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포레토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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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17년 10~11월에 걸쳐 진행된 이탈리아 전선의 전투. 제12차 이손초(Isonzo) 전투로도 불린다. 이 전투를 통해 이탈리아 전선의 주도권이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2. 배경
1915년 이탈리아 왕국이 삼국 동맹을 파기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선전포고한 이래, 오스트리아는 발칸전선, 동부전선에 이어 이탈리아 전선까지 강요받게 되었다. 이는 안 그래도 취약한 오스트리아의 동원병력 규모와 맞물려 오스트리아에 심각한 부담으로 작용하였으며, 결국 1916년 오스트리아를 타겟으로 한 러시아 제국의 브루실로프 공세가 성공하는 요인이 되었다. 여기에 1916년 말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죽은 것까지 결부되어 이중제국은 급격히 흔들리고 있었다.
러시아 혁명으로 제정은 붕괴되었지만 임시정부가 아직 전쟁을 지속하고 있는 상황에서, 독일 제국군 수뇌부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이런 상황을 염려했고, 또 계속되는 이탈리아의 공세로 오스트리아가 행여 무너지지 않을까 우려했다. 실제로 이탈리아군은 카포레토 전투 이전까지는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상대로 대체로 공세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알프스 산맥의 괴물과 같은 빙벽과 지형에 막혀 제대로 된 성과도 없이 삽질성 공세를 남발하는 걸로 전락했고, 이미 상황이 말이 아니었던 오스트리아 측도 전선을 유지하는 방어전에서는 좋은 성과를 냈지만 근본적인 역습을 가하는 능력이 없었다. 1917년 무렵에 들어가서는 오스트리아군과 이탈리아군은 매번 전투를 벌일 때마다 쌍방에 막대한 피해를 강요하면서도 별 성과도 없는 충돌을 지속했으며, 이 와중에 숱한 장병들이 전투보다 알프스 산맥의 혹한과 낙설, 산사태 등에 죽어나갔다.
이미 이탈리아군과 오스트리아군은 1915년 1차 이손초 전투를 시작으로 1917년의 11차 이손초 전투까지 양군 합계 100만명에 달하는 누적 사상자가 발생한 상황이었다.#참고 양측 모두 병력을 수도 없이 갈아넣었으며, 이탈리아와는 달리 러시아 쪽까지 2중전선을 부담해야 하는 오스트리아군측의 전력이 서서히 이탈리아군에게 밀리기 시작하여 오스트리아에게 매우 큰 부담이 되고 있었다. 자세한 것은 이손초 전투 항목 참조.
한편, 합스부르크 이중제국의 새로운 황제 카를 1세는 제11차 이손초 전투의 패배 이후 독일의 빌헬름 2세에 구원을 요청하며 '''계속되는 이탈리아 전선의 압박'''을 호소하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 전선에 총력을 다할테니 독일이 대신 동부전선 전부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한다. 빌헬름 2세와 논의한 독일군 총참모장 파울 폰 힌덴부르크 원수는, 오스트리아의 제안을 거절하는 대신 이탈리아 전선에 독일군을 파병하여 직접 전투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이 전투의 규모는 초기에는 주의분산용으로 기획되었으나, 최종적으로는 이탈리아 군에 통렬한 일격을 가하여 전선 주도권을 되찾는 것으로 전략목표를 변경하기에 이른다.
본격적인 공세를 하기로 합의한 뒤에도 양국은 전략에 있어 의견 차이를 두었다. 오스트리아군은 전 전선에서의 일제적인 공세를 제안한 반면 독일군은 관전단을 통해 전선을 유의깊게 살펴본 후 이손초 강 유역 북쪽에 위치한 카포레토를 공세지역으로 삼고자 했으며, 결국 독일군의 주장대로 카포레토 방면에서의 공세가 결정되었다.
3.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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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10월 24일 새벽 2시를 기해 동맹군은 전면 공세로 돌입한다. 독일-오스트리아 혼성 17개 사단으로 구성된 독일 제14군은 독가스와 포병사격을 신호로 이탈리아 왕국군 방어선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동맹군은 기상 예측을 바탕으로 바람이 거의 없는 시간대를 골라 공격을 가했고, 이는 서부전선과 달리 대규모 독가스 사용이 거의 없던 이탈리아 전선에서는 상당히 위력적으로 작용했다. 물론 이탈리아 전선에서도 독가스가 안 쓰인 건 아니었지만 이런 대대적인 사용은 유례가 드문 일이었던데다, '''이탈리아제 방독면은 영 신통치 않아 무용지물이거나 오래 버티지 못했다'''고 영국, 프랑스의 파견장교들이 기록하고 있다.
더군다나 이탈리아군은 동맹군의 대규모 증원 및 공세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탈리아군 사령부는 조간만 오스트리아의 반격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은 했으나 이렇게 빨리 대규모로 올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으며, 무엇보다 독일군이 전선에 출현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는 독일-오스트리아군이 야간에만 움직여 이탈리아군 정찰기에 포착되지 않은 덕분이기도 했다.
한편, 독일군 보병부대는 이탈리아군이 점령한 산악지대와 그 참호선을 눈 깜작할 사이에 돌파하며 순식간에 이탈리아 주력군의 배후를 들이치기 시작했다. [2] 전체적인 측면에서 독일군의 전략은 이탈리아군의 후방을 들이치는 것이었고 지금까지 오스트리아군만 상대하던 이탈리아군은 독일군의 맹공에 순식간에 무너져내렸다. 특히 단순한 참호전과 보병전만 경험한 이탈리아군은 수류탄과 화염방사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새로운 방식의 공세에 대응하지 못했다. 서부전선과 같은 개활지의 참호전이 아닌 산악지대에서의 전투에서 수류탄과 화염방사기의 대대적 활용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안그래도 전선 정면에서 대대적인 공세로 패주중인 와중에 후방으로 동맹군이 깊숙히 침투하려는 모습이 명백해지자 전선을 맡은 이탈리아 제2군 및 제3군은 일제히 붕괴하고 전면패주를 시작한다. 전투개시 3일째인 10월 26일이 되자 이탈리아군 수뇌부는 퇴각을 허가하지 않을 수 없었고 새로운 방어선으로 이손초 강 서쪽의 탈리아멘토 강을 선택했으나 순식간에 돌파당했다. 결국 11월 3일에는 피아베(Piave) 강까지 퇴각해야 했다. 이탈리아군은 여전히 상황을 수습하지 못했으나 동맹군이 늘어진 보급선 문제로 공세를 지속할 수 없었기에 겨우 전선을 형성하고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주전선의 붕괴로 트렌티노 일대 산악지대에서 약간 진격한 상태였던 이탈리아 제3군도 급히 후퇴, 이로 인해 이탈리아군은 오스트리아 영내에서 획득한 지역을 모조리 상실하고 오히려 자국 영토로 크게 후퇴해야 했으며, 북부의 주요도시 중 하나인 베네치아를 잃어버릴 위기에 처하게 된다. 피아베 강에서 베네치아까지는 더 이상 자연적인 방어선이 없었다.
약 2주간에 걸친 이 전투의 결과 이탈리아군은 전사 약 1만~1만 3천여 명에, 포로만 265,000여 명이라는 경이적인 인명피해를 기록한다. 이는 카포레토 전선에 투입했던 이탈리아 2군, 3군 병력이 총 40만임을 감안할때 70%에 육박하는 경이적인 병력손실율이었다. 거기에다가 추가로 35만에 이르는 전선 이탈자가 발생했지만 이후 대부분 수습되었다. 물론 1차대전은 참호전이라는 미친 짓 때문에 이 정도의 높은 병력손실이 속출하긴 했지만, 중요한 건 병력손실의 대부분이 포로라는 것. 전선이 붕괴한 직후 이탈리아군은 열심히 도망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열심히 항복하기도 했다. "독일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를 외치며 집단으로 항복하지 않나, 이탈리아군이 물밀듯이 달려오길래 "재네 반격하려나 보다" 하고 전투 준비 중이던 독일군이 달려오는 이탈리아군의 백기를 보고 오히려 당황하는 일들이 속출했다.
4. 결과
카포레토 전투의 참패로 이탈리아 전선은 파국을 맞이할 뻔 했다. 이탈리아군은 거의 30만에 가까운 병력을 보름여만에 잃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전선을 유지하기 매우 힘들었다. 그나마 다행인건, 이탈리아 전선이 부차적 전선이어서 독일군도 오스트리아 영내에서 이탈리아군을 축출해낸 것에 만족하고 1918년 루덴도르프 공세를 위해 죄다 서부전선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이탈리아 왕국은 즉시 패전의 후폭풍에 휩싸였다. 이탈리아군 사령관 카도르나 대장은 "나는 쿠스토차와[3] 아도와에서 패배한 군대를 이끌었을 뿐이다"라는 비범한 변명을 하다가 경질되었고[4] 신임 사령관인 아르만도 디아즈(Armando Diaz)는 공세를 포기하고 전면적인 방어전으로 전환하였다.
하지만 카포레토 전투에서 정말 열나게 얻어터진 이탈리아군은 독일 제국군의 죽빵 한 방에 제대로 정신을 차린 건지, 정부와 왕실은 '로마를 빼앗기고 시칠리아까지 밀려나도 절대 항복은 없다'며 항전을 선언했고 이탈리아 전역에서 거국적인 자원입대 열풍이 불었다. 그리하여 이탈리아군은 베네치오 북쪽의 그라파 산지에서 필사적으로 저항을 통해 베네치아를 목표로 남하해오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저지하는데 성공했으며 피아베 강에서는 공격해 온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 거의 20만에 이르는 피해를 안기고 패배시켰다. 이후 최후의 전투인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에서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 최후의 한 방을 불어넣어 '''50만'''에 이르는 피해를 안겨 30만의 피해를 입은 지난 패배에 덤을 얹어 그대로 되갚아주었다. 이 전투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붕괴의 전주곡이 되었다.
이 전투는 대영제국과 프랑스 제3공화국에도 영향을 끼쳤다. 눈깜작할 사이에 이탈리아 전선이 붕괴되는 꼴을 본 영프 양국은 동부전선을 맡아주던 러시아 제국이 러시아 혁명으로 리타이어하자 동부전선이 종식되어 서부전선에 대한 압력이 크게 늘어나는 것을 걱정하던 차에, 이탈리아까지 박살나 버리자 공포에 휩쓸렸다. 결국 양국은 이탈리아의 지원군 요청을 받아들여 얼마 없는 병력을 쪼개어 이탈리아 전선에 파병하였다. 또, 이런 패전의 이유 중 하나로 협상국 간 공조체계 미비라고 보고 각국별로 따로따로 되어있는 전쟁지휘부를, 대영제국-프랑스 제3공화국-이탈리아 왕국-미합중국 4개국이 하나로 통합하여 지휘하기로 합의한다.
5. 여담
- 다이스가 제작한 게임이자 제1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하는 FPS 게임인 배틀필드 1에서 아포칼립스 dlc로 추가 된 맵의 배경으로 나온다.
[1] 현재는 슬로베니아에 속한다.[2] 이 전투에서 에르빈 롬멜이 이끄는 독일군 1개 대대는 이탈리아군 방어선 깊숙히 돌파하여 이탈리아군을 혼란에 빠트렸고, 대규모 적군이 후방에 침투하는 걸로 착각한 이탈리아군은 단체로 멘붕해서 도망치거나 항복하기 바빴는데, 이때 롬멜의 소대는 이탈리아군 살레르노 여단 5개연대의 집단항복을 받아내어 포로만 9,000여 명을 잡는다.[3] 이탈리아 통일전쟁 당시 사르데냐-피에몬테 군 12만명이 오스트리아군 8만에게 무참한 참패를 당한 전투, 숫적으로 우세했음에도 이탈리아군은 8천명이상이 사상했고 오스트리아군은 5~6천명정도의 피해를 입었다.[4] 그러나 전후 카도르나는 공훈을 인정받아 원수 계급장을 달게 된다. 그동안 이손초 전투에서 내내 사령관 노릇을 해왔다는 점을 높이 산 듯한데 현실은 그냥 똥별이다. 자세한 것은 이손초 전투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