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전쟁
蹴球戰爭
Soccer War/Football War
La guerra del fútbol(축구전쟁) 혹은 Guerra de las 100 horas(백시간전쟁)
1969년 중앙아메리카의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가 100시간 동안 벌였던 전쟁으로 1970년 월드컵 중미(中美) 예선이 계기가 되어 일어났기 때문에 축구전쟁이라고 불린다. 물론 축구가 이 전쟁의 주요 원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기폭제로 작용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엘살바도르는 온두라스에 비해 면적이 1/5 정도에 불과했지만, 인구는 엘살바도르가 370만명에 온두라스가 260만명으로 40% 더 높아 골치를 앓고 있었다. 사실 단순히 땅이 작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엘살바도르 내에서 농지로 쓸 만한 땅을 이른바 14가문을[1] 비롯한 극소수의 부유층이 대부분을 차지하여 일반 중소농들이 일굴 수 있는 땅은 더더욱 적었다. 당시 엘살바도르 독재 정권은 이들 특권층과 유착 관계가 깊었기 때문에 토지 독점을 딱히 해결하지 않았으며 그나마 일자리를 만들어 줄 산업화도 지지부진하다보니 문제가 해결될 턱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상당수의 엘살바도르인들이 먹고 살 길을 찾아 땅이 널널한 온두라스로 이주하여 무단 경작을 하면서 경작지 문제로 충돌이 잦았다. 엘살바도르인의 대규모 이주는 특히 1969년 초에 절정에 이르러 파악된 것만 30만에 달했고 온두라스 전체 농지의 20%를 무단으로 점유하는 상황이었다. 물론 온두라스도 엘살바도르처럼 소수 계층이 농경지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것은 똑같았지만 그나마 인구밀도가 낮아 미개척지가 많았던 편이라 조금은 나았다. 이 때문에 두 나라는 국경선과 이민자 문제로 대단히 적대적이었다.
결국 온두라스에서는 1962년에 새로운 토지개혁법을 발표하여 1967년에 발효했다. 이 법은 엘살바도르 이주민들이 불법 점유하고 있는 농토를 환수하여 자국 빈민들에게 재분배하는 내용이었다. 이는 당시 중남미에서 수십년 동안 토지개혁이 화두로 나오던 상황에서 엘살바도르인들이 경작하고 있는 농토를 자국 내 빈농과 소작농들에게 나눠주면 온두라스 상층부들이 소유하고 있는 농토를 나눠주지 않고도 충분히 달랠 수 있다는 계산으로 통과된 법안이었다. 온두라스 대지주와 대기업들이 주도한 이 토지개혁에 의해 수천 명의 엘살바도르 노동자들이 추방되었고, 엘살바도르가 이에 강하게 항의하면서 팽팽한 긴장상태가 조성되었다.
이렇게 가뜩이나 감정이 안 좋을 때 두 나라 간의 1970 FIFA 월드컵 멕시코 예선전이 벌어지자 관중들 간의 충돌에 각종 방해공작이 판을 쳤다. 온두라스에서 벌어진 1차전에선 온두라스 시민들이 엘살바도르 선수단 숙소 바로 옆에서 밤새도록 급조한 축제를 벌였으며 반대로 엘살바도르 홈경기 2차전에선 호텔 요리사가 대량의 설사약과 수면제를 넣은 요리를 경기날 아침 온두라스 선수들에게 제공했다.
이런 막장 방해공작 속에서 1차전은 온두라스가 1:0으로, 2차전은 엘살바도르가 3:0으로 나눠가지면서(각자 홈 구장에서) 1:1(=1승 1패)이 되었다. 이 시기 플레이오프에는 골득실이나 원정 다득점 같은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1:0으로 이기나 10:0으로 이기나 똑같았다. 이것만 잘 처리했다면 전쟁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지만[2] 결국 축구는 단지 기폭제 및 침공 명분이 되었을 뿐이다. 마치 제1차 세계 대전이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암살로 인해 터졌던 것처럼.
이 와중에 엘살바도르에서 한 열혈 축구팬 소녀가 자국의 국가대표팀이 진 것에 충격을 받아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정부측에서는 소녀의 장례식에 대통령과 축구 대표팀 전원이 참석하고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하며 달아오른 국민 감정을 오히려 부추겼다.
결국 유혈사태를 우려한 FIFA가 3차전을 제3국인 멕시코에서 열었다. 멕시코는 경기 중 대형 사고를 막기 위해 10만 명이 입장할 수 있는 에스타디오 아스테카에 2만 명만 입장시켰음에도 '''경찰이 관람객보다 많을 지경이었다.''' 이런 노력과는 상관없이 엘살바도르는 온두라스가 이기면 외교 단절을 하겠다고 협박하는 지경까지 갔다. 6월 27일에 벌어진 3차전의 결과는 연장전 끝에 3:2로 엘살바도르가 승리했다.
온두라스 국민들은 자국 국가대표팀이 패하자 반 엘살바도르 감정이 폭발하여 온두라스 내의 엘살바도르인들을 상대로 대대적인 린치를 벌였다. 이 사태를 구실로 엘살바도르는 7월 14일 민간 여객기에 폭탄을 장착하여 온두라스 수도 테구시갈파의 공군기지를 기습 선제공습하며 '''결국 전쟁이 개시되었다.''' 이민자 문제, 경제 문제, 정치 문제 등으로 오랫동안 곪아왔던 두 나라 간의 적개심이 축구를 계기로 폭발한 셈이다. 때문에 군대는 물론이거니와 농민들까지 서로 민병대를 조직해서 엽총과 농기구로 공격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다만 전쟁 종전 이후 밝혀진 자료에 따르면 이미 1968년부터 엘살바도르군은 온두라스 공격 계획을 비밀리에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7월 14일 전쟁이 시작되자 엘살바도르 육군은 1만 2천명의 병력으로[3] 두 개의 도로를 통해 두 방면에서 신속히 진격하였다. 전체적인 군사력은 온두라스가 우위였지만 갑작스런 기습공격으로 인해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고, 7월 15일 저녁까지 하루만에 8km 이상 후퇴하였다. 처음에는 온두라스가 질적으로 다소 우세하던 육군만으로도 어느 정도 버틸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어처구니없게도 당시 온두라스 육군 3군 주둔지에는 할당된 인원의 절반만이 근무하고 있었다. 왜냐면 온두라스 육군 장교들이 군대의 돈을 횡령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오코테페케 주(Departamento de Ocotepeque)의 주도인 누에바 오코테페케(Nueva Ocotepeque) 시와 다른 8개의 도시가 함락되었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린 온두라스 공군이 제공권을 장악하여 엘살바도르의 일로판고(Ilopango) 공군 기지와 원유 시설을 타격하고 엘살바도르 군의 보급을 차단하면서 공세를 약화시켰다.
이 꼴을 보다 못해 미주기구(OAS)가 개입하자 엘살바도르 정부는 온두라스 내의 엘살바도르인들의 안전과 피해에 대한 보상이 약속되지 않으면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지만 미국까지 외교 압력을 가하자 7월 18일 정전이 선언되며 100시간에 달하는 이 한심한 전쟁은 '''일단''' 막을 내렸다. 하지만 엘살바도르군은 휴전협정 후에도 점령지를 내놓지 않고 버텼으며 미주기구가 경제 제재를 개시한 8월 1일에 이르러서야 철수를 개시했다. 이에 온두라스군도 무단으로 엘살바도르의 6개 마을을 점령하고 버티는 바람에 정전 이후에도 한동안 소규모 충돌은 계속되었다. 이 충돌은 미군을 포함한 미주기구 정전감시단이 도착하고 나서야 마무리 되었으나 최종 평화협정까지는 10년이 더 걸렸다.
전쟁 후 두 나라의 경제 상황은 막장이 되어서 오랫동안 그 후유증에 시달렸다.
엘살바도르는 공식적으로 총 9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미주기구의 경제 제재를 받은 데다 온두라스가 30만에 달하는 불법 이주자를 모조리 강제 추방하면서 대규모 난민을 떠맡게 되어 빈민층 급증으로 사회 불안과 경제난이 가중되었다. 여기에 오일 쇼크로 인해 식료품의 가격이 폭풍처럼 상승하고 토지 부족이 더 심화되며 농업생산력은 파국을 맞았다. 토지 개혁이 해법이라는 주장이 사회 각계에서 나왔지만 엘살바도르의 정계를 지배하던 군부와 엘리트층의 반발로 또다시 무산되었고 시위는 무력 진압으로 답했다.
결국 이에 파라분도 마르티 해방전선 등 좌익 반정부군이 정부를 공격하면서 결국 엘살바도르 내전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이 좌익 반정부 세력들도 쿠바, 소련 등 공산권 국가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지원을 받는 엘살바도르 정부군을 상대로 제대로 싸움조차 하지 못 했다. 수도 산살바도르를 점령하려는 두 차례의 대공세에서도 정부군에게 밀려 패배했다.
국토가 전쟁터가 된 온두라스는 공식적으로 100여명의 군인과 2천여명의 민간인 사상자가 났으며 수천여명이 거리에 나 앉았다. 거기다 상당한 농지가 쑥대밭이 되어 막대한 타격을 받았다. 울화통을 터뜨리며 재침공에 대한 불안에 떨다가 결국 미군 주둔을 허용하게 되었다. 한편 온두라스 정부는 엘살바도르인들이 무단 점유한 토지를 빈농과 소작농들에게 나눠준다고 했으나, 정작 전쟁이 끝나고는 대부분의 토지가 대지주와 대기업에 넘어가면서 '''사실상 말짱 도루묵이 되었다.''' 그야말로 자강두천이 아닐 수 없다. 이후 온두라스는 토지 배분 과정에서의 부패로 정국혼란이 가중되던 와중에 1972년에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1981년 민주화 이전까지 9년간 군사 독재 정권이 온두라스를 지배하게 되었다.
결국 둘 다 농업 국가라서 자국 영토에서 전쟁을 벌이면 심각한 타격을 입는 경제 구조였으나 근시안적으로 벌인 전쟁이라는 점이 막장성을 더욱 강조한다. 이 틈에 소수의 부유한 인도, 미국계 이민자들이 두 나라의 경제를 휘어잡았다. 다만 전쟁이 끝난 이후로 1990년대에는 엘살바도르가 조금 더 경제 성장을 하여서 온두라스보다 어느 정도 잘 살고는 있다. 하지만 둘 다 치안이 나쁘고 빈부격차가 워낙 심하기 때문에 상당수 국민들이 빈곤에 처해있는 개발도상국의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
전쟁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자료에 따라 차이가 심하다. 2,000~6,000명에 이를 것이라 추정될 뿐인데 그 대다수가 '''보복성'''이라 이 전쟁의 추잡스러움을 말해준다.
사실 따지고 보면 배경이 다른 전쟁과 별다를 바가 없지만, 세간에는 단순히 축구하다가 전쟁한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지 11년이 지난 1980년에 공식적으로 종전했으며 지금은 그럭저럭 잘 지내는 듯하다.
가끔 인터넷에 떠도는 글은 물론 심지어 어떤 교과서에까지 엘살바도르가 승전했다고 하는데 이는 틀린 말이다. 물론 국토가 유린당한 온두라스가 엘살바도르에 비해 훨씬 큰 피해를 입었고 전투에서도 엘살바도르 군이 훨씬 잘 싸웠지만, 위에 적혀있듯 엘살바도르 또한 전쟁 전 수립했던 목표를 하나도 이루지 못했다. 전쟁사에선 일방적인 침공에 대한 방어전에 성공했을 경우 보통은 방어 측이 더 많은 손해를 입었더라도 이겼다고 평가하는 편이다. 막는 쪽이 전장이 되니 손해가 큰 게 당연하기 때문이다.
7월 20일에는 '''아폴로 11호의 역사적인 달 착륙 중계를 보느라 임시로 휴전하고 중계방송이 끝나자 전투를 재개하는'''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 전쟁에서는 F4U 콜세어 P-51 머스탱과 FG1D 코르세어(F4U의 굿이어사 라이센스판)등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시절 같은 연합군 진영에서 사용되던 전투기 간의 공중전이 벌어졌다.
전쟁의 원인이 양국의 고질적인 사회 문제인 소수 대지주들의 토지 독식과 깊게 연관되었고 축구전쟁으로 양쪽이 얻었던 것도 없기 때문에 우루과이의 작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는 《불의 기억》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한 바 있다.
축구전쟁 이후 아이티마저 이기고 월드컵 본선에 올라간 엘살바도르는 벨기에전 0:3 패, 멕시코전 0:4 패, 소련전 0:2 패로 '''3전 전패 무득점 9실점'''이라는 성적으로 조별리그 광탈했다.
13년 후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는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 양 팀 모두가 올라갔으나 둘 다 1라운드에서 광탈했다. 특히 엘살바도르는 이 대회에서 헝가리에 '''10:1'''이라는 엄청난 차이로 완패하면서 또 한 번 화제가 되었다.
가장 최근에 만난 월드컵 예선인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북아메리카 지역 최종 예선의 경우 온두라스가 단독으로 진출하면서 40년만에 한을 풀었다.
FIFA 시리즈인 '2006 FIFA 월드컵'에서는 2002 한일 월드컵 예선에서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와의 배경으로 한 도전 과제가 나왔으며 '축구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이 전쟁을 다뤘다.#
Soccer War/Football War
La guerra del fútbol(축구전쟁) 혹은 Guerra de las 100 horas(백시간전쟁)
1. 개요
1969년 중앙아메리카의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가 100시간 동안 벌였던 전쟁으로 1970년 월드컵 중미(中美) 예선이 계기가 되어 일어났기 때문에 축구전쟁이라고 불린다. 물론 축구가 이 전쟁의 주요 원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기폭제로 작용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2. 진행 과정
엘살바도르는 온두라스에 비해 면적이 1/5 정도에 불과했지만, 인구는 엘살바도르가 370만명에 온두라스가 260만명으로 40% 더 높아 골치를 앓고 있었다. 사실 단순히 땅이 작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엘살바도르 내에서 농지로 쓸 만한 땅을 이른바 14가문을[1] 비롯한 극소수의 부유층이 대부분을 차지하여 일반 중소농들이 일굴 수 있는 땅은 더더욱 적었다. 당시 엘살바도르 독재 정권은 이들 특권층과 유착 관계가 깊었기 때문에 토지 독점을 딱히 해결하지 않았으며 그나마 일자리를 만들어 줄 산업화도 지지부진하다보니 문제가 해결될 턱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상당수의 엘살바도르인들이 먹고 살 길을 찾아 땅이 널널한 온두라스로 이주하여 무단 경작을 하면서 경작지 문제로 충돌이 잦았다. 엘살바도르인의 대규모 이주는 특히 1969년 초에 절정에 이르러 파악된 것만 30만에 달했고 온두라스 전체 농지의 20%를 무단으로 점유하는 상황이었다. 물론 온두라스도 엘살바도르처럼 소수 계층이 농경지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것은 똑같았지만 그나마 인구밀도가 낮아 미개척지가 많았던 편이라 조금은 나았다. 이 때문에 두 나라는 국경선과 이민자 문제로 대단히 적대적이었다.
결국 온두라스에서는 1962년에 새로운 토지개혁법을 발표하여 1967년에 발효했다. 이 법은 엘살바도르 이주민들이 불법 점유하고 있는 농토를 환수하여 자국 빈민들에게 재분배하는 내용이었다. 이는 당시 중남미에서 수십년 동안 토지개혁이 화두로 나오던 상황에서 엘살바도르인들이 경작하고 있는 농토를 자국 내 빈농과 소작농들에게 나눠주면 온두라스 상층부들이 소유하고 있는 농토를 나눠주지 않고도 충분히 달랠 수 있다는 계산으로 통과된 법안이었다. 온두라스 대지주와 대기업들이 주도한 이 토지개혁에 의해 수천 명의 엘살바도르 노동자들이 추방되었고, 엘살바도르가 이에 강하게 항의하면서 팽팽한 긴장상태가 조성되었다.
이렇게 가뜩이나 감정이 안 좋을 때 두 나라 간의 1970 FIFA 월드컵 멕시코 예선전이 벌어지자 관중들 간의 충돌에 각종 방해공작이 판을 쳤다. 온두라스에서 벌어진 1차전에선 온두라스 시민들이 엘살바도르 선수단 숙소 바로 옆에서 밤새도록 급조한 축제를 벌였으며 반대로 엘살바도르 홈경기 2차전에선 호텔 요리사가 대량의 설사약과 수면제를 넣은 요리를 경기날 아침 온두라스 선수들에게 제공했다.
이런 막장 방해공작 속에서 1차전은 온두라스가 1:0으로, 2차전은 엘살바도르가 3:0으로 나눠가지면서(각자 홈 구장에서) 1:1(=1승 1패)이 되었다. 이 시기 플레이오프에는 골득실이나 원정 다득점 같은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1:0으로 이기나 10:0으로 이기나 똑같았다. 이것만 잘 처리했다면 전쟁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지만[2] 결국 축구는 단지 기폭제 및 침공 명분이 되었을 뿐이다. 마치 제1차 세계 대전이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암살로 인해 터졌던 것처럼.
이 와중에 엘살바도르에서 한 열혈 축구팬 소녀가 자국의 국가대표팀이 진 것에 충격을 받아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정부측에서는 소녀의 장례식에 대통령과 축구 대표팀 전원이 참석하고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하며 달아오른 국민 감정을 오히려 부추겼다.
결국 유혈사태를 우려한 FIFA가 3차전을 제3국인 멕시코에서 열었다. 멕시코는 경기 중 대형 사고를 막기 위해 10만 명이 입장할 수 있는 에스타디오 아스테카에 2만 명만 입장시켰음에도 '''경찰이 관람객보다 많을 지경이었다.''' 이런 노력과는 상관없이 엘살바도르는 온두라스가 이기면 외교 단절을 하겠다고 협박하는 지경까지 갔다. 6월 27일에 벌어진 3차전의 결과는 연장전 끝에 3:2로 엘살바도르가 승리했다.
온두라스 국민들은 자국 국가대표팀이 패하자 반 엘살바도르 감정이 폭발하여 온두라스 내의 엘살바도르인들을 상대로 대대적인 린치를 벌였다. 이 사태를 구실로 엘살바도르는 7월 14일 민간 여객기에 폭탄을 장착하여 온두라스 수도 테구시갈파의 공군기지를 기습 선제공습하며 '''결국 전쟁이 개시되었다.''' 이민자 문제, 경제 문제, 정치 문제 등으로 오랫동안 곪아왔던 두 나라 간의 적개심이 축구를 계기로 폭발한 셈이다. 때문에 군대는 물론이거니와 농민들까지 서로 민병대를 조직해서 엽총과 농기구로 공격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다만 전쟁 종전 이후 밝혀진 자료에 따르면 이미 1968년부터 엘살바도르군은 온두라스 공격 계획을 비밀리에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7월 14일 전쟁이 시작되자 엘살바도르 육군은 1만 2천명의 병력으로[3] 두 개의 도로를 통해 두 방면에서 신속히 진격하였다. 전체적인 군사력은 온두라스가 우위였지만 갑작스런 기습공격으로 인해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고, 7월 15일 저녁까지 하루만에 8km 이상 후퇴하였다. 처음에는 온두라스가 질적으로 다소 우세하던 육군만으로도 어느 정도 버틸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어처구니없게도 당시 온두라스 육군 3군 주둔지에는 할당된 인원의 절반만이 근무하고 있었다. 왜냐면 온두라스 육군 장교들이 군대의 돈을 횡령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오코테페케 주(Departamento de Ocotepeque)의 주도인 누에바 오코테페케(Nueva Ocotepeque) 시와 다른 8개의 도시가 함락되었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린 온두라스 공군이 제공권을 장악하여 엘살바도르의 일로판고(Ilopango) 공군 기지와 원유 시설을 타격하고 엘살바도르 군의 보급을 차단하면서 공세를 약화시켰다.
이 꼴을 보다 못해 미주기구(OAS)가 개입하자 엘살바도르 정부는 온두라스 내의 엘살바도르인들의 안전과 피해에 대한 보상이 약속되지 않으면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지만 미국까지 외교 압력을 가하자 7월 18일 정전이 선언되며 100시간에 달하는 이 한심한 전쟁은 '''일단''' 막을 내렸다. 하지만 엘살바도르군은 휴전협정 후에도 점령지를 내놓지 않고 버텼으며 미주기구가 경제 제재를 개시한 8월 1일에 이르러서야 철수를 개시했다. 이에 온두라스군도 무단으로 엘살바도르의 6개 마을을 점령하고 버티는 바람에 정전 이후에도 한동안 소규모 충돌은 계속되었다. 이 충돌은 미군을 포함한 미주기구 정전감시단이 도착하고 나서야 마무리 되었으나 최종 평화협정까지는 10년이 더 걸렸다.
3. 승자 없는 싸움
전쟁 후 두 나라의 경제 상황은 막장이 되어서 오랫동안 그 후유증에 시달렸다.
엘살바도르는 공식적으로 총 9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미주기구의 경제 제재를 받은 데다 온두라스가 30만에 달하는 불법 이주자를 모조리 강제 추방하면서 대규모 난민을 떠맡게 되어 빈민층 급증으로 사회 불안과 경제난이 가중되었다. 여기에 오일 쇼크로 인해 식료품의 가격이 폭풍처럼 상승하고 토지 부족이 더 심화되며 농업생산력은 파국을 맞았다. 토지 개혁이 해법이라는 주장이 사회 각계에서 나왔지만 엘살바도르의 정계를 지배하던 군부와 엘리트층의 반발로 또다시 무산되었고 시위는 무력 진압으로 답했다.
결국 이에 파라분도 마르티 해방전선 등 좌익 반정부군이 정부를 공격하면서 결국 엘살바도르 내전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이 좌익 반정부 세력들도 쿠바, 소련 등 공산권 국가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지원을 받는 엘살바도르 정부군을 상대로 제대로 싸움조차 하지 못 했다. 수도 산살바도르를 점령하려는 두 차례의 대공세에서도 정부군에게 밀려 패배했다.
국토가 전쟁터가 된 온두라스는 공식적으로 100여명의 군인과 2천여명의 민간인 사상자가 났으며 수천여명이 거리에 나 앉았다. 거기다 상당한 농지가 쑥대밭이 되어 막대한 타격을 받았다. 울화통을 터뜨리며 재침공에 대한 불안에 떨다가 결국 미군 주둔을 허용하게 되었다. 한편 온두라스 정부는 엘살바도르인들이 무단 점유한 토지를 빈농과 소작농들에게 나눠준다고 했으나, 정작 전쟁이 끝나고는 대부분의 토지가 대지주와 대기업에 넘어가면서 '''사실상 말짱 도루묵이 되었다.''' 그야말로 자강두천이 아닐 수 없다. 이후 온두라스는 토지 배분 과정에서의 부패로 정국혼란이 가중되던 와중에 1972년에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1981년 민주화 이전까지 9년간 군사 독재 정권이 온두라스를 지배하게 되었다.
결국 둘 다 농업 국가라서 자국 영토에서 전쟁을 벌이면 심각한 타격을 입는 경제 구조였으나 근시안적으로 벌인 전쟁이라는 점이 막장성을 더욱 강조한다. 이 틈에 소수의 부유한 인도, 미국계 이민자들이 두 나라의 경제를 휘어잡았다. 다만 전쟁이 끝난 이후로 1990년대에는 엘살바도르가 조금 더 경제 성장을 하여서 온두라스보다 어느 정도 잘 살고는 있다. 하지만 둘 다 치안이 나쁘고 빈부격차가 워낙 심하기 때문에 상당수 국민들이 빈곤에 처해있는 개발도상국의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
4. 결과
전쟁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자료에 따라 차이가 심하다. 2,000~6,000명에 이를 것이라 추정될 뿐인데 그 대다수가 '''보복성'''이라 이 전쟁의 추잡스러움을 말해준다.
사실 따지고 보면 배경이 다른 전쟁과 별다를 바가 없지만, 세간에는 단순히 축구하다가 전쟁한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지 11년이 지난 1980년에 공식적으로 종전했으며 지금은 그럭저럭 잘 지내는 듯하다.
가끔 인터넷에 떠도는 글은 물론 심지어 어떤 교과서에까지 엘살바도르가 승전했다고 하는데 이는 틀린 말이다. 물론 국토가 유린당한 온두라스가 엘살바도르에 비해 훨씬 큰 피해를 입었고 전투에서도 엘살바도르 군이 훨씬 잘 싸웠지만, 위에 적혀있듯 엘살바도르 또한 전쟁 전 수립했던 목표를 하나도 이루지 못했다. 전쟁사에선 일방적인 침공에 대한 방어전에 성공했을 경우 보통은 방어 측이 더 많은 손해를 입었더라도 이겼다고 평가하는 편이다. 막는 쪽이 전장이 되니 손해가 큰 게 당연하기 때문이다.
5. 뒷이야기
7월 20일에는 '''아폴로 11호의 역사적인 달 착륙 중계를 보느라 임시로 휴전하고 중계방송이 끝나자 전투를 재개하는'''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 전쟁에서는 F4U 콜세어 P-51 머스탱과 FG1D 코르세어(F4U의 굿이어사 라이센스판)등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시절 같은 연합군 진영에서 사용되던 전투기 간의 공중전이 벌어졌다.
전쟁의 원인이 양국의 고질적인 사회 문제인 소수 대지주들의 토지 독식과 깊게 연관되었고 축구전쟁으로 양쪽이 얻었던 것도 없기 때문에 우루과이의 작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는 《불의 기억》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한 바 있다.
공교롭게도 이 두 나라는 현재 전 세계에서 살인율 1, 2위를 나란히 달리는 국가다(...). 2015년 기준 엘살바도르가 인구 10만명당 108.64건으로 압도적 1위,[4] 63.75건의 살인이 발생한 온두라스가 2위를 차지했다.한 세기 반 전까지도 하나의 공화국에 속했던 중앙아메리카의 두 나라가 축구 때문에 적이 되어 싸운다.
작은 농업 국가인 온두라스는 소수의 대지주들에 의해 지배된다.
작은 농업 국가인 엘살바도르는 소수의 대지주들에 의해 지배된다.
온두라스는 쿠데타로 태어난 군사 독재 정권이 통치한다.
엘살바도르는 쿠데타로 태어난 군사 독재 정권이 통치한다.
파나마에 있는 미국의 '아메리카 학교'에서 교육받은 장군들이 온두라스를 다스린다.
파나마에 있는 미국의 '아메리카 학교'에서 교육받은 장군들이 엘살바도르를 다스린다.
온두라스의 독재자는 미국으로부터 무기와 고문관을 공급받는다.
엘살바도르의 독재자는 미국으로부터 무기와 고문관을 공급받는다.
이제 온두라스의 독재자는 엘살바도르의 독재자가 피델 카스트로에게 고용된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한다.
이제 엘살바도르의 독재자는 온두라스의 독재자가 피델 카스트로에게 고용된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한다.
전쟁을 하는 동안
온두라스 민중은 자신들의 적이 엘살바도르 민중이라고 생각하고
엘살바도르 민중은 자신들의 적이 온두라스 민중이라고 생각한다.
1주일간 지속된 두 나라의 전쟁은 4천명의 죽은 자를 남겼다.
축구전쟁 이후 아이티마저 이기고 월드컵 본선에 올라간 엘살바도르는 벨기에전 0:3 패, 멕시코전 0:4 패, 소련전 0:2 패로 '''3전 전패 무득점 9실점'''이라는 성적으로 조별리그 광탈했다.
13년 후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는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 양 팀 모두가 올라갔으나 둘 다 1라운드에서 광탈했다. 특히 엘살바도르는 이 대회에서 헝가리에 '''10:1'''이라는 엄청난 차이로 완패하면서 또 한 번 화제가 되었다.
가장 최근에 만난 월드컵 예선인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북아메리카 지역 최종 예선의 경우 온두라스가 단독으로 진출하면서 40년만에 한을 풀었다.
FIFA 시리즈인 '2006 FIFA 월드컵'에서는 2002 한일 월드컵 예선에서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와의 배경으로 한 도전 과제가 나왔으며 '축구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이 전쟁을 다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