재단에서 빚을 갚지 못해 학생들이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고 팔 수 있는 것은 다 팔아 돈을 댔다. 사실 서화와 도자기 몇 점만 팔았어도 충분히 해결하고도 남았겠지만 전형필은 끝까지 자신의 문화재 수장품들을 지켜 낸다. 이렇게 혼신의 힘을 다해서 재단의 빚을 모두 갚은 후 갑작스레 들이닥친 병마인 급성 신우염으로 쓰러져서 고통스러운 투병 생활을 하다 1962년 향년 57세로 사망하였다.
이후 보성중고등학교 재단법인 '동성학원'의 이사장직은 전형필의 후손들이 맡고 있다. 그 뒤 후손들은 선친 전형필의 수집품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연구하기 위해 1966년 봄 '한국 민족 미술 연구소'를 설립하여 그를 중심으로 간송 전형필 수집품에 대한 본격적인 정리와 학문적인 연구 작업이 이루어졌으며 1971년 가을부터 매년 5월과 10월에 소장품 전시회를 연다. 2018년 4월 6일 사망한 전성우 이후 새로 취임한 전인건 둘 다 간송 전형필의 후손이다.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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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문고등학교 재학 당시 선수 및 야구부장으로 활약했다. 출처 이때 축구부장 박정휘[10] , 미술부장 이마동[11] 과 함께 친하게 지내서 '삼총사'라고 불렸다고 전해진다. 특이하게도 친구들은 자기 적성과 맞게 직업을 가졌는데 전형필은 야구와 관련없는 쪽으로 직업을 가졌다.
- 시인 김광균과 사돈이었다.
- 또 다른 기증가로 동원 이홍근(1900~1980) 선생이 있다. 살아 생전에 4,941점이나 되는 고려, 가야, 신라 등등 많은 문화재들을 전재산 바쳐가며 사 모았고 세상을 떠날 때 모조리 나라에 기증하라고 유언을 남겼다. 덕분에 1980년대 국민학교 시절 교과서에서도 실린 바 있다. 이홍근이 기증한 문화재는 국립중앙박물관의 기증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 2010년대 이후 설민석의 한국사 대모험, Go Go 카카오프렌즈 등의 학습 만화에 전형필의 업적이 소개되면서 어른들보다 초등학생들이 전형필의 업적에 대해 잘 아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 일반인들의 인식과는 달리 공식적인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지는 못하였다. 독립유공자의 선정 기준으로 수감 생활을 행하였다는 점이 강하게 작용하는데 전형필은 수감 사례가 없기 때문이다. 전형필이 받은 공식 서훈은 문화체육관광부가 문화와 예술 발전에 기여한 이들에 수여하는 금관문화훈장(1등급) 뿐이다. 그나마도 2014년에야 추서하였는데 금관문화훈장의 훈격은 문화인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등급으로 매우 높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 말년에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방학리(현재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지었던 옛집이 한때 소실되었다가 2015년 서울 도봉구청의 주관으로 복원되어 개장하였다. 현재 전형필의 종로 생가는 재개발로 소실되어서 유일하게 이곳에서 전형필의 생애를 알 수 있다.도봉문화재단 소개 옛집 외에 간송미술관 바로 옆에 전형필의 직계 후손이 거주하는 집이 있기는 한데 이 곳은 후손들의 사생활을 위해 일반인들에게는 비공개하고 있다. 이 집은 엄밀히 말하면 전형필의 자택이 아니라 별장이었는데 간송미술관을 정식으로 세우기 전 문화재들을 보관하고 미술관 설립 활동을 하며 거주하기 위해 만든 곳이다.
[1] 이충렬, 「간송 전형필」(2010)[2] 100칸부터는 왕가의 영역이다. 민간에서는 최고 부자라는 의미[3] 현재 대한민국의 문화재적 관점으로 보면 전형필이 집안의 유산을 물려받은건 참으로 다행이지만 전형필 개인 사정으로 보면 딱한 일이었다. 조부모, 삼촌, 부모가 거의 같은 때에 돌아가시자 물려받을 사람이 없어서 전형필이 가족과 친척의 모든 재산을 물려받은 것이다.[4] 1864년~1953년. 개화 사상가 오경석의 아들이며 언론인, 독립운동가, 서예가로 유명하다.[5] 당시 금액을 현재 환율로 보면 만원은 대략 70억, 천원은 7억에 해당하는 금액이다.[6] 남쪽으로 피난갈 당시 전형필이 직접 품에 안고 걸어갔으며 밤에는 베개 밑에 두고 잘 정도였다고 한다.[7] 이때 사온 고려 청자와 청화백자 도자기들을 한데 묶어서 이를 먼저 수집했던 "존 개츠비 컬렉션"이라 명명하기도 한다.[8] 현재 한국 원화로 약 1200억 원.[9] 현재 보성중고등학교 중시조 급의 인물로 지금도 보성고등학교 교정에 동상이 있다.[10] 1909년~1985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초대 감독.[11] 훗날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장을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