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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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제국 육군의 항공장교이자 대한민국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남방작전당시 전사했다.
2. 생애
최명하(崔鳴夏)는 한반도가 일제의 강점 하였던 1918년 3월 6일, 경상북도 선산군 선산면(現 경북 구미시 선산읍)에서 조선인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1937년 3월 대구중학교를 졸업한 최명하는 그해 4월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해 예과과정을 마쳤고 1939년 9월 일본육군항공사관학교를 수료하고 일본 육사를 제52기로 졸업했다.
3. 참전과 최후
1939년 11월 최명하는 일본군 육군의 항공 소위로 임관해 소만(蘇滿, 소비에트 연방과 만주국) 국경일대에서 경비 업무를 담당했고, 1940년에는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중화민국의 화남(華南) 방면을 공격하는 데 참전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최명하는 가토 다테오(加藤建夫) 중좌가 이끌고 있던 일본 육군 비행 제 64전대[1] 에서 중위로 복무하며 부대장기 엄호, 정보 수집등의 업무를 수행하였고, 1941년 12월에는 영국령 인도제국[2] 의 랑군과 영국령 해협식민지[3] 의 페낭을 폭격했다.[4]
이듬해인 1942년 1월 17일 최명하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수마트라 섬 팔렘방 비행장을 공습하던 중 대지공격을 위해 고도를 낮춘게 화근이 되어 네덜란드군의 대공포화에 휘말렸다.
최명하는 자신이 탑승한 Ki-43 하야부사 전투기의 후방에서 대공포탄이 폭발해 엔진이 손상을 입자 인근 페칸바루의 호수까지 비행해 항공기를 불시착시켰고, 조종석에 항공유를 뿌리고 지도에 불을 붙여 비행기를 소각시키는 데에는 성공 했으나, 연기를 본 주민의 신고를 받고 네덜란드 경찰이 출동하자 1월 20일 자기를 치료해주던 수마트라 섬 원주민의 집에서 네덜란드 군경과 총격전을 벌인 끝에 남은 권총탄 한발을 자신에게 쏴 권총자살했다.
일본제국 군부는 최명하를 일계급 특진시켜 육군 대위로 추증하였으며 수훈(殊勳) 갑(甲), 공(功) 4급 금치훈장, 훈6등 욱일장을 추서하는 한편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시켰다.
일본 군부와 조선총독부는 최명하의 죽음을 '''대일본제국을 위해 싸우다 전사한 조선인 청년의 업적으로 선전했는데''', 이러한 일환으로 1943년에는 마찬가지로 친일 작곡가였던 임동혁(任東爀)[5] 이 그의 행적을 기려 《다케야마 대위를 따라라(武山大尉を續け)》 라는 제목의 친일 가곡을 발표했으며 같은해 친일 극작가였던 송영(宋影)[6] 이 그의 행적을 다룬 극본 《창공》을 발표하는 등 태평양 전쟁을 미화하는 수단으로 활용해 많은 조선의 청년들을 침략전쟁의 포화속에 동원하는데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2009년 대한민국 대통령 직속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와 민족문제연구소는 최명하의 행적을 감안해 그를 친일인명사전 군 부문과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등재했다.
[1] 개전 초부터 항복하는 날까지 지상레이더와 숙련된 조종사를 앞세워 영국 및 미국의 신예기와 끈질기게 맞서싸운 부대로, 가토 하야부사 전투대라 일컫던 부대이다.[2] 현재의 미얀마[3] 현재의 말레이시아, 싱가포르[4] 당시 태평양전쟁 개전과 함께 참전한 조선인 항공장교는 최명하 외에도 두사람이 더 있었는데, 그중 한명인 노태순은 일본령 말라야에서 전사하였고, 다른 한 사람인 '''김정렬'''은 해방 후까지 살아남아 대한민국 공군참모총장과 국방장관, '''국무총리'''까지 역임했다.[5] 일본 이름은 도요하라 토오카쿠(豊原東爀). 해방 직후 실종되었다.[6] 일본 이름은 야마카와 미노루(山川實). 항목에도 나와있다시피 이 양반 친일-종북-월북의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