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칼팍스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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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즈베키스탄 북서부의 아랄해 남단에 위치한 자치공화국. 면적은 164,900km²이며 인구는 171만 1,800명(2013 추정)이다. 수도는 누쿠스(Nukus)이다.[2] 주민은 우즈베크인, 카라칼파크인, 카자흐인이 주류를 구성하고 있다. 그 외의 기타 민족으로 러시아인, 타지크인, 고려인 등이 거주중이다.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전반적으로 우즈베크인의 비중이 높아지는 추세이다. 동부에는 키질쿰 사막에 위치해 있다.
남한 면적의 약 1.7배에 달하고 우즈베키스탄 전체 면적의 37% 가량을 차지하지만 인구 상으로는 전체의 약 5% 남짓 정도를 구성하고 있다. 강역 내 사막이나 볼모지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서 인구 밀도는 희박한 편. 대부분의 인구가 아랄해의 지류인 아무다리야 강 유역 인근에서 거주중이다.
2. 국명
소련 시절 아랄해 남단 지역에 튀르크 계통, 더 구체적으로는 킵차크 계통의 카라칼파크인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에 카라칼파크 자치주를 설치한 것이 오늘날 카라칼팍스탄의 직접적인 기원이 된다.
국명의 유래가 된 '카라칼파크(Qaraqalpak 또는 Karakalpak)'라는 민족명은 '검은 모자'라는 뜻이다. 더 자세히 살펴 보자면 튀르크 제어로 '검은 색'을 뜻하는 '카라'[3] 와 모자를 뜻하는 '칼파크'로 이루어진 명칭이다.
칼파크는 주로 튀르크계나 타타르계 유목민이 사용하는 양피 모자이다. 영어단어 캘팩(Calpac 혹은 Calpack)의 어원이 되는 단어이기도 하다.
3. 민족 구성
대략적으로 공화국의 주류민족인 카라칼파크인과 우즈베크인이 각각 1/3 정도를, 카자흐인이 1/4정도를 구성하고 있고 나머지 기타민족으로 러시아인, 타지크인, 고려인 등이 거주하고 있다.
다만 카라칼팍스탄 공화국 뿐아니라 우즈베키스탄 전역의 민족분포는 추정치로 추산되고 있어 정확한 수치를 가늠하기가 까다롭다. 우즈베키스탄 당국에서 정확한 통계를 내지 않고 있기 때문인데 소련 해체 전 마지막으로 실시한 1989년 인구조사 이후 무려 30년 가까이 인구센서스를 한 차례도 실시하지 않고 있다.(...)[5] 그런 고로 독립 이후의 카라칼팍스탄 공화국의 인구 및 인종구성에 관한 자료는 전부다 추정치인지라 자료마다 다 구체적인 수치가 크게 차이난다.
확실한 점은 독립 이후 인구구성에서 우즈베크인을 제외한 나머지 민족들이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는 사실이다. 특히 소련이 해체되고 구성국들이 개별주권국가로 독립하게 되자 동포들이 주류민족으로서 운영중인 모국으로 귀환하거나 역외이주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카자흐인과 러시아인, 투르크멘인 등에서 이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3.1. 카라칼파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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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고고학적 근거를 통해 15~16세기 후반 레세르 호드(Lesser Horde)의 카자흐와 가까운 시르다리야 강의 튀르크 부족 연합체에서 시작되었다고 추측된다.
이외에도 약 11세기에 존재하던 "체르니예 클로부키"[7] 라 불리우는 튀르크 연맹을 그 기원으로 보고 있으나 이들이 카라칼파크인들과 명칭의 의미가 같다는 것 이외에는 고고학적, 역사적으로 어떠한 관계인지에 대해선 제대로 된 증거가 없는 상태이다.
공화국에 거주하는 카라칼파크인의 상황은 영 좋지 않은데 카라칼팍스탄의 환경, 경제 문제로 인해서 국경 넘어 카자흐스탄 등 외국에서 외화벌이를 하는 이주 노동자들이 많다.[8] 이들에 대한 정부의 관리는 방치에 가까울만큼 허술하다. 당국이 공식적으로 추산한 카자흐스탄 거주 카라칼파크인은 2009년 기준으로 2800명 수준이다.[9] 하지만 비공식 자료는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한 카라칼파크인은 최소 2만 또는 50,000명 에서 200,000명으로 추산하기도 한다.[10][11] 사실 이런 이주 노동자들은 영구적인 이주를 목적으로하는 사람들도 있고 한철 장사처럼 따뜻한 계절에 일하러 카자흐스탄에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얼마나 되는 사람이 카라칼팍스탄을 떠났는지 추산하기 어렵다. 여기에 우즈베키스탄 당국이 자국민 이주 노동자 문제에 전혀 무관심한 것도 한 몫을 더하고 있다.
카자흐, 키르기스와 매우 가까운 관계이지만, 이들에 비하면 백인 외형이 어느 정도 남아있는 편이다.
3.2. 카자흐인
소비에트 연방과 카라칼팍스탄의 성립 이전부터 카라칼팍스탄 일대는 우즈베키스탄 내 카자흐인이 다수 거주하던 지역이었다. 또 다른 주류민족인 카라칼파크인 역시 언어, 문화 상으로 카자흐인과 꽤 유사했기 때문에[12] 언어, 문화적 여건만을 고려한다면 카라칼팍스탄은 카자흐스탄의 자치지역으로 귀속되는 편이 더 자연스럽기도 했고 실제로도 카자흐스탄에 일시적으로 편입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카라칼팍스탄이 아랄해의 주요 지류인 아무다리야 강 유역의 하류에 위치했다는 이유, 다시말해 관개 농업으로 물을 끌어다가 면화 재배가 가능한 지역이기 때문에 면화 재배의 관리와 통제를 위해[13] 우즈베키스탄으로 이관되었다.
그래도 중앙아시아 일대가 소련이라는 하나의 국가 안에 있을 때는 큰 문제는 없었지만 중앙아시아의 다른 구소련 국가 및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카라칼팍스탄의 카자흐인들도 소련붕괴 이후 귀속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
때마침 같은 시기에 독립한 카자흐스탄 공화국이 역외에 거주하는 재외 카자흐인들을 대상으로 귀국사업과 재정착 지원정책을 꾸준히 시행하고 있어 카자흐스탄 역외에서 소수민족으로 거주중인 카자흐인의 이주가 수월해졌다.[14] 카라칼팍스탄의 카자흐인들 역시 아랄해 소멸 등으로 인해 거주여건이 워낙 악화됐기 때문에 카자흐스탄으로 활발하게 이주하고 있다.
소련 해체와 독립 이후 우즈베키스탄에서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한 카자흐인은 5만 명으로 추산되고 이 중 75%는 카라칼팍스탄 출신이었다. 비공식 자료에 따르면 재정착민의 숫자는 최대 18만 명에 달하기도 한다.[15]
3.3. 고려인
잘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카라칼팍스탄은 한때 상당한 숫자의 고려인이 거주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 소련당국의 면화경작지 및 관개지역 확장으로 아랄해 유역의 환경이 파괴되었고 독립 이후에는 초기 이주민수의 절반 수준으로 고려인 인구가 크게 감소했다.[16]
1937년 고려인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당시 우즈베키스탄에는 총 7만6526명의 고려인이 이주되었다. 카라칼팍스탄의 쿤그라드( Kungrad)에는 고려인 2,300가구 10,620명이 이주되었고 이는 우즈베키스탄 내에서 '''두번째로 큰 고려인 거주지였다.''' 당시만해도 아랄 해 유역이 본격적으로 개발 되기 전이라 이주지역은 농경에도 적합하고 생활여건이 그런대로 양호한 편이었다. 다만 쿤그라드는 주위가 사막이나 호수 등 자연 지형으로 외부와 고립된 지역이라 '''감시와 통제'''가 용이했고, 이 점이 쿤그라드가 이주지로 선정된 주요한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소련이 해체되기 전부터 아랄해 유역의 수량이 고갈되면서 환경문제가 점차 심화되었다. 1970년대에는 이미 카라칼팍스탄 내에서 고려인이 일궈낸 콜호즈들은 환경문제로 급격하게 와해되는 중이었다. 카라칼팍스탄 내 고려인의 숫자는 정체기를 겪으면서 조금씩 감소했고 특히 소련이 붕괴한 이후부터는 고려인 인구의 유출이 가속화됐다.
2019년 기준으로 외교부 추산에 따르면 카라칼팍스탄 자치공화국 내 재외동포는 6,512명, 일반 체류자가 150명이다. 이중 외국국적동포(시민권자)가 6,362명이다.[17] 단순 수치상으로 우즈베크 내 고려인 인구는 2.5배 이상 증가한 반면 카라칼팍스탄 내 고려인 인구는 최초 이주 당시의 거의 절반 수준으로 급감했다. 특히 이주역사 초기에 고려인이 집중적으로 거주했던 콘그라드에서는 독립 이후에는 소수의 노인층 외에는 고려인 인구가 거의 존재하지 않고 있다.
카라칼팍스탄에 잔류한 고려인은 대부분 자치공화국의 수도인 누쿠스에 주로 거주 하고 있다. 역외로 이주한 고려인들의 경우 우즈베키스탄의 수도인 타슈켄트[18] 또는 카자흐스탄이나 볼고그라드를 비롯한 러시아 남부에 주로 이주했다.
4. 역사
원래 호라즘이라고 불리던 지방의 일부분으로, 카라칼파크인이 이 지역에 이주한 건 16세기에 이르러서였다. 문헌상으로는 1598년 부하라 칸국의 공문서에서 카라칼팍이라는 민족명이 최초로 확인 가능하다. 이후 17-18 세기 중엽 카자흐 칸국의 지배를 받았고 18세기 경에 (오늘날 카라칼팍스탄 공화국의 위치인) 아무다리야 강 유역, 더 구체적으로 아랄 해 남부에서 아무다리야 강 우안에 이르는 지역에 정착했다. 다시 19세기 초에는 중흥기를 맞아 호라즘 지역을 거진 확보해나간 히바 칸국에 귀속되었다.
19세기 중후반부터는 러시아가 중앙아시아 지역에 본격적인 팽창을 시작했다. 1873년에는 러시아 제국이 히바칸국을 정복했고, 카라칼팍 민족과 이들이 거주하던 지역 역시 러시아에 귀속되었다.[19]
러시아 혁명과 소련 성립 후에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영토이다가[20] , 1925년, 카라칼파크인의 거주 지역이 자치주의 지위를 인정받았고, 1932년에는 자치공화국으로 승격되었다. 1936년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자치 지역으로 이관되어 편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호라즘 지방의 남부는 투르크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영토가 되었는데, 당시에는 같은 소련 가맹국이었기에 별 문제가 안 되었지만 소련이 1991년 붕괴되면서 소련 내의 행정구역 경계 그대로 서로 다른 나라로 갈라지면서 졸지에 이 지방도 두 나라로 갈라졌다. 지금도 투르크메니스탄 국경 안쪽, 즉 투르크메니스탄 북부 지방은 우즈베키스탄의 카라칼팍스탄과 밀접한 정체성을 공유한다.
60년대까지 카라칼팍스탄은 관개 농업이나 어업 등으로 꽤 잘 먹고 사는 곳이었으나, 아랄해가 점점 말라가면서 식수 부족과 기후 변화, 염해 등으로 카라칼팍스탄 내의 농업과 어업은 붕괴되었으며 한때 120만에 달했던 인구는 40만까지 줄었다. 결국 카라칼팍스탄 노동인구의 30% 이상이 이웃한 카자흐스탄으로 일하러 떠나게 될 정도까지 되었다.
5. 분리주의
카라칼팍스탄은 소비에트 중앙아시아에서 유일한 자치공화국 지위를 가진 지역이었다.[21] 소련이 해체되던 시기, 우즈베크 SSR에 소속 되어있던 카라칼팍스탄은 1990년 12월 14일 주권선언을 채택했다.[22] 1993년에는 우즈베키스탄과 20년간 합병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에는 국민 투표로 우즈베키스탄을 탈퇴할 권리가 보장되어 있었고 이는 우즈벡 공화국 헌법[23] 에도 명시되어있다.
하지만 합병조약의 시효가 만료됐음에도 카라칼팍스탄의 자주권 증대 및 독립 요구 등은 우즈베키스탄 당국의 동화·이주 정책과 이런저런 유무형의 탄압으로 묵살되고 있다. 당장 우즈베키스탄 헌법에도 사실상의 '안전장치' 가 담겨져 있다.
우즈베키스탄으로부터 독립을 꿈꾼다고 하는데 우즈베키스탄 독재자 이슬롬 카리모프와 우즈베키스탄 정부가 당연히 봐주지 않고 자치 정부 수반을 숙청하고 온갖 탄압을 가하고 있다. 사실 카라칼팍스탄이 독립할 경우 다른 민족들도 독립하겠다고 난리치거나 최소한 소수민족의 지위와 권익 보장을 요구할 것이 분명하기에 카리모프와 우즈베키스탄 정부 입장에선 독립을 용납할 수가 없다.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는 것이다.[24]우즈베키스탄 헌법 제 71조
카라칼팍스탄공화국은 독자적인 헌법을 가진다.
카라칼팍스탄공화국의 헌법은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의 헌법과 배치될 수 없다.'''
다만 카리모프 사후에는 본격적으로 독립을 시도하려는 이야기는 없다. 사실 독립해도 국토 대부분이 황무지들 뿐이라 경제적으로 빈약하기 때문에...
6. 기타
2020년 7월 31일에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2002부터 18년 이상 재임해 온 카라칼팍스탄 공화국의 정치 지도자 예르니야조프[25] 의장이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1] 우즈베크어, 칼라칼파크어, 러시아어 및 '''영어 지원'''[2] 우즈베크어로 Nukus / Нукус. 카라칼파크어로 Nókis / Нөкис.[3] 대표적인 예시로 계통은 좀 차이가 나지만 같은 튀르크 계 언어인 터키어로 흑해는 '''Kara'''deniz이다.[4] 짤의 주인공은 터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케말 아타튀르크.[5] 정경택(경상대) ''우즈베키스탄의 민족-언어상황 연구''중 "우즈베키스탄의 행정구역과 민족분포", (러시아어문학연구논집, 2018, 275pp)[6] 투르크멘인, 러시아인 등[7] 러시아어로 "검은 모자"라는 뜻이며, 당시 키예프 루스의 용병에 속해있기도 했다.[8] 이는 카라칼팍 자치공화국 뿐 아니라 우즈베키스탄 전체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우즈베키스탄보다 경제상황이 양호한 러시아나 카자흐스탄으로 따뜻한 계절에 돈벌러 떠나는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이 많다. 상당수는 '비합법적인 경로'로 일하기 때문에 공식 통계에 잘 잡히지 않지만 보통 이주 노동자의 수는 100만에서 300만 또는 200만에서 무려 '''800만'''까지 추산하기도 한다.[9] 최성규(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카자흐스탄 카라칼팍 민족 디아스포라의 선교적 의미와 사역 방향''(복음과 선교 제46집), 333pp[10] 이채문(경북대학교), ''아랄해의 환경문제와 고려인의 이주․정착 및 지역성 변화:우즈베키스탄 카라칼팍스탄 공화국의 사례를 중심으로''(한국동북아논총 제70호, 2014년), 209pp[11] “Retreating Aral Sea displaces Karakalpaks[12] 현재 와서는 거의 사장된 견해긴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카라칼팍어를 아예 카자흐어의 방언으로 보기도 했을 정도로 두 언어는 매우 밀접하다.[13] 달리말하자면 카라칼팍스탄의 귀속을 결정할 당시 언어, 문화적 요인보다 국가 경제정책 시행의 효율성이 우선됐다할 수 있다. [14] 독립 당시만 해도 카자흐스탄 내 카자흐 민족의 비중이 40% 정도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카자흐인 인구를 보충하기 위한 목적에서 시행중인 정책이다. 이 같은 정책으로 인해 카자흐로 재정착한 재외 카자흐 출신자들을 오랄만(Oralmans)라 부른다. [15] 김영진(한양대학교),''우즈베키스탄의 노동이주와 송금: 빈곤축소와 경제발전에 대한 영향''(전략지역심층연구 12-24), 166pp.[16] 이채문(경북대)''아랄해의 환경문제와 고려인의 이주, 정착 및 지역성 변화'':우즈베키스탄 카라칼팍스탄 공화국의 사례를 중심으로, (한국동북아논총 제70호, 2014), 202pp[17] ''재외동포현황 2019'', 244pp[18] 우즈베키스탄 내에는 2019년 기준으로 1800여명의 재외국민을 포함하여 17만7천명 가량의 재외동포가 거주중이다. 그중에서도 타슈켄트시에 6만2천명, 타슈켄트주에 7만여명이 거주하고 있어 타슈켄트와 그 인근 지역에 전체 재외동포의 3/4가 거주중이다.[19]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히바 칸국은 완전히 합병되는 대신 러시아의 보호국 형태로 잔존했다. 대신 영토가 히바 근교로 대폭 축소됐다. 카라칼팍스탄을 비롯한 나머지 주위지역은 러시아제국에 합병되었다. 오늘날의 카라칼팍스탄에 해당하는 강역의 대부분은 러시아령 투르케스탄에 편입되었다.[20] 1936년 이전에는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러시아 내의 '''자치 공화국'''이었다.[21] 역내의 다른 국가들도 마찬가지로 자치공화국 시기를 거쳤으나 이들 국가들은 카라칼팍스탄이 자치공화국으로 승격되기 이전에 이미 공화국으로 승격됐다.[22] 카자흐, 우즈벡 공화국보다는 늦었지만 키르기스공화국보다는 앞선 것이었다.[23] 17장 74조[24] 사실 구 소련에서 분리독립되어 나온 유라시아 지역 국가들 대부분이 이렇다. 1991년 소련 해체 과정에서 분리독립 이후 다수민족과 소수민족간의 갈등으로 분리주의나 미승인국가들과의 분쟁과 대립이 끊이지 않는 곳이 한둘이 아니다. 그나마 민족 차별이나 갈등을 적절히 관리하고 있는 카자흐스탄 정도가 그나마 나은 편.[25] Musa Yerniyazov,(1947~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