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진청년역
淸津靑年驛 / Ch'ŏngjin Ch'ŏngnyŏn S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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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아시아프레스 북한 내부영상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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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라선의 철도역. 함경북도 청진시 청암구역 역전동(광복 당시 포항동) 소재. 청진역 혹은 청진청년역이라고 불린다.
청진시의 역사는 조선 건국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1398년 정도전이 북방의 행정구역을 정할 때, 경성군 아래의 석막(石幕: 지금의 부령)에 속했고, 1417년에 경원 도호부에 소속되었다. 그 경원군이 바로 현재 새별군으로 개칭된 그 경원군 맞다.
광무(光武: 1897~1907) 연간까지만 해도 60여 가구밖에 살지 않는 어촌이었지만, 1908년에 개항되면서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1913년, 부령군 전역이 청진부로 승격되었다가 1914년 청진 개항장 지역만 청진부로 남고 나머지를 다시 부령군으로 분리했다.
무산광산이 개발되어 여기에 공장들까지 들어오면서 일약 함경북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로 부상했으며, 1940년에는 나남읍과 용성면을 흡수해 인구가 20만에 달하여 경성·평양·부산과 함께 조선 4대 도시로 발돋움했다. 광복 당시 청진의 면적은 275㎢.[1]
광복 직후에 함경북도 청진시로 개편되었다가 1960년에 나남시와 부령군을 다시 편입해서 청진직할시로 승격되었다. 10년 후 일반시로 격하되면서 부윤구역이 신설되었고 부령군이 떨어져나갔다. 2년 후에 부령군이 다시 청진시에 편입되면서(...) 5년 후 다시 직할시로 승격되었고, 1985년에 또 부령군이 떨어져나가면서(......) 일반시로 강등. 그야말로 극심한 행정구역 변화의 산 증인이다.
라진역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이자, 함경북도와 량강도의 모든 역을 관할하는 철도총국의 소재지로써 매우 중요한 역이다. 비록 승강장은 2면뿐이지만 인근 차량검수고로 들어가는 선로의 수는 세기도 힘들며 유동량도 많고 크기도 매우 크다(약 2,100㎡). 거의 '''30선(!!)''' 가까이 된다.
관북 지방의 철도총국 중심 역의 후보로 이 역과 라진역, 혜산청년역을 꼽아볼 수 있는데, 두 역 모두 간선 철도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게 단점. 특히나 혜산청년역의 경우는 선형이 너무 나쁜 북부내륙선 때문에 감점이고, 라진역은 비록 자유경제무역지대로서는 괜찮지만 청진청년역에 비해서 량강도와 너무 떨어져 있어서 감점. 더군다나 라진역에서는 제대로 된 선로분기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평라선과 함북선이 쭉 이어져 있기 때문.
행선판이 다소 이상한데, 이는 함북선이 평라선을 따라가지 않고 ∩자로 크게 우회하기 때문이다.
한국전쟁당시 '''UN군이 도달한 가장 북쪽에 위치한 제대로 기능하는 역'''이다. 1950년 11월 25일 수도사단이 개전 이후 격전으로 인해 단 1대 남아있던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를 선봉에 세우고 청진까지 진격했으며, 11월 30일에는 부령~부거 지역까지 진격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후 수도사단은 장진호 전투개시와 동시에 후퇴명령을 받고 후퇴길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다.
물론 기록만 따지면 청암역과 이후 몇개 역도 한국군의 손에 들어왔겠지만, 제대로 철도역으로 기능하는 역은 사실상 이 역이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왜나하면 그 당시 북한군은 지리멸렬 상태인데다가 함경북도 방면에는 제대로 된 병력을 투입하지도 못해서 철도시설 및 장비를 미처 파괴하지 못하고 철수했지만, 그래도 최전선에서 막 빼앗은 철도시설을 굴려먹으려면 며칠의 여유 및 최전선과의 거리 이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역도 한국전쟁 이후에 복구된 것이다. 후퇴를 지원할 목적 및, 이후 휴전선 근처에서 싸움이 심하게 발생할 때 시선을 돌릴 목적으로 아이오와급 전함이 청진에 함포사격을 가한 사례가 몇 번 있으며, 주요 목표가 '''철도시설 및 항구시설'''이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2018년 12월 중순에 동해선 공동조사를 하던 남북 철도 공동조사단이 청진역 인근에서 4km 가량의 광주령차굴[2] 를 조사하였다고 한다. 조사과정 중 조사단이 밝혀낸 것은 북한에서 제일 긴 이 터널 내 조명이 하나도 설치가 되어있지 않다고 한다. 북측 동해선의 노후화의 심각성이 보이는 부분이다.
평양역 기점 720.7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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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아시아프레스 북한 내부영상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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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평라선의 철도역. 함경북도 청진시 청암구역 역전동(광복 당시 포항동) 소재. 청진역 혹은 청진청년역이라고 불린다.
2. 역사
청진시의 역사는 조선 건국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1398년 정도전이 북방의 행정구역을 정할 때, 경성군 아래의 석막(石幕: 지금의 부령)에 속했고, 1417년에 경원 도호부에 소속되었다. 그 경원군이 바로 현재 새별군으로 개칭된 그 경원군 맞다.
광무(光武: 1897~1907) 연간까지만 해도 60여 가구밖에 살지 않는 어촌이었지만, 1908년에 개항되면서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1913년, 부령군 전역이 청진부로 승격되었다가 1914년 청진 개항장 지역만 청진부로 남고 나머지를 다시 부령군으로 분리했다.
무산광산이 개발되어 여기에 공장들까지 들어오면서 일약 함경북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로 부상했으며, 1940년에는 나남읍과 용성면을 흡수해 인구가 20만에 달하여 경성·평양·부산과 함께 조선 4대 도시로 발돋움했다. 광복 당시 청진의 면적은 275㎢.[1]
광복 직후에 함경북도 청진시로 개편되었다가 1960년에 나남시와 부령군을 다시 편입해서 청진직할시로 승격되었다. 10년 후 일반시로 격하되면서 부윤구역이 신설되었고 부령군이 떨어져나갔다. 2년 후에 부령군이 다시 청진시에 편입되면서(...) 5년 후 다시 직할시로 승격되었고, 1985년에 또 부령군이 떨어져나가면서(......) 일반시로 강등. 그야말로 극심한 행정구역 변화의 산 증인이다.
3. 특징
라진역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이자, 함경북도와 량강도의 모든 역을 관할하는 철도총국의 소재지로써 매우 중요한 역이다. 비록 승강장은 2면뿐이지만 인근 차량검수고로 들어가는 선로의 수는 세기도 힘들며 유동량도 많고 크기도 매우 크다(약 2,100㎡). 거의 '''30선(!!)''' 가까이 된다.
관북 지방의 철도총국 중심 역의 후보로 이 역과 라진역, 혜산청년역을 꼽아볼 수 있는데, 두 역 모두 간선 철도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게 단점. 특히나 혜산청년역의 경우는 선형이 너무 나쁜 북부내륙선 때문에 감점이고, 라진역은 비록 자유경제무역지대로서는 괜찮지만 청진청년역에 비해서 량강도와 너무 떨어져 있어서 감점. 더군다나 라진역에서는 제대로 된 선로분기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평라선과 함북선이 쭉 이어져 있기 때문.
행선판이 다소 이상한데, 이는 함북선이 평라선을 따라가지 않고 ∩자로 크게 우회하기 때문이다.
4. 여담
한국전쟁당시 '''UN군이 도달한 가장 북쪽에 위치한 제대로 기능하는 역'''이다. 1950년 11월 25일 수도사단이 개전 이후 격전으로 인해 단 1대 남아있던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를 선봉에 세우고 청진까지 진격했으며, 11월 30일에는 부령~부거 지역까지 진격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후 수도사단은 장진호 전투개시와 동시에 후퇴명령을 받고 후퇴길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다.
물론 기록만 따지면 청암역과 이후 몇개 역도 한국군의 손에 들어왔겠지만, 제대로 철도역으로 기능하는 역은 사실상 이 역이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왜나하면 그 당시 북한군은 지리멸렬 상태인데다가 함경북도 방면에는 제대로 된 병력을 투입하지도 못해서 철도시설 및 장비를 미처 파괴하지 못하고 철수했지만, 그래도 최전선에서 막 빼앗은 철도시설을 굴려먹으려면 며칠의 여유 및 최전선과의 거리 이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역도 한국전쟁 이후에 복구된 것이다. 후퇴를 지원할 목적 및, 이후 휴전선 근처에서 싸움이 심하게 발생할 때 시선을 돌릴 목적으로 아이오와급 전함이 청진에 함포사격을 가한 사례가 몇 번 있으며, 주요 목표가 '''철도시설 및 항구시설'''이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2018년 12월 중순에 동해선 공동조사를 하던 남북 철도 공동조사단이 청진역 인근에서 4km 가량의 광주령차굴[2] 를 조사하였다고 한다. 조사과정 중 조사단이 밝혀낸 것은 북한에서 제일 긴 이 터널 내 조명이 하나도 설치가 되어있지 않다고 한다. 북측 동해선의 노후화의 심각성이 보이는 부분이다.
평양역 기점 720.7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