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럿 어거스타
1. 소개
왕세자 시절의 조지 4세와 브라운슈바이크의 캐롤라인 사이에서 태어난 외동딸이다. 더 오래 살았더라면 조지 4세의 뒤를 이어 영국의 여왕이 되었겠지만, 아이를 낳다 21살의 나이에 사망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윌리엄 4세를 거쳐 사촌 빅토리아 여왕이 대영제국의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2. 생애
2.1.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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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5년 왕세자였던 조지는 사촌[1] 브라운슈바이크의 캐롤라인과 결혼한다. 조지와 캐롤라인은 서로를 너무나 싫어했는데, 훗날 조지 4세가 그녀와 부부관계를 딱 세 번 밖에 안했다고 말하고 다닐 정도였다. 그들은 몇 주 만에 각방을 썼고 이러한 와중에 기적적으로 아이를 임신하게 된다.
결혼한 지 딱 9개월이 된 1796년 1월 7일, 캐롤라인은 공주를 낳는다. 아들을 원했던 조지 4세와 달리 당시 국왕이었던 조지 3세는 태어난 공주를 정말 예뻐했다고 한다. 공주의 탄생으로 부부관계가 좋아지나 싶었지만, 조지 4세는 공주에게 캐롤라인이 접근을 엄격히 제한하고 자신의 정부인 마리아 피츠허버트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당시 영국 왕실 일가는 국민들에게 인기가 좋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새 공주의 탄생을 기뻐했다. 공주는 1796년 2월 11일 칼턴 하우스에서 '샬럿 어거스타' 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샬럿은 할머니 샬럿 왕비로부터, 어거스타는 외할머니 브라운슈바이크 공작부인 어거스타로부터 따왔다고 한다.
조지 4세는 샬럿의 육아에 있어 캐롤라인이 절대 간섭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정부나 유모가 없는 환경에서는 절대 딸을 볼 수 없었고 샬럿의 육아에 있어 어떠한 결정도 내릴 수 없었다. 보다 못한 보모가 몰래 자리를 비켜 주었을 때 비로소 딸과 단 둘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2.2. 어린 시절
샬럿이 자라면서 조지 왕세자와 캐롤라인의 사이는 점점 더 안 좋아졌다. 그들은 딸을 국왕 부부의 애정을 얻기 위한 장기말로 이용했고, 결국 1797년 왕세자 부부는 별거에 들어간다. 아들을 원했던 조지 왕세자의 노력으로 잠시 사이가 좋아지기도 했지만 이를 마지막으로 그들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캐롤라인은 딸을 보러 종종 방문하곤 했으며 샬럿 또한 캐롤라인에게 가기도 했지만 어머니의 집에서 머무는 것은 절대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1810년 국왕 조지 3세의 정신병이 극에 달하였고 1811년 2월 6일부터 아버지 조지 왕세자가 섭정을 하기 시작했다. 샬럿은 엄격한 교육 속에서 점차 반항적이고 자기가 하고싶은대로 하려는 10대로 성장했다. 공부도 다양하게 하는것이 아니라 원하는 것만 공부해서 피아노와 승마는 정말 잘했지만 다른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조지 왕세자가 섭정으로 바쁜 틈을 타 몰래 남자들을 만나기도 했다. 조지 왕세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왕실 일원들은 이를 알고 있었지만 그가 얼마나 엄격한 지 알기에 샬럿에게 아무도 간섭하지 않았다.
1813년부터 조지 왕세자는 샬럿의 결혼을 진지하게 고민한다. 남편 후보로 처음에는 네덜란드 빌럼 1세의 아들 빌럼 왕자(훗날의 빌럼 2세)를 생각했다. 하지만 샬럿은 빌럼 왕자를 영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 미래의 여왕이 될 자신이 왜 외국인과 결혼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주장했다. 샬럿의 결혼으로 북유럽에 영향을 미치고 싶어했던 왕세자는 끝까지 빌럼 왕자와 결혼할 것을 고집했고 그녀는 결국 1814년 6월 10일 혼인계약서에 서명한다.
그러던 어느날, 파티에 참석한 샬럿은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공자 레오폴드[2] 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레오폴드를 초청하여 한 시간 가량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두 사람은 첫눈에 사랑에 빠졌지만, 샬럿이 빌럼 왕자와 결혼을 못 하겠다고 하자 조지 왕세자는 그녀를 감금해버렸다. 샬럿은 거리 밖으로 뛰쳐나왔고 이를 본 어떤 시민이 그녀를 캐롤라인의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며칠 뒤 다시 궁전으로 돌아가긴 했지만, 이 일은 순식간에 가십거리가 되었다.
샬럿은 국민들에게 사랑받는 공주였다. 그녀가 모습을 나타내면 영국 사람들은 샬럿이 이미 여왕이 된 것처럼 환호했다. 이런 공주가 네덜란드로 시집가버린다고 하니 사람들은 빌럼 왕자와의 결혼을 싫어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1815년 초 샬럿 공주는 레오폴드 공자와 결혼하겠다고 밝혔다. 아버지 조지 왕세자는 여전히 빌럼 왕자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했지만 샬럿은 단호했다. 그 해 7월 마침내 그녀는 레오폴드와의 결혼을 허락받았다. 맨 처음에 조지 왕세자는 레오폴드를 탐탁지 않아했지만, 나중에는 자신의 딸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며 좋아했다고 한다.
2.3. 결혼과 죽음
성대한 결혼식은 1816년 5월 2일 거행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결혼식을 보려고 런던에 몰려들었다. 두 사람은 결혼 후 정말 행복했다. '이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다'고 말 할 정도로 사랑이 넘쳐흘렀던 두 사람에게는 그렇게 행복한 날들만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1816년 8월 오페라를 보던 샬럿은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고 곧 첫아이를 유산했다. 다행히도 1817년 4월에 그녀는 다시 임신 소식을 발표했고, 그것은 영국 국민들의 가장 큰 관심거리였다. 그들은 새로 태어날 로열 베이비가 아들일지 딸일지 내기를 하곤 했다. 임신 말기에 담당 주치의는 아이가 너무 커지는 것을 우려하여 샬럿에게 체중 조절을 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는 샬럿을 약하게 만드는 데 일조하였고 비극의 씨앗이 되었다.
예정일이 2주가 지난 11월 3일 저녁, 샬럿의 산통이 시작되었다. 주치의는 여전히 그녀가 먹지 못하게 했다. 진통은 이틀이 지나도록 진행되었지만 아이는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11월 5일, 샬럿은 아주 큰 남자아이를 사산했다. 죽어서 태어난 아이를 본 사람들은 영국 왕실 가족들을 닮은, 아주 잘생긴 남자아이였다고 말했다. 샬럿은 출산 후 회복하고 있었고 레오폴드는 긴장이 풀린 탓에 아편을 먹고 잠에 들었다.
그러나 그날 밤, 샬럿은 구토를 하며 위가 아프다고 고통을 호소했다. 그녀는 호흡이 불규칙했고 피를 흘리고 있었다. 주치의와 레오폴드를 데려왔을 때 그녀는 이미 사망해 있었다. 사산의 후유증으로 숨진 듯하나 사인이 영국 왕족들이 앓던 유전병인 포르피린증이라는 얘기가 있다. 그렇게 샬럿은 결혼한 지 1년 6개월만에 향년 21세를 일기로 요절했다.
샬럿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온 나라는 슬픔에 잠겼다. 모든 사람들은 검정색 옷을 입었고, 상점은 2주간 문을 닫았다. 조지 왕세자는 너무 슬픈 나머지 몸을 가눌 수 조차 없어서 외동딸의 장례식에 불참하였다. 임종을 지킬 수조차 없었던 캐롤라인은 뒤늦게 딸의 사망 소식을 듣고 혼절했고, 심지어 옛 약혼자였던 빌럼 왕자마저도 애도를 표했다.
하루아침에 아내와 아들을 모두 잃은 레오폴드는 평생 샬럿을 그리워했다. 샬럿과 사별하고도 십여 년이 지나도록 재혼하지 않다가 벨기에 국왕으로 추대된 후에야 샬럿을 닮은 여성인 오를레앙의 루이즈와 재혼했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신의 고명딸의 이름도 샬럿으로 지었다.[3] 심지어 레오폴드 1세는 임종 직전에도 '샬럿!'을 외쳤고 이것이 유언이 됐다고 한다. 다만 레오폴드 1세의 후처와 딸인 루이즈와 샤를로트 모녀는 상당히 불행했다. 레오폴드의 후처 오를레앙의 루이즈는 프랑스 오를레앙 왕조의 첫번째 왕 루이필리프의 장녀였는데, 아버지의 퇴위 소식이 전해지자 충격을 받고 병에 걸려 사망했다. 특히 레오폴드의 딸 샤를로트는 남편인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 대공이 프랑스 황제에게 놀아나 멕시코의 황제로 옹립됐다가 사형당하자, 말 그대로 미쳐버려서 오빠 레오폴드 2세에게 60년 동안 감금되었다가 죽었다. 이쯤되면 레오폴드 1세에게 무슨 마가 낀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후 샬럿은 성 조지 성당에 아들과 함께 묻혔다. 그녀의 죽음은 영국 왕실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는데, 왕위를 이을 왕손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조지 3세의 자녀들은 서로 아이를 먼저 갖기 위해 경쟁했고 조지 3세의 4남 켄트 공작 에드워드 왕자가 늦은 나이에 딸을 낳아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그녀가 바로 대영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빅토리아 여왕이다.[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