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이페다
1. 개요
리투아니아의 도시. 리투아니아 서쪽 발트해 연안에 위치한 항구도시로, 리투아니아가 보유한 유일한 항구도시이다. 인구는 약 15만명(2020년)으로 리투아니아에서 3번째로 큰 도시이자 발트 3국에서 5번째로 큰 도시이기도 하다. 2017년 기준 시민의 87%는 리투아니아인, 10%는 러시아인-우크라이나인-벨라루스인 등 동슬라브 민족이다. 쿠로니아 반도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
2. 역사
도시 자체는 12세기 무렵에 발트족이 건설하였고 도시의 항구는 1252년 튜튼 기사단이 건설하였다. 당시의 이름은 독일명 '메멜부르크(Memelburg)'로 독일 최동단에 위치한 도시였다. 독일 국가의 가사에서도 가장 동쪽에 있는 도시(마스에서 '''메멜''')로 나온다. 메멜부르크가 있던 '''리투아니아 마이너''' 지역의 리투아니아인들은 발트 독일인 엘리트들의 지배를 받을 때, 가톨릭을 주로 믿는 다른 리투아니아인과 달리 루터교회를 믿게 되었고, 아예 프로이센인으로 동화되어 리투아니아인 정체성을 버리게 된 경우도 많았다.
1919년까지 프로이센/독일령이었으며, 나폴레옹 전쟁때는 프로이센 왕국의 임시수도였다. 베르사유 조약 이후 프랑스 총독이 관리하는 국제연맹령이 되었다. 1923년 지역에 주둔하던 프랑스군이 루르 점령으로 빠져나가자 리투아니아 정부의 사주를 받은 봉기로 리투아니아의 영토가 되었다가 1939년 나치 독일이 최후통첩을 보내며 반환을 요구하자 독일에 반환하여 다시 독일령이 되었다.
2차 대전 말기 독일인들이 동프로이센을 탈출하며 이곳도 텅 비어버렸고 소련군이 진입하였다. 이 지역은 칼리닌그라드와는 다르게 다시 리투아니아의 영토로 편입되어 '클라이페다(Klaipėda)'라는 이름으로 현재에 이른다. 루터교회를 믿는 리투아니아인들은 종교 차이 문제로 리투아니아 공화국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대부분 현대 독일로 이주해서 동화되었다 한다. 2차 대전 전에는 5만 명을 넘은 적이 없는 소도시였으나, 리투아니아 SSR 시절에 소련의 부동항이자 군항으로 발전해 인구가 증가하여 독립 직후(1992년)에는 한때 20만명을 돌파했다가 이후 감소하였다. 1991년에 클라이페다 대학이 창설됐다.
3. 기타
현재는 리투아니아 현지인들이 일광욕을 즐기는 해변 리조트로 개발되는 중이며, 독일의 지배 시절의 잔재로 근교에 니다(Nida)라는 마을에는 독일의 유명 소설가 토마스 만 기념관도 있다.