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안 1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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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1870년 9월 26일 ~ 1947년 4월 20일(향년 만 76년 208일)
재위기간(덴마크): 1912년 5월 14일 ~ 1947년 4월 20일
재위기간(아이슬란드): 1918년 12월 1일 ~ 1944년 6월 17일
1. 개요
덴마크 왕국의 국왕이자, 아이슬란드의 국왕 . 아버지인 프레데리크 8세가 죽자 왕위를 승계받게 된다. 참고로 키는 '''201cm.'''
2. 생애
1912년 프레데리크 8세가 죽자 덴마크와 아이슬란드의 왕으로 즉위했다.
2.1. 부활절 위기
당시 슐레스비히 지방은 덴마크로 회귀하느냐 독일에 남느냐로 19세기부터 이어져온 뿌리깊은 분쟁에 휩싸여 있었다. 일단 이 지역은 두 번의 슐레스비히 전쟁으로 프로이센 왕국, 이후 독일 제국의 영토로 남아있었는데,그냥 국민투표로 결정하자는 이야기가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전쟁에서 덴마크가 발려버리는 바람에 흐지부지되어서 독일 영토가 되어버린 상태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제국이 패망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서자 분쟁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덴마크 의회에서는 우드로 윌슨이 주창한 14개조 원칙, 즉 '''민족자결주의'''에 따라서 슐레스비히의 국민투표를 개최할 것을 요구했고 연합군이 이를 수용하여 마침내 1920년 슐레스비히 국민투표(1920 Schleswig Plebiscites)가 열리게 되었다.
투표 지역은 슐레스비히 북부와 중부[1] 로 나뉘어 각각 2월 10일, 3월 14일에 개시되었고 결과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서에도 있듯이 북부는 덴마크 회귀 74%, 중부는 독일 잔류 80%로 결정되면서 오늘날의 덴마크-독일 국경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덴마크 민족주의자들은 이 투표 결과에 응하지 않고, 투표 따위 집어치우고 슐레스비히 북부와 중부 전역이 덴마크의 고유 영토이며 모두 왕국에 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크리스티안 10세 역시 이 의견에 동조했고, 마침내 당시 총리였던 카를 테오도르 잘레에게 중부 슐레스비히를 병합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잘레는 왕의 명령에 불복하고 투표 결과에 따라 북부 슐레스비히만 병합한 뒤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이에 크리스티안 10세는 화가 나 독재 정치를 펼쳐서 내각을 멋대로 해산해버리고 카를 율리우스 오토 리베를 중심으로 보수파 인물들로 구성된 새 내각을 구성했다. 그러나 이러한 왕의 독선은 덴마크 민중들의 시위와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크리스티안 10세는 일주일만에(...) 굴복하여 총선거를 실시, 미샤일 페데르센 프리스의 정상적인 내각을 출범시켰다.
이 사건은 덴마크에서 군주가 의회 없이 독자적으로 정치를 한 마지막 사건이었으며, 이 일주일간의 해프닝이 3월 말, 4월 초의 부활절 기간에 이루어졌기에 부활절 위기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후 크리스티안 10세 역시 다른 국가의 군주들처럼 실질적인 권력을 잃고 완전히 상징적인 국가원수가 되면서 덴마크에도 입헌군주정이 자리잡게 되었다.
2.2. 독일의 침략
나치 독일이 덴마크를 침공하여 덴마크를 덴마크 보호령 으로 만들어 버렸을 때 크리스티안 10세는 덴마크가 독일의 보호령이 되는 것을 승인했지만,[2] 덴마크가 나치 독일에 점령되어 있던 기간에 크리스티안 10세는 '''나치 독일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기도 했다.
왕궁인 크리스티안보르 궁에 나치 독일의 기가 게양되어 있자 크리스티안 10세는 독일 측에 나치 독일 국기인 하켄크로이츠를 내리라고 요구했고, 나치가 당연히 거절하자 내일 당장 군인 1명이 가서 기를 강제로 내릴 거라고 말했다. 나치는 그 군인을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으나 크리스티안 10세는 '그 기를 내리는 군인은 바로 짐'이라고 받아쳐서 나치 국기를 왕궁에서 내려버린 일화가 있다. 이건 덴마크 국왕의 자존심 상 감히 덴마크 궁정에다 침략자 놈들이 국기를 달다니! 라는 심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크리스티안 10세는 늘 애마 쥬빌리를 타고 코펜하겐 시내를 돌아다니곤 했는데 한 독일 군인이 조롱하는 투로 왕이라면서 왜 경호원이 없는 거냐고 말하자 한 소년이 '모든 코펜하겐 시민이 그 분의 경호원'이라고 답했다. 당시 덴마크 왕국은 크리스티안 10세와 마찬가지로 나치를 매우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그 외에 독일군이 덴마크 거주 유대인을 체포해 절멸수용소로 보내려는 준비 단계로 유대인들에게 노란색 다윗의 별 배지를 달게 하자 국왕 본인이 같은 배지를 달고 무언의 시위를 벌여 유대인 체포 계획을 최대한 지연시켰다는 일화가 아이들용 동화책에까지 실렸을 정도로 유명하다. 단, 이 일화는 어디까지나 야사이다. 실제로는, 덴마크의 유대인들은 다른 지역의 유대인과 달리 다윗의 별 배지를 달지 않았다고 한다.
또 당시 크리스티안 10세가 72번째 생일을 맞이하자 독일에선 아돌프 히틀러의 명의로 긴 축하 전문을 보내왔는데 이에 대한 크리스티안 10세의 답장은 'Spreche Meinen besten Dank aus. Chr. Rex'가 전부였다. 직역하면 '매우 고맙소. 크리스티안 10세'란 뜻이다. 한마디로 '님 ㄳ’수준의 성의없는 답장을 보내어 덴마크를 점령한 나치 독일에 대한 반감을 드러낸 것.
3. 여담
왕세자 시절 벨기에 왕국의 레오폴드 2세가 콩고에서 저지른 만행에 대해 아버지 프레데리크 8세와 마찬가지로 '''그 놈이 인간이라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다!'''라고 디스했을 정도였다. 당시 레오폴드의 만행을 가장 비난한 사람이 이 부자였으며, 이 영향인지 평생 노예제를 혐오했다.[3]
히틀러의 생일에 사망 했는데 나치 점령 기간에 나치에 저항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다소 아이러니하다. 다만 히틀러보다 2년 늦게 죽었기 때문에 당시 히틀러는 이미 패망한 후 사망했고 전 세계적으로 히틀러의 생일이 불과 몇 년 전처럼 국경일로 하는 곳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4]
4. 가족관계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알렉산드리네와 결혼해서 아들 프레데리크 9세와 크누드를 낳았다.
친동생이 노르웨이 국왕 호콘 7세이다.
[1] 북부와 남부가 아니다. 남부는 애초부터 영유권 분쟁에서 배제되어 있었다.[2] 당시의 독일 국방군은 덴마크군이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유혈사태를 최소한으로 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3]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대의 식민제국들이 저지른 노골적인 수탈이나 학살같은 범죄까진 아니었어도 덴마크 식민제국은 그린란드 원주민들을 닭장같이 비좁은 소련식 아파트에 몰아넣고 원주민의 전통적인 풍습들을 탄압하는 등 어느 정도는 제국주의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다만 덴마크 식민제국은 당대에 이름 좀 들어봤다 하는 식민제국들에 비하면 매우 완만하고 신사적인 통치를 한 것이 사실이며 현재 피식민국들과의 관계도 꽤 괜찮은 편이다. 현재는 그나마 남아있는 속령(이래봤자 고도의 자치권을 누리는 사실상 독립국인) 그린란드를 2021년까지 독립시키려고 노력하는 중인데, 그린란드 독립의 원천인 석유가 최근 저유가로 힘을 못쓰는 중이라 난항을 겪고 있다고 한다. '''절대 다수의 식민제국은 독립전쟁과 같은 유혈사태를 겪지 않고는 식민지를 그냥 보내주지 않았다. 심지어 독립을 허용해준 나라중엔 프랑스 식민제국같은 국가는 피식민국으로부터 ‘독립세’까지 걷었다. 독립을 시켜준 이후에는 (훗날 식민지 보상의 명목으로 차관을 제공한 것을 제외하면)어떤 보상도 없이 그냥 무책임하게 자국민들 데리고 떠나버려 피식민국에 빈곤, 내전과 같은 불행을 겪게 했다. 아무런 유혈사태도, 대가도 없이 피식민국의 경제적 전망까지 신중히 고려해 독립을 지원해준 식민제국은 덴마크가 유일하다.''' 그래도 식민제국은 식민제국이었지만.[4] 히틀러는 공산국가 독재자 못지않게 우상화가 되어 있어 북쪽의 누구누구처럼 생일이 국가적 기념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